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h PIPFF] <바람의 목소리> 기억의 상흔 위를 걷는 순례자
[2th PIPFF] <바람의 목소리> 기억의 상흔 위를 걷는 순례자
  • 오세준
  • 승인 2020.06.24 1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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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의 목소리'(Voices in the Wind, Japan, 2020, 139분)
감독 '스와 노부히로'(SUWA Nobuhiro)
스와 노부히로, 와타나베 마키코, 세레나 모토 라, 이즈미 에이지감독 (왼쪽), 주요 여배우 (중간) 및 프로듀서 (오른쪽), 사진 ⓒ 베를린국제영화제
2020 베를린국제영화제 현장, 스와 노부히로, 와타나베 마키코, 세레나 모토라, 에이지 이즈미 /(왼쪽), 주요 여배우 (중간) 및 프로듀서 (오른쪽), 사진 ⓒ 베를린국제영화제

 

영화 '바람의 목소리'는 제2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POV: 안녕, 아이들' 섹션의 초청된 작품으로, '스와 노부히로'(SUWA Nobuhiro) 감독이 연출했다.

<바람의 목소리>는 일본의 거장 감독인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신작이다. 그의 신작은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2020, Generation 14plus)에 선보였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을 이야기할 때, 그가 초창기때부터 꾸준히 여러 단편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듀오>(1997), <마더>(1999)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적 시선과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배우와 소통을 통한 즉흥연기를 이끌어내는 스와 감독의 독창적인 제작 스타일은 단연코 독보적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고향인 '히로시마'에 대한 애정이 많은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1959)을 리메이크한 <H Story>(2001)가 대표적이다. 또 <응시 혹은 2002년 히로시마>(The Letter from Hiroshima, 2002)는 한국 여배우 김호정과 히로시마에 관한 영화를 찍으려는 스와 감독의 만남을 기록한 작품으로, '전쟁과 영화'라는 주제로 한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2000)에 포함되었던 옴니버스 단편영화이다.

관객인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주시하고 집중해야 하는 것은 '롱테이크' 방식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롱테이크에 대해서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의존하면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라는 것이 혼자 자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스타일은 평창에서 선보인 신작 <바람의 목소리>에서 과감히 나타난다. <바람의 목소리>는 대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소녀를 중심으로, 가족을 잃고서도 남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역설적인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사진 ⓒ mydramalist
사진 ⓒ mydramalist

9년 전 동일본 대지진에서 가족을 잃고 히로시마에서 '이모'(와타나베 마키코)와 함께 지내는 17살 고등학생 '하루'(모토라 세리나)는 어느 날 집에서 쓰러진 이모를 발견한다. 이모가 병원에 입한 후, 홀로 남기진 하루는 슬픔 속에서 방황하다 과거 엄마‧아빠, 동생 하야토와 함께 살았던 후쿠시마 근처인 이와테현 오츠치로 떠난다. 영화는 비교적 간단한 이야기를 가지지만, 두 시간이 넘도록 길게 달린다. 즉, 영화는 하루가 자신의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연'을 그녀의 시선을 발판 삼아 관객인 우리에게 전달한다. 사정(하루)에 사정(하루가 만난 사람들)을 더하는 식이다.

여동생을 잃은 모자, 남편 없는 임산부, 가족을 잃은 남자, 딸(아스카, 하루의 친구)을 잃은 엄마 그리고 아빠가 수용소에 갇힌 쿠르드인 난민 가족까지. 자신의 집으로 떠나는 하루의 여정에는 이렇게 가족 구성원이 다 채워지지 않은, 결핍과 상실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뿐이다. 여기에는 원자폭탄에 의한 히로시마 사람들의 죽음,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아픔으로의 자살, 동일본 대지진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죽음 등이 자리하면서 한편으로 홀로 아이를 낳고자 하는 의지, 원전 사고에 대한 어른들의 책임,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와 희망이 자리한다.

중요한 건, '하루의 사정과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사정이 어떤 식으로 보여지는가'이다. 이는 <바람의 목소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지점에 위치한다. 즉, 관객인 우린 '하루와 이같은 사람들의 만남'을 단순하게 '우연이나 운명'으로 정의해야 함에 서있는 것이다. 마치 하림의 노래 제목인 '사랑은 다른 사람으로 잊혀지네'처럼, 상처는 다른 상처로 잊혀지는(치유되는) 식으로의 만남. 단, 이는 영화의 표층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영화는 한 입 베어 물기 좋은 크루와상 속 겹겹이 여러 층과 같은 구조를 지닌다.

