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백' 꿈을 담는 그릇을 빚어라!
'룩백' 꿈을 담는 그릇을 빚어라!
  • 박정수
  • 승인 2026.10.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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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다운 영화, 영화다운 영화"

<룩백>을 보고 난 지금, 브뤼노 라투르의 형식 이론이 떠오른다. '라투르'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발굴 현장에서의 표본 채취에 비유한다. 표본은 아무 그릇에나 담아 두어서는 안 된다. 먼저 탈지면으로 감싸 조심스레 보관하고, 그다음 표본의 크기와 형질에 맞는 서랍과 그릇, 보관함을 골라야 한다. 여기서 표본이 내용이고 보관함이 형식이라면, 형식은 내용의 성질에 맞게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하면서 그 내용을 보존해낸다. 형식은 바로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형식은 담길 내용에 합목적적인 그릇이어야 한다.

 

#스테디캠과 필름

만화가 원작이고 이미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작품을 다시 실사 영화로 옮긴 <룩백>을 보고 라투르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는 저마다 담아낼 수 있는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갖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영화'는 실사 영화를 가리킨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주인공 후지노(아역 나나세 후우리)는 자신이 공들여 그린 네 컷 만화를 바라보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후지노의 시선에 정확하게 조응하며 핸드헬드로 움직인다. 카메라를 쥔 사람의 불완전한 손과 급박한 발의 운동을 반영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연출이다. 이윽고 카메라는 후지노의 시선에서 벗어난다. 홀로 방에 있는 후지노를 바라보는 시선은 오직 감독 고레에다의 것이다. 이때 그는 전능한 시선으로 후지노의 등을 제목처럼 '룩 백'하고, 스테디캠 특유의 온유하고도 우아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후지노는 꿈꾸는 아이지만 아직 그 꿈을 실현하지 못했고 자신이 이룬 것에도 만족하지 못했기에, 그의 시선은 조금 불안하다. 반면 고레에다는 후지노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차근차근 꿈에 다가가는 모습을 포착한다. 즉 고레에다의 스테디캠은 현실의 어설픈 운동을 소거함으로써 후지노가 매끈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반영한다. 감독은 현실보다 그윽한 꿈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모든 것이 선명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디지털 대신 뿌옇고 아스라한 35mm 필름을 활용한다. 그렇게 고레에다는 후지노의 꿈을 담아낼 그릇을 빚어낸다.

하지만 <룩백>은 영화라는 그릇만 탐구하는 작품이 아니다. 후지노의 꿈이 만화라는 매체에서 출발한 만큼, 원작의 매체성을 영화에서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한 흔적도 묻어난다. 그 고민은 운동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는 상반된 두 카메라 운동이 분명 도드라지지만, 이후에는 달리 숏이나 트래킹 숏처럼 카메라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숏이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초반부의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거나 패닝하는 데 그친다. 그럼에도 영화는 정적이지 않다. 카메라 대신 편집을 통한 이동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영화는 더욱 동적으로 느껴진다. 달리 숏의 1분이 그저 1분일 때, 편집이 잦은 1분짜리 시퀀스에는 억겁의 세월이 담길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영화와 유사하면서도 영화보다 더 급진적일 수 있는 만화의 특징이 아닐까. 만화의 개별 컷을 연상시키는 회화적 프레임들이 연속되며 만들어내는 과감한 도약이 말이다. 후지노가 만화를 통해 먼 미래의 자신에게로 훌쩍 건너뛰거나,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사는 캐릭터들에게로 뛰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고레에다는 이처럼 후지노가 그리는 네 컷 만화와 유사한 연출을 고안한다. 그럼에도 <룩백>은 만화가 아니라 영화다. 시간과 물리, 물질의 제약을 무시할 수 있는 만화와 달리, 영화는 그 모든 제약을 극복하거나 오히려 끌어안아야 한다. 앞서 꿈의 질감을 빚어내던 35mm 필름은 자글거리는 물성을 드러냄으로써, 꿈이지만 결국에는 현실일 수밖에 없는 영화의 이중성 또한 드러낸다. 그래서 고레에다는 저 멀리 단숨에 도약하는 대신, 몽상에만 잠기지 않고 현실에서 직접 꿈을 향해 나아가는 후지노의 모습을 만화와 유사한 '영화'로 보여준다. 그 영화라는 그릇 안에는 주로 후지노의 '등'이 담긴다. 소녀는 현실에 등을 돌렸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달아난 것은 아니다. 만화를 그려서 밥벌이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 교우 관계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요구, 가라테 학원에 다니라는 권유 등 온갖 세속적인 요구에 등을 돌린 채, 자신의 꿈을 위해 현실을 열정적인 손놀림을 개척하고 있다. 그 등은 참으로 단단하고 우직하다.

