[NETFLIX] <더 디그> 투탕카멘에서 한 줌의 금화로
[NETFLIX] <더 디그> 투탕카멘에서 한 줌의 금화로
  • 이지영
  • 승인 2021.03.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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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머금은 황혼의 빛

무덤의 크기는 망자의 소망을 반영한다. 투탕카멘의 무덤, 조선시대 왕릉, 현대의 납골당, 수목장까지. 큰 무덤은 망자가 남기고 간 발자취를 영원히 기리기 위한 소망과, 선조의 영광스러운 업적을 잊지 않으려는 후대의 바람을 드러낸다. 반대로 무덤의 크기가 작거나 흔적조차 분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바람처럼 이 땅에 왔다가 다시 자연의 무로 돌아가고자 하는 망자의 소망을 드러내는 것일 테다. 영화 <더 디그>에서 이디스 프리티(캐리 멀리건)가 발굴하고자 하는 유적은, 아주 먼 앵글로색슨 시대 선조들이 묻혀있는 무덤인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염원을 담고 있는 영원한 안식처이기도 하다. 발굴을 통해 무덤은 압도적인 크기로 위용을 드러내었다가, 다시 풀과 흙으로 덮여 무로 돌아간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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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이디스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 로버트(아치 반스)를 홀로 키우고 있다. 자신의 집 주변에 무언가가 묻혀 있다는 직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땅을 매입한 후 서퍽의 아마추어 발굴가 배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을 고용한다. 그렇게 이디스는 배질이 이끄는 독특한 발굴팀을 꾸리게 된다. 어릴 적 류마티스열로 인해 심장막에 문제를 안고 있는 그녀는, 자신과 아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들판의 축축하고 보드라운 흙을 한 삽씩 퍼 올리면서, 묻혀있던 역사적 진실뿐 아니라 사람들의 무의식 저변에 감춰져 있던 기억과 감정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한다.

배질은 현장 경험이 많은 베테랑 발굴가이자, 역사 지식 또한 다른 고고학자 못지않게 풍부하다. 그러나 그의 출신과 교육 때문에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리지도, 인정을 받지도 못한 인물이다. 처음 이디스의 주문을 받고는 여느 작업보다 보수가 적어서 제안을 거절했던 그는, 일이 진척될수록 이 프로젝트에 모든 사활을 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한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땅파기(digs)를 해왔을 테지만, 본인의 주도하에 이름을 걸고 하는 발굴 작업은 여태껏 없었던 것이다. 이 발굴 프로젝트는 그의 직업적 소명의식을 다시 일깨웠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불멸의 전당에 올려줄 유일무이한 <The Dig>가 된다. 이디스도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수도원의 발굴 작업을 따라다니면서 가슴이 뛰었던 기억, 그리고 런던대학교에 합격할 만큼 학구열이 높은. 재원이었던 긍지를 되살린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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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와 배질은 어느새 공동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6세기 앵글로색슨의 배에 탄, 즉 '한 배를 탄' 운명이 된다. 시간이 흐르며 둘의 삶과 죽음, 서로의 인연은 단단하게 얽힌다. 이디스는 생매장당할 뻔한 배질을 죽음의 위기로부터 꺼내어주고, 배질은 아버지를 잃은 아이의 부재를 메워 준다. 로버트는 아이가 없는 배질에게 자식 같은 존재가 된다. 배질과 이디스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전우애, 혹은 인간적인 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질과 이디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는 다 스러져 가는 두 황혼의 빛이 잠시 스친 것과 같이 부드럽다. 이 두 빛은 어떤 스파크도 내지 못한 채 서서히 소멸한다. 배질에게 저녁식사 데이트를 선뜻 청하고 기분 좋게 단장을 하던 이디스는, 브라운 부인의 등장으로 잠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그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결단을 내리는 모습을 보인다. 본인도 모르게 땅 위로 드러나 버린 감정, 다시 땅속으로 묻어버려야 할 감정을 영화는 고고학 유물 하나하나를 붓질하듯 섬세하게 다룬다.

