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밤의 전투를 보여주는 '빅슬립'의 거대함과 사소함
[Interview] 밤의 전투를 보여주는 '빅슬립'의 거대함과 사소함
  • 이상용
  • 승인 2023.12.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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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관객들에게 전해질 거다."

영화는 집을 나온 박길호(최준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길호는 잠자리를 찾다가 김기영(김영성)의 집 앞 툇마루에서 잠을 청자고, 소년을 발견한 기영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길호의 숙박은 다음 날로 이어진다. 길호는 기영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밥을 먹이고 잠자리를 마련해 준다. 하지만 기영이 들어오지 않던 밤에 길호는 자신의 친구들을 무단으로 집에 들인다. 이로 인해 두 사람 혹은 아이들과 기영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고, 길호는 친구들과 다시 거리로 나온다. 집과 거리, 낮과 밤, 길호와 기영 사이의 오해는 몇 가지 사건과 몇 번의 부딪힘 속에서 이해로 바뀌어 가고, 기영은 거리에 있는 길호를 찾아 나선다. 앞으로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낼 수 있을까. 일시적인 구원에 지나지 않는 걸까. 김태훈 감독이 경험한 이 영화를 둘러싼 현실과 영화가 도달하려는 지점에 대한 깊은 고민을 들어보았다.

 

동두천에서

이상용 평론가

영화를 보면 초반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 장면에서 동두천의 지명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주요 촬영지가 동두천인가요?

김태훈 감독

대부분 동두천이고, 기영의 집 같은 경우는 평택에서 촬영했습니다. 기영이 다니는 공장도 평택에서 촬영했어요.

이상용 평론가

그럼 공장의 폐기물을 처리하는 장소는 평택인가요.

김태훈 감독

아니요. 영주에서 촬영했어요. 도저히 이 장면을 허가 내주거나 촬영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고향의 선산에서…

이상용 평론가

영주가 고향이시군요. 그럼, 촬영지가 대한민국의 위에서 아래까지네요. 이렇게 동선이 크면 총 몇 회차에 촬영을 끝낸 건지가 궁금해지네요.

김태훈 감독

회차가 좀 짧았어요. 18회, 19회차였는데 굉장히 힘든 스케줄로…

이상용 평론가

그래서 사전 리허설을 길게 가져간 것이군요. 효율성을 위해.

김태훈 감독

그것도 있지만 단편 영화 작업을 할 때도 리허설을 통해 인물끼리 대화를 하면서 만들어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미리 연습실을 잡아놓고, 보름에서 한 달 정도 배우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준비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아무리 리허설을 했다가 해도 18회차로 장편을 끝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김태훈 감독

스태프들이 다 친해서 그나마 가능했죠. 서로 해보자고 의기투합이 되었어요. 이 작품을 좀 가능하게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스태프들이 먼저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인지,  그때가 너무 힘들었는지, 만날 때마다 스태프들이 막 울어요.

이상용 평론가

운다고요?

김태훈 감독

그때 너무 힘이 들었고, 이제 개봉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 기뻐서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나 봐요.

이상용 평론가

순제작비는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김태훈 감독

2억 가량을 지원받았어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사전 제작 지원을 받은 금액이 1억 5천이고,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5천을 받았어요. 그런데 촬영을 하다가 다 써버린 거예요. 그래서 대출도 받고, 고향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빌리기도 하고. 후반 작업 때도 일을 해서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총 순제가 2억 5천 정도인데, 그것보다 조금 넘게 들어갔어요.

이상용 평론가

그렇다면 동두천에서 주로 촬영을 한 것은 경제성을 고려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건가요?

김태훈 감독

여러 인터뷰에서 제가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설명했는데, 대안 교육을 했던 곳이 동두천이었어요. '시네버스'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했습니다. 군대 생활도 동두천에서 했어요. 이렇게 저렇게 지내다보니 동두천이 무엇인가 흥미로운 공간이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가건물도 많고, 동두천의 중앙으로 지하철이 다니거든요. 덕분에 사방팔방으로 열차 소리와 열차가 지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 느낌이 좀 희한하더라구요. 교통라인으로 인해 동두천은 거쳐 가는 장소라는 인상이 생기고, 현실적으로 촬영 회차도 길지 않으니 아는 지역에서 몰아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이상용 평론가

문학적 상상의 공간으로 동두천이 호출된 적이 있죠. 김명인의 시이자 시집인 『동두천』도 생각이 나네요. 1970년대식 혹은 기지촌에 대한 상상력인데 요즘은 이러한 지역적 특징이 문학이나 영화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영화나 드라마가 이러한 방식으로 지역을 다루는 것을 현지 분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요즘 드라마들은 실제 지명을 쓰는 게 어렵습니다.

<빅슬립>에서도 공간적 지표들은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도 동두천인가요. 길호와 기영이 '결혼'에 관한 대화를 하는 장면 말입니다('델리만쥬' 장면이라고 관객들이 부르는)

김태훈 감독

동두천에서 좀 올라가면 연천 쪽으로 가다가 발견한 장소였어요. 올라가다 보니 이 주변에서 촬영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이상용 평론가

감독님이 가르친 곳이 동두전인지는 몰랐지만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의 모티브에 관한 언급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정규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경우였고, 수업 중에 매번 잠자는 아이를 보게 되었다는 인터뷰 말입니다.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이 이 아이에게는 자신의 수업보다 잠이 훨씬 더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도요.

그런데 인터뷰를 읽으면서 정작 궁금했던 것은 영화의 주인공이 어째서 길호가 아닌가 하는 점이었어요. 아이들의 세계만을 온전히 그려도 될 텐데, 기영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간섭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정작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길호에게 꽤 간섭합니다. 

김태훈 감독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두려워하면서 수업을 시작했어요. 관계자분들께서 해주시던 말씀이 "전화번호는 절대 주지 마세요." 였습니다. 그만큼 아이들과의 관계를 맺는 부분에 있어서 신중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무게감도 크죠. 그런데 진짜 아이들 옆을 지켜주는 분들이 계셨어요. 심지어 선생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옆에서 계속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어른들이 계세요. 현장의 경험을 통해 그분들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어요. 왜 저렇게까지 하시지,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저 조차도 두려웠거든요. 더 많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덕분에 자책도 많이 했고, 아이들과 나 자신 혹은 아이들과 어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나라는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해졌어요. 또한, 아이들을 보면서 저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게 되더라고요. 어렸을 때 나도 저랬었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등. 지금은 내가 아이들이 될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과 대면하는 어른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까칠한 어른 혹은 기영의 탄생

이상용 평론가

영화 속 기영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지네요. 현실에서 기영을 만나면 굳이 마주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길호와 만나는 어른이 왜 하필이면 기영이었어야만 했을까요?

