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박정범, 구원과 희생에 관한 이상한 알고리즘의 세계
[INTERVIEW] 박정범, 구원과 희생에 관한 이상한 알고리즘의 세계
  • 김민세
  • 승인 2026.06.0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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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하는 몸으로 세계를 버티다 — 박정범 영화의 리얼리즘

박정범의 영화 속 주인공은 마치 자신이 세계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고행의 몸짓을 반복한다. 폐허만이 가득한 공터에서 굴러떨어지고, 무너져 내린 집을 자신의 몸으로 지탱하려 하며, 피 흘리는 와중에도 누군가를 업고 달리거나 어둑한 숲속을 내려간다.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촛불을 나르는 <노스텔지아>(1983)의 고르차코프처럼, 박정범의 고행은 무모하지만 그렇기에 숭고함으로 가득하다. 그의 영화 안에서 고행하는 몸의 존재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박정범이 단순히 그것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앞의 배우로서 그것을 오로지 홀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범은 인물을 가학하는 카메라 뒤의 자리를 내려놓고, 어떠한 죄의식을 내려놓으려는 듯 끊임없는 자학의 퍼포먼스를 카메라 앞에서 보여준다. 이 고행이 더욱 잔인한 이유는 그가 구원자로서 세계에 놓인 이상, 소멸과 회피의 선택도 주어지지 않은 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질문하고 증명하며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범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영화 바깥으로 시선을 틀어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말한다. 한 창작자로서 영화 안에 있는 자신의 사유와 사명에 대해 말하다가도, 그 바깥의 세계에서 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의무와 책임에 대해 말한다. 그를 낙관적인 사람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의 영화가 그러하듯, 그가 보는 세계는 보통 사람이 보통의 삶을 이뤄내기에 너무 가혹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그는 영화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정확히는 세계를 바꾸기보다, 영화와 진실하게 만난 어떤 한 사람을 삶에 작은 진동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 믿음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그의 영화가 지닌 태도다.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이야말로 그의 영화가 기적의 순간을 보여줄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몸의 영화이자, 인본주의적 희망에 관한 영화라는 면에서 박정범의 영화는 21세기 한국 독립영화가 거쳐 왔던 리얼리즘의 경향과 결을 함께 한다. 많은 창작자가 이 질문 속에서 자신만의 대답을 내놓았지만, 신작 이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토록 위태로우면서도 도발적인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밀어붙인 작가는 보기 드물다. 인간의 몸이라는 최후의 리얼조차 위협받는 시대에 세계를 버티고 있는 박정범의 몸은 어떤 기시감을 만들고, 어떤 미래와 저항할 것인가? 앞으로 그의 몸은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동시대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알 수 없는 시대 안에서 변화를 꾀하면서도 보통의 삶에 대한 그의 관심사는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로서 그의 다음 챕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 포토그래퍼 강현후​​​​

김민세

마지막 장편 작업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간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었나.

박정범

2019년 두 작업을 마칠 즈음에 독일 제작사의 제안을 받고 신작을 준비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시나리오 개발이 거의 마무리된 상태에서 투자가 엎어졌다. 2년 동안 올인한 프로젝트가 엎어지니 심적으로 힘들게 다가왔고, 그 후로 홀로 미친 듯이 글쓰기에 매달렸다. 아마 6년 동안 A4용지로 따지면 만장 넘게 쓰지 않았을까. 최근 3년 동안은 드라마를 쓰고 있고, 몇 차례 수정을 거치며 마무리 중이다.

김민세

당시 작품을 독일 제작사에서 제작이 어렵다고 하는 요인은 무엇이었나.

박정범

독일 제작사와 함께 신작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오랫동안 독립영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창작자가 중심이 되어 일사결정을 하는 환경에 익숙했다. 반면 제작사는 작품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조금씩 달랐고, 아쉽게도 그 차이를 충분히 좁히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일과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 위한 문법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최근 드라마를 쓰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것을 포기하거나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많은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김민세

글 작업을 제외하고 일상에서 규칙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없을지.

박정범

글만 쓰다 보니까 허리도 아프고 근육이 빠지는 것 같다. 그래서 최근부터는 작업 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팔굽혀펴기를 20개나 30개씩 하고 있다. 그렇게 운동을 하면서 칠판에 표시를 해두는데, 평균적으로 하루에 300개씩은 한다. 그러다 보니 허리가 펴지고 좀 살 것 같더라.

