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th BIFF]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 아득한 미래로 보내는 부모의 편지
[31th BIFF]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 아득한 미래로 보내는 부모의 편지
  • 김민세
  • 승인 2026.10.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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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한국 부문 특집 ① | 박송열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

태영(박송열)과 주미(원향라)는 새로운 변화를 겪는다. 주미는 아이를 임신했고, 태영은 대리운전과 가게 운영을 그만 두고 오토바이 배달을 시작했다. 곧 아이가 태어난다.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주미는 육아 일상을 담은 유튜브를 시작한다. 이런 그들을 멈춰 세우는 것은 태영의 작은 오토바이 사고다. 그는 각서를 쓰고 100만 원을 갚겠으니 돈을 마련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박송열 감독과 원향라 프로듀서로 구성된 ‘영화사 사랑하자’의 영화에서 미장센은 언제나 제작 환경,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가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돈에 대한 감각과 깊이 연관한다. 단편을 비롯한 그의 영화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대리기사 일을 하며 지폐를 건네받는 몸짓이고,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은 “당장은 돈이 없다”라는 식의 말이다. 많은 평자가 지적했듯이 박송열과 원향라의 영화는 제작과 배우를 겸하는 2인 체제 아래 있으며, 그 제작 환경은 자동 초점 설정으로부터 축소된 몸짓과 통제된 몸짓을 낳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영화 안에 촬영된 것을 보는 일은 프레임 내외부를 둘러싼 제작 환경을 계속해서 상기하게 만든다. 나아가 박송열의 고유한 발성과 딱딱한 대사 처리 또한 2인 체제 아래서 비전문 배우를 활용해야 하는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그들의 영화를 다큐멘터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큰 오해다. 무엇보다 박송열의 시나리오는 픽션성으로 넘친다. 그들 주위에는 돈을 갚으라고 불쑥 등장하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 맴돈다. 그 뜬금없는 픽션성과 다큐멘터리적 기척이 한데 모이는 과정에서 ‘영화사 사랑하자’의 영화가 지닌 특유의 활력이 발생한다. 박송열과 원향라 부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그 바깥의 존재들은 자본주의의 유령 혹은 타자다. 박송열의 영화는 그 유령들에 맞서고 때로는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이 만든 작은 세계를 뚫고 들어오는 자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들일지가 그들의 영화가 지닌 서스펜스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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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오토바이를 둘러싼 이미지의 불확실성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에서 그 문제는 달라진다. 원향라의 임신으로부터 비롯한 ‘아이’라는 새로운 손님이 그렇다. 그는 기존의 유령이나 타자가 아니며, 픽션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제작 환경에 맞게 몸짓과 음성을 통제할 수 존재 또한 아니다. 박송열과 원향라는 카메라를 설치하고 스스로 정해진 위치에 서서 통제된 몸짓과 음성을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다. 갓난아이는 그러지 못 한다. 아이를 촬영하는 일은 연기 연출의 측면에서 다큐멘터리적 환경의 구획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영화에서 큰 문제다. 그들의 영화는 제한적인 환경 안에 자신의 몸과 목소리를 구겨 넣고 그것을 각자만의 메소드로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근데 아이는 그럴 수 없다.

또 다른 변화 중 하나는 태영이 오토바이 배달을 시작했다는 설정이다. 박송열 감독이 실제로 오토바이 배달로 생계를 이어갔을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전작들에서 봐왔던 대리운전 장면과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의 오토바이 장면은 분명히 다르다. 승용차에는 통상적으로 영화 촬영에 사용하는 카메라를 설치할 수 있다. 하지만 2인 체제의 제작 환경 안에서 오토바이를 그런 방식으로 촬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스마트폰과 블랙박스를 활용한다. 스마트폰은 그의 얼굴을 향하고 블랙박스는 오토바이가 달리고 있는 도로를 향한다. 이 숏/역숏에는 다큐멘터리적 불확실성이 넘쳐흐른다.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비와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그는 스스로의 표정을 통제할 수 없고, 카메라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도로의 풍경을 견디지 못하며 픽셀과 프레임이 무너져 내린다. 극영화적으로 통제된 상황에 카메라를 놓고 촬영하는 기존의 방식은 오토바이에서 유효하지 않다.

