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th BIFF]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를 꿈꾸는 일
[31th BIFF]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를 꿈꾸는 일
  • 김민세
  • 승인 2026.10.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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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한국 부문 특집 ④ | 신동민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

은우(심은우), 승우(강승우), 윤영(조윤영)은 자살 사별자 자조 모임에서 만난 이들이다. 이들은 모임 자리를 통해 가까운 사람을 잃은 기억을 공유하고, 이후에도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이들이 모임 바깥에서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 또한 따라간다. 은우는 어머니와 함께 결혼한 남동생의 집을 찾아가고, 영화감독으로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연인과 동거 중인 승우는 아버지의 자살 소식을 밝히지 못한 채 고민한다. 윤영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고 배우로서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

신동민 감독의 영화에는 항상 죽음이 어른거렸지만, 세 번째 장편인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에서 유독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은 에로스의 부재다. 가령, 그의 두 번째 장편 <당신으로부터>(2023)에서 2부의 승주는 연인과 한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곳에 어떤 에로스적인 정서가 발견되진 않는다. 대신 1부의 민주와 2부의 승주 두 여성이 구조상 기묘한 위치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다.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에서 승우가 은우와 윤영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장면은 그런 생각을 이어가게 만든다. 한 남성이 두 여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상황에는 어쩔 수 없이 에로스적인 설정이 개입하지만, 그 안에서 세 남녀는 철저히 서로의 선을 지킨다. 이후에 승우의 연인이 집으로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상 초반부의 장면, 세 남녀가 함께 한탄강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도 이들의 관계에 에로스는 끼어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상황 안에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데 집중한다. 여기서 에로스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식물적인 태도를 넘어선다. 오히려 이 설정이 보여주는 것은 죽음의 경험이 더 이상의 사랑을 가능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감각에 가깝다. 세 번째 장편으로 마주한 새로운 질문. 이들은 왜 사랑의 가능성 앞에서 망설이고 태연해지는가?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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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신동민 감독은 앞 선 두 장편에서 본인의 실제 어머니를 비전문 배우로 기용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에 관한 내밀한 사적 기억을 영화적 질료로 활용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자기참조적인 그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이야기가 지닌 사실성보다 표현 방식,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어머니와의 거리감을 수시로 변경하고 조정한다는 데 있다. 3부 구조를 지닌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감독 본인의 어머니에 대한 단편 세 편을 이어붙인 결과다. 1부에는 실제 어머니와 아들 역의 전문 배우가 등장하고, 2부에는 어머니 역의 배우와 아들 역의 배우가 각각 존재하며, 3부에서는 아들 역의 배우가 사라지고 실제 어머니만 등장한다. 각 단편의 제작은 2부, 1부, 3부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따져보자면 처음에는 가장 극영화적인 세팅 안에서 영화를 완성하고, 다음에는 어머니의 자리에 실제 어머니를 데려다 놓았으며, 마지막에는 아들 역의 배우를 지워버리고 자신이 다큐멘터리적 카메라의 위치에 선 것이다.

신동민 감독은 비전문 배우를 활용하는 제작 방식에 있어서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으며, 아들 역의 신정웅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 역시 ‘잘 듣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그가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의 3부 구조 안에서 차례로 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듣는 자의 위치다. 2부에서 1부로의 변화는 신정웅이라는 배우의 몸을 빌려 실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태도이며, 1부에서 3부로의 변화는 아들 역의 배우가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이 카메라를 통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태도다.