김민세

학부 시절 체육교육을 전공하기도 했고, 몸 쓰는 일을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박정범

복싱과 헬스를 오래 해왔다. 근데 자식들이 생기고 나서는 과한 운동을 할 여유가 없어 최소한의 운동만 해오고 있다. 글 쓰는 사람은 알겠지만 운동을 하고 땀을 흘려야 머리가 돌아가고 아이디어가 찾아온다. 영화를 만드는 일도 비슷하다. 이전부터 '세컨드윈드 필름'이라는 영화사 이름을 사용 중인데, 여기서 세컨드 윈드는 체육학 용어로 사점(死點)을 넘겼을 때 몸에서 가장 순수한 마약 성분인 아드레날린이 나오는 상태를 말한다. 정말 힘들게 촬영을 마치고 끝내 관객과 만나는 순간도 그렇다. 첫 상영을 할 때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고 시선을 보면서 어마어마한 기분을 느낀다.

 

ⓒ 영화 <복서 김예준>(2021)

김민세

운동이나 복싱에 대한 애정이 <복서 김예준>(2021)이라는 짧은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이어진 것일까.

박정범

2021년에 완성한 작업은 감독 조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든 트레일러였다. 2019년부터 김예준 선수의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고 아직까지 촬영 중이다. 그의 최근 가장 큰 이슈는 2025년 초 이노우에 나오야와의 경기였다.

김민세

복서의 서사에서 어떤 점이 끌렸을지 궁금했다. 지속적으로 몸과 폭력에 대한 문제를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들을 만들어왔는데, 김예준 선수의 모습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발견한 걸까.

박정범

그가 지닌 몸의 에너지를 존경한다. 두 번의 부상으로 몸이 망가진 후 아무도 보살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게는 멈추지 않는 자신만의 루틴이 존재한다. 마치 이 세계가 이미 멸망했고 자기 혼자 살아 있는 것처럼. 그래서 촬영본을 보면 왕빙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놀랍게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홀로 훈련하는 일의 연속이다. 예를 들면, 새벽 4시에 갑자기 눈을 뜨고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제자리 뛰기를 하는 식이다. 처음 볼 때는 몽유병이나 정신병인 줄 알았다. (웃음) 그게 심장을 깨우는 방식이라더라.

그렇게 일어나자마자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한강 주위를 달리는 훈련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한다. 인생 자체가 복싱 빼면 아무것도 없는 거지. 인생의 모든 것이 거세되어 있고 유일한 목표만을 보고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지를 입증하는 사람이다. 사람 자체가 말이 없어서 묵언 수행을 하는 수도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민세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촬영을 이어오고 있다. 확정할 수는 없겠지만 촬영은 언제쯤 끝나게 될까.

박정범

처음 4년은 내가 촬영했고, 이후 3년은 공동 연출자가 맡았다. 지금은 내가 다시 이어받은 상태다. 원래는 2025년 초 이노우에 나오야에게 도전하는 시점에서 끝내려고 했다. 그렇게 작년에 매치를 마쳤는데, 다시 한번 도전하겠다고 하더라. 지금도 그는 다시 이노누에와 맞붙는 것을 목표로 모든 것을 걸고 훈련 중이다. 그래서 나 역시 그 여정을 계속 따라가고 있다.

김민세

장편 다큐멘터리는 처음이다. 이전에 단편을 만들 시절에 비슷한 시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박정범

학부 시절에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당시에는 인터뷰 중심의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였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은 관찰과 개입의 문제였다. 집의 형광등이 깜빡이는데 이 전등을 새로 갈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돈이 없는서 재활조차 못 하는 사람에게 밥 한 끼를 사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같은 문제들 말이다. 이런 문제로 공동 연출자와도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공동 연출자는 가능한 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어느 정도의 개입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개입을 숨기지 않는 것이었다. 카메라가 들어가는 순간 이미 현실은 변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관객에게 솔직하게 보여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 역시 영화 속 인물이 되기로 했다. 초기에는 김예준 선수만 단독으로 촬영했지만, 지금은 나와 함께 대화하는 장면들도 담고 있다. 체육교육을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그의 훈련을 돕기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영화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결국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을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정의 순수성을 주장하기보다, 현실과 부딪히며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 과정을 관객과 공유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윤리에 더 가깝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관객 역시 자신만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김민세

촬영 중에 개입을 결심하게 된 명확한 지점이 있었을까.

