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SEMELE>(2015)와 <ARIA>(2017)로 베네치아, 선댄스, 베를린 등 주요 영화제 주목받은 '마르시니 아리스티두'는 첫 장편인 <나를 놓지마>(2025)에서 단편 시절부터 탐구해온 아이의 서사를 이어간다. 그의 영화에서 아이는 항상 외로운 존재이며,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10대 소녀 아이리스가 가족을 떠난 아버지와 재회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나를 놓지마>는 둘의 어긋남이 화해와 연대로 이어지는 순간을 사려깊은 호흡으로 따라간다. 이 단순한 이야기는 부녀 관계를 넘어 외로움과 결핍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로 나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신화적인 메타포를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다. 감독의 고향인 섬나라 키프로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해변과 바다, 조선소와 비포장 도로를 오가며 한국 관객들에게 생경한 풍경을 각인시킨다. 마르시니 아리스티두는 자신의 고향이 지닌 아름다운 풍광을 담으면서도 그 공간에 깃든 상실과 외로움의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부녀 역을 맡은 마리아 페트로바와 크리스토스 파살리스의 연기도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나를 놓지마>로 첫 연기에 도전한 마리아 페트로바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상처받은 눈빛을 통해 관객에게 큰 울림을 준다. <송곳니>(2009)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스 파살리스 또한 거친 삶 속의 연약함을 보여주며 애증으로 묶인 부녀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완성한다. <나를 놓지마>는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고, 로스앤젤레스 그리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지난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일정 속에서 처음으로 관객과 만났다. 아이의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이 영화는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초기작, 카를라 시몬의 가족 삼부작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동시대 여성 감독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작가로 도착한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기회를 가졌다.
김민세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단편영화들을 선보였고, <나를 놓지마>로 첫 장편을 완성했다. 이전 단편영화들을 돌아보았을 때, 그 작품들을 통해 어떤 주제와 생각들을 탐구해왔나.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내 영화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관계와 연결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 주변부에 놓여 있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갈망하는 인물들에게 자주 초첨을 맞춰왔다. 나는 물리적인 고립보다 정서적인 고립에 늘 관심을 가져왔다. 내 영화의 인물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럼에도 지독할 정도로 외로움을 느낀다. 나는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연약한 순간을 탐구하려 한다. 비록 그 시도가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또한 나는 계속해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로 돌아가게 된다. 그 시절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게 우리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성인이 된 이후의 삶에도 계속해서 메아리치는 방식에 매혹되어 있다.
김민세
단편에서의 관심사가 첫 장편으로 이어진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돌아보았을 때, 본인의 영화적 관심사는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싶은지.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나는 극적인 외부 사건보다는 조용한 정서적 변화에 관심이 있다. 내 영화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보다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이 변하는가에 더 가깝다. 나는 감정을 절제하는 인물들에게 끌린다. 아주 작은 몸짓, 이를테면 한 번의 시선이나 침묵, 떠나는 대신 남기로 택하는 행동이 때로는 엄청난 정서적 무게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복잡성을 탐구하는 것도 좋아한다. 사람을 영웅이나 악인으로 나누어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 대부분은 각자가 지닌 상처를 짊어진 채 그저 최선을 다하려고 애쓸 뿐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릴 때 생겨나는 연민에 관심이 있다. 궁극적으로 내 영화가 판단보다는 공감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김민세
<나를 놓지마>는 부녀 관계에 대한 영화다. 가족을 다룬다고 하면 여러 관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인데, 부녀 관계의 서사에서 어떤 매력을 느꼈나.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나는 부녀 관계가 영화에서 의외로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다고 늘 느껴왔다. 특히 모자 관계나 모녀 관계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많은 딸들에게 아버지는 사랑과 보호, 심지어 부재라는 감정을 이해하게 되는 최초의 모델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그 관계는 성인이 된 이후까지 오랫동안 우리를 형성하곤 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단순한 화해가 아니었다. 상실과 실망을 경험한 두 사람이 수년간의 정서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다시 찾아가려는 과정이었다. 아이리스와 아버지는 둘 다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함께하는 경험과 이동, 침묵을 통해 발전하고, 마침내 서로의 연결과 감정을 진실하게 깨닫는 지점을 향해 서서히 열린다. 나는 그것이 진실하게 느껴진다.