<당신으로부터>의 3부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신동민 감독은 어김없이 자신의 실제 어머니를 영화에 등장시키는 동시에 구조에 따라 듣는 사람의 캐릭터와 위치를 조정한다. 1부와 2부에는 아들이 아닌 가상의 딸이 등장한다. 그리고 3부에서는 감독 자신이 아들로서 직접 카메라 앞에 서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연기한다. 다시 말해 <당신으로부터>에는 가상의 딸들을 통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이 직접 카메라 앞으로 나와 어머니를 마주하는 변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모에 관한 가족사 자체가 아니라 실제 어머니와 배우의 배치, 아들 혹은 딸 역의 전문 배우와 감독 자신의 배치를 끊임없이 변경하고 조정하는 방식이다. 그에게 영화란 자신과 주변인의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듣고 기록하며 재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에 가깝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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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달라졌다. 우선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에서 어머니라는 인물의 비중은 축소되었다. 대신 자살 사별자 자조 모임에서 만난 세 명의 남녀가 중심이 된다. 이들은 모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세 사람이 들려주는 사연은 전작부터 봐온 신동민 감독의 가족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다만 그 내용이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함께 영화를 찍었던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유학 시절 함께 지내던 지인의 죽음 등은 느슨하게나마 신동민 감독의 역사, 혹은 지금까지 그의 영화가 그려왔던 역사를 환기한다. 신동민은 세 인물의 몸과 입을 빌려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파편적으로 흩어놓고 픽션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들은 분명 감독의 과거와 경험을 닮아 있지만, 단순한 감독의 분신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감지되는 또 다른 변화는 더 이상 신동민에게 듣기의 대상이 어머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제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신동민은 몇 년 전부터 실제로 자살 사별자 자조 모임의 자리를 만들고 참여해왔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영화적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다. 아마 그 역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타인의 경험을 들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시금 발견한 것은 듣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타인의 이야기가 영화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결국 자신의 사연을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가능성이 아니었을까. 이전까지 타인의 몸을 빌리거나 자신의 몸을 통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는 이제 타인의 몸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발화하게 하고, 그 레이어를 거쳐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듯하다. 그렇기에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은 모순적이게도 감독 자신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가장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영화가 된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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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가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에로스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앞서 세 남녀 사이에 아무런 성적 긴장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소 거친 공상을 통해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에로스의 가능성이 가로막히는 순간을 반복해서 발견할 수 있다. 각각의 연인과 동거 중인 승우와 은우는 결혼을 망설이고 있다. 은우의 남동생은 더 이상 아내와 살 수 없겠다는 속마음을 밝힌다. 윤영은 사랑 고백을 거절한 사람이 자살한 사연을 갖고 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죽음의 경험으로 인해 사랑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사랑이 실패한 자리에 죽음이 찾아오는 일을 겪는다.

신동민 감독의 영화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지난한 가족사 안에서도 결국 함께 살아가는 것, 죽음 이후에도 가족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었다. 다시 말해, 끊어낼 수 없는 가족 관계 앞에서 상처받고 원망하다가도 끝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에서 사랑의 문제는 달라진다. 사랑은 과거로부터 끊어낼 수 없는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가족이 될 가능성을 지닌 미래의 존재를 향한다. 과연 죽음 이후에도 이들은 가족을 이룰 수 있을까? 신동민의 영화에서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이 영화에서 에로스가 가로막히는 지점은 바로 이런 망설임과 맞닿아 있다.

이 문제 앞에서 신동민은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 죽었다고 이야기된 은우의 어머니가 은우와 함께 남동생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어머니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말하다가도, 방문을 열고 남동생의 갓난아이를 바라보다가 무한한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아이의 손을 잡는다. 물론 이 장면은 은우가 촬영한 영화 속 영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신동민은 그 모호한 상상적 장면을 통해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가족이라는 미래를 향한 사랑의 가능성을 불러온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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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은 자신의 가족사를 경유해 모종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안에서 사랑을 발견해 온 감독이 만들어낸 새로운 가족의 탄생 서사다. 승우는 연인에게 아버지의 자살 사별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청혼한다. GV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한 은우는 연인이 준비한 청혼의 현장을 뒤늦게 마주한다. 그를 기다리던 연인은 이미 잠들어 있다. 은우가 웃음을 터뜨리고 묘한 표정으로 바라볼 때도 그는 잠에서 깨지 못한다. 신동민은 그 실패한 청혼의 순간에서조차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꿈꾼다. 어쩌면 그의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시선을 지닌 순간이다.

마지막에는 마치 유언 같은 윤영의 편지가 내레이션으로 흐르고, 세 사람이 함께 산을 오른다. 이 장면은 <당신으로부터>에서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아버지가 묻혀 있던 산을 오르던 수 분간의 롱테이크를 떠올리게 한다. 신동민의 영화에서 함께 산을 오른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자신의 상처와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며 감독 자신의 내밀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순간이다.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의 산행 역시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어떤 작별 인사처럼 다가온다. 앞선 영화에서 신동민은 아버지와 작별하기 위해 어머니와 산에 올랐다. 그러나 그 작별은 아버지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 서사 끝에 마주하는 이번 산행 역시 신동민의 영화가 지금까지 각도를 바꿔가며 반복해 왔던 가족 서사에 대한 작별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 작별은 자신의 지난 영화를 애도하고 껴안는 일이다.

그렇기에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은 그의 가장 새로운 영화이자,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영화다. 통상적인 에로스가 사라진 자리에서 세 사람은 서로의 상실을 말하고 들으며 친밀해진다. 그들의 관계는 연애나 혈연으로 규정되지 않지만, 오히려 또 다른 방식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사랑과 가족을 상상할 가능성을 연다. 그것은 동시대 한국 영화가 어느새 잃어버린 에로스 너머에서 발견한 새로운 관계성이다.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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