반면에 더 젊은 세대인 페기 프레스턴(릴리 제임스)와 로리 로맥스(자니 플린)의 경우, 서로를 향한 감정은 드러난 채로 조용히 묻혀버리지 않는다. 페기는 로리의 사진을 보면서 언제나 자신을 향하고 있던 그의 시선을 한발 늦게 깨닫는다. 그리고 늘 겉돌았던 남편과의 결혼에 끝을 고하고 반지를 빼서 주저없이 던진다. 이들의 감정은 밤에 요동치고, 새벽에 선연하게 다가오는 감정이다. 그리고 밝아오는 새벽 빛 속에 당당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새 연인들은 서로를 향한 시선을 포착하고, 서로에게 매료되어버린 자신을 드러냄에 주저함이 없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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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커플의 차이점을 거칠게 구분하자면, 아마도 19세기 말에 태어나 전간기를 살아간 세대와, 양차 대전의 질곡을 겪은 20세기의 세대적 차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939년에 각각 중년과 노년을 맞이하고 있는 이디스와 배질은, 아직까지 결혼 제도와 계급 차이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혹은 그와 비슷한 감정)은 장벽에 가로 막혀서 한숨처럼 꺼진다. 이제는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워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더라도, 그들에게 제도적 질서는 감히 넘을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러나 페기와 로리에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폴란드 침공 이후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던 때, 로리는 공군으로 징집되어 본인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1차 대전 전후(前後)에 태어났을 그들에게 내일의 만남을 약속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불확실성 안에서 늘 생존만을 목표로 삼아야 했던 이 세대에게, 제도나 계급, 미래의 약속 조차도 오늘에만 지속되는 새벽을 이길 수는 없다. 파헤쳐진 감정은 다시 땅 속의 어둠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역사적·문화적 의미 안에서

이 발굴 실화는 영국인들에게 역사적, 또는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디스가 책 속에서 읽고 있는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은, <더 디그>의 발굴과 17년의 시간 차를 두고 서로 극명하게 대비된다. 아마도 이디스는 학생 시절 하워드 카터의 업적을 읽으면서 고고학자의 꿈을 남몰래 키우지는 않았을까?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났으며 대영 박물관에서 고고학을 사사했던, 대영 제국 시절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극적으로 발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발굴은 워낙 세계적인 특종이었기 때문에 카터와 그의 발굴을 둘러싼 세간의 전설들이 무성하게 넘쳐났다. 그는 탐험을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더 디그>의 배경인) 1939년에 사망한다. 전세계의 식민지를 제패했던 대영제국의 위엄,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그 시절은 대영제국의 유산이자, 영국 고고학의 빛나는 전성기였을 것이다. 그 시절은 하워드 카터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에서 퇴장한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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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빛나는 시절에 무색하도록, <더 디그>의 작업은 '어느 미망인의 앞뜰'에서 '아마추어'들에 의해 작업되는 것인 만큼 심히 변변치 않아 보인다. 이제 영국인들은 식민 지배를 했던 낯선 민족의 휘황찬란한 고대 유물이 아니라, 본인들의 조상이 살아갔던 원시적인 흔적을 찾아 과거로 여행한다. 메로빙거 시대의 작은 금화를 이디스는 최초로 전해 받는다. 6세기 앵글로 색슨족의 문화와 경제가 이렇듯 융성했고 정교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자각하면서, 그들은 더이상 식민 지배로부터 얻을 수 없는 민족적 자긍심을 내 집 앞마당에서 나온 한 유물로부터 되찾는다. 그리고 배질과 이디스의 세대, 페기와 로리의 세대, 마지막으로 아들 로버트의 세대가 전 과정을 지켜보며 정신적인 갈증과 허기를 채운다. 특히 가장 어린 세대인 로버트는 어머니의 마지막 유산, 즉 전쟁으로도 무화할 수 없는 문화적 긍지와 자부심을 배운다. 그리고 어머니와 밤하늘을 보면서 과거(배와 항해)로부터 미래의 비전(우주 비행)을 그려보면서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깊이 위로한다.

이제 영국은 세계를 제패하는 해상 강국이 아니라 유럽 문명의 최후방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도맡는다. 또한 배를 타고 전장에 나갔던 앵글로색슨 선조들처럼 그들의 후손들은 마지막 명운을 건 전쟁에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다. 사실 영국영화 특유의 민족적 자긍심이 보일 때마다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으나, 최소한 그들이 대영제국의 지는 해, 즉 제국의 황혼을 바라보는 씁쓸한 감정은 어쩐지 이해도 가는 부분이었다. 이제 투탕카멘의 발굴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을 이디스는 역사의 장에서 명예롭게 퇴장한다. 그녀와 배질의 업적은 대영박물관에 자랑스럽게 모셔졌으나, 배질의 업적이 최근에야 알려졌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철저한 계급 사회인지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이제 유산을 지키는 것은 (투탕카멘이 아니라) 앵글로 색슨의 발굴 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다음 세대의 몫이다. 이들의 힘겨운 저항으로 인류의 유산이 런던 지하철역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거대한 배의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잔잔한 희망과 안도감을 주었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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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디그
The Dig
감독
시몬 스톤
Simon Stone

 

출연
캐리 멀리건
Carey Mulligan
랄프 파인즈Ralph Fiennes
릴리 제임스Lily James
자니 플린Johnny Flynn
벤 채플린Ben Chaplin
켄 스탓Ken Stott
아치 반스Archie Barnes
모니카 돌런Monica Dolan
아셔 알리Arsher Ali
에일린 데이비스Eileen Davies

 

제작|제공 넷플릭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12분
등급 12세이상 관람가
공개 2021.01.29

이지영
이지영
평이한 문장이지만 사색을 담은 글을 씁니다. 투박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의 일면에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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