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 과열된 세상을 무엇으로 잠재울 것인가
'마틴 에덴' 과열된 세상을 무엇으로 잠재울 것인가
  • 이지영
  • 승인 2020.11.0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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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단은 서로 닮아 있다

2020년, 한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의 경제 활동, 나라 간의 교역, 집회와 연대, 인간의 면대면 소통, 이 모든 것들이 얼어붙었다. 거의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잃어버린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다. 자신을 스스로 격리하는 개인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고독을 앓는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인 20세기에는 모든 것이 들끓고 있었다. 이념 대립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인류는 생존을 위해, 또 존재 이유와 구원을 찾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했다. <마틴 에덴>은 그 열화와 같은 세상 속에서 함께 휩쓸리면서도 한 인간이 느꼈던 고독을 담은 영화다.

마틴 에덴이 엘레나의 집에 도착해서 처음 보았던 그림은 풍랑이 이는 어둠이 내린 바다에서 외롭게 항해하는 배의 그림이다. 멀리서 홀로 빛나는 배에서는 엄숙함과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20세기에 대한 후세인들의 인상을 스케치한다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캔버스를 가까이서 들여다볼 때, 무수한 개인들의 삶이 짓이겨진 듯한 그림의 질감은, 본래의 아우라를 잃은 채로 혐오스러움만 자아낸다. 주인공의 말에 따르면 마치 "그림이 마치 사기를 치는 듯"하다.

이제는 역사책 속의 글자들이 되어버린 20세기 전반에 일어난 사건들은 지금으로서는 모두 사기며 거짓이라고 외치고 싶은 것들이다. 이러한 역사가 있건대 어떻게 20세기 전반을 그리며 아름다움을 논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이 시대는 끔찍한 사실의 나열과 죄목들을 덕지덕지 붙인 흉한 자화상이 되어야만 하는가? 과연 당대의 사람들에게서도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류의 보편적인 숭고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이 영화는 특유의 방식으로 찾고 있다.

 

ⓒ 알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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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념의 문제

<마스터>(2012)의 첫 장면을 떠올리도록 하는 한 선원의 항해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아름다운 인물의 프로필과 목소리, 문장, 그리고 화면의 이질감이 관객을 매혹하고 1920-30년대라는 시대로 우리를 불쑥 불러들인다. 이로써 잭 런던의 원작 소설 속 1909년의 미국 오클랜드가 전간기의 이탈리아로, 마틴 에덴이라는 미국인이 이름조차 안 바꾸고도 건강한 육체와 매력을 지닌 다른 시대의 유럽인으로 완벽하게 재탄생했음을 알린다. 서막이 오르면, 이 시점에 이미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사상적인 지표를 세운 작가인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의 선언과도 같은 낭독이 흘러나온다.

그리하여 세상은 나보다 강하다. 그 힘에 맞서 내가 가진 건 나 자신뿐이지만, 다수에 짓눌리지 않는 한 나 역시 하나의 힘이며 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 만하다. 왜냐하면 감옥을 짓는 자는 자유를 쌓는 이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이어서 필름이 일부 망가진 흔적까지도 그대로 노출된 아카이브 푸티지들이 연속적으로 지나간다. 저기 이름 없는 사람들은 누굴까,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에 본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카이브 푸티지는 극에 대한 몰입도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고양하며 본 극과 사실의 기록 사이를 능숙하게 직조한다. 지난 10년간 이탈리아 다큐멘터리계에서 떠오르는 신예이자, 이제는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하고 시네마에서의 세계적인 입지를 공고히 한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자신감이 돋보인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여러 사상과 이념을 담은 대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정신이 없지만, 위의 영화의 화법은 결국 직설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마틴 에덴은 특수한 어떤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저 군중들 속에서 포착된 어떤 성격과 심성, 즉 고고함과 속물성, 타협과 비타협, 폭력성과 관능까지도 모두 현현한 캐릭터다. 이 영화의 서사 자체는 보는 이에게 클리셰로 느껴질 정도로 익숙함을 풍기는 19세기 풍 고전소설의 내용이다.(서사구조는 <적과 흑>처럼 다가온다. 늘 상상해왔던 줄리앙 소렐이 육체미를 얻고 스크린에 등장했던 것처럼)

