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김종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는 흘러간다"
[INTERVIEW] 김종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는 흘러간다"
  • 김민세
  • 승인 2026.11.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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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낮과 밤은 서로에게>(2026)

오래 기다린 김종관의 신작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2024년에 촬영을 마쳤다고 알려진 이 프로젝트는 그사이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2025)의 제작과 영화제 공개 이후 완성되어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관객을 찾았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카페라는 한 공간을 중심으로 네 편의 로맨스 서사가 펼쳐진다는 면에서 <더 테이블>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에 전작의 제한적인 세팅을 확장해 한 공간 안에서 펼쳐질 수 있는 대화의 장면을 다채롭게 수놓는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김종관의 영화에서 오래 반복되어 온 익숙한 풍경이다. 그의 인물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다가가지만, 동시에 말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비밀을 남긴다. 오히려 그의 영화에서 뇌리에 박히는 순간은 인물이 침묵하고 망설일 때다. 설렘과 긴장, 수치와 난감함이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얼굴. 그리고 그 행간을 채우는 인서트와 풍경들. <낮과 밤은 서로에게> 역시 그 단순한 형식에서 출발한다. 다만 이번에는 하나의 테이블에 머물기보다 카페 공간 곳곳으로 인물과 카메라를 움직이며 만남의 모양을 달리한다. 누군가는 처음 만나고, 누군가는 오래된 관계를 돌아보며, 어떤 대화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어떤 대화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확인한다. 그리고 같은 공간을 거쳐 가는 서로 다른 얼굴과 이야기를 낯선 인물이 꿰뚫는다.

그런 점에서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더 테이블>(2017)의 형식을 다시 꺼내 온 작품인 동시에, 김종관이 오랫동안 만들어온 러브 스토리를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보는 영화처럼 보인다. 어쩌면 김종관의 가장 솔직한 영화일 수도 있는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그의 영화에 펼쳐지는 모든 러브 스토리가 결국은 영화에 대한 사랑 고백일 수도 있다는 감흥으로 다가온다.

“예전부터 고전영화가 가진 대화 장면의 호흡을 좋아했다”라는 그의 말처럼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고전 멜로드라마 영화의 감각을 동시대적으로 번역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고전 영화 감독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 또한 비롯하지만, 자신의 취향을 믿는 데서 오는 결과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그 존경과 애정과 믿음으로 가득하다. 오랜 시간 자신만의 필름메이킹을 이어온 김종관 감독의 영화 사랑을 확인하는 대화를 나눴다.

 

 

© 포토그래퍼 강현후
© 포토그래퍼 강현후

김민세

감독님의 영화 중 가장 멋진 오프닝이다. 카페 곳곳에 놓인 인물들이 각자의 그룹과 대화한다. 1대1로 대화하는 자들, 다수와 수화로 대화하는 자들, 홀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 등. 대화의 풍경이 여러 방식으로 펼쳐지는데, 살아있는 듯한 캐릭터들이 나누는 생경한 대화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통상적인 영화보다는 긴 러닝 타임의 오프닝 시퀀스가 되었는데.

김종관

아무래도 내가 옛날 영화들을 보는 걸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고전 영화들은 오프닝이 길지 않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도 그렇고, 어릴 때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슈퍼맨>의 긴 오프닝을 보면서 설레다가 졸려서 잠들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그런 예열이 될 수 있는 오프닝을 만들고 싶었다. 오프닝은 이 영화가 어떤 영화가 되리라는 컨셉을 앞서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더 테이블>의 오프닝에서 컵 안에 부유하는 찻잎이나 바깥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김민세

해당 오프닝 장면의 연기 연출 방식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직접 쓴 대사를 기반으로 만들었던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접근법이 있었을 것 같다고 예상한다.

김종관

다양한 방식을 택했다. 수어를 쓰는 인물들은 수어로 편하게 이야기하게 하고, 고등학생들은 각자가 관심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도록 유도해서 촬영했다. 배우들이 준비해 온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한 것도 있다. 가령 자신이 화상 입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영화상에 나오진 않지만 사실 그는 보험설계사다. 보험을 팔기 위해 그 앞에 서사를 쌓고 있는 거지. 최종적으로는 편집했지만 그 뒷이야기도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다만 이 오프닝에서는 한 이야기를 길게 보여주기보다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서로 섞이고 흘러가는 것이 중요했다.