박정범

몇 차례 큰 부상을 겪은 뒤에는 생활비가 부족해 재활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내가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런 내용들은 촬영본이 아니라 자막으로 정리해 넣을 생각이다.

 

 

반성이자 고백으로서의 영화

ⓒ 영화 <사경을 헤매다>(2001)

김민세

학부 시절 체육을 전공했고 체육 교사를 꿈꾸다 군대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1997)를 보면서 영화를 꿈꿨다고 알고 있다. 이 영화의 어떤 면이 영화에 매료되게 했는가.

박정범

에로 영화를 빌려오라는 군대 고참의 심부름에 비디오 가게에 갔다가 그 앞에서 헌병대를 마주쳤다. 양심상 에로 영화를 빌릴 수는 없으니 강렬한 포스터를 보고 고른 영화가 <하나비>였다. 근데 정작 고참은 재미없어했고 나 혼자서 몇 번을 돌려봤다. 처음에는 마냥 재미없다고 느꼈는데, 두 번째로 보니까 찡하더라. 그리고 서너 번 보니까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이 크게 와닿았다. 분절된 연기나 이상한 리듬에서 나오는 비장미가 뒤늦게 이해되었다. 총을 쏘는데 아무도 피하지 않고, 결국 마지막에는 사람이 죽는 것도 보여주지 않고 연이 날아가는 이미지가 나오는데,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스타일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리고 전역을 했는데 운 좋게도 학교 안에서 영화 제작 실습이라는 수업이 처음 개설되었다. 그 수업에서 찍은 단편이 뉴욕 영화제까지 가게 되었고 영화제를 돌면서 점점 영화에 빠져드는 몇 년을 보냈다. 그래서 교보문고에서 '영화'가 들어가는 책들은 모조리 사서 홀로 공부했다. 방 안에 먹지를 붙이고 4~5개월을 영화만 보고 공부했던 기억이다.

김민세

그렇게 2001년에 연출한 첫 단편 <사경을 헤매다>가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그 후로 8년간 40여 편의 단편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아무리 독립적인 성격의 단편이라 해도, 그 정도의 속도로 영화를 연출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당시의 경험이 어떤 자양분이 되었는가.

박정범

<사경을 헤매다> 이후는 막노동해서 번 돈으로 영화를 만들고 계속해서 떨어지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주변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는 상황이다 보니 영화 대학원에 들어가 8편의 단편을 만들었다. 그 8편 중 마지막 작품이 <125 전승철>(2008)이다. 40여 편을 만들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뽐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에 질문을 던지고 도전하는 일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술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이상한 지점을 건드려서 그것의 가치를 질문하는 일인데, 옛날에는 내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포장했던 거지.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데 8년이 걸렸다.

김민세

무엇보다 제작적인 면에서 많은 경험들을 했을 것 같다.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려면 정말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을 동원하게 되지 않나.

박정범

처음에는 장황하게 쓰고 만들곤 했는데, 독립적인 환경에서 20편, 30편을 찍다 보니까 시나리오를 점점 미니멀하게 쓰게 되었다. 무엇보다 돈이 드는 일이다 보니까.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한두 명의 캐릭터로 원하는 주제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에 몰두했다. <125 전승철>도 한 회차로 하루 만에 찍은 영화다.

 

ⓒ 영화 <125 전승철>(2008)

김민세

<사경을 헤매다>와 <125 전승철>을 비롯해, 장편 작업까지 본인이 연출과 연기를 겸하고 있다.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나. 독립 제작 여건 안에서의 시도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다.