후쿠시마에서 만난 한 노파는 하루를 보며 '아야코!'(죽은 딸의 이름)이라 부른다. 곧이어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릴 적 원자폭탄으로 죽은 사람의 뼈를 본 적이 있다며, 항아리에 담긴 유골을 보고 자신이 생각했던 '사람의 뼈'와는 달라 실망했었다고 말한다. 이어 당시 6살이었던 자신이 한심하다며 끝내 미안하다 말을 뱉는다. 딸이 죽었는지 잃어버리면서, 당시 원자폭격으로 죽은 누군가의 뼈를 기억하는 노파의 이야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반성'이 담겨있다.

 

사진 ⓒ 평창국제영화제
사진 ⓒ 평창국제영화제

이처럼 하루가 만난 사람들은 후쿠시마 원자폭탄,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사고 등의 재난으로 상실을 겪은 자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하루와 관계, 그 안에서 공감과 치유하기 위함이 아닌 '일본 재난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작품이 가지는 기질은 분명 '일본 재난의 역사를 써야함'에 대한 의무와 사명감을 지닌다. 하루가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치 옛사람들의 구전 설화를 듣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스와 감독 특유의 다큐멘터리적 시선이 이 영화에도 작용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감독의 손으로 빚어진 픽션의 인물들일지언정 그 인물들이 배치된 공간들은 재난 이후의 '현재'라는 시간성을, 즉 관객의 시간을 공유하는 곳들이다. 이 공간들은 미장센이 아닌, 사건 현장을 보도하는 기자의 '현장성과 사회 고발성'에 더 가까운 것들이다. 설령 실재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거짓으로 의심할 수 있더라도, 영화의 공간은 그 어떠한 잣대로 의심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가진다. 이를테면 지진의 여파로 터만 남은 집이나 사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집, 재포장된 도로, 한적한 거리, 흙이 무너져 버린 산 등.

하루를 포함한 영화 속 인물들의 사연은 '현재성'이라는 시간의 기질을 가진 공간들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들의 마주함은 재난이 낳은 비극적인 사정들의 만남으로, 이것들은 서로 충돌하지도, 그렇다고 결합되어 더 큰 아픔을 쏟아내지도 않는다. 이들은 막대자석과 같이 서로를 끌어당기다가도(공감) 밀어내는 성질(시련극복)을 모두 지닌다. 감독의 이야기가 결코 관성적이고 상투적인 것이 아닌, 재난 상흔만이 토해낼 수 있는 슬픔과 아픔을 '일본 재난의 역사'(시간)와 '재난이 이뤄진 현장'(공간) 속에서 균형 있게 배치해 놓은 것이다.

 

사진 ⓒ 평창국제영화제
사진 ⓒ 평창국제영화제

롱테이크의 연속으로 이뤄진 영화는 관객인 우리가 하루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아야 하는 집중을 요구하며, 더 나아가 하루가 사람들과 어떻게 섞이는지, 하루가 자신의 슬픔을 토해내는지 결과적으로 '도대체 우린 그녀를 위해서(재난으로 상처를 가진 사람들)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도록 만든다. 이는 어른의 책임이기도 하면서, 국가가 방관하고 묵인하는 사람들을 향한 관심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으로, "집단적 재난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상실감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서로를 돌보고 기대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는 감독의 말과 맞닿는다.

하루의 여정은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떠올리게 한다. 쓰쿠루가 도망치듯 떠났던 고향을 다시 찾아가는 모습이나 옛 친구들과 만남을 통해서 자신이 숨기고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떠올리고 받아들이는 모습까지. "살아남은 인간에게는 살아남은 인간으로서 질 수밖에 없는 책무가 있어. 그건, 가능한 한 이대로 확고하게 여기에서 살아가는 거야. 설령 온갖 일들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해도."라는 말은 소설 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닌, <바람의 목소리>까지 퍼진다.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다는 다자키…>, 믿음사, p.378]

