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영화의 '계급성'에 관하여
봉준호 영화의 '계급성'에 관하여
  • 이상용
  • 승인 2025.03.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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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사는 남자의 계급은 무엇인가"
봉준호 <미키 17> 특집
여전히 봉준호적인 '미키 17'
봉준호 영화의 '계급성'에 관하여

 

봉준호 감독의 <미키17>(2025)은 가까운 미래인 2054년에 가장 하층민이라 할 수 있는 익스펜더블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의 전작에서도 이러한 계급성은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처럼 전면적인 경우는 드물다. 가령 <괴물>(2006), <마더>(2009), <옥자>(2017)와 같이 두 글자 제목의 영화들 속에서 실질적인 사건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전작 <기생충>(2019)에서 이러한 방식을 잘 살펴볼 수 있다. 하층민으로 설정된 기우의 가족은 박 사장의 집을 하나씩 점령해 간다. 박 사장의 가족 모두가 캠핑을 떠나고, 박 사장의 집에서 술과 목욕과 정원을 즐기며 행복한 하루를 보낸 저녁에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 봉준호의 영화 혹은 영화 제목은 직접적이기보다는 매개적이거나 관계적이다. 그런데, <미키 17>은 시종일관 버려진, 낙오된, 겹쳐진 미키를 따라간다. 그것은 할리우드로의 진입에서 일어난 단순화일까, 변화의 추구일까 아니면 우연의 결과일까. 이 글은 봉준호 영화에 등장하는 계급성을 중심으로, 봉준호가 걸어온 길과 <미키 17>에서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계급성을 화두로 단순하게 풀어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 영화 <기생충>

1.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

<기생충>(2019)에서 기우네 가족은 박 사장의 집에 하나둘씩 취직을 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기우의 계획이라 할 수 있는 사기 행각을 통해 박 사장의 집을 점령하는 것이다. 막내의 생일을 맞이하여 박 사장의 가족이 캠핑을 떠나고, 남궁현자의 저택은 드디어 기우의 가족이 차지한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잘 짜여진 코미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가족 사기극이자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계급적 대립 구도를 제시하는 정도다.

그런데 쫓겨난 가정부 문광이 초인종을 누르며 다시 등장한다. 황급히 들어온 그녀가 문을 열고 안내하는 곳(그것은 기우의 가족에게 안내하는 동시에 이 영화의 비밀을 관객에게 안내하는 순간이다)은 저택의 지하실로 통하는 길이었다. 거기 ―불어로 그곳 혹은 거기는 là-bas로 표기된다. 대부분의 봉준호 영화는 '라바'의 영화다. <기생충>의 지하실이 라바라면, 이번 영화에서는 얼음 행성 니플하임은 프린트가 폭파되고, 새로운 인류가 정착하는 라바의 영화로 끝이 난다. 그것은 <설국열차>(2013)에서도 마찬가지다. 1년간 순환하는 기차의 폐쇄성을 벗어나 기차 밖의 '라바'로 끝나는 영화다― 에는 문광의 남편이자 <기생충>의 가장 밑바닥 계급인 근세가 머물고 있었다. 이 부부는 기우의 가족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 집에 기생하는 계급임이 드러난다.

이때부터 영화의 구도는 휘어진다. 박 사장 대 기택(혹은 박 사장의 가족 대 기택의 가족)의 대결인 줄 알았던 대결의 구도는 기우의 가족과 근세 가족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으로 전환된다. 영화는 아이러니를 동반한다.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의 대결인 줄 알았는데, 근세의 등장으로 인해 하층민 간의 대결로 전환되는 셈이다. 과연 승리한 하층민 가족이 온전히 남궁현자의 저택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의 전쟁에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를까. 

 

ⓒ 영화 <마더>

결국, 문광의 죽음을 시작으로 복수에 나선 근세에 의해 기정이 칼에 찔리고, 이를 본 충숙의 손에 근세가 죽음을 맞이한다. 대낮의 정원 연쇄살인은 하층민 계급의 상처뿐인 영광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췄더라면 지상낙원으로 오르기를 꿈꾸는 두 하층민 가족이 박터지게 대결을 펼치다가 파멸하는 이야기로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충분히 괜찮은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계급 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밑바닥에서 치고받고 싸우다가 파멸하는 하층민의 비극적 순환의 이야기.