김태훈 감독

그건 이 영화의 전체 방향이기도 한데, 영화의 안과 밖이 일종의 거울 보기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현장에서 배우들하고 이야기 나눌 때 "후회로 시작을 해서 이해로 끝나기를 바란다"라고 했거든요.

기영도 그렇고, 길호도 그렇고. 현실에서 마주치면 피할 만한 이들이잖아요. 서로가 마찬가지죠. 그러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면 어떨까. 서로의 과거나 미래로 생각하고 보면 어떨까. 관객들 또한 그러한 마음으로 보게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들에 대한 오해가 2시간이 안 되는 영화라는 시간을 통해서 마냥 밉지만은 않은 사람들로 이해 받게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이 영화가 완벽하지는 않아도 관객들에게 조금 더 닿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거울 보기의 효과라… 서로 마주 보게 한다는 것을 의도하신 건데 오히려 역설적인 게 있습니다. 대중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올라와 있는 일반 관객들의 비판적 반응을 살펴보면 생략되는 장면들에 대한 불만이 보입니다. 생략의 상당 부분이 인물에 대한 것이다 보니 거울 효과가 제대로 발휘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거든요. 

예를 들어, 기영의 아버지는 왜 저런 상태로 있는가하는 것에 관한 설명도 생략되어 있고, 새엄마가 집을 나갔다가 기차역에서 돌아오는 에피소드도 그녀의 진술을 통해서만 아는 것이지 정작 그녀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길호에 대한 것도 궁금한 게 많아요. 길호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새아버지죠. 따지고 보면 길호는 피붙이가 없는 고아인데, 그의 친척들은 정말 아무데도 없는 것일까 싶기도 하고. 친절하지는 않아도 좀 더 설명이 있다면 어떨까. 사실, 친엄마가 죽은 후 새아빠와 살게 된다는 것은 현실에서도 쉽지 않아 보이거든요. 두 인물에 관한 가족사적 설명이 좀 더 있었다면 거울 보기 효과를 좀 더 잘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김태훈 감독

좀 도전 같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에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영화를 통해서도 그 모든 것을 다 알려주는 게, 그 스토리를 다 알려주고, 그 사람의 어떤 사람인지를 다 보여준다는 게 오히려 진짜 이야기에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나 스스로도 평범하기 때문에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럴 때 이 영화가 영화의 바깥으로도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길호 뿐만 아니라 영화 바깥의 다른 청소년들도 영화를 통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수업을 하면서 저 자신을 내려놓고 아이들과 소통을 하다보면 이들도 똑같은 아이들이고, 그 아이들의 배경이 어떤지 몰라도 아이들을 이해하게 되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험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이 경험을 어떻게 공유하느냐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모든 걸 다 알지 않더라도, 우리가 시간을 함께 보낸다면, 조금 더 이해의 눈빛으로 그 아이들을 봐주고 소외된 사람들을 봐준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영화가 상영되는 짧은 시간일지라도 그렇게 다가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도전이었어요. 좀 불안하더라고요. 이렇게 설명해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이해해 줄 수가 있을까. 촬영하는 내내, 편집하는 내내, 음악을 만들고 믹싱을 하는 내내 불안감이 계속 있었어요.

이상용 평론가

그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인물에 대한 정보의 제공에 관한 문제에 국한된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보다 미묘하고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감독님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게 있어요. <명희>(2014)라는 단편을 만드셨는데, 탈북 여성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죠. 이 작품도 인물의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빅슬립>에서도 그러했듯이 인물의 과거를 보여주는 플래쉬백을 전혀 쓰지 않더라고요. 작가로서는 빠지기 쉬운 유혹인데, 플래쉬 백의 거부는 지금 설명해 주신 것과 나란히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태훈 감독

네 맞습니다. 좀 전에 답변드린 거랑 일맥상통하긴 하는데, 가장 큰 목표 중에 하나는 현재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이돌도 혹은 소외된 어른들도 과거로 돌아가서 그들의 아픔을 들춰낼 수 있지만 과거를 듣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은 있을 수 있으니 현재에 집중해서 그 부분을 좀 더 밀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지만 할 수 있는 말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그 말대로라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실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태훈 감독

엄청 좋아합니다. '켄 로치'도 그렇고.

이상용 평론가

그런데 다르덴의 영화와는 결이 좀 달라요. 다르덴의 영화에서는 어른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이들을 보살펴주거나 바라보는 경우는 많지는 않아요. <아들>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빅슬립>하고는 다른 종류의 것이고, <자전거를 탄 소년>의 경우에도 어른들이 이 정도로 밀고 들어오지는 않아요. 다르덴 형제의 대표작 <로제타>가 대표적인데 십대 소녀 로제타를 바라만 보고있죠. 소녀를 둘러싼 어른들은 오히려 방해가 되거나 불편함을 만들죠.

<빅슬립>에서 어른들도 다르덴의 영화들처럼 불편한 존재에 가깝지만, 기영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길호의 아버지를 직접 만나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과 있는 길호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길호>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기영이라는 어른의 모습을 통해 영화의 윤리적 태도나 결기를 드러내고 있어요. 결국 그들이 함께하는 '빅슬립'이 중요하죠. 

김태훈 감독

맞아요. 다른 무엇보다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제 태도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담길지 예상할 수는 없지만 그 시작과 끝을 꼭 올바른 태도 그러니까 최소한 기영이라는 인물처럼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태도를 견지하려고 했어요. 이 영화의 배우 오디션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오디션 준비를 하는 스텝들과 나눈 부분이 여기 오시는 분들에게 우리는 최대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지키면서 시작을 하고, 들어오시는 분들에게도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그 태도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심지어 관객을 만나는 순간까지도 이 태도를 유지하자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들이 영화 안에 담길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태도가 어떻게 담길지도 모르겠고, 두렵긴 하지만 최소한 이 태도가 기영에게 담길 것이고, 이 영화의 형식에도 담길 것이고, 끝내 관객들에게 전해질 거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저만의 약속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굉장한 싸움이죠.

 

이상용 평론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들의 현실이 바뀔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영화 안에서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눈에 띕니다. 그런데도 말씀하신 그러한 믿음을 전달하는게 가능한 건가요?

김태훈 감독

사실은 실패할 거라는 불안감이 극도로 오기도 했었어요. 이게 뭐지? 대체 뭘 위해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게 너무 명백하고, 이 영화 속 세계도 바꿀 수 없다는 게 너무 명백했기 때문에 말이죠.