아이를 촬영하는 일과 오토바이 배달을 촬영하는 일은 기존 ‘영화사 사랑하자’의 영화가 갖고 있던 촬영과는 다른 방식을 요청한다. 이 두 변화로 둘러싸인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는 전작들과 다른 성질의 미장센을 지닐 수밖에 없다. 영상을 채집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보다 불확실하고 통제될 수 없는 상황 안에서 다큐멘터리적으로 무언가를 채집해야 한다. 이를테면 아이를 촬영할 때는 연기 디렉팅을 하기보다는 원하는 행동을 보여줄 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고, 오토바이 배달 장면을 촬영할 때는 그저 블랙박스를 켜놓고 운전하며 촬영을 지속해야 했을 것이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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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떠올려볼 수 있는 건 박송열이 감독으로 데뷔하기 이전에 동시녹음 기사로 활동한 이력이다. 그는 당시의 활동 덕분에 평소에 많은 소리들을 채집할 수 있었고,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사운드스케이프를 당시 녹음해 두었던 앰비언스 사운드를 활용해 구성했다. (조혜영,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씨네21, 2022.11.09) 어쩌면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에서 그가 푸티지를 다큐멘터리적으로 채집하는 방식은 당시의 앰비언스 사운드의 채집과 활용 방식과 유사해 보인다. 불확실한 것들이 넘실거리는 환경 안에서 이미지 및 사운드를 다큐멘터리적으로 채집하고 이후 자신의 영화에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사랑은 지평선 너머로>의 이런 방법론이 가장 두드러지는 순간은 태영이 사고 책임자에게 다짜고짜 아이의 옹알이 소리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태영은 합의금을 받기 위해 가해자를 따라가는 와중에 돌을 앞둔 아이의 이야기를 꺼내더니 녹음해 둔 옹알이 소리를 들려준다. 그 순간 스크린이 암전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 소리가 흘러나온다. 마치 영화가 더 이상 프레임 안에 무언가를 담을 수 없다는 듯이 스스로 눈을 감을 때.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음성이 영화를 가득 메운다. 이런 소리를 영화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기묘한 순간.

아마 이 옹알이 사운드 또한 감독이 다큐멘터리적으로 채집했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에 삽입할 생각이 없던 사운드를 사후에 입힌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앰비언스 사운드를 채집하듯이 이미지를 수집하던 박송열 감독은 이 순간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 장면은 ‘영화사 사랑하자’의 영화에서 가장 낯선 순간이자 그들의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감흥으로 다가온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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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평선 너머로>에서 아이는 과연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는 것일까. 그 사운드가 증명했듯이 아이의 옹알이는 영원히 해독할 수 없는 언어다. 애초에 이 영화에 아이의 시점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프레임 안의 대상이고, 스스로 무언가를 의식하며 카메라 앞에 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의 몇몇 순간들은 아이의 시선, 혹은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지닌다. 영화는 밤 장면마다 흑백 이미지를 택한다. (이 또한 그들의 영화에서 낯선 순간이다) 그때마다 영화는 뭔가 이상하게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것 같다. 흑백의 선택 또한 그렇거니와 실제로 그 장면들에서 카메라는 인물과 다소 거리를 둔다.

이 거리두기는 또 다른 시점 혹은 시선의 기척을 불러온다. 그것이 보다 두드러지는 장면 중 하나는 주미가 과거 임신 당시의 자신을 돌아보는 흑백 장면이다. 주미와 태영이 함께 바닥에 누워 있다가 주미가 소파 쪽으로 시선을 넘기면, 그 소파에는 입덧 때문에 고생하는 주미가 있다. 그리고 이내 집을 떠돌던 과거의 주미는 상상적으로 떠오르는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본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보고 있고, 과거의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시기의 아이를 본다. 이 시선의 연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것. 과연 이 모든 것을 돌아볼 자는 누구인가? 흑백의 밤을 뚫고 나오는 컬러의 초음파 사진은 끝내 누구의 시선에 닿을 것인가?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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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계속 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는 이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존재의 탄생과 성장을 기록하며 주미의 시선을 경유해 초음파 이미지를 발굴해 낼 때, 이 영화는 그 자체로 미래의 아이를 위한 일종의 편지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제야 흑백 장면의 거리두기를 조금씩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흑백의 밤 장면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는 것은 부부가 아이를 재우는 장면이다. 다시 말해, 그때마다 아이는 잠에 들고 있거나 자고 있다. 그러면 이 흑백의 밤을 아이가 꾸고 있는 꿈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그 거리감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시선이 미래의 아이의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영화의 마지막에 아이는 결국 가족들의 축하를 받는 객체로 남겨진다. 여전히 아이는 프레임 안의 대상이고 주미에 의해 들려 있는 존재다. 그에게는 명확한 시선의 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는 그 아이가 영화를 통해 과거를 돌아볼 미래의 어느 아득한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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