가장 미묘하고 정교한 영화인 <마더>에서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약재상을 하는 혜자가 아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탐정을 자처한다. 그녀는 이 마을의 비밀을 폭로하는 인물이다. 쌀집 소녀로 불렸던 피해자 문아정은 동네 남성들에게 성적 착취를 당하는 계급이었고, 혜자는 경찰서를 나오며 마주친 고물상 노인에게 천 원을 주고 우산을 샀지만, 끝내 그로부터 아들 도준의 살해 현장에 대한 증언을 듣고 살해를 하고, 방화를 저지른다. 진실을 둘러싼 하층민들 간의 전쟁에서 모성이라는 독특한 요소가 개입하면서 지배계급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전쟁으로 폐쇄적인 순환을 한다. 여기서 문아정-혜자-고물상 노인은 서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의 형상을 띤다.

그런데 결말에 이르러 봉준호 감독은 한 가지를 더 얹는다. 경찰은 도준을 대신해 새로운 가해자로 종팔을 지목한다. 문아정을 좋아했던 종팔은 다운증후군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혜자의 말을 빌자면 엄마 없는 존재다. 그것은 계급 아래의 계급, 가장 밑바닥을 지칭하면서, 이 모든 시건을 뒤집어쓴다. <마더>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잠깐 언급되었던 가장 밑바닥의 존재를 드러난다. 봉준호 감독은 이 존재성의 결핍으로 "엄마"를 끄집어낸다(그런 점에서 가장 한국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기생충>의 정원의 살육전에서도 화살은 엉뚱하게 날아간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기택에 의해 갑자기 박 사장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살육전은 끝이 난다. 그것은 본래의 계급 대결로의 회귀일까. 아니면 근세의 시체를 들어 올리며 코를 쥐는, 선을 넘는 냄새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던 기택(송강호)을 자극하여 근세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며 칼을 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냄새는 과연 이토록 강력한 계급적 동질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화학적 연대라는 새로운 기반을 이룰 수 있는 일일까.

 

ⓒ 영화 <기생충>

<기생충>은 <마더>가 계급 전쟁의 현실에서 한국 사회의 중요하게 계급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계급 상승의 열망은 부모 혹은 엄마의 과잉된 욕망의 결과로 한국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모성의 문제를, 냄새라는 것으로 추상화한다. 냄새는 희미하다. 동시에 <기생충>의 마지막에서 작동하듯이 계급 간의 동질성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종팔을 향해 혜자가 던지는 "넌 엄마 없니?"와 유사한 것일 수 있다. 실상 오늘날의 계급성은 점점 희미해지거나 희미해짐을 가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여전히 마르크시즘의 계급론을 반복하는 테제들이 있다. 그것은 이 계급성은 여전히 강력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리 때문이 아니라 트럼프의 재등장이 명징하게 보여주듯 이 세계는 급격한 보수성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수십만의 이민자를 막는 정책에 대해 환영하는 수많은 댓글들은, 우리 시대를 둘러싼 희박해져만 간다고 여겼던 계급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정치성과 만나며 뚜렷해지는 시기임을 목도하게 된다.

계급의 차이는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단단해진다. 그 결과, <기생충>의 지하실에는 죽어 버린 근세를 대신하여 기택이 머문다. 지하실을 차지하는 것은, 여전히 피지배계급이며, 그의 존재를 바뀐 독일인 집주인은 알지 못한다. 주인은 알지 못하지만, 관객은 알고 있는 이 현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만들어 내는 비극이다. 박 사장은 죽기 직전까지도 근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집을 차지하려고 노골적으로 들이민 것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박 사장의 아내가 들여온 '믿음의 벨트'라는 것은 허상인 동시에 계급전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박 사장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부르주아의 공포를 드러낸다. 언젠가 선을 넘어 이들이 칼을 들이밀 것이라는 공포.