이상용 평론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거나 구원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쪽도 아닌 거잖아요. 

김태훈 감독

그래서 항상 고민했던 것이 이 영화의 최초였어요. 그때로 돌아갔던 이유가 뭐냐면 수업 초창기에 만났던,  잠자고 있었던 그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깨울 수가 없었는데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제 어설픈 수업보다는 이 친구가 자는 게 수업보다 훨씬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결론적으로 말자면 이 영화의 끝이 수업하며 만난 잠자는 학생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결론과 닮아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 어설픈 영화는 중요하지 않고 차라리 이 영화가 여기서 멈추고, 이 친구에게 잠을 재우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말이죠. 거기를 향해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상용 평론가

그러한 생각 때문일까요. 이러한 이야기나 캐릭터가 등장하면 폭력적인 게 훨씬 더 강조되거나 농담반 진담반으로 피칠갑을 하는 장면이 나올 수도 있는데 거의 없잖아요. 마지막에 기영이 파이프를 휘두르는 정도가 최대치라고 해야 할까요. 

김태훈 감독

맞습니다. 아이들의 불행을, 어른들의 불행도, 등장하는 인물들의 불행도 전시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런 영화는 수도 없이 봐왔고, 그렇게 해서는 다른 영화를 찍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아이가 제자라면 그 아픔을 들추는 것 자체가 오히려 제 욕망으로 영화를 만들게 되는 꼴이 되어버리는 느낌이었어요.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혹시나 이 영화를 보더라도 제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가르친 제자들 중에 영화를 본 경우가 있을 것 아닙니까? 상처를 안 받았을 것 같긴 한데요.

김태훈 감독

네.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어요. 그런데 좀 다른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많은 단편을 만들었습니다.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어요. 뇌병변이 있는 학생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 친구가 직접 주인공을 맡아서 영화를 촬영했습니다. 촬영 후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한 장면의 음악 사용을 두고 이슈가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뇌병변 친구를 괴롭히고 우유를 바닥에 쏟았는데 장면이 바뀌면 그 친구가 화장실에 가서 갑자기 정상인처럼, 보통 사람처럼 휠체어에서 일어나 마대자루를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갑니다. 마치 아이들을 때릴 것 같은 기세였는데 정작 다가가서는 걸레질을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일종의 환상 장면이네요.

김태훈 감독

네, 환상 장면인데, 다른 친구가 대역을 해서 촬영을 했죠. 움직임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음악을 약간 환상적이고 뭔가 스릴이 있는 느낌으로 집어넣었는데 편집 후 상영을 했을 때는 모두가 좋아했어요. 그런데 상영 후 주인공 친구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나는 그 장면이 진짜 싫었다."고. 아이들에게 뭔가 복수할 것 같은, 공포와 서스펜스를 자극시키는 음악의 사용이 싫다고 했어요.

저는 뒤통수를 한 방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닐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돌봐야겠구나, 이야기를 더 돌보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마음을 더 돌봐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강박 관념처럼 이야기를 쓸 때도, 영화를 찍을 때도 혹시 이 친구가 상처받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덕분에 굉장히 어렵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데 그게 뭔가 올바른 태도로 영화를 이끌어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외줄 타기를 하면서 영화를 찍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접으려고 했다

이상용 평론가

응당 그래야 하는 거지만 동시에 어렵고 그러한 태도를 계속 견지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겠네요. 이야기를 쓸 때 가까이 놓여 있는 인물들로부터 좀 벗어나면 또 다른 화학작용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게 첫 장편이 오래 걸린 이유일까요. 필모그래피를 보면 영화를 시작한 이후 첫 장편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요. 경제적 상황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김태훈 감독

솔직히 이제 영화를 찍지 못하겠다,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라는 사람이 정말 영화를 찍을 때 즐거움이 절반이 있다면, 괴로움도 절반이 생겨나요.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그걸 제가 견딜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결혼도 했고, 돈도 벌어야 되고, 제 앞가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38세쯤에 <빅슬립>의 시나리오를 쓰게 된 이유가 더 이상 도망치지 말자,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영화를 그만둘 거면 정말 멋지게 그만둬야겠다고도 생각했고, 망하더라도 한 번 제대로 망하고 가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를 할지 말지를 두고 스트레스를 받을 거면, 영화 찍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자고 생각했습니다.시나리오를 썼는데 운이 좋게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을 받게 되고, 찍어야 하는 상황이 주어졌죠. 제가 그동안 만났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를 한번 던져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용 평론가

같은 맥락의 이야기지만 아이들 장면에 대한 애정과 묘사가 눈길이 가기는 합니다. 길호가 아이들 무리의 우두머리인 오현 일행과 함께 빈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잠깐이지만 여학생들도 보이거든요. 아침에 경찰들이 들어왔을 때를 보면 술병과 과자들이 보이죠. 그런데 여자아이들이 보이지 않아요. 사라진 시간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많죠. 그런데 이러한 설정은 현실적이거나 관습적이기보다는 "감독님적인 거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집을 나온 십대들의 생활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예상되는 장면들이 있을 텐데 너무 철저하게 배제한 것은 아닐까요.

김태훈 감독

차라리 보여주면 더 쉽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이야기도 더 재미있게 끌어갈 수 있을 것 같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선택을 하지 말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거 말고 어떻게 보여줄까 하는 것이 과제로 남았지요. 이 과정을 통해 나온 것 중에 하나가 상상에 맡겨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관객들에게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이상용 평론가

아쉬운 것이 있었어요. 길호와 오현은 기영이 찾아오면서 갈라지게 되는데, 그들의 우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갈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남았습니다. 그것을 좀 더 상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오현과 영범 사이에 놓인 대화와 힘의 역학 관계 때문인데요, 길호는 영범에게 오현이 부른다고 가지말라는 식으로 말을 하죠. 하지만 자신 또한 영범과 마찬가지로 쉽게 오현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또한  길호와 영범 사이에는 오현과 있을 때는 찾아볼 수 없는 친밀함이 있죠. 마치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의 한 장면처럼 아이들끼리 즐겁게 어울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결국 세 아이들의 삼각관계가 궁금한 거죠.