김민세

별도의 대사 디렉팅은 없었던 걸까.

김종관

그렇다. 어떤 장면은 인터뷰에 가까웠다. 일본에 가서 택시를 잡는 도중 어떤 남자를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 사실 그 분은 배우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의 사장님이다. 그래서 그분은 실제로 인터뷰를 했다. 친한 사람을 옆에 두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촬영했다. 다큐멘터리적인 장면과 극영화적인 장면이 어우러지는 한 편의 시퀀스를 만들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오프닝에 각각의 장면들은 모두 하루 안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날 동안 일어날 일일 수도 있다. 그런 다채로운 이야기의 풍경을 보여주고 메인 스토리로 넘어가고자 했다.

김민세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와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비슷한 시기에 촬영되었지만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한다. 오프닝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의 오프닝은 서촌이라는 큰 의미로서의 공간적 세팅, 혹은 계절적인 세팅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낮과 밤은 서로에게>의 오프닝은 카페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소개하는 방식이다. 그 차이를 어떻게 인식하나.

김종관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 보다 양식적인 구성일 수밖에 없었다.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는 내가 현장에서 적응하면서 즉흥적으로 연출을 유도할 수 있었는데, <낮과 밤과 서로에게>는 보다 정밀한 구성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카페 공간도 시나리오에 유리한 세팅으로 만들어야 했고, 리허설도 많이 해야 했다. 그리고 적은 예산으로는 공간 내외의 리얼한 상황을 연출하기 어렵지 않나.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는 따로 보조출연자를 두지 않아도 망원렌즈로 원경에 흘러가는 사람들을 포커스 아웃하며 찍을 수 있었다면, <낮과 밤은 서로에게>의 컨셉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카페 공간을 더 리얼하고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김민세

말한 것처럼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가 바나 갤러리 등 실제로 존재하는 로케이션을 쓴 것과 달리, <낮과 밤은 서로에게>의 로케이션은 보다 양식적이다. 서로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김종관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는 실제성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작업이었다. 반면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한 공간에서 모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면에서 다소 낯선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더 많은 사람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했고, 그래서 공간을 활용하고 컨티뉴이티를 조정하는 것에서 정밀한 고민이 필요했다.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김민세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더 테이블>과 컨셉적인 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이때 달라진 점은 더 넓은 공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더 테이블>은 결국 하나의 테이블 안에서 사람이 바뀌고 음료가 바뀌고 시간이 바뀌는 영화였다면, <낮과 밤은 서로에게>의 카페는 애초에 공간 자체가 크고 다채롭다. 바 테이블 같은 공간도 있고, 소파가 놓여있는 공간, 가운데 놓여있는 테이블 공간 등을 오간다. <더 테이블>과는 또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을 것 같다.

김종관

<더 테이블>은 어쩌면 연극적이고 매우 컨셉추얼한 작업이었다. 하루 안에 벌어지는 일이고, 오전에서 오후, 해 질 녘, 밤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근데 그런 것은 내가 한번 해봤으니까. (웃음) 이 영화에서는 더 넓은 공간을 쓰고 싶었다. 둘 간의 이야기가 한 카페에서 벌어지더라도 어떤 이야기는 바테이블에서 하는 게 유리하고, 어떤 이야기는 소파가 놓인 테이블에서 하는 게 유리하다. 그래서 각자가 다른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식으로 컨셉을 잡았다. <더 테이블>이 테이블과 의자가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라면,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김민세

임선우 배우가 연기했던 <더 테이블>의 카페 사장은 손님들에게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낮과 밤은 서로에게>에서는 카페 사장과 직원이 손님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김종관

서로 다른 에피소드에서 각자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도, 하나의 유기적인 이야기가 되길 바랐다. 그 사이에 계절이 바뀌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민세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이번 영화는 공간적 구성이 더욱 복잡하다. <더 테이블>은 다른 용도로 쓰인 공간을 카페처럼 재구성했다고 알고 있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의 로케이션은 실제로 어떤 곳이었나.