하지만, 대다수 관객의 입장에서 박 사장의 공포는 크지 않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 남게 되는 더 큰 공포는 환한 대낮에 남궁현자의 저택에 머무를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의 공포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있다가 굶주림에 움킨 배를 쥐고 몰래 냉장고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 영화 속에 등장하듯이 한낮의 정원에 머물 수 있었던 순간은 주인집 사람들이 모두 외출을 나갔거나 클래식이 흐르는 한낮의 정원에 살육전을 벌이기 위해서나 겨우 등장할 수 있다는, 이때 아무도 근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럼에도 많은 한국인들은 자신의 계급성을 받아들이는데 희미하다).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한낮의 정원을 누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민 기우는 새로운 계획, 근본적인 계획을 또다시 세운다. 실소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계급 전쟁을 위한 계획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현실에서, 이러한 계획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그것은 로또의 꿈이며, 비트코인의 욕망이며, 주식 개미의 지속성의 근원이다. <기생충>은 계급 전쟁의 구도와 변화를 통해 기우의 새로운 계획 혹은 근원적 계획의 허상에 이른다.  

 

2. 연대하는 하층민들

물론, 봉준호의 영화가 밑바닥 계급들의 전쟁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설국열차>(2013)에 등장하듯이 꼬리 칸의 사람들은 치욕스러운 세월을 견디고, 머리 칸을 차지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나아간다. 이때의 계획은 역사적이며, 이들의 연대는 단단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론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계획이 지니고 있었던 어리석음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의 순간에는 확실한 쾌감이 있다.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 소년 "첸"의 모습처럼 말이다. 

<괴물>에서 한강의 괴물과 싸우는 것도 공권력이나 군인이 아니다. 현서를 찾고자 하는 한강 매점을 운영하는 한 가족이다. 이들을 돕는 유일한 캐릭터는 현서의 삼촌 남일(박해일)을 도와 화염볌을 제조하는 거리의 노숙자다. 그리고, 현서는 끝내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를 대신하여 구원하는 것은 현서가 돌보던 거리의 아이 세주다. <옥자>의 주인공 미자는 동물해방전선과 연대한다. 이들은 슈퍼 돼지를 구한다는 목적아래 연대한다. 계급적 연대와는 다른 결이지만, 미자를 돕는 동물해방전선의 활약은 영화의 에필로그로 이어진다(봉준호 영화에서 에필로그로는 현재까지 유일하다). 그것은 도살장에 남겨둔 수많은 슈퍼돼지를 구해야 한다는 연대의 희망을 담고 있는 해결책이다.

하지만 여전히 연대는 불안을 안고 있다. <설국열차>의 커티스는 엔진실의 윌포드를 만난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꼬리 칸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희생한다. 그런데 새로운 상황이 폭로된다. 하나는 윌포드와의 대화 중에 알게 되는 길리엄의 정체다. 커티스 이전에 꼬리 칸의 지도자였던 길리엄은 윌포드와 내통을 해 왔으며, 그를 도와 기차의 인구를 조절하고 있었다. 꼬리 칸의 지도자이든, 기차의 지도자이든 인구가 조절되어야 모두가 살 수 있다는 폐쇄적 공동체성에 동의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전의 역사에서 길리엄이 혁명을 일으키도록 도운 것은 기차 안의 인구 조정을 위한 방책에 동참하기 위한 전략이었고, 결국에는 모두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혁명이었다. 윌포드가 커티스를 칭찬하면서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는 것은 이를 극복하고 엔진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이러한 폭로를 통해 머리 칸이나 꼬리 칸이나 서로 공생 혹은 공조하고 있었다는 연대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허상의 폭로를 보여주는 영화들은 낯설지 않다. 1970년대 베르톨루치의 정치 영화들은 한결같이 이 점을 다루고 있었는데, 보르헤스의 원작을 옮긴 <거미의 계략>(1970)은 역사의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사실은 파시스트였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으며, <순응주의자>(1970(는 시대에 맞춰 파시스트를 살다가 배신해 버리는 한 남자의 인생을 풍자하고 있다. 역사적 현실과 영화의 상징 속에서 영웅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배신자인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음을 상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르헤스의 소설 제목인 "영웅과 배신자에 관한 논고"는 고스란히 <설국열차>의 영웅이 보여주는 허상을 폭로하는 이야기가 된다.