김태훈 감독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대화도 있었고, 더 많은 에피소드들도 있었어요. 길호와 관련된 어떤 내용을 찍은 부분이 있는데 코로나 상황이어서 제대로 촬영하지 못하거나 아예 쓸 수 없는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거리의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장면들은 쓰지 않고 걷어냈습니다. 코로나 탓을 한 가지만 더 하자면 찍고도 거기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은 밀접 접촉자가 되는 바람에 날아가 버렸어요. 왜냐하면 남은 촬영 기간 동안 그 인물을 찍을 수가 없으니까, 그 인물을 버리고 이미 촬영한 장면을 날려 버려야 하는 경우도 생겼죠. 덕분에 새로운 배우를 전날 캐스팅을 해서 촬영해야 하기도 했어요. 팬데믹 상황에서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세세한 부분을 완전히 만들 수가 없었어요. 이러한 이유도 영화를 좀 더 관객에게 맡기는 부분으로 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죠.

 

이상용 평론가

촬영이 코로나 시기였던 것도 큰 영향이 있었겠군요.

이건 실내 장면인데, 경찰서에서 길호가 자신이 훔치지 않았다고 소리칠 때 기영이 그것을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표정처럼 반응합니다. 공장으로 돌아간 기영이 이 말이 떠나지 않는 듯 황급히 경찰서로 다시 찾아가고, 길호의 집주소를 알아내어 소년의 아버지를 만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의 연결은 이전과 달리 급속하고 비약이 있다고 느껴지는 연결이었습니다.

김태훈 감독

솔직하게 부족함이 있었던 거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경찰서 장면에서는 그냥 바라보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기영이 길호를 바라보고, 기영이 길호를 바라보면서 소리치는 장면을 통해 서로의 입장(시선)이 뒤엉키는 순간을 다루고자 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영화 후반부에 오현이 소리를 치는 장면에서 기영과 길호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을 만들어 경찰서 장면과 대응시켰습니다. 비슷한 시선의 교환이지만 서로를 대하는 시선의 태도가 달라졌죠.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이해의 부분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관객들도 두 사람을 어느 순간부터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고, 이 영화가 끝났을 때 두 사람을 그냥 바라봐주게 된다면 그것이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했어요. 

이상용 평론가

두 사람도 있지만 이야기 혹은 드라마의 차원에서는 영범의 선택과 변화에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범은 길호에게 기영의 집 물건을 자신이 훔쳤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나중에 기영을 찾아가 물건을 돌려주고 자신이 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꽤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행위와 선택인데, 영화는 쑥하고 이 순간을 들이밉니다.

영범은 보조적 캐릭터로 볼 수 있지만 도둑질 사건으로 인해 길호와 기영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본인이자 오해를 풀어주는 직접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실 길호와 기영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죠. 직접적인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은 영범이고, 길호가 있는 기영의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전화를 한 것도 영범이잖아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정작 문제의 상황 속에서는 쑥 빠져버리는 동시에 이 둘의 관계를 다시 이어붙이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좀 더 내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김태훈 감독

확실히 선택의 문제였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더 만들 수도 있었고… 우선적으로는 길호와 기영에게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상황을 좀 더 도드라지게 보여주자는 것이었죠. 이외에 여러 스토리들을 각각의 캐릭터들에게 부여하고자 시도 했습니다. 다만, 배분과 분량 때문에 가지를 쳐내고, 짧은 순간에 어떻게든 입체적으로 인물들을 보이게 만들 수 있는가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기영의 새어머니라든지, 길호의 친구 영범도 그렇고, 공장에서 만나는 초은도 그렇고. 서브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펼친다기보다는 각각의 인물에 대한 입체성을 어떻게 줄 것이냐에 대해 집중을 했고, 이로 인한 모순되는 감정들 그리고 이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을 가지고 간다고 생각을 했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캐릭터들 전체, 그러니까 배우들한테도 직접적으로 이 인물들이 모두 닮아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모두가 서로라는 거울을 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영범은 길호이기도 한 거죠. 

이상용 평론가

개인적으로는 아이들 세계에 대한 묘사에 확실히 눈길이 갑니다. 몇몇 장면의 행동이 계속 머리에 남거든요. 경찰서를 다녀온 이후에 또 다른 빈 집에 들어갔을 때 길호가 보석을 혼자 챙기고 있는 장면이라든가(그 보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투는 소리가 나서 다급히 거실로 나와보니 오현이 무리 중 하나를 혼내고 있는 장면에서도 왜 다그치는지 궁금증이 남습니다. 이들 사이에 놓인, 집을 나온 거리의 아이들의 삶이 무엇인지를 상상할 수 밖에는 없는 걸까요.

김태훈 감독

영화를 준비하면서 인터뷰도 아이들을 더 많이 했어요.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심지어 보호소에 있는 선생님들까지 만나서 인터뷰도 다 하고, 그 자료들을 정리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쓰면서 내렸던 결론은 뭐냐면 저는 기영이 될 수는 있지만, 길호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의 주가 되어야 하느냐라고 생각했을 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기영의 이야기가 되는 게 맞겠다 생각을 했고, 기영에게 있어서 길호와의 만남은 자신의 과거를 만난 듯한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의 아버지들

이상용 평론가

과거라고 하시니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아버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자식들이 만나 인연을 갖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각자의 아버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기영의 아버지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환자로 집 안에 머물러 있고, 길호의 아버지는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만 길호를 마치 타인처럼 말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존재감이 없거나 부정하는 인물이죠.

하지만 동시에 드는 생각은 결국 주인공들도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델리만쥬'라 불리는 강변 장면에서 길호와 기영이 결혼에 대한 농담을 나누는 장면은 어쩌면 자신들이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기도 하겠죠. "너도 결혼 못해."라는 기영의 대사는 농담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 속에서 아버지가 좋게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여전히 한국 사회를 가부장적인 사회라고 말하지만 영화가 반영하거나 총공세를 펼친 것은 아버지의 권위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김태훈 감독

저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아이들하고 학교 밖 청소년들, 가정 밖 청소년들 만나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열이면 열. 아버지와의 불화와 폭력으로 인해서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제 경우도 흔히 얘기하는 경상도 아버지처럼 무뚝뚝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고요. 한때는 아버지를 둘러싼 이슈가 시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현재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빨리 해야 되는 이야기처럼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상용 평론가

영화에 국한시켜 생각해 보면 현실의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적 아버지의 등장에 눈길이 갔습니다. 기영이 사장을 독대하는 장면말입니다. 어찌 보면 영화 전체를 통해 가장 필요없는 장면일 수 있겠다 싶은데도 꽤 긴 테이크로 찍어서 등장합니다. 저는 이 관계를 아버지에 대한 발언으로 읽었습니다. 기영과 반장과의 관계도 유사 형제로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길호와 기영도 형동생의 느낌을 주죠. 일종의 가족유사성이라고 할만한 모델들이 영화 속 남성들을 중심으로 반복됩니다.