김종관

실제로 운영 중인 카페였다. 현재는 스튜디오처럼 쓰이고 있고 카페는 빠졌다고 하더라. 청량리에 위치한 곳인데 1층은 카페로 쓰고 2층은 전시 등을 하는 공간이었다. 일단 로케이션이 너무 번잡스럽지 않았고 바깥의 거리 풍경이 좋았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이즈의 내부 공간과 통창이 있었다. 그래서 내부 공간을 이야기에 유리한 용도대로 바꾸기에 유리했다. 가령, 3부 ‘이.순.불’에서 혜진과 동남은 서로 ‘ㄱ’로 배치된 소파에 앉아 있다. 그런 식으로 각자의 무대를 카페 안에서 설계해 본 것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를 보면 그 가구들의 위치가 바뀌어 있기도 하다. 그런 공간의 지형들은 삼면의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로 대강 파악할 수 있다.

김민세

개인적으로 그 그림들도 궁금했다. 서동욱 작가의 회화 세 편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선정하게 되었나.

김종관

서동욱 작가의 회화는 그림 하나가 영화적인 스토리텔링처럼 느껴진다. 이전부터 좋은 느낌을 갖고 있었고, 그의 작품을 통해 이 카페의 개성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이 이야기에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도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대한 영화이지 않나. 카메라가 창문 바깥에서 카페 안의 이야기를 바라보듯이, 이 그림이 이야기를 지닌 또 다른 창처럼 기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김민세

영화의 수어 장면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 이전에 <침묵의 대화>(2006)라는 단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남자와 들을 수 없는 여자가 소통하는 장면을 만들었고, <아무도 없는 곳>(2021)에서도 보조 출연자들이 수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번에는 수어 장면을 영화 안으로 적극적으로 갖고 왔다. 감독님의 영화에서 수어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하나.

김종관

<아무도 없는 곳>에 등장하는 수어는 그저 그 사람들이 일상 안에 같이 들어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청인이건 농인이건,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그 안에서 다 같이 어울려 사는 것이 세상이니까.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말에 대한 영화인 만큼 그 말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갖고 있고 어느 한쪽이 전부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상호적인 언어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최악의 하루>(2016)에서도 은희와 류스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소통이 될 때가 있지 않나.

김민세

영화에서 대화라는 것은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고 정서를 드러내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갖고 있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청각적인 리듬이다. 이 영화의 수어 장면은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 대화라는 것이 리듬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가 대사를 들을 때 통상적으로는 내용과 의미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데, 비장애인 관객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 장면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각적인 리듬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영화 안을 수놓는 율동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감독님의 영화에서 대화를 리듬으로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수어 장면을 디렉팅할 때는 어떤 것들이 오갔나.

김종관

수어를 하는 배우가 실제 농인은 아니기 때문에 따로 배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나도 수어를 모르니 어떻게 그것을 사실적으로 하느냐가 중요했다. 그 안에서 농인끼리 주고 받는 대사는 정해져 있다. 영화 후반부에 중요한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그 내용을 노출하지는 않고 그저 남겨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나리오 안에는 명확한 대사가 있지만 별도의 자막을 처리하진 않았다. 수어를 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김민세

비장애인 혹은 수어를 모르는 관객의 시점을 상정하고 자막을 넣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까.

김종관

그것만은 아니다. 카페 직원인 수연은 카페 안의 사람들을 제일 많이 바라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농인 손님과 사랑에 빠진다. 서로 연애의 감정이 묘하게 생기지만 수연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언어를 다 알아듣는 상황은 아니지 않나.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시점에서 흘러가는 부분들이 있고 그 시점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겠다.