그러나 이 익숙한 고전소설의 주제와 인물을 다큐멘터리 장르와 유려하게 연결해보고자 하는 실험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주제 의식보다는 표현해내는 방식에, 즉 건축으로 치면 구조보다는 그 질료에 훨씬 더 매료되었다면 감독이 의도한 바에 정확히 적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살 때부터 선원으로 세상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프롤레타리아 계급 출신인 마틴 에덴은, 어느 날 부두에서 폭행을 당하는 동생을 구해준 감사의 표시로 부르주아지 가문인 엘레나 오르시니(제시카 크레시)의 집에 초대받는다. 고급 교육을 받았으며 미술과 음악, 문학과 언어를 두루 섭렵하고 있는 엘레나는 마틴에게 그 자체로 존경과 찬양의 대상이 된다. 엘레나가 살고 있는 폐쇄된 사회는 아름답고 정적이며 본인에게는 지루한 세계이다.(경이로운 하루를 보낸 마틴에게 엘레나는 오늘 하루가 지루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마틴은 자신이 몸소 부딪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목격한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들임을 자각한 후에 이제 그것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법을 엘레나로부터 배우기를 원한다. 그는 엘레나에게 자신의 '마스터'가 되어주기를 청하지만 엘레나는 거절하고 사회 안에서 정식 교육을 받으라고 권한다. 하지만 소스(가난)를 모두 찍어 먹을 빵(교육 수단)이 없는 마틴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지식을 '어부처럼 긷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가게 된다.

엘레나가 직접 사사하는 대신에 건네는 책은 19세기의 산업 사회를 살아가며 대도시 안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추악함을 보았던 한 시인의 냉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엘레나의 책으로 문법을 익히고 배움의 즐거움을 깨우치게 된 마틴에게 영감을 주는 책은 허버트 스펜서의 <제1 원리>이다.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의 자유방임론과 맞닿아 있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이후 그가 엘레나 집에서 부르주아지들과 벌이는 논쟁의 단초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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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단은 서로 닮아 있다

마틴이 비판하고 경고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을 죽이는 이념의 위험성이다. 마틴은 같은 논지로 사회주의자들도, 기득권인 부르주아지와 엘리트 계층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둘은 양 극단에서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사실은 결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사회주의자들을 증오하지만, 경제 불황과 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을 잠재우기 위해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은밀히 차용한다.

실제 1930년대 무솔리니의 권위주의 국가는 국가 경제를 '계획'하여 대규모 실업, 파업과 폭동이 만연했던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을 '어느 정도는' 견인했다. 이것을 부러워한 자들이 프랑스, 영국 등 유럽 등지에 있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들 사상의 정치적인 한계, 혁명의 좌절, 경제위기에 대한 사회주의 정당의 무기력한 대응을 보며 깊이 좌절했다. 오즈왈드 모즐리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더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펴는 파시즘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이후 자본주의를 수정하고 계획할 수 있다는 (당시로 치면) 소수파의 이단적인 생각은 파시즘과 전쟁을 거치며 전후에 주류 사상으로 대두되었다. 유럽 국가들에서 국가 주도하에 인프라를 복구하고 사회를 재건하는 작업은 사회주의와 파시즘의 제도적 유산을 자연스럽게 이양받은 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과연 마틴이 이 모습을 목격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반면에 마틴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감화되어 자유방임주의와 개인주의를 주창한다. 그러나 그 자신 또한 변화하는 환경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피나는 노력 끝에 부르주아지가 된 순간 다음과 같은 부조리가 건재함을 목격한다. 자본이 낳은 불평등, 부정부패, 빈민층의 폭동과 소요, 그리고 이에 대한 지배 계층의 철저한 무관심이 미해결의 난제로 남아있던 것이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이기심과 이율배반 앞에서 극도의 무력함과 환멸을 느낀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자들이 그의 진정한 의도를 곡해하고, 본인들의 이념이나 이해관계에 맞게 철저히 이용하려 들 때는 또 다른 경멸과 적대감을 느낀다.