 

ⓒ 영화 <설국열차>

<설국열차>에서 세계의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 주목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송강호'가 연기하는 '남궁민수'다. 그것은 <설국열차>의 두 번째 차원의 폭로다. 크로놀을 모으며 커티스 일행과 함께 진격한 남궁민수는 엔진실 앞에서 크로놀을 터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요나와 유사하게 남궁민수는 폐쇄적 세계의 진실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엔진실 앞에서 커티스와 다투며 남궁민수가 그에게 주장하는 것은 엔진실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달리는 기관차를 멈추고 기차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커티스는 남궁민수가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가 크로놀에 중독된 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세계에 갇혀 있던 혁명가는 커티스였다. 길리엄 노인에 관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폐쇄적인 세계 안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다. 자신의 목표는 대다수 꼬리 칸의 사람들처럼 앞으로 향해 지배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윌포드를 대체하는 순간은 제2의 윌포드, 즉 후계자가 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커티스는 윌포드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궁민수의 제안을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하면서 현재의 자리를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순간, 이 기차가 영원할 수 없음을(그것은 이 세계의 폐쇄성이 영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난다. 꼬리칸에서 잡혀간 아이들이 기차의 부품을 대신하여 사용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아이의 존재는 진실의 각성이 되고, 성냥을 건네달라는 요나의 요청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이 기차의 타락은 폭파시켜야 마땅한 것이 되는 셈이다. 계급의 전쟁은 진실의 투쟁이 되고, 어린아이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커티스의 과거 혹은 죄의식은 끝내 폭발의 도화선이 된다.

진정한 혁명은 계급의 폐쇄성을, 순환하는 질서를 폭파하는 것이다. 기차가 멈추고, 살아남은 생존자는 요나와 일찌감치 엔진실의 부속으로 활용되기 위해 잡혀간 어린 소년 '티미'였다. 이 지점에서 <기생충>의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만일, 근세가 등장하고 기우의 가족과 연대하는 이야기였다면, 그리하여 박 사장의 집을 두 집안, 즉 멀티플이 공평하게 양분하는 이야기였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봉준호는 이 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미키 17>의 사건은 미키 17이 18을 발견하면서 멀티플이 되었음을 알게 되고, 이로 인해 갈등이 시작되는 이야기인데(계곡에서 떨어진 미키 17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기나긴 설정에 불과하다. 그 전개는 <기생충>의 기우 가족 스토리처럼 긴박감이 크지는 않다. 다만, 여전히 유머러스하게 미키 17로 살아온 이력을 보여준다), 멀티플은 사건의 발화점이 된다. 마치 <기생충>의 두 가족처럼 이들은 하나만이 생존하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미키 17과 미키 18은 크리퍼의 꼬리를 가져오라는 미션을 안고, 폭탄을 짊어진 채 밖으로 내쳐진다. 이곳에서 두 미키는 합심한다. 그것은 <기생충>이 가지 못했던 길이며, <설국열차>에서 낭궁민수와 커티스가 뒤늦게 연대했던 길이다. 익스펜더블을 통한 연대는 크리퍼 무리의 한가운데서 전개된다. <기생충>은 대만 카스테라 사업의 실패를 지닌 익스펜더블의 만남을 그린 이야기였지만 서로의 가족을 우연이든 필연이든 살해한다. 그에 반해 니플하임 행성에 던져진 익스펜더블은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성격으로 마샬을 향한 적대적 목표를 수행한다. 그것은 봉준호의 계급 전쟁에서 가장 새로운 측면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크리퍼의 존재감이다. 크리퍼가 몰려온 것은 종족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에서 크리퍼의 계급성 혹은 원주민성이 부각된다. 크리퍼는 적대적 전쟁을 일으키기에 너무 순할 뿐만 아니라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말미에 미키 17이 찾아가 물어보았듯이 이들이 외치는 함성이 뇌를 폭파시킬 것이라는 것은 위협을 가장한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폭탄을 안고 크리퍼들 한 가운데 서 있는 멀티플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크리퍼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무도 위협당하지 않는다. 심지어 멀피플이 안고 있는 폭탄조차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이러한 위협성과 해결책을 찾는 과정의 아이러니함이 단순하게 처리되기 때문일 것이다.  