하루의 여정 속에서 누군가는 하루에게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고, 또 누군가는 어른의 책무로 하루를 아끼고 망설임 없이 도와주며, 또 누군가는 하루로 인해 자신의 아픔을 극복한다. 감독은 코로나19로 언택트 사회로 변모한 현재를 부정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결속감'임을 설득한다. 영화 속 '하루의 방향'은 그것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돼지로 변한 부모를 되찾고자 하는 '센의 행방'(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을, 또 원전사고로 시간이 멈춘 후쿠시마 속에서 버려진 피아노를 조율하고 건반을 두드리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 소리'(류이치 사카모토:코다, 스티븐 쉬블)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진 ⓒ mydramalist
사진 ⓒ mydramalist

다시,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이번 신작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그것이 단순하게 '힐링'으로 치부된 형식 정도로 정의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태동한다고 느껴진다.

영화 초반 쓰러진 이모를 확인하고 병원을 나온 하루는 황폐하게 깎이고 휩쓸린 어느 산언덕에서 "왜?"라고 외치며, 자신의 불행과 비극에 대한 슬픔을 목청껏 토해낸다. 이때의 카메라는 정지된 롱테이크가 아닌, 핸드헬드 (hand-held)로 떨림 있는 움직임과 함께 그녀를 담는다. 마치 언제라도 죽을 것처럼 느껴지는 기운도 잠시, 기막힌 우연이 그 자리를 파고든다. 한 남성이 쓰러진 하루를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다짜고짜 함께 밥을 먹는다. '잘 먹어야 살 수 있다'라며. 그리고는 그녀가 먹을 간식을 챙겨 역까지 바래다준다.

이처럼 영화 속 하루와 이방인들의 만남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들은 하루를 모른 척 지나갈 수도, 버려둘 수도, 또 끼니를 챙겨줘야 하는 의무와 학생인 그녀에게 세상은 위험하다는 훈계와 걱정까지. '영화는 왜 하루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가'라는 의문, 여기에는 데리다와 레비나스가 정의한 '환대'의 개념이 자리한다. 가족을 재난으로 잃고, 유일한 가족인 이모마저 쓰러진다. 그녀는 혼자다. 그녀는 황폐한 현재에 갇힌, 그 어떤 가능성도 상상할 수 없는 출구 없는 일상 안에 남겨진다. 그녀의 세계는 닫힌다. 아니. 닫힐 위기에 처한다.

위에서 언급한 강력한 힘의 태동, 이것은 '하루를 기꺼이 환대하겠다'는 이방인들의 의지이며,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확고한 존재를 자아낸다. 이것은 "나는 약자로부터의 타자에게 자리를 내주며 타자를 대접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타자를 돕는 것이지만, 그 타자는 내가 그러한 행위를 통해 나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나를 나의 경계 밖으로 이끌의 준다. 나보다 더 부족한 존재인 타자가 오히려 나를 돕는 것이다"라는 레비나스의 말과 생각의 '동일시'다.

영화의 마지막은 죽은 사람에게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바람의 전화'로 향한다. 그곳에서 하루는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쓰러지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치 않는다. 덤덤히 전화 부스에서 나온다. "모두를 만날 때까지 살 거야. 즐겁게 기다려줘"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살아있기에 가족을 기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배운 것이다. 메마르고 잔뜩 젖어있던 스크린의 이미지가 생기를 찾는 순간이다. 평창에서 느끼는 '일본인들의 상처와 상흔의 숨결'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바람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극장에서 볼 수 있기를 기다려 본다.

 

사진 ⓒ 평창국제영화제
사진 ⓒ 평창국제영화제

P.S. 이 작품에서 '하루'를 연기한 배우 '모토라 세리나'의 연기가 상당하다. 올해 초 국내에 개봉한 '유카 에다' 감독의 <소녀가 소녀에게>(2017)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는데, 3년 동안 상당한 연기력을 키워왔다고 볼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보여준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떡잎부터 다르다'라는 천재성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녀의 얼굴'은 그동안 일본 배우에게서 볼 수 없었던, 또 '이시바시 스즈카'와 같은 스크린에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보여주는 매력을 지닌다. 한편으로, '우울감과 상실감'에 대한 감정을 끌어오는 부분에서 '지금의 시대에 필요한 얼굴'이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미야케 쇼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한다. 'S'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쓴 채. 그를 처음 본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그 모자를 쓰고 왔던 기억이 나는데, '슈프림(Supreme) 한정판 모자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끼는 듯하다.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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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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