박정범

당시 나에게 영화는 포지션이 나눠지지 않은 하나의 덩어리였다. 배우 겸 감독으로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영화 제작의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직접 촬영이나 조명을 맡기도 했다. 한편, 어떻게 보면 기타노 다케시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연기와 동시에 연출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홀로 시간을 내서 여러 실험을 해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연기를 하다 보니 선후배들 영화에 출연 제안을 받아 주조연을 맡는 경험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남의 현장에서 연기하는 것이 어색하고 힘들었다. 내 영화를 만들 때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수십 번 동안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배우로서는 이미 수백 번 리허설을 한 셈이어서 연기가 편했다. 근데 남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내가 만들어주는 일은 부담스러운 거다. 이후에 상업 영화에도 출연해보고 경험이 쌓이다 보니 그 그림의 격차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보편성 안에 있다는 것을 실감한 이후부터는 연기에 큰 부담이 없다.

김민세

<125 전승철>과 <무산일기>(2010)의 주인공 전승철은 고 전승철 씨를 모태로 한 캐릭터다. 친구였던 그의 모습에서 영화적 인물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은 어떠했나. 단편을 만들던 시절 함께 하던 동료로 알고 있는데 그와 어떤 일화들이 있었을지.

박정범

탈북자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 중 하나는 견딘다는 것이다. 자신이 오래 살아온 북한이라는 세계와 남한은 다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통의 부재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언제 한 번은 내가 그 친구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신이 났는지 갑자기 북한 노래를 부르는 거다.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였는데, 그걸 듣고 아직도 북한 전체주의 사상을 못 벗은 거냐며 화를 냈다. 그렇게 서로 언성이 높아졌고 결국은 그 친구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말을 하더라. 나는 17년간 군 생활을 했고 고향 생각하면 아는 노래가 이것밖에 없다고. 나는 그가 남한에서 겪는 고통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태어나서부터 받았던 교육을 비롯한 그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고 악한 것으로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그 잘못된 생각을 깨닫는 과정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무산일기>는 전승철을 주인공으로 한 세 가지 단편의 아이디어를 합쳐서 만든 영화다. 교회에서 만난 여자를 좋아하는데 잘 풀리지 않는 이야기.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는 이야기. 그리고 한국에서 만난 형사에게 여러 도움을 받다가 북한에서 사람을 죽인 사실을 고백하는 이야기. 근데 어느 순간 이 세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졌고, 장편 시나리오로 고쳐서 <무산일기>를 완성했다.

김민세

<125 전승철>과 <무산일기> 모두 전승철 역을 직접 연기했다. 탈북자를 연기하는 것에 있어 부담을 느끼진 않았나.

박정범

원래는 그 친구가 직접 출연하려 했지만, 너무 일찍 죽음이 찾아와 버렸다. 그래서 내가 직접 그를 연기하게 되면서 스스로 약속했다. 내 옆에 승철이가 같이 있다고 생각하고 탈북자를 감정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자. 그래서 얼굴이 아니라 뒷모습을 찍었다. 한편으로는 관객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싶기도 했다. 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겠지만 안 보여줄 거야, 왜냐하면 당신들은 이 사람에게 한 번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일종의 복수심인 거다.

 

ⓒ 영화 <무산일기>(2010)

김민세

말한 것처럼 <무산일기>는 뒷모습의 영화다. 뒷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의 위치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는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다.

박정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을 때 뒷모습을 바라본다. 가령 누군가 엉엉 울고 있을 때 그 얼굴을 가까이 쳐다보는 사람은 없지 않나. 그저 옆에 앉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질 뿐이다. 관객에게 이러한 공황 상태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동안 지속되는 시간은 관객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내 영화적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뒷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지속 시간이다. 실제로 누군가를 바라볼 때면 10초 남짓한 시간에서 끝나지만, 그 이상으로 계속 바라보면 관객들은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곧 타자화이자 낯설게 하기, 일상적 풍경에서 기이함을 증폭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관찰하면서 한참 바라보면 그 사람의 인생과 오늘의 삶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김민세

<무산일기>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은 탈북인 친구들이 모인 생일 파티 장면이다. 지금까지 전승철의 뒤를 계속 쫓아오던 영화가 그 태도를 잠시 내려놓고 탈북인들의 일상을 거칠게 스케치하는 듯한 장면이다. 이후에 경철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긴 하는데, 씬이 시작할 때 우리는 영화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의 난데없는 대화를 듣고 있는 거다.