김민세

카페 직원 수연과 농인 손님 명진은 영화에서 각각 단독적으로 흐르는 이야기를 꿰뚫는 존재다. 그들은 이야기 주변을 맴도는 것 같다가 후반부에 그사이를 꿰뚫고 들어온다. 감독님의 전작들에서는 볼 수 없던 낯선 순간이었다.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던 주변의 인물이 들어와 영화 전체의 흐름을 가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김종관

영화는 네 에피소드로 구성되었지만, 결국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 카페 안의 사람이든 카페 직원이든 그들의 이야기가 매듭지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약 다음 이야기가 있다면 그들의 인생은 각자 따로 흘러갈 것이다. 수연과 명진의 서사는 그런 느낌을 위한 장치다. 영화 바깥을 맴도는 듯한 주변인들에게도 분명히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어느 순간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그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걸 완결 지을 필요는 없다. 카페라는 공간에서 이야기들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수도 있고 이들도 그렇게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는 흘러가고 누군가는 그것으로 창작을 하기도 한다.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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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세

1부와 2부, 3부는 인물의 배치나 동선이 만드는 리듬을 동원해서 각각의 서사와 관계를 다채롭게 보여준다. 반면 재미있게도 4부 ‘가을 이야기’에서만 <더 테이블>의 세팅에 가까운 배치로 두 사람이 앉아 있다. 굉장히 정직한 배치이고, 연출적인 면에서도 일종의 정공법을 택했다고 느꼈다. 영화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에피소드에서 이 정공법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김종관

앞의 세 편이 형식적으로 재미를 줄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클래식하게 끝내고 싶었다. 예전부터 고전영화가 가진 대화 장면의 호흡을 좋아했다. 나루세 미키오의 <흐트러지다>(1964) 같은 영화를 보았을 때 느껴지는 고즈넉한 대화의 호흡 말이다. 이 호흡에는 한국이나 일본 같은 동아시아권에서만 가능한 정서가 있다. 그런 영화들의 대화 호흡이나 음악의 분위기가 투영되었다.

김민세

분명 음악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영화 속의 음악을 들으면서 불현듯 1950~60년대 일본 영화에서 나오는 현악 중심의 음악을 떠올렸다.

김종관

그렇다. 요즘 영화음악에서는 잘 쓰지 않는 클래식한 방식으로 음악을 사용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 음악감독과 정말 노력했다. 음악을 비롯해 나의 영화 취향이 많이 들어간 영화다. 말한 것처럼 내가 좋아했던 1950년~60년대 일본 영화의 정서를 지금의 젊은 세대로 풀어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돌을 준비하는 사람과 셰프를 준비하는 사람의 이별 이야기로 말이다.

김민세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와 <낮과 밤은 서로에게> 모두 영화 현장이 등장한다. 이 장면들은 종종 이야기한 캐주얼한 영화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는 면에서 다소 메타적인 접근으로 느껴진다. 이전부터 창작에 관한 이야기, 이를테면 글을 쓰는 사람 같은 인물을 종종 다뤄오긴 했지만 영화 현장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작품 안으로 불러온 것은 최근작 두 편이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정한 계기가 있을까.

김종관

일단 이런 창작자를 다루는 영화를 좋아한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2년 전에 촬영했고,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는 작년 초에 찍었다. 비슷한 시기에 촬영하고 완성한 만큼 두 영화는 나에게 자매 같은 성격의 영화다. 당시의 개인적인 생각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었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 보다 각본도 먼저 쓰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창작들이 가진 비호감적인 면모를 이용해서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썼다.

김민세

3부 ‘이.순.불’에서 이희준 배우가 맡은 동남이 그런 캐릭터다.

김종관

그렇다. 심은경 배우가 맡은 혜진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좀 이상한 여자인데?’라고 생각하다가 동남이 등장하면 ‘저 남자가 더 이상한 놈인데?’가 된다. (웃음) 서로가 그런 면모를 갖고 있지만 결국 어느 순간에는 이해하게 된다. 이런 메타적인 성격을 지닌 에피소드가 있으니 마지막 장면에 그들의 촬영 현장을 보여주며 마무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계속하고자 하는 창작의 성격이 잘 보이는 장면이 된 것 같다.

 

 

© 포토그래퍼 강현후
© 포토그래퍼 강현후

김민세

한편으로 감독님의 영화에서 창작자에 대한 관심은 이번 작품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앞서 <최악의 하루>의 류스케를 자기반영적인 캐릭터라고 말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에 등장하는 사진은 감독님이 실제로 어린 시절 태어나서 처음 찍은 사진으로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감독님의 영화에서 창작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에 대한 관심도 있겠지만, 자기반영적 접근 또한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은 어떻게 영화의 재료가 되나.