그리고 가족유사성을 통해 확보된 공장 사회(가족)의 핵심적인 사건은 폐기물 처리 문제에요. 그것은 길호와 가족, 기영과 가족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확대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영의 반응이죠. 그는 폐기물 처리에 분노를 하면서도 이 일을 계속합니다.

김태훈 감독

사장과 기영 혹은 반장과 기영 사이에 놓인 모습들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것을 일정하게 반영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대한 기영의 태도가 궁금했어요. 처음에는 폐기물을 버리는 것을 멈추고 신고를 한다면 기영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도 될 수 있겠다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기영이 살고 있는 세상을 어떤 세상으로 설정하면 좋을까라는 부분에서 폭력적인 아버지들이 만든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 끝에서 세상을 망치는, 지구를 망치는 폐기물이 아버지와 닮아있다는 의미로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른 셈이죠. 이 모든 배후의 아버지가 사장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계속 느꼈던 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계속 들어갈 수밖에 없더라고요.

이상용 평론가

그래서 기영이 아버지 몸을 기억이 닦아주는 장면이…

김태훈 감독

그것도 그렇고 아버지들도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게끔 되는 모습이라든지, 그들도 제대로 잠자지 못해 기영의 차 안에서 잠을 청하는 장면을 보여줬어요. 어떻게 보면 이 아버지들도 기영을 만나지 못한 길호이겠죠. 이들 또한 편히 자 본 적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상용 평론가

그래서 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면의 차 안에서 카메라가 뒤에 앉은 나이 든 세 어른을 비춰주는 거네요. 잠은 길호와 기영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저 사람들한테도 필요한 거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태훈 감독

폐기물에 대해서도 여러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기영의 차가 고장이 나서 뒤에 잠들어 있던 아버지들이 깨어나서 같이 다시 시동을 걸려고 밀고 간다라는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이상용 평론가

너무 많은 상징이 깔리다보면 영화를 상상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겠죠. 폐기물, 화분 등 이러한 장면들이 넘치면 상징의 요소로 환원되기 쉬울 텐데, 그러한 방식이 영화를 가장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함정이 되기도 하니까요. 좀 다른 측면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네요. 저희가 계속 얘기했던 게 "거울 보기", "마주 보기"의 방식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영화의 미장센이나 스타일과도 관련됩니다. 결국에는 영화의 시선과 이미지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요.

이 영화에는 분명히 이미지를 처리하거나 이미지를 제시하는 방식들의 있습니다. 길호의 무리가 전등의 불빛을 비추는 일련의 장면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밤중에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불빛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기도 하고, 스스로 희미한 빛을 내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반딧불의 이미지죠. 철학자인 디디위베르만의 사유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반딧불을 통해 민중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하죠. 아무튼 희미한 손전등의 불빛은 빈집에서 도둑질할 때도 등장하고, 영화 전반에 걸쳐 아이들과 함께합니다. 무엇보다 이 섬세한 불빛의 느낌을 영화 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김태훈 감독

빛이라는 이미지를 어떻게 가지고 오게 되었냐면 이태원 해방촌에서, 그 언덕에서 가출 청소년들이 굉장히 많이 모인다는 얘기를 듣고는 한동안은 테이블을 가지고 가서 수업을 한 적이 있어요.

이상용 평론가

영화 감독의 꿈도 있었지만 한때는 사회 활동가에 대한 꿈도 있었네요.

김태훈 감독

그러한 꿈을 갖고 있기보다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수업을 하고 싶었는데 센터 같은 곳에서 같이 한번 해볼까요, 하는 제안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수업이 라이트 페인팅이었어요. 랜턴을 이용해 아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랜턴 불빛으로 그림을 그리면 제가 카메라 뒤에서 찰칵하면서 그림을 형상화시키는 작업이었는데 최초의 계획은 어둠 속에 있는 아이들에게 제가 빛을 건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가니까 제가 카메라 뒷편, 그러니까 어둠 속에 있고 아이들이 빛으로 저를 비추는 경험을 하게 된 거예요. 역전이 일어났죠. 되게 이상하게 다가오더라고요. 내가 생각하던 것이 아니었구나! 저 어둠 속에서 깔깔대면서 랜턴을 비추고, 저를 비추는 아이들이 마치 영화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의 모습이 영화관에서 빛을 비추는 영사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빛으로 표현하면 영화가 되겠구나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에 관한 것을 <빅슬립>을 촬영하기 전에 짧은 영상으로 만든 적이 있어요. 3분짜리였는데 나에게 있어서는 영화라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인디포럼'의 폐막 영상이기도 했습니다. 강원도 평창에서 배우 3명을 태우고 가다가 언덕이 있는 곳에서, 헌팅을 미리 한 것도 아닌 우연히 발견한 곳에서 찍었습니다. 3분짜리 영화에는 해가 지기를 계속 기다리는 사람들의 얘기로 보여집니다. 첫 시작이 차 안에서 사람들이 자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깨울 수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람 소리만 들리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다가 해가 질 무렵에 바깥으로 나와 바람을 맞으면서, 해가 완전히 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언덕으로 올라가 삼각대를 설치하고 완전히 깜깜해졌을 때 하늘을 향해 카메라를 찍으면 그 소리에 반응하듯이 하늘의 별빛이 장대하게 펼쳐집니다. 저는 그게 영화 같다고 생각을 했어요. 불빛이 하나둘 늘어나고, 그것은 사람들이기도 하죠. 그게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빅슬립>은 꽤 오랫동안의 경험과 고민과 시도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인 셈이네요. 이미지를 좀 더 얘기하자면 빚에 대한 인상도 눈에 띄지만 텅 빈 공간들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눈에 띕니다. 대표적으로 기영의 집 베란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화분이 사라지는 순간이요. 그 장면의 정서적 울림만으로도 영화를 끌고 가겠다는 결기를 엿보게 됩니다.

김태훈 감독

외로움이에요. 아이들을 만났을 때 제가 가장 많이 느꼈던 게 외로움. 아이들 자체가 늘 외로워하고 쓸쓸해서 사람의 손길을 기다린다고. 되게 거칠고 정말 겉에서 보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막상 관계를 틀고 얘기를 걸어보면 그렇게 따뜻한 아이들이 또 없어요. 그러한 모습은 외로움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해방촌에서 수업을 할 때 학교를 다니지 않는,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한 아이가 와서 자기도 랜턴으로 하는 수업을 듣고 싶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어른처럼 보였는데 수업을 하면서 아이처럼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매일 찾아 오더라고요. 아이들의 마음이 딱 그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로움.