박정범

'드라마투르기'(Dramaturgy, 연출기법)나 내러티브를 집중해서 보는 관객은 그 장면을 보고 문법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니까. 이런 상황에서 보통의 영화는 설명을 해준다. 하지만 누군가의 실제 일상은 설명적으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설명 없이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고민해 보면, 그저 일상을 쌓아가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삶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일상의 플롯을 통해 영화의 극성을 미시적인 차원으로 눌러주면 그 이후에 터질 사건이 보다 극적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내러티브를 만드는 원칙이라 할 수 있겠다.

김민세

<무산일기>와 <산다>(2014)는 경험적인 이야기를 일상과 현실의 차원에서 풀어가지만, 비교적 최근작들인 <이 세상에 없는>과 <파고>(2019)는 우화적이거나 신화적인 성격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관심사나 접근법이 변화한 것일까.

박정범

<무산일기>와 <산다>를 만들면서는 일종의 강박 아래 있었다. 리얼리즘은 무엇인가. 그리고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고통의 미학은 어디까지인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무리 총을 쏘고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크게 다가오진 않기 마련이다. 근데 <무산일기>와 <산다>의 맞는 장면들을 보면 끔찍함에 눈을 가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폭력과 리얼리즘이 지닌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근데 <산다>를 마친 시점이 되니 몸의 고통을 통해 관객들의 공포를 건드리는 것이 영화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인 폭력보다 오히려 무형의 전조 같은 것들이 관객의 마음을 흔들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그런 장면을 만들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또 다른 톤 앤 매너와 리듬감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다.

앞서 우화 또는 신화라고 표현했지만,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판타지라고 말해보고 싶다. 구원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판타지. 구원을 바라지만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혹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 속에서 드라마를 쓰는 나만의 도식이 생긴 것 같다. 구원은 희생을 전제로 하고 희생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내 영화가 인물에게 구원을 주지는 않지만, 구원과 희생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던지는 것이 지금 나의 화두다. 그것을 위해서는 리얼리즘이든 형식주의든 자유연상이든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민세

<이 세상에 없는>과 <파고>는 확실히 플롯의 면에서 보다 도식적으로 다가온다. <이 세상에 없는>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전반부와 전혀 다른 톤 앤 매너로 나아가고, <파고>의 캐릭터들이 플롯을 이끄는 방향은 쉬이 예상하기 어렵다.

박정범

사실 <파고>의 플롯은 문법적으로 따지면 말이 안 된다. 경찰 영화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이들 둘이 나타나서 도망치는 추격 영화가 되고, 후반부에는 총을 겨누는 위협자가 갑작스레 주인공인 것처럼 등장한다. 그런데 결국 그 장면을 맺는 것은 상이라는 꼬마 아이다. 상이가 구원하려 하는 사람도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엄마가 아니라 예은이다. 물론 이들은 완전히 구원받지는 못하지만, 상이는 예은을 자기 집으로 데려감으로써 작은 희생을 감수한다. 이 우화 같은 이상한 알고리즘의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그냥 하루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런 도식을 많이 풀어놓다 보니 관객들이 영화 안에서 무엇을 본 것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로카르노에서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이 그런 지점들을 좋게 봐주신 것 같다. <파고>를 여성의 여러 세대를 통과하는 비극의 서사로 봐주셨는데, 나 역시 그런 메타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문학을 오래 좋아해왔고, 그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 영화 <파고>(2019)

김민세

앞서 <산다> 이후부터 고통을 몸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을 모색했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파고>의 상훈은 새로운 인상으로 다가온다. 그는 예은에게 물리적으로 폭력을 가하진 않지만 방관함으로써 그를 고통의 굴레에 빠뜨리는 인물이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뱉는 말들은 모순적이면서도 서늘한 폭력으로 다가온다.

박정범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상훈이 아이들을 도망치게 하지 않나. 그런 모순들이 돌고 도는 거다. 그게 다 옛날 사람들이 겪었던 일이다. 신안 염전 사건 같은 일도 마찬가지다. 다들 나쁜 일인 걸 알면서도 한다. 마을 공동체의 평범함 속에서 악이 스며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민세

영화 속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구분 짓지 않으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이들은 어떠한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계속해서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만 같다.

박정범

<산다>의 정철도 그러한 인물이다. 그도 사실 누나 연수의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해줘야 하는데, 누나를 방안에 가두고 무너진 집을 고치고 있는 거다. 더 이상 이상적인 생각을 못 하는 상황까지 와버린 거지.

