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th JIFF] '마지막 도시' 기억과 경험이 한 점으로 수렴하다
[22th JIFF] '마지막 도시' 기억과 경험이 한 점으로 수렴하다
  • 이지영
  • 승인 2021.05.0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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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의 기억과 경험을 중첩하는 유토피아적 사고 실험"
ⓒ 전주국제영화제
ⓒ Filmgalerie 451=전주국제영화제

유토피아적 사고 실험

하인츠 에이미홀츠 감독의 <마지막 도시>의 오프닝은 아래와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꿈에서 한 도시가 위치를 계속 바꾸는 바람에 그 도시의 실제 위치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난 가능한 한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잠을 자며 꿈속에서 그 도시의 좌표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꿈에서 본인의 역할을 너무 많이 바꿔서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여기서 '나'는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가?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면, 고고학자와 무기 설계가가 대화를 한다는 설명이 나와 있을 뿐, 자세한 정황은 나와 있지 않다. 이들은 전생에 영화감독과 정신분석의로 만났다고 한다. 그다음 고고학자는 다시 선잠에 들고, 갑자기 침대에 누워있는 아시아계 남자와 함께 깨어나서 그와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같은 기억을 서로 거울처럼 비추면서 옛 기억을 반추하는 게임을 진행한다. 아시아계 청년은 베를린에서 또 다른 인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다른 도시에서 또 다른 인물로 태어나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혹자는 이렇게 거울처럼 서로를 반사하는 인물들이 누군가의 꿈속 인물들은 아닐지, 특히 현생에서 정신상담을 받고 있는 영화감독 혼자만의 사유인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도시>는 한 도시의 생존을 그린 디스토피아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베르셰바, 아테네, 베를린, 홍콩, 상파울루까지 각 문화권의 특성을 지닌 도시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먼 미래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처럼 폐허가 된 것도 아니고 평소와 같이 건재하다. 오히려 특이할 만한 점은 시공을 초월해 다중으로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철학을 전공한 감독답게, 전쟁과 대량 살상 무기, 전범국가의 부채, 인종차별, 종교, 젠더, 기술과 우주론까지, 현시대의 굵직한 토론 주제들이 인물들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표현되고 있으며 때로 아주 급진적인 주장도 제기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주장은 마치 온화한 설교 말씀처럼 포교되고 청자는 그것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잘 새긴다. 영화 내내 몇 도 정도 기울어져 보이는 카메라 앵글은, 이 영화가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이 되고, 터부가 만고의 진리가 되도록 세상을 비틀어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 전주국제영화제
ⓒ Filmgalerie 451=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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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캐릭터들은 고유의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 서로의 입장이 되어 보기도 한다. 고유한 정체성이 뒤섞여가는 과정에서 도시들 간의 이질성은 조금씩 중화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이처럼 에이미홀츠 감독에게 <마지막 도시>가 생성되는 과정은 모든 도시들이 하나씩 소거되는 방식이 아니라 도시들을 중첩하고 한 데 융화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후반부 상파울우 커플의 대화 중, '팬케이크 괴물의 비유'에서 이미지로 나타난다. 커플 여자의 말에 따르면 팬케이크 괴물은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키면서 그 안에 담고 있던 기억과 경험이 한 데로 합쳐진다고 한다. 그렇게 괴물의 개체 수는 점차 줄어들고 단 하나의 팬케이크가 남아, 그는 영원불변하고 영속적인 존재가 된다. 마지막 도시란 그렇게 최종적으로 남아있는 영속적인 괴물이며, 지표를 알 수 없는 꿈속의 공간이다.

자아와 타아의 기억이 서로 전복되고, 도시와 도시가 합쳐질 때 비로소 인종과 시대를 초월하는 '역지사지'가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몸과 태어난 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과연 자신과 다른 시대에서 다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이의 입장을 상대가 느끼는 그대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백인 최상류층 남성은, 차상위 계층으로 살아가는 아시아 여성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여성은 흑인 게이 남성의 삶을 마치 자신의 삶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헤테로섹슈얼 어머니는 호모섹슈얼 자식을, 규범적인 인간은 금기를 깨는 다른 종류의 인간을 서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 불가능성과 몰이해로부터 차별과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영화는 우리의 철학적인 사유가 이런 폭력, 나아가 대규모 살상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지 되묻는다.

 

ⓒ 전주국제영화제
ⓒ Filmgalerie 451=전주국제영화제

고고학자가 아시아계 청년과 한 침대에서 같이 깨어났던 아까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이들은 둘 다 '게이공원에서 살인사건 목격 후 이 문신을 했다'고 말한다. 청년이 꿈속의 인물인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으며, 게이 공원에서 죽음을 맞은 장본인이 누군가의 꿈에 등장한 것일 수도 있다. 문신은 이러한 내용이다.

철학자는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만 해석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혐오와 폭력의 장면은 목격자들의 무의식 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위의 말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음을, 철학적 사유는 단지 이것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을 촉구해야 한다는 내면의 외침을 반영한다. 감독이 만들어낸 팬케이크의 사고 실험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적 금기를 어기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진입해보기도 하고, 전범국의 상대화 논리를 이해해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다다를 점은 각자가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별다를 것이 없는 그저 인간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영화는 지구적 차원으로, 또 우주적 차원으로 논의를 확대한다. 이혼한 두 커플은 우주 저 너머에 있을 지도 모르는 지적 생명체가 우리와 같길 바래야 하는지(소통하고자 하는 욕구), 다르기를 바래야 하는지(정복욕구) 토론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결국 "저 위에 누가 있든, 행복한 결말은 우리 앞에 있어."라고 외치며 서로의 공통점을 재발견하고 재결합한다는 심플하고도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된다. 영화의 사유는 개인 기억으로부터 타지역, 문화, 민족, 인종, 다른 은하계까지 확장하고 다시 그 시선은 자신 개인에게로, 바로 옆의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얼마 가지 않아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 <마지막 도시>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문제들을 고발하고, 윤리적 각성과 행동을 촉구하기 위한 영화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말미에 공원(아마도 게이공원을 투영한 상상도일 것이다)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장면이나, 인물들이 갑작스럽게 당하는 사고는 되려 허망한 정서를 담고 있다. 어쩌면 영화는 마지막 도시의 유토피아적인 특정, 인간들이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유한한 이 시간을 쓸쓸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영화 '마지막 도시' 포스터
ⓒ Filmgalerie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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