김민세
부녀의 서사는 신화에서도 종종 다뤄진다. 그래서인지 <나를 놓지마>의 많은 요소들, 공간, 서사, 관계성, 성장 등은 신화적인 뉘앙스로도 다가온다.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참고한 신화들이 있을지.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시나리오를 쓰며 의식적으로 참고한 특정 신화가 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화와 심리학은 언제나 내가 이야기를 사고하는 방식의 일부였다. 나는 그리스 신화가 풍경 속에 스며들어 있는 키프로스에서 자랐다. 그곳에는 모든 산과 해안선, 동굴마다 우리보댜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온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하나의 특정 신화에서 가져오기보다는, 부모와 자녀 관계가 지닌 원형적 역학을 활용해 시대를 초월하는 이야기, 거의 현대적인 민담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신화는 흔히 여정과 변화, 용서, 그리고 하나의 정서적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영화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민세
영화에 묘사된 공간들이 인상적이었다. 해변과 바다가 중요한 장소로 다가오고, 소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비포장 도로들도 기억난다. 실제로 촬영된 장소들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모두 키프로스에서 촬영했다. 주로 해안 도시 리마솔과 수도 니코시아 인근에서 촬영했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엽서 속 키프로스의 이미지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관광객으로 가득한 해변 대신, 잊힌 동네와 조선소, 버려진 도로처럼 시간 속에 멈춰 있는 듯하면서도 그 안에서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장소들에 관심이 있었다. 특히 조선소는 구체적인 의도를 갖고 선택한 공간이었다. 배가 수리된 뒤 일종의 해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저는 멀어져 있던 아이리스와 아버지의 관계 또한 수리되고,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나에게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풍경은 영화 속 또 하나의 인물이 된다. 바다는 자유와 미래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다는 끊임없이 이동과 떠남, 귀환을 상기시킨다. 먼지투성이 도로들은 인물들의 정서적 풍경을 반영한다. 그 도로들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아름답고, 불완전하지만 매우 인간적이다.
김민세
주인공 아이리스와 그의 아버지가 탈 것을 타고 이동하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배를 탄다. 한 공간을 여러 탈것으로 통해 이동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생각이다. 이 이동의 모습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길 바랐나.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나를 놓지마>에서 이동은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말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정서적 연결은 함께 하는 경험을 통해 발전한다. 이동 수단이 달라질 때마다 두 사람 사이의 리듬도 달라진다. 때로는 서로 가까이 있고, 때로는 떨어져 있으며, 때로는 한 사람이 앞장서고 다른 사람이 그 뒤를 따른다.
물리적인 여정은 정서적인 여정을 비추기 마련이다. 두 사람은 단 한번의 대화만으로 갑자기 가족이 되지 않는다. 신뢰는 함께 보내는 평범한 순간들을 통해, 1킬로미터씩 점진적으로 쌓여간다. 관객들이 그 길 위에서 축적되어가는 친밀함을 경험하길 바랐다.
김민세
영화에서 여러 청소년들이 등장하지만 주인공 아이리스의 또래는 그뿐이다. 친한 동네 언니도 있고, 그들과 어울리는 무리나, 아이리스의 오빠 등도 등장하지만,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로 등장하는 것은 아이리스 뿐이다. 왜 이 동네에 어린 아이는 아이리스 뿐일까.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아이리스가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 놓인 사람처럼, 어느 공동체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로 느껴졌으면 했다. 아이리스는 십대 아이들과 어울리기에는 너무 어리지만, 동시에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성인들과 얽힌 상황들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 조용한 외로움은 아이리스라는 인물을 이루는 중요한 일부가 된다. 또한 그것은 아이리스가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그토록 간절히 연결을 추구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아버지가 다시 아이리스의 삶에 들어왔을 때, 그 연결의 가능성은 아이리스에게 크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김민세
두 주인공 부녀의 캐스팅이 매력적이었다. 둘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입은 인물을 인상적으로 연기했다. 부녀로서 서로의 조합을 맞추는 것이 중요했을텐데,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아마 제작 전체 과정에서 캐스팅이 가장 오래 시간이 걸린 일이었을 거다. 영화의 모든 것이 이 두 인물 사이에서 올바른 정서적 진실을 찾아내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역의 마리아 페트로바는 이전에 연기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마리아는 놀라운 정서적 지능과 연기하려 애쓰지 않으면서 그저 카메라 앞에 존재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가르쳐서 만들어낼 수 없는 진솔함을 영화에 가져왔다.
크리스토스 파살리스는 내가 오랫동안 존경해온 배우다. 그는 대사가 거의 없어도 깊은 감정을 표현하고, 한 인물의 내면 전체를 전달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분명 놀라운 유머 감각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단순히 재능 있는 두 배우를 찾는 일이 아니었다. 진실하게 느껴지는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촬영 전에 리허설을 할 시간이 전혀 없었음에도 두 배우는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점차 서로 연결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 배우 역시 그렇게 가까워졌다.
김민세
좋아하는 한국 감독이나 한국 영화가 궁금하다.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이창동 감독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이다. 그의 영화에는 놀라운 정서적 깊이와 인내가 있다. <버닝>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있는 작품이다. 또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도 무척 좋아한다. 최근에는 셀린 송 감독의 작품을 좋아했다. 셀린 송은 한국계 캐나다인이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문화적 경계를 넘어 공명하는 정서적으로 절제된 서사의 아름다운 사례라고 생각한다.
김민세
추후의 작업들이 궁금하다. 앞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영화가 무엇일까.
마르시니 아리스티두
앞으로도 인물을 중심에 둔 이야기를 계속 만들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장르와 더 넓은 세계를 탐구하면서 내 자신에게 도전하고 싶다. 내가 가장 큰 관심사는 장르 자체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탐구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정치 스릴러든, 스파이 이야기든, 혹은 더욱 내밀한 이야기든, 나는 언제나 플롯 아래에 놓인 정서적 진실을 찾고 있다.
내 모든 작품을 연결하는 하나의 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장 힘든 순간에 놓여 있을 때조차도 서로가 깊이 인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깨닫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인터뷰 김민세 영화평론가]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