이상용 평론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잠자는 모습에서도 외로움이 느껴집니다.기영이 잠든 모습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 공장에서 자신의 차 안에 홀로 자는 모습이잖아요. 그 순간이 유일한 기영의 낙원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홀로 잠들어야 하는 외로움이구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김태훈 감독

네 정확하게. 제가 만난 사람들과 제가 만난 아이들 보면 외로움이라는 이미지가 저한테는 최초의 이미지고, 그 외로움을 향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손길을 건넬 수 있을까 하는 게 하나의 테마이기도 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도 어떻게 하면 길호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을까라는 게 목표였는데 여러 변화를 거치다가 결국에는 이불 안 덮어주고, 아무것도 안 해줘도 되니 옆에 그냥 사람이 하나 두고 있는 것 자체가 따뜻한 잠이 되겠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죠.  

이상용 평론가

그 장면에서 기영이 이불을 가져다주려고 나오니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잠든 길호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낯선 집에서 자게 된 길호가 기영이 잠든 모습을 비춰 보았는데 역전이 일어나죠. 처음에 이 집에서 자는 것을 낯설어하는 길호였는데, 그래서 아이들이 몰려와 잠들 때에도 길호는 제대로 잠을 자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빈집에 들어갔다가 경찰이 찾아오는 장면에서도 길호 혼자만 깨어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이 집이 편안해 졌구나, 드디어 길호의 집을 찾았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태훈 감독

목표는 하나였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가장 깊고 따뜻한 잠을 재울 것인가. 여러 가지 의견들이 오고 갔습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밥을 먹고 다시 잤다, 이런 것도 있었고. 그러다가 기영이 들어와서 같이 자면 안 돼요, 라는 의견이 나왔어요. 얘기를 듣는 순간 그렇구나, 그게 가장 따뜻한 잠이 될 것 같다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이상용 평론가

거기에 변주가 있지요. 저는 사실 그 순간이 더 좋았거든요. 길호가 깨어났다가 기영이 자는 걸 보고 또다시 자는 모습이요.

김태훈 감독

시나리오상에는 길호가 일어나 기영을 바라보고 아무 할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잠에 빠진다. 이렇게 썼거든요. 그만한 깊은 잠은 없을 거다. 한밤중에 자는 잠보다 오후에 햇살을 받으면서 잠을 잤으면 좋겠다. 다 같이, 의기투합해서.

 

이상용 평론가

잠자는 모습을 포함해 영화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작이나 장면들이 있습니다. 담배 피우는 기영의 반복적인 모습이라든가 식사하는 장면도 꽤 중요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영화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묘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반에 새엄마가 반찬을 싸줬을 때 그 반찬을 냉장고에 집어넣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 길호에게 들어오라고 하고 같이 밥을 먹는 장면은 두 사람의 잠만큼이나 중요해 보입니다. 

김태훈 감독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던졌던 질문이 딱 이거였어요. 먹고 싶은데 먹을 수 없고, 자고 싶은데 잘 수 없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성장을 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형태로든 아이들에게는 굉장히 안 좋은 결과로 올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잠이라든지 밥이라든지 이런 부분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먹는 건 중요하죠. 이러한 측면에서 기영이 초은의 제안에 따라 쫄면을 먹으러 가는 장면을 찍어야 하지 않았을까요(웃음)? 아예 안 찍으신 걸까요?

김태훈 감독

안 찍었습니다. 저희끼리는 기영과 초은의 관계를 "오늘부터 1일"이 되기 전인 "오늘부터 0일"이라고 했습니다. 1일이 되기 전에 영화는 끝이 난다(웃음). 

이상용 평론가

쫄면 먹는 장면이 있었으면 1일이 되는 거잖아요.

김태훈 감독

맞습니다. 기영과 길호는 식사뿐만 아니라 델리만쥬도 먹지만 다른 인물들은 그러한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이 거리에서도 뭘 먹거나 하는 장면도 없죠. 관련된 묘사가 있기는 합니다. 아이들이 들어가는 빈집 장면에서 아침이 되면 자고 있는 아이들 사이로 술병과 과자 봉지들이 보이죠. 하지만 그들이 먹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이 또한 아직은 이해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거기까지다. 

이상용 평론가

하지만 집을 나온 아이들의 행동이나 욕망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길호는 보석을 훔칩니다. 그것을 보여주시지 않나요?

김태훈 감독

그렇죠. 그런데 관객분 중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길호가 그것을 다시 놓고 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말이 되게 감사했어요. 그러기를 바랬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길호가 훔치던, 기영이 폐기물을 버리던 이들이 보여주는 행동의 원인과 결과들이 이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범죄  행위조차도 의문을 가지고 다른 상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관객분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또 어떤 관객은 폐기물을 버리러 가는 기영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폐기물을 버리고 가는 것을 멈추고 이제는 안 버릴 것이라고 상상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또한 무척 감사한 말씀으로 생각했어요. 두 시간도 안 되는 영화를 통해서 길호와 기영이 이해를 받았구나! 저는 그것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감독님의 얘기 듣다 보니 어떤 인물을 그려내건 간에 이해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면 카메라를 멈춘다라는 게 철칙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태훈 감독

이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모르는 거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 혹은 그들의 불행을 보여주는 부분들은 아주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를 쓸 때 재미있더라도 그 부분은 돌아서 가더라도, 피해야 한다면 피하고 싶다. 다른 방식으로 고민해서 다른 지점을 통해서 설득시키고 싶다는 고민이 커졌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대중 영화는 장르적 관습에 의해서 그렇게 묘사하거나 인물들을 선악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까. 이런 고민과 태도라면 아직은 상업 영화를 찍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이 없지 않나 싶은데요?

김태훈 감독

그냥 되게 혼란스럽다가 맞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짊어져야 될 삶의 무게도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독립 영화를 하는 것 자체가 저를 믿고 저와 함께해 주는 가족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찍어야 하지만 꿈꾸던 영화도 찍을 수 있어야 하는 입장이 있으니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 <빅슬립> 이후에 여러 제작자 분들을 만나뵈었는데, 계속 이 부분이 걸리더라고요. 이 과정을 제가 잘 겪을 수 있을까 해서 거절한 부분도 있고.

이상용 평론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잘해볼 수 있는 영역이 생기지 않을까요. 영화를 처음으로 보고 나서 배급사인 찬란 대표에게 연락을 한 이유 중의 하나가 다음 영화가 기대된다는 거였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들으니, 이 정도로 신중할 수 있다면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의 도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가는 뚝심이 있지 않을까, 장르가 뭐든, 캐릭터가 무엇이든 이 고민이 자산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김태훈 감독

제가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 있고 지금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아요. 이것저것 써보고 그러고 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제작자들은 무조건 책(시나리오)을 달라는 게 관습적으로 먼저 던지는 얘기니까요.