 

ⓒ 영화 <미키 17>

3. <미키 17>의 새로운 계급 구도

미키 17과 미키 18이 마주했을 때, 미키 17은 법적인 문제를 눈감을 수 있다면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살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분명 <기생충>이 가 볼 만한 길이었다. 사실, 원작 소설에서는 이 점이 크게 문제가 된다. 그렇지 않아도 음식이 부족한 현실에서 멀티플이 일으키는 이슈 중의 하나는 먹을 것을 나눠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이 점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기생충>이라면 예민하게 건드렸을 법한 이 상황을 넘긴 채 크리퍼와의 소통을 목표로 하는 미키 17의 방식과 마샬을 암살하려고 했고, 끝내 그와 자폭을 선택하는 미키 18의 행동적 혁명가의 모습을 통해 닮았지만 서로 다른 미키가 수행하는 역할 분담을 보여준다. 이것은 일종의 근세와 기택의 연합 전술이다.

그런 점에서 <미키 17>은 확실히 새로운 계급전쟁과 연대의 방식을 보여준다. 심지어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이 연대는 성공한다. 커티스와 남궁민수의 연대는 겨우 기차를 폭파시켰지만 이들은 전 세대의 책임을 안고 윌포드와 함께 사라져야 하는 인물들에 지나지 않았고, <옥자>의 미자와 동물해방전선의 연대는 각자의 공간에서 마무리 되어야 하는 현실이었다. 미자는 산골에서 옥자와 함께, 동물해방전선은 감옥에서 나와 새로운 시위를 벌이며 각자의 방식으로만 존재했다. 그런데, <미키 17>은 18의 숭고한 희생과 17의 소통 능력으로 인해 새로운 길을 연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새로운 사회의 리더가 되는 것은 미키가 아니라 연인 나샤다. 그녀가 계급적 연대에 키워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영화 속에서 꽤나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미키 17과 18이 등장했을 때 나샤는 옥시포졸에 취한 탓도 있지만 두 남자를 공평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적 상상력이 아니다. 나샤가 니플하임의 새로운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은 하층민 중의 하층민인 익스펜더블을 받아들인 최초의 정직원이었고, 그녀는 미키 1에서부터 18에 이르는 모든 미키들과 사랑을 나누며 포용한 인물이었다. 나샤를 통해 봉준호 영화의 계급적 환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생겨난다. 모든 미키를 사랑했던 그녀야말로, 새로운 개척 행성에 새로운 질서를 불어넣어 줄 인물이다. 새로운 질서는 미키의 역할도, 간사한 친구 티모의 역할도 아니다. 오직 순수하게 미키를 인간으로 대했던 나샤만이 새로운 길의 리더가 된다.

나샤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잠깐 등장하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미키 17을 유혹했던 카이도 문제적 인물이다. 그녀는 마샬 부부에 의해 자궁의 완전함을 칭송받으며 우생학적 선택의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성정체성의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죽은 제니퍼와 우정 이상의 연인 관계로 짐작되는데(나중에 새로운 연인이 카이에게 기대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녀의 캐릭터는 나샤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개척지의 주요한 일원의 자격이 부여된다. 

 

