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NETFLIX]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 배명현
  • 승인 2020.10.02 18: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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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The Devil All the Time, 미국, 2020, 138분)
감독 '안토니오 캠포스'(Antonio Campos)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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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한테 오하이오의 노컴스티프나, 웨스트버지니아의 콜크리크를 가리켜 보라면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두 마을은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지도에서도 별 볼일 없는 두 지역의 그 많은 사람이 어쩌다 무슨 일로 엮이게 됐을까. 이 이야기는 그 물음에 맞닿아 있다. 그저, 우연이라는 사람들 도 있을 테고 신의 뜻이라는 사람들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돌아간 걸 보면 두 가지 다였지 싶다.

영화는 초반부터 주제를 드러내 놓고 시작한다. 전시적 시점의 화자가 섬뜩한 목소리로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이하 악마는)에서 초반만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등장하던 인물들이 산발적 사건을 통해 한 지점을 향해 모이게 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 지점으로 가는 길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는가'이다.

러셀 가(家)를 중심으로 이야기에는 전체적으로 죽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샌디'(라일리 키오)와 '칼'(제이슨 클락)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끼와 슈터(shooter)의 관계로 이루어진 이들은 사람을 유인하고, 그 미끼를 서서히 죽여가면서 죽는 순간의 표정을 사진에 담는다. '로이'(해리 멜링)와 '헬렌'(미아 와시코우스카)의 관계에서도 죽음은 반복된다. 헬렌은 종교에 자신의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삶까지 넘긴다. 목사인 로이와 혼인한 것도 여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로이는 자신의 종교적 권능으로 고민하다 헬렌을 죽이고 부활 시키려 한다. 하지만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의 딸 '리노라'(엘리자 스캔런)는 입양되어 '러셀'(톰 홀랜드)과 함께 큰다. 하지만 리노아도 자신 부모의 불행을 이어받아 사이비 목사인 '티가딘'(로버트 패틴슨)과 관계를 가지고 아이를 임신하자 자살한다. 의붓동생을 사랑한 러셀은 격노하여 키가딘을 죽이고 동네를 떠나지만 여기서 다시 샌디와 칼을 만나게 된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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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다시 주목할 만한 점이 등장한다. 영화의 설정이 불행과 죽음이 유전되듯 설계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윌러드 러셀(아버지)에서부터 아빈 러셀(아들)을 통해 이어진다.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 폐색감 짙은 저주는 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보인다. '윌러드 러셀'(빌 스카스가드)은 아내의 죽음을 막기 위해 광적일 정도로 기도에 매달린다. 그 절박함은 키우던 개를 희생물로 바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 기도는 무용하다 못해 자신의 죽음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는 자살한다. 로이와 헬렌은 어떠한가. 로이는 주님이 느껴진다며 신에게 권임 받은 능력을 시험하려 하지만 결국 인간일 따름이다. 죽은 사람은 부활하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긍율은 없다. 여기서 로이의 생각을 읽어주는 작가 시점의 독백은 눈여겨 볼만하다. '로이 하늘의 구름을 보며 생각한다. 죽으면 저렇게 될까. 그저 허공을 부유하는 것이다. 몇 년을 죽음에 관해 설교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 이 '인간적 무능의 상태'에서 인물들은 신을 불러내지만 정작 효과는 없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기도를 올릴 뿐이다. 자연이 불러온 죽음은 그 자체로 대상이며 목적이다. 자연현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탄생과 죽음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여기엔 악함도 선함도 어떤 의도도 없다. 과학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 모종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 그 때문에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들의 무능력함과 왜소함을 마주했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다. 과학의 세기라 불리는 20세기 이후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라고 다를까.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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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니라고 말한다. 자연의 섭리를 넘어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죽음의 구렁텅이, 요컨대 인과관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죽음들(영화에선 총으로서 묘사되는 것들...) 앞에 인간은 다시 한번 신을 복기해낸다. 이 영화의 시기가 2차 세계대전 후반을 시작으로 베트남전까지 설정되어 있는 건 이 '인간적 무능'을 극명하게 보여주게끔 적절히 기능한다. 이 지점에 대해서 영화는 영화 초반 대사로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1957년 당시 노컴스티프에는 대략 400명이 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악행과 비운으로 인해 그중 대부분이 혈연관계였다. 이유가 욕망이었든, 필요였든 단순한 무지였든 간에 말이다"

아버지에게 양도받은 권총으로 적극적인 죽음을 실현 시키는 아빈 러셀은 슈터 '칼'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칼은 제 기능을 잃고 만다. 칼은 그때까지 죽음을 손에 쥔 유일한 존재였다. 살인을 하는 행위는 죽음의 능동행위이므로 자신은 죽음과 거리를 두는 행동이다. 그는 살인이 목적이 아닌 죽이는 행위를 포착함으로 얻게 되는 자존적 만족감을 얻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빈 러셀은 또 다른 능동자이자 복수와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인 인물이다. 그는 죽음과 멀리 있지 않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러셀이 칼의 바지 뒤춤에 꽂힌 총을 본 것은 우연(신의 뜻)일지도 모르나 샌디의 권총에 총알이 공포탄인건 우연(하필 그날 칼이 총알을 바꿨으므로)의 일치라는 것이다.

영화 후반에 러셀은 보안관과 사투를 벌인 뒤, 자신의 권총을 기도용 통나무 밑에 묻는다. 어린 시절 '아무 소용없었다'는 기도용 통나무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묻은 그는 콜크리크를 떠난다. 대로 이어지던 죽음과 불행을 뒤로하고 떠나는 그는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 탄다. 그 순간 라디오에서는 베트남전 파병 인원을 증원할 계획이라는 뉴스가 들려온다. 영화는 질문한다. 세상이 죽음으로 가득 찼을 때, 그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드리워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어떻게 할 건인지.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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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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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ㄹㄹ 2020-11-10 02:48:30
전문가는 다르네요. 다른 네티즌들 리뷰보면 죄다 종교와 연결지어서 핀트가 엇나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