김태훈 감독

많이 만나 뵀는데 결국에는 이제 잘 써야 되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어차피 이거 제가 잘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제가 열심히 써서 첫 번째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이곳저곳에 말하고 다녔습니다(웃음) 그래도 대중적인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이 드는 건 애들을 만나면서 했던 것 같아요. 애들을 만나기 전에는 제가 생각하는 영화에만 빠져 있었다면, 얘네들은 이걸 영화라고 생각 안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어요.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과 매년 10편 20편 가까이 영화를 계속 찍으니까 그렇게 되네요.

이상용 평론가

그렇게 많이 찍으셨어요? 궁금하네요. 일반적으로 공개하신 건 거의 없잖아요.

김태훈 감독

그렇죠. 아이들이랑 같이 영화를 찍고 아이들이 하는 거니까. 재미있고 즐겁고 슬프기도 하고 또 신나기도 한 그런 영화가 되기를 늘 바라는 마음으로 하다가 보니까 제 욕심보다는 이거를 보고 있고 이거를 찍고 있는 인물들이 더 중요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찍으니까 어떤 영화를 해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빅슬립>의 오디션을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면서 정말로 그냥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정말 제가 기영이라고 생각한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과 하고 싶어서 그런 원칙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이상용 평론가

길호는 어떻게 찾은 건가요?

김태훈 감독

진짜 엄청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오디션도 되게 많이 봤는데 자기 말로 연기를 하고 자기가 가진 매력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배우가 최준욱 혼자였어요. 그 친구가 당시에 중학교 2학년이었어요. 제외될 수 있는 나이인데, 고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생 20살 또는 21살까지 보면서 살폈봤어요. 그 친구가 보낸  프로필을 보니까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연기를 시켜보니까 이 친구가 아니면 아무도 못하겠다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빨 교정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에게 연락드려서 혹시 촬영할 동안 교정기를 뗄 수 있냐고 물어봤죠. 연기를 정식으로 배우거나 한 학생이 아니었어요. 

이상용 평론가

영범 캐릭터에게도 날 것의 느낌이 납니다.

김태훈 감독

그 친구는 아예 연기 경험이 없었어요. 자기 친구들이랑 찍어가지고 올린 거예요. 올린 거를 저한테 보냈고. 한번 불러보자 해서 만났습니다. 당시 이 친구도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오디션장에 온 참가자 중 이 친구 혼자만 대본을 안 외워온 거예요. 그런데도 당당하게 "감독님 이거 저 안 해왔는데 보고해도 되죠?" 이러더라고요. 그런데 하다가 틀렸어요. 틀리니까 "감독님 한 번만 더 할게요"라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하는데 누가 안 뽑겠어요?

이상용 평론가

캐스팅 과정에서 좀 더 생생한 느낌이 중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인물의 비교도 눈에 띄는데요 기영과 길호의 행동 방식에는 모두 분노가 내장되어 있지만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보입니다. 길호는 소리 지르는 존재로 보여요. 초반 기영과의 세 번째 만남에서 부모에 대해 묻는 질문에 "내가 얘기하면 도와줘요? 그럼 얘기 할게요"라고 말할 때 톤이 올라갑니다. 길호의 폭발은 경찰서에 기영이 나타나자 "나 안 훔쳤다고요"라고 외칠 때 격앙됩니다.

상대적으로 기영은 퉁명스러운 말투가 기본인데 보통은 참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분노에 찬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공장에서도 물건을 내던질 때 엿볼 수 있죠. 이 영화의 절정은 기영의 액션입니다. 달겨드는 오현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든 파이프를 빼앗은 후 땅에 패대기를 치며 분노를 터트리는 장면은 확실히 이 영화의 최대치이기도 합니다. 물론 상대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분노와 폭력이라는 점에 있어 두 인물은 닮은 듯 보이지만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김태훈 감독

먼저 기영은 노력하는 존재다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죠. 그래서 참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에 있어서 늘 혼란스러워하고, 마주하는 상황에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존재로 설정을 했어요. 길호 같은 경우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연민을 던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말투가 공격적일 수 있죠. 누구나 그럴 것 같아요. 자신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싫기도 하고.  길호는 나 여기 있어라는 외침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나 여기 있는데 왜 못 알아주지 이런 느낌으로 캐릭터를 구축 하게 됐어요.

이상용 평론가

마지막 질문입니다. 영화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빅슬립'은 레이먼 챈들러의 대표작이고, 하워드 혹스에 의해 당대 스타들과 함께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유명한 제목을 쓰는 건 엄청난 자신감이 있거나 아니면 정신이 없는 거다라는 생각밖에 안들었거든요. 어떤 자신감인가요?(웃음)

김태훈 감독

선택할 때 다른 후보가 너무 많았어요. 처음에 부산국제영화제에 낼 때까지도 계속 수정 수정 수정… 마지막 용기는 주변에서 얻었습니다. 영화하는 친구들과 영화를 하지 않는 친구들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무게감이 너무 커서 사실은 <빅슬립>의 제목에 대해 질문이 나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경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부산 상영 이후 어떤 해외 영화제에 갔나요?

김태훈 감독

이탈리아의 지포니 영화제입니다. 

이상용 평론가

거기, 어린이 영화제가 메인인 곳으로 알고 있는데. 

김태훈 감독

네. 근데 저는 이제 18세 플러스 부분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영미권을 가셨으면 제대로 제목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을 텐데(웃음)

김태훈 감독

영미권은 아니지만 원래 모스크바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이 되었는데, 전쟁 때문에 보이콧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가지 못했죠. 그때부터 영화제 선택이 좀 꼬이긴 했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코로나 말고 전쟁이었군요

김태훈 감독

하지만 이렇게 개봉하고 관객분들 만나는 것만으로도 약간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을 할 정도에요. 

이상용 평론가

어쨌든 결과를 내놓으셨으면 그때부터 야망을 크게 가지시는 게 필요하긴 합니다. 이 작품을 많이 보아야 오늘 이야기를 나눈 부분들이 좀 더 많이 퍼지고 전달되고 공유되겠죠. 그건 영화의 운명인 것 같아요. 영화를 화두 삼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로 보입니다. 남은 이야기 중 일부는 배우들과 관련된 것이기도 해서 잠시 후에 있을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남겨두기로 하죠. 거울, 태도, 오해에서 이해로, 시간의 필요성 그리고 영화를 둘러싼 현실과 운명 그리고 교육적인 측면까지 <빅슬립>은 나눠질 이야기가 풍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추가한 몇몇 대화들

관객1

객석에서 나온 질문 중에 김영성 배우가 브레드 피트를 닮았다는 말에 관하여.