계층을 뛰어넘은 끝에 그가 맞닥뜨린 것은 어떤 고독이다. 진창 끝에서 발돋움하여 날개를 달았으나 그에게 어디에도 앉아서 쉴 안식처는 없다. 대중은 그에게서 듣고 싶은 말만 듣기 원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 언제든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이것은 결국 그의 날개를 꺾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높은 둥지에서 낮은 출신의 그를 밀어낸다. 마틴이 아직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을 때 엘레나를 이끌고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고 붙잡았다. 그러나 이제는 강단에 선 그의 말, 과장된 연극에 환호할 뿐, 그는 거리에서 노동계급에게는 '일개 부르주아지'로, 부르주아들 사이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출세자'로만 인식될 뿐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사상적 지향점을 갖고 있었지만, 마틴의 예술 세계에 대한 이해와 깊은 애정을 품고 있던 루스 브리센덴(칼로 세치)이, 그를 이해하는 데 가장 근접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루스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당신의 비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마틴에게는 본인에게 동조하는 목소리보다는 루스의 그 말이 가장 목말라하던 바였을 것이다. 어쩌면 마틴은 갈구하던 이상과 안식처를 엘레나가 아닌 루스에게서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엘레나에게 스승이 되어달라고 했지만, 사실은 루스가 그의 유일한 정신적인 지주였고 스승이었다. 엘레나를 잃었을 때보다도 그의 스승이 병들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마틴의 내면은 크게 흔들리고 결국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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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과 사상이 난무하며 정치권력이 전복되기를 반복했던 20세기 전반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뜨겁게 과열된 시기였다. 과열된 세상을 무엇으로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 엘레나 집에서 부르주아지가 제시한 '촛불'의 문제 앞에서 그는 창작시를 읊으며 그 촛불을 이내 잡는다. 이때의 마틴이라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이 있었고, 세상을 향한 욕망과 그의 희망을 응집한 엘레나라는 이상향이 있었다. 선원과 공주라는 둘의 관계를 통해 영화는 오디세우스 신화를 스스럼없이 가지고 온다. 마틴에게는 정신적인 유랑을 끝내고 돌아갈 영원한 천국, 에덴이 생긴 것이다.

무한히 샘솟는 지식에 대한 욕구, 자아의 성장과 세계관 형성, 창작과 영감의 즐거움,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개인의 정신과 선함을 통해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마틴은 엘레나에게 투영한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정신적으로 무장하여 사회적으로 더 강한 존재로 질기게 살아남으면 엘레나는 "영원히 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그는 외람되다는 생각 없이 그리고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계급을 타파함으로써 그녀와의 영원한 결합을 꿈꾼다.

그러나 2년간의 갖은 고생 끝에 엘레나의 집에서 겨우 부르지아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신비로운 엘레나 대신에 그를 멸시하고 배척하는 자들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한 범상한 부르주아 여인 엘레나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마틴은 그의 정신과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마르게리타(데니스 사르디스코)와 결혼한다. 엘레나는 더 고결한 지성과 감성을 가져서 그를 이해할 수 있었으리란 가정은 착각이다. 그는 여전히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세월은 바뀌고 어느새 그가 '판사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 되는 시절이 온다. 그사이에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는 완전히 삭제된 채로, 우리는 정신적으로 파산한 한 인간을 보게 된다. 마틴은 양쪽 계급에 대한 환멸과 그 사이에서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자신에 대한 혐오로 얼룩진 채 이미 정신이 피폐해져 버린 상태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라고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에서 모든 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밑바닥에 있고 사회적으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순간에야 엘레나는 (아마도) 가족들의 등에 떠밀려 그를 찾아온다. 마틴은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프랑스어로 밀어를 속삭이는 엘레나에게 심한 비웃음과 경멸 조의 비난을 쏟아붓는다. 사실은 그것이 과거의 본인 스스로에 대한 비난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토록 순진하게 부르주아의 개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다니, 너무도 세상을 몰랐고 순진했던 것이 죄라면 죄인 것일까? 사랑이라는 열쇠로 가볍게 촛불을 끄듯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이 그 뒤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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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에덴, 낙원의 상실