 

#두 번의 질주

영화의 두 번째 시퀀스에서 한 아이가 논두렁에서 백조를 봤다고 말한다. 선생님(쿠도 칸쿠로)은 백조가 아니라 백로일 것이라며 핀잔을 준다. 선생님은 또 학교에 나오지 않는 쿄모토(아역 오카다 로카)에게 네 컷 만화 지면을 일부 양보하라고 후지노에게 제안한다. 쿄모토의 만화를 본 후지노는 아마 난생처음 느끼는 열등감과 질투에 휩싸였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친구들이 만화가든 운동선수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했는데, 이젠 자신이 없다. 지면을 괜히 내준 걸까. 이때 고레에다는 지금까지 비교적 빠르게 도약하던 편집을 잠시 접어두고, 논두렁을 내달리는 후지노의 모습을 트래킹 숏으로 포착한다. 대략 30초에 이르는 이 숏에서 후지노는 아무리 내달려도 그 30초만큼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영화는 이 숏에서 몸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설 수 없다는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 시퀀스는 우리가 어째서 꿈꾸는지를 보여준다. 도저히 될 수 없기에, 도저히 볼 수 없기에, 도저히 나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꿈을 꾼다.

그런데 똑같이 후지노가 논두렁을 뛰어가는 숏인데도 그 함의가 전혀 다른 시퀀스가 등장한다. 후지노가 쿄모토에게 졸업장을 전달하기 위해 그 애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안 그래도 만화를 그만둔 후지노는 쿄모토의 집에 쌓인 무수한 연습장을 보자 더더욱 주눅이 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일조차 어찌나 어려운지. 그러다 두 사람은 오해 아닌 오해를 풀고, 후지노는 자신이 쿄모토의 꿈이었음을 확인하며 용기를 얻는다. 너의 꿈이 나였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 꿈꾸게 했다. 이후 후지노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간다. 이때의 상황은 처음 논두렁을 내달리던 순간보다 더 나쁘다. 차디찬 칼바람이 불고 싸라기눈까지 흩날린다. 그럼에도 후지노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심지어 백조도 실재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 단단한 믿음이었다. 이때 영화는 앞서 등장한 트래킹 숏을 반복한다. 대신 이번에는 숏의 크기가 풀숏에서 롱숏으로 넓어지고 속도는 슬로모션으로 느려지는 등, 구도와 흐름이 자유자재로 바뀐다. 앞선 시퀀스에서 현실의 물리적 제약을 드러내던 트래킹 숏이 이제는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변주해가며 꿈을 향한 움직임을 다채롭게 담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만화다운 연출 대신 지극히 영화다운 연출을 택한다. 그리고 그 연출 역시 꿈을 담아낸다. 오히려 꿈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는 데에는 영화가 만화보다 더 적합한 그릇일 수 있다.

언뜻 만화에 투영된 꿈은 잠시의 해소이자 환상에 그치는 것처럼 보인다. 샤크맨이 어떻게 현실에서 자신의 지느러미를 떼어간 사람에게 복수를 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꿈이 현실에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후지노는 쿄모토를 만나기 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네 컷 만화 용지를 주워 자신의 만화를 그린다. 그런데 우연이 겹치면서 그 종이는 사람이 통과할 수 없는 쿄모토의 방문 틈새로 쏙 들어간다. 후지노의 만화를 본 쿄모토는 그림의 주인이 후지노임을 알아차리고, 지금껏 열지 못했던 문을 활짝 열고 뛰쳐나온다. 히키코모리인 쿄모토에게 그 문을 여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지 생각하면, 만화가 현실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또 두 소녀는 용맹한 캐릭터들의 대사를 읊조리며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다지는 듯하다. 즉, 만화 자체가 현실을 직접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만화는 나의 꿈을 타인에게 전하고 타인이 현실에서 행동할 용기를 얻게 할 수 있다. 꿈은 만화라는 형식 안에서 잠시 간직되기도 하고, 타인에게 전해지며 현실의 행동을 추동하는 힘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꿈을 간직하는 그릇과 꿈을 실천하는 그릇이 모두 필요하다.

 

#꿈의 자리바꿈

소녀들은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후지노(성인 데구치 나츠키)는 자신의 약점인 데생을 보완해줄 쿄모토(성인 마키타 아쥬)를 동료로 삼고, 집에 하숙시킨다. 쿄모토 역시 방문을 여는 데 그치지 않고 후지노의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인가. 여기서 고레에다가 줄곧 탐구해 온 소재인 '대안 가족'이 떠오른다. 우선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부터가 독특하다. 너무나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후지노의 언니는 현실성 없는 꿈을 꾸는 동생을 타박하지만, 부모님은 그저 말없이 지지하고, 샤크맨을 그릴 때는 아예 <죠스>를 보여주며 조력한다. 쿄모토의 할머니 역시 내향적인 손녀에게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바깥세상을 경험하는 법, 나아가 불안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준 듯하다. 고레에다는 이 작품에서 가족을 꿈을 지지하는 동반자로 그린다. 그리고 그 꿈을 지지해 줄 타인이라면 피가 섞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식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룩백>이 제안하는 대안 가족이다.