나샤와 카이의 캐릭터는 68혁명을 전후로 시기에 등장한 성혁명(빌헬름 라이히에게 영향을 받은 동유럽의 마샹 듀카에프나 일련의 감독들)을 주제나 소재로 한 작품의 영향력을 엿보게 하는데, 성정치학이라고 명명된 이 작품들은 결국 새로운 질서와 연대를 희망하는 20세기 한 때의 비전이었다.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1973)를 비롯한 일련의 영화를 아는 관객이라면, 좀 더 세련된 어투로 이러한 지향점들이 영화에 어떻게 드리워져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봉준호의 <미키 17>은 2054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지만, 자신의 이룩한 계급적 세계관들을 변형하면서 변화를 향해 치닫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SF 장르를 통해 극단적 신자본주의의 미래 사회에서 소비가 되는 것은 바로 "죽음"임을 보여준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성을 소비했고, 신체의 일부를 팔아치웠지만 결단코 죽음은 교환되거나 소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미키 17>은 죽음이 전면적으로 소비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죽음의 소비가 가능한 것은 미래의 테크놀로지 덕분이다. 그 덕분에 아무 능력이 없는 미키는 개척지 우주비행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지만, 그의 지위는 맨 아래에 놓인다. 우주선 밖으로 나가 손목이 잘려나가도, 방사능 노출에 피폭을 당해도, 사람들은 소비의 메커니즘에 놓인 미키의 존재를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는 미키 17의 회상은 이러한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할애된 장면들이다. 만일 이 점을 설득할 수 없다면, 연대하는 미키 17과 18의 사연을 충분히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프린트 되는 현실은 미래의 하층민 계급의 인간을 최대한 가벼운 존재로 상정한다. 그가 새롭게 프린트 되는 동안 연구실의 사람들은 지루하다는 듯, 오락거리와 소일거리를 찾는다. 죽음의 재생은 결코 신중한 일이 아니다. 프린트 중 실수로 코드가 뽑혀도 다시 꼽으면 그만이다. 이처럼 소비의 존재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봉준호 영화의 계급성이 변화를 포용한다. 종이 조각 한 장처럼 묘사되는(프린트 되는 한 장면에서 미키는 용지처럼 흘러내린다) 새로운 미키가 과연 전쟁의 중심에 서서, 세계의 위기 한 가운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상상한다. 그렇게 본다면, <미키 17>은 확실히 만만한 영화가 아니다. 가장 하찮은 존재가 독재자를 살해하고, 원주민과 소통하는 두 가지 과제를 멀티플하게 해결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 낙관적인 상상력은 여태까지의 봉준호의 영화 속에서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봉준호 영화의 사회학적인 성찰의 정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래 사회를 바탕으로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을 내놓는다.

 

ⓒ 영화 <미키 17>

죽어야 사는 남자, 아무리 죽어도 소진되는 않는 이 존재의 가벼움은 끝내 자신의 죽음 혹은 생명을 재생하는 프린트를 폭발할 수 있는 단추를 얻기에 이른다. 그것은 마샬의 버튼에 의해 죽을 뻔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프린트를 날려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이 순간  미키 17은 비로소 "비키 반스"가 된다. 그것은 '존재의 무거움을 얻으며, 죽음의 가벼움을 날려버리고, 단 한 번의 생애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고전적인 존재의 질문으로 전환된다. 결국, 미키가 벌인 계급 전쟁은 존재의 무거움을 얻기 위한 반복된 죽음의 여정이었다. 우리는 낭굼현자의 저택에 살 수도 있고, 엔진실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으며, 세상의 모든 동물을 해방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거움을 새롭게 획득할 수 없다면(기존의 무거움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 가운데 책임과 무거움이어야만 한다. 봉준호의 영화는 계급전쟁을 통해 이를 뚜렷히 보여준다), 모든 것은 희미해질 수 있다. 배신과 음모는 넘쳐나고, 연대의 뒷편은 사악하다. 그 가운데, 미키는 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세계를 바꾸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지금까지 봉준호의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아이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였다. 거기에는 일정한 성공과 실패를 오고 갔다. 그런데, <미키 17>은 아이가 세상을 직접 구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제 막 태어난 미키야말로 순수성과 야성과 지성으로 매번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영원회귀할 수 있는) 아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적 통찰 혹은 비유의 저서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세계관에 따르면 존재의 회귀는 낙타, 사자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르러 어린아이의 단계에 이른다. 낙타가 노동계급인지, 사자가 숭고한 영웅인지를 설명해 볼 수 있겠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도달하고 싶은 영원회귀(반복되는 죽음)에서 도달하고 싶은 길은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이 순수성의 파토스는 기존의 계급을 무화시키고, 유희성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봉준호의 <미키 17>은 SF가 아니라, '이 천진함이 미래 사회에 도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유희의 장르 영화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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