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계속되는 희망...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계속되는 희망...
  • 배명현
  • 승인 2020.09.20 1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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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he Tokyo Night Sky Is Always the Densest Shade of Blue, 일본, 2017, 108분)
감독 '이시이 유야'(Ishii Yuya)
사진 ⓒ(주)디오시네마
사진 ⓒ(주)디오시네마

이것이 정말 <행복한 사전>(2013)의 감독과 같은 사람이 찍은 영화란 말인가. 러닝타임 내내 반복되는 영상의 불균질성을 보며 생각했다. 동명의 시집을 영화화한 작품인 만큼 개연성의 고리보단 추상성의 영상화에 집중했기 때문일까. 영상은 다음 쇼트와 붙기보단 계속해서 자립해 독존하길 바라는 듯하다. 앞과 뒤 영상과의 연결 혹은 부딪힘보다 홀로 기능할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낱낱의 영상들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제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 이동한다. 기표로서 존재하는 영화보단 기의의 본질을 찾아가는 움직임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지만 그 이전에 보여주었던 모든 스타일을 바꾼 건 당연히 아니다. <행복한 사전>에서 보여주었던 애정 어린 시선과 향취는 그대로 존재한다. 대상에 대한 심도 깊고 면밀한 응시 그리고 그것을 다각화하여 보여주는 능력이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일본청춘의 아픔 혹은 무기력과 폐색감 짙은 웅크림(이 모든게 일본 영화에서 자주 반복되는 테마이긴 하지만)이 드러나 있고 그 안에서 어떻게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는지를 면밀하게 탐색하고 보여준다.

 

사진 ⓒ(주)디오시네마
사진 ⓒ(주)디오시네마

영화의 시작은 역전된 도쿄의 전경이다. 수면에 비친 도쿄의 밤을 보여주며 물에 잠식된 무드를 잡아낸다.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현실이 아닌 역전된 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 역전조차도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닌, 어두운 물에 잠식된 상태라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이러 안에 두 인물이 등장한다. 낮에는 간호사 밤에는 술집의 서버로 일하는 '미카'(이시바시 시즈카)와 공사판에서 일용직 노가다를 업으로 살고 있는 '신지'(이케마츠 소스케)가 등장한다. 이 두 사람에게는 상흔이 존재한다. 미카는 노동의 고단함 그리고 인간에게서 느끼는 모종의 벽 같은 것을 느낀다. 이 것을 도시에서의 공허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지는 어떠한가. 한쪽 시야를 잃어버린 그는 세상을 반으로 본다. 그게 세상의 반밖에 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진 않지만 세상을 반으로 본다는 건, 분명 세계를 인식하는 데에 있어 약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꼬인 문장처럼 신지의 내면은 어딘가 꼬여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의 반복과 근원을 알 수 없는 흥분, 타인과의 대화 불가능성 등등. 그는 도쿄에서 희망을 찾고 있지만 시도만 계속될 뿐 어디에도 착지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이 슬픈 도킹 시도는 미카를 만나며 달라진다.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미묘한 끌림을 느낀다.

 

사진 ⓒ(주)디오시네마
사진 ⓒ(주)디오시네마

이 둘은 도쿄라는 도시를 배회하며 서로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찾아다닌다. 이때 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은 이 인물들의 동선을 도저히 알 수가 없게 만들어놨다는 것이다. 지속해서 보여주는 곳은 실내뿐이다. 거리에서 배회하는 동선은 반복된다고는 쳐도 그 방향이 계속해서 바뀐다. 철저하게 의도된 이 도쿄의 미로화는 감독이 바라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어쩌다 도쿄는 이런 도시가 되었을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진에 대한 불안(물리적 현상)과 경제적 어려움(추상적 현상)이 두 발현이 계속 반복되며 불안을 내면화하게 된 도시인들은 히스테릭해 보이기까지 하다. 불안의 내면화를 빠져나오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때문에 이 영화의 감독 이시이 유야는 치유의 상징으로 그 희망을 표기하려 한다. 피지 못할 것 같았던 꽃 그리고 음악과 가사, 아무도 보지 않아도 하늘을 나는 비행선 같은 것들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 동의할 수는 없다. 희망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희망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를 영상화한 만큼 그 해결 또한 문학적 수사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나는 제기하고 싶다. 일본 영화계에서 이미 희망을 이야기한 작품들은 다수 존재한다. 특히, 소노 시온의 <두더지>(2011)와 같은 작품 말이다. 하지만 그 두더지 안에서도 '달리기'라는 영상화된 추상성이 희망의 코드였다면 그 다음 영화들은 <두더지>를 넘어서는 현실성 혹은 구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이 보여준 결과만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순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의미만으론 만족해야 할 것인가. 어느 순간엔 현실적 결단이 필요하다. 영화가 현실에서 기능하는 방법이 바로 거기에 있다. 상상력의 제공,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곳에서 더 나은 방법론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힌트로서 말이다. 우리의 문제를 들추는 것만으론 부족하지 않을까. 나는 이제 그 해답들이 보고싶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주)디오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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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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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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