김영성 배우

브레드 피트는 뭔가 딱 각인이 되네요. 제가 살면서 브래드 피트를 닮았다는 말을 딱 두 분한테 들은 것 같은데 지금이 두 번째고, 작년에 <카지노>라는 작품을 찍었는데 현장에서 최민식 선배님은 저한테는 너무나 큰 선배님이고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떨고 있었는데 제 이름을 부르더니 "야 너 피트 닮았다." 이러시는 거예요. 오 좋네 그랬었는데 두 번째로 이 말이 나오니 뭔가 있나 봐요(웃음). 하여튼 너무 영광스러운 얘기고, 감사합니다.

이상용 평론가

혹시 기영의 대사 중에 에드립에 가까운 것도 있으셨던 건가요?

김영성 배우

현장에서 바로 그냥 갑자기 나오는 애드립은 아니고. 리허설을 할 때 이렇게 그냥 쳐보고 감독님이 써서 해 본 대사를 하는 등 사전에 얘기를 나눠서 반영을 했던 것 같아요. 델리만쥬 장면이라고 부르는데, 강가에서 둘이 걸으면서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죠. 제가 "너도 걱정하지 마 결혼 못 할 거야." 이 장면을 관객들이 좋아해 주시고 또 그 부분을 굉장히 애드립으로 많이 봤나 봐요. 엄밀히 말하면 연습 과정에서 나온 것을 반영해 준비한 경우였습니다.

관객2

헤어스타일에 관하여.

김영성 배우

영화 속 헤어스타일의 탄생을 얘기하면 연습실을 한 달 정도 빌려서 연습을 했었는데 혜화역 근처였어요. 근처 미용실에 가서 저는 가운을 입고 앉아 있었고, 감독님과 조감독님이 헤어 디자이너 선생님한테 머리를 처음 깎아본다고 생각하고 잘라달라 했어요. 그래서 머리를 조각하듯이 오래 깎았어요. 요구 사항이 많았죠. 여기는 조금 짧게 더 자르고, 여기는 안 자른 것처럼 냅두고, 시골에 어떤 이발소 가서 자른 것처럼 무슨 땜빵하는 느낌도 있고. 되게 고민하면서 조각하듯이 잘랐던 것 같아요. 연습할 때  자르고 나중에 촬영이 길어지니까 막판에 또다시 갔어요. 회차가 길어지면서 머리가 자라 감독님이랑 다 촬영하고 바쁘니까 저 혼자 다시 찾아가서 디자이너님한테 사진 다시 보여주면서 "다시 왔습니다. 똑같이 또 잘라주세요." 해서 똑같이 그 모양대로 잘랐던 기억이 있어요.

이상용 평론가

그 후로 미용실 디자이너 분 찾아가 보신 적 있으세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드는 데 커다란 일조를 하신 분인데.

김영성 배우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큰 일조를 하신 것은 맞죠(웃음).

 

이랑서 배우(초은)

관객3

이랑서 배우(초은)가 등장하는 초반부의 우는 장면에 대한 질문.

이랑서 배우

잘 봐주셔서 너무 감사하구요. 초은의 첫 장면은 저도 연기하기 되게 어려웠어요. 당시에 울어야 하는 장면이고, 어려워하면서 시작을 했었는데 사실 어떤 걸 딱 정해놓지 않고 연기했던 것 같아요.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상상도 해보고, 대입도 해보고 했는데 현장에서는 초은이가 이래서 우는 거야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그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감독님께서 어떤 힌트나 이래서 우는 거야하는 얘기는 없으셨나요?

이랑서 배우

감독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말씀해 주시죠. "내 생각에는 초은이가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라고 얘기를 해 주시죠. 그러면 저도 "그렇죠"라고 답을 한 후 왜 힘들었을까를 생각 해보는 거죠. 정말 힘들지 않았을까요? 어떤 연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공장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었을 것 같고, 많은 나이도 아니었고, 본인만의 사정이 있었을 테고. 왜 힘든 일을 하는데 그것을 버티고 괜찮아라고 해서 더욱 힘든 거죠. 그렇게 혼자 버티다 보니까 더 힘든 게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구석에서 혼자 울고 싶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사실 그 장면은 기영과 초은을 이어주는 데 중요한 거잖아요. 왜냐하면 유일하게 우는 모습을 기영이 보게 되고, 나중에 대사로도 나오지 않습니까. "울다가 웃으면…" 우는 장면이 두 캐릭터를 붙이는 데 중요한 첫 번째 본드 역할을 하는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거든요.

이랑서 배우

맞습니다. 저도 공감하는 게 저는 초은이가 기영을 발견해 나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장면에서 기영이가 초은을 먼저 발견을 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순간에 기영은 감독님의 말을 빌리면 초은에 대해서 한 면만 보고 오해를 했을 수 있는 순간이지만 어쨌든 하나의 발견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상용 평론가

그러게요. 그렇게 서로 힘들게 발견했으면 쫄면을 먹었어야 했는데…(웃음)

 

관객4

질문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길호가 비단 이불에 누울 때랑, 한 집에서 도둑질을 할 때 길호의 심장 소리 사운드를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맞는지 궁금합니다. 두 번째는 기영의 집에서 방 한쪽에서 이불 꺼내는 방은 그 어머님의 물건이 있는 방으로 보이는데 물건을 치우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태훈 감독

그 집 자체가 사실은 어머니 소유였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집을 묘사할 때도 어머니의 부재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생각을 했고, 어머니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더라도 어머니라는 존재의 힘이랄까, 어머니가 남겨주신 세상을 살아가는, 외롭게 살아가지만 버티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묘사의 방식으로 방을 치우지는 못했다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심장 소리 같은 경우는 저는 이제 영화 작업을 할 때 스텝들과 함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나간다는 게 영화를 만드는 중요한 이유인데, 후반 작업 과정에서 등장했습니다. 이 영화가 아이들의 비행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을 최소한으로 해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아이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까를 두고 저희끼리 고민하다가 사운드 감독님께 심정을 체험할 수 있게끔 하면 어떨까라는 고민에 이르렀고, 심장 박동소리를 넣어보면 어떨까라고 했는데, 음악 감독님께서 그러면 나중에 길호가 다리 아래에서 돌아오는 장면에서 베이스 음을 사용하면 마치 그 심장 소리처럼 들리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 소리를 통해 관객들에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를 좀 전달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터뷰 이상용 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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