김종관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표면적으로는 그냥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나. 내가 처음 영화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필름이라는 것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단 한 장의 원본을 만들어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없어진다는 말도 있었다. 결국 내 영화에는 당시 나의 고민들이 함께 들어가 있다. ‘내가 영화라는 것을 왜 좋아하게 됐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카메라는 무엇이고, 내가 처음 찍은 사진의 의미는 무엇이고. 첫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물론 관객들 입장에서는 내가 촬영한 사진 같은 개인의 역사가 상관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으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게 나라는 사람에게는 재미있는 일일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면 일종의 레이어가 되어서 영화를 읽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 수도 있다. 그 안에는 어떤 면에서는 의도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것들이 들어가 있다. 당시의 상황과 시기가 있고, 내가 영화를 처음 좋아했을 때의 느낌도 있다.

무언갈 좋아하는 감정에는 설레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굉장히 무력하고 통제 불가능하기도 하다. 갑자기 슬픔에 빠지거나 수치스러울 때도 있다. 어릴 때 제대로 연애도 못하고 누군가를 좋아하다 보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가 굉장히 수치스럽지 않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수치스럽게 느낀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런 수치심을 보여주면서 ‘그 감정이 괜찮다’고 말하는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 같다.

김민세

그러면서도 개인적인 경험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지는 않는다고 했다. 본인에게 영화가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과 픽션을 만드는 일은 어떤 관계인가.

김종관

첫사랑의 감정이나 후회스럽고 수치스러운 감정들은 서서히 잊히기 마련이다. 한 인간으로서 모두가 한 번은 겪을 수 있는 감정이고 결국은 지나간다. 나는 영화라는 매체가 특정한 시기를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매체라는 점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을 일기처럼 솔직하게 담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는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에는 내 개인의 역사가 들어가 있지만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식으로 창작은 나 스스로의 기억을 팔면서도 거짓말을 잘 이용해야 한다. 그러면 내 추억팔이 때문에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윤리를 획득할 수도 있다. 많은 거짓말이 섞이면 내가 나의 슬픔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누군가를 공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김민세

자신의 기억을 영화로 가져올 때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김종관

그렇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들이 해소되고 세월이 지나서 내가 거리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한다. 지금 당장의 감정으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김민세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당시, 이 영화를 두고 "작고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말했다. <폴라로이드 작동법>부터 시작해 감독님이 만든 수 편의 단편영화들이 떠오르는 말이었다.

김종관

2000년대 초반에는 장편을 만드는 것에 대한 욕심이 크게 없었다. 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작은 단위로 단편을 만드는 작업 자체가 항상 신나고 재미있었다. 원래부터 기질이 그러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가령, 길을 가다 큰 상업 촬영 현장을 보게 된다고 가슴이 뛰진 않는다. 작년 쯤에 혼자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다 거리에서 여고생 둘이 대화하며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근데 그 모습이 뭔가 연기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쪽을 보니까 누가 혼자 카메라를 잡고 그걸 찍고 있더라. 스태프도 없이 연출자 홀로 두 명의 배우를 데리고 영화를 만드는 상황이었던 거다.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뛰었다. 언제나 이런 작은 단위의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

김민세

마지막으로 제목에 대해 묻고 싶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낮과 밤’은 무엇인가.

김종관

낮과 밤은 같은 공간에 있고 같은 성질을 갖고 있지만 다른 시간대에 존재한다. 하나는 빛이 차 있고 하나는 어둠이 차 있다. 두 사람이 대화한다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대화라는 상황, 캐릭터적인 맥락 등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점도 많다. 소설가 혜진과 영화감독 동남도 닮은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다른 성질을 지녔다. 그렇지만 결국은 닮아있다. 낮에 있는 현오와 밤에 있는 유진이 서로 만날 수 없으면서도 어떻게든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와 타인이라는 존재를 두고 누군가는 낮과 밤처럼 다르다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낮과 밤처럼 같다고 할 수도 있다. 낮과 밤이라는 시간대가 달라져도 그 안에 놓인 공간은 결국 같은 공간이지 않나. 현실을 반영한 꿈처럼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터뷰 김민세 영화평론가]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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