마틴은 세상에 대한 문법책을 막 받아 들고 싱그럽게 부두를 걷는 과거의 자신을 망연히 따라간다. 엘레나가 그에게 숭앙의 존재였을 때 그녀를 상징했던 파란색(엘레나의 파란 눈, 파란 블라우스, 편지를 읽을 때의 파란 배경 등)은 이제 어린 시절의 파편화된 기억에 입힌 블루톤으로 옮겨간다. 이때, 다큐 푸티지가 쓰인 형식은 매우 특별하다. 픽션화 된 인물의 기억은 현실의 기록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고전이나 신화 속의 이 인물은 마치 반드시 어디선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주는 것과 같다. 실제로 기록된 영상과 이미지 하나를 보았을 뿐인데 인물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무한한 이야기와 생명력이 샘솟는다.

이렇게 실존했을 법한 인물이 된 순간, 루카 마리넬리의 탁월하고 절절한 연기와 함께 마틴이 온몸으로 느끼는 강렬한 페이소스는 우리의 심중을 깊이 건드린다. 세상을 향한 문을 막 열려고 하는 맑은 영혼의 마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 세상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마치 파멸을 부르는 화약 냄새가 화면을 뚫고 나와 코끝을 찌르는 듯하다.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열화가 온 세상을 삼키기 직전이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냉소와 우울, 이 둘 뿐이다. 세상의 문제라는 촛불은 이제 거대한 태양처럼 작열하고, 이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우울 속으로 잠식하는 것뿐... 그리고 그 태양마저도 전쟁 앞에서 서서히 지평선을 향해 기운다.

이 이야기의 끝이 그리도 허망하지 않은 것은, 일몰을 향해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마틴의 마지막 뒷모습을 우리가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을 향하던 배는 서서히 침몰하였지만, 냉소와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속에 자신을 스스로 내버려 두어 그대로 잠겨 죽지 않고, 다가오는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그의 마지막 뒷모습 어딘가에 구원이 있을 것이다.

바흐의 코랄을 레스피기와 엘가가 오케스트라 편곡한 위의 곡을 엔딩크레딧이 다 끝날 때까지 무상하게 앉아 듣고 있었다. 매일 듣던 바흐의 음악이 이렇게 낭만적이었던 적이, 그리고 숙연하게 마음을 떨리게 한 적이 얼마 만이던가. 마치 대미사나 레퀴엠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곡은 한 시대와 함께 저물어가는 인물들에게 헌정하는 애도의 연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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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한가운데서 필사적으로 본연의 자리를 지키려고 했던 마틴 에덴이라는 인물의 생을 그렸다. 그는 어떤 주변 이념이나 사상에 경도되기를 거부했으며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자신의 손끝에 있다는 신념을 지녔다. 그 신념이 통째로 흔들렸을 때조차, 본연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려는 처절한 저항의 몸짓은 한 인간으로서 지극히 숭고한 의지를 나타낸다.

이 영화를 보면서 100년 전과는 또 다른 형태로 우리 앞에 산재한 문제들을 생각해본다.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경제위기가 이미 현실화되고, 사회적 혹은 국제적인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방향키를 잡아야 하는가? 무엇이, 누군가가 사상적 지표가 되어줄 것인가?

마틴 에덴이 그 시대에 믿었던 이념과 사상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가고 여러 과정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장해간 과정은 늘 그렇듯 힘들고 지난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다. 누구나가 힘 안 들이고 쉬운 길을 가고 싶어 한다. 그에 더해 듣고 싶은 말을 듣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은 미디어의 범람으로 최대 호황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사회 정규 교육과정을 통한 공부도, 누군가의 입을 통한 지식의 습득도, 본인이 부수고 깨며 '어부처럼 길어 올린' 지식이 지닌 힘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영화 <마틴 에덴>은 20세기 전반의 인류가 승전국과 패전국, 그리고 이념에 상관없이 많은 죄를 범하고 죗값을 아직 다 치르지 못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과 무한한 의지에 여전히 희망을 보내고 있다. 또한, 이러한 오늘날의 영화를 키우고 자양분이 되어준 고전 예술에도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하고 있다. 요즘 시대에도 이런 영화가 새로이 만들어지고, 또 이런 배우와 연기가 있다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전율을 느낀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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