중학생이 된 이후로는 쿄모토의 관점이 한층 도드라진다. 이때 첫 시퀀스 이후 자취를 감췄던 핸드헬드가 쿄모토와 함께 돌아온다. 첫 시퀀스에서 후지노의 불안한 시선을 담던 핸드헬드의 흔들림은, 이제 쿄모토가 마주한 현실의 흔들림으로 의미를 넓힌다. 후지노가 그 흔들림을 잘 견뎌내는 아이였다면, 쿄모토는 그 흔들림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쿄모토에게는 흔들림을 견디면서 그림마저 뚝딱뚝딱 그려내는 후지노가 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만화라는 꿈을 그려내기 위해서도 핸드헬드로 표상되는 현실의 흔들림에 적응해야 한다. 만화의 재료가 되는 것들은 결국 현실의 바다와 숲, 도시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후지노의 손에 이끌린 쿄모토는 빙글빙글 이어지는 지하도를 통과해 도시로 향한다. 이때는 후지노의 '저 머나먼 꿈'을 표현하던 트래킹 숏과 달리, 깊고도 깊은 감각을 자아내는 '달리 숏'이 사용된다. 쿄모토에게 만화는 꿈이었지만, 그 꿈을 실현하려면 현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림의 재료를 얻기 위해, 미술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꿈과 현실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꿈이 나아가고자 하는 곳이 저 너머의 현실이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잠입해야 하는 곳이 깊은 현실이든 말이다.

두 소녀는 '후지노 쿄'라는 활동명으로 첫 단편을 완성한다. 이후 등단하기 위해 만화사가 있는 도시로 향한다. 이때 고레에다는 지금껏 사용하지 않던 '하이 앵글 숏'으로 만화사에 들어서는 소녀들을 포착한다. 유년기에는 만화를 그리는 것만으로 꿈에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백조는 충분히 봤다. 이제는 외부의 평가, 그것도 높디높은 기준과 시선을 통과해야 비로소 만화가로 인정받는다. 또 중학생을 지나 성인이 되어가면서 더는 원하는 것만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샤크맨을 그리고 싶어도 편집장의 요구에 따라 두더지맨을 그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꿈은 '되고 싶다'에서 '돌아가고 싶다'로 바뀐다. 그리고 내가 꾸던 꿈을 네가 간직하고 있었다 해도, 너는 나와 똑같은 꿈을 꾸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꿈이었던 후지노는 어른이 되어 쿄모토를 꿈꾸고, 후지노가 꿈이었던 쿄모토는 어른이 되어 자신만의 꿈을 꾼다. 그렇게 두 사람의 꿈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그리고 어느 순간, 후지노에게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던 가족은 그 자체로 꿈의 목적이 된다.

 

#실사와 애니메이션

그렇게 후지노가 쿄모토를 그리워하던 무렵, 쿄모토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이제 꿈은 가능한 일을 이루는 데 그치지 않고 불가능한 것을 향한다. 고레에다는 지금까지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탐구하며 만화다운 영화와 영화다운 영화를 제시해왔지만, 이 결말에서는 그 고민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어붙인다. 쿄모토가 문에 댄 손을 귀에 가져다 대며 바다 소리를 듣는 장면에서 고레에다는 할머니와의 추억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후지노와 함께 있는 순간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가 만족스러우면 굳이 다른 시간을 꿈꿀 필요가 없다. 그러나 쿄모토가 세상을 떠난 뒤, 후지노는 쿄모토와의 대체 역사를 상상한다. 만약 너와 내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내가 그 자리에서 너를 처음 만나 구할 수 있었더라면… 이 상상이 실사로 펼쳐진 뒤 후지노는 쿄모토와의 실제 추억을 떠올리는데, 이 회상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다.

대체 역사는 실사 영화로, 실제 추억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라는 꿈은 단단한 물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부활과 재회마저 마치 실제인 양 상상하게 한다. 반면 애니메이션은 구체적인 사실의 재현보다 감정과 정서처럼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을 떠올리는 데 사용된다. 되살리고 싶은 것이 대상 그 자체인지 아니면 대상과 함께했던 감각인지에 따라, 다시 말해 꿈이 물질에 가까운지 관념에 가까운지에 따라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도 달라진다. 하지만 불가능한 꿈들이 위안을 줄지언정 현실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결국 후지노는 현실로 돌아온다. 이때 고레에다는 현재의 후지노와 과거의 쿄모토가 숏-리버스 숏으로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영화라는 꿈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연결한다. 나아가 카메라와 피사체가 머무는 '지금, 여기'로 시선을 되돌림으로써, 부재하는 무언가를 현재와 이어 붙이고 남겨진 이를 다시 살아가게 한다. 이것이 '지금, 여기'를 포착하는 영화라는 꿈의 그릇이 후지노에게 건네는 마지막 선물이다.

이처럼 고레에다는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진공 상태에 머무는 듯한 '힐링 만화'와 마주할 때는 급진적으로 만화다운 영화를 고민한다. 반면 만화가 점차 현실을 닮아갈 때, 또 꿈이 현실이 되어갈 때는 영화다운 연출을 모색한다. 그러나 꿈은 현실과 단절된 채 머물기만 하지 않는다. 현실이 되어가기도 하고, 타인과 공유되며 가족을 만들기도 하며, 상실 이후에는 남겨진 이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꿈을 담는 그릇은 꿈만이 아니라 현실 역시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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