 

개인적인 몸을 빌려 비개인적인 고통을 찍고 싶다

ⓒ 포토그래퍼 강현후​​​​

김민세

감독님의 영화는 '몸'의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감독님의 영화 속 인물들은 자꾸 몸을 부딪치고 싸운다. 정확히 말하면 싸우기보다는 누군가가 계속 맞는다. 영화에서 폭력은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데, 그것을 영화 속에서 '맞는 것'이라는 일관된 태도로 보여주고 있다.

본인이 스스로 영화에 출연하는 이유 중 하나가 '맞는 연기를 남에게 시키기 어려워서'라고 말한 것을 보았다.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시키기도 어렵고 찍기도 어려운 맞는 장면을 왜 계속 영화에서 찍게 되는가.

박정범

상업영화의 액션 장면과 실제로 때리고 맞는 장면의 타격감은 완전히 다르다. 가령 복싱 다큐멘터리 속 스파링을 볼 때면 정말 살아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 타격에는 합이 없거든. 합이 있는 액션과 합이 없는 액션의 가장 큰 차이는 호흡이다. 뛸 때나 때릴 때, 혹은 맞을 때 사람들의 숨소리가 다르다.

반면 매끄럽게 합을 맞춘 액션은 그저 정보일 뿐이다. 그 정보에는 진실이 없다. 정보로 주어진 액션은 또다시 정보로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계속되는 정보의 나열 속에 남는 것은 액션 합의 희열 밖에 없다. <본 시리즈>(2002-2007)가 처음 나왔을 때 즐거웠던 이유는 그 액션이 처음 보는 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합은 이제 식상해졌다. 그러니 판타지나 우주 같은 스펙터클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합 없이 실제로 맞는 모습은 고통의 체험이자 정서로 다가온다. 그 순간 관객은 액션 합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들어와 버린다.

김민세

현장에서 액션 장면을 만들 때는 어떠한가. 합을 거의 안 맞추고 실제로 맞고 때리는 식인지.

박정범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 최소한의 합은 맞춘다. 어느 부위를 때릴지 정하고 맞을 때 그 부위에 힘을 주는 식으로. 하지만 실제로 맞으니 아픈 건 당연하다. (웃음)

김민세

액션 장면 촬영에서 가장 힘들던 때는 언제였는가.

박정범

<무산일기> 촬영 당시 실제 탈북자 배우가 있었다. 운동선수 급으로 힘이 좋은 친구였는데 그 친구에게 맞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갈비뼈에 금이 갔다. 부상 투혼으로 촬영을 계속했던 그때가 제일 힘들었다. 그다음은 <이 세상에 없는>의 원호가 나를 나무 막대기로 때리는 장면이다. 아쉬운 건 롱샷으로 멀리서 찍다 보니 화면에는 그렇게 아프지 않은 것처럼 담겼다는 사실이다. (웃음)

김민세

일련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항상 맞는 역할이었다. <무산일기> 같은 영화에서 돌로 사람을 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저항에 가까웠다. 근데 <일주일>(2012)의 강철은 영화 후반부에 학생을 잡아서 잔인하게 고문한다. 선한 면모를 지닌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에게서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박정범

사실 그 반대를 의도했다. 박스에 학생을 가두고 꼬챙이로 치는 것인데. 진짜로 때리는 것이 아니고 꼬챙이가 박스 때문에 실제 몸에 닿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겁만 준 거지. 하지만 혹자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철의 분노가 그 정도는 되거든. 그 학생이 남을 때렸을 때 상대방이 느꼈을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려는 분노이자 복수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김민세

맞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하는 몸을 계속 담고 있기도 하다. 가령 <산다>의 초반 장면에서는 대사 한 줄도 없이 무너진 집을 세우기 위해 나무를 베고 돌을 깨부수는 장면이 지속된다. 노동하는 몸에서 어떤 흥미로운 점을 느끼는가.

박정범

<산다>에서 그 장면을 길게 보여준 것도 결국 지속시간의 문제다. 도끼로 나무를 베는 모습이나 장작을 나르고 돌을 미는 모습들, 이런 모습을 긴 시간 동안 관찰하다 보면 이 사람이 어떻게 몸을 쓰는지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 몸이 갖고 있는 성질을 고민할 수 있고, 삶의 투쟁을 통해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인간에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노동이라는 사실을 초반부에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다. 앞서 영화적이지 않은 단순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몸의 노동을 통해 몸부림치고 살아있다고 소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김민세

단순하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가장 원초적인 방법 아닐까.

박정범

그렇다. 내 영화 속에서 행복의 조건은 결국 의식주다. <무산일기>에서 정철이 선물 받은 오리털 자켓은 결국 커터칼로 그여 찢어진다. 교회에서 다 불어 터진 스파게티를 생전 처음 먹는다. 그리고 잘 곳이 없어서 차에서 잠을 자고 철거촌의 옷장에 들어간다. 이러한 의식주가 내 영화 속 인물의 계급, 욕망, 미래, 나아가 내러티브를 결정한다. 그래서 <산다>의 정철이 다 무너진 집을 고치고 있는 거다.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개인은 계급의 단계를 올리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 욕망을 몸의 노동, 입고 있는 옷이 변하는 것, 그리고 먹는 것이 변하는 것 등을 통해 보여준다. 물론 모든 관객이 그 정보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상 속의 변화는 너무 소소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정보들이 잠재적으로 쌓여나가 폭발력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영화 <산다>

김민세

외적으로 크고 작은 공통점이 있는 주인공 인물에게도 주목하게 된다. 수염이 나 있거나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의 한 남성. 일련의 영화를 거쳐 그 인물을 반복해서 마주하다 보면 마치 채플린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박정범

사실 내 영화는 채플린 영화랑 비슷한 점이 많다. 채플린의 떠돌이는 대공황 시대를 전후로 가장 가난한 길거리에서 떠도는 캐릭터 아닌가. 동시에 사모하는 어떤 여자를 쟁취하고자 노력하는 기사도 장르의 인물이다. 기사도 서사의 코미디 버전이 채플린이라면 내 영화는 우울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민세

직접 맡은 배역들 이름을 보면 어떤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125 전승철>과 <무산일기>의 전승철, <일주일>의 강철, <산다>의 정철, <이 세상에 없는>의 정철. <파고>에서는 상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그래서인지 지금까지의 캐릭터와는 사뭇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이러한 이름들이 본인에게는 어떤 느낌을 주는지.

박정범

명확한 의도로 시작했다기보다는 나도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된 사실이다. 여기서 '철'은 쇠를 뜻할 때의 철이 아니라, '맑을 철(澈)'이다. 물이 맑아서 바닥까지 보인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그 의미가 좋았다. 인간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계속 흐려진다. 가난 때문에 흐려지고, 모멸 때문에 흐려지고, 생존 때문에 흐려지고, 자기 안의 부끄러움과 욕망 때문에 흐려진다. 그럼에도 인간의 아주 깊은 곳에는 흐려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전승철, 강철, 정철 같은 이름들은 그런 마음에서 나온 이름들이다. 내 영화의 인물들은 결코 깨끗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더럽혀지고, 상처받고, 때로는 자기 자신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도 아직 바닥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맑은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함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끝내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근원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철'이라는 이름은 인물에게 붙이는 일종의 기도에 가깝다. 세상 속에서 아무리 흐려져도, 끝내 완전히 탁해지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파고>의 상훈은 조금 다르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직접 연기해 온 인물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고통의 중심을 끝까지 통과하는 인물이라기보다, 타인의 삶을 곁에서 바라보는 인물에 가깝다. 그래서 이름도 '철'의 계열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내가 그 인물을 어떤 깊이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김민세

직접 출연하는 영화들이 많다 보니, 그 캐릭터가 감독님 본인의 실제 인상과 삶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면도 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은 영화 안에 얼마나 반영된다고 볼 수 있을까. 혹은 그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나.

박정범

내 영화 속 인물들이 나와 무관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곧 나라고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영화는 고백이 아니라 변형이라 생각한다. 내 안에 있는 수치심, 분노, 가난의 감각, 버려진 사람들의 마음,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같은 것들이 인물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그것은 나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사회적 조건과 만나야 한다. 나는 한 인간이 왜 그렇게까지 버티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무너지는지 알고 싶다. 인간은 선하거나 약해서만 행동하지 않는다. 배고픔과 추위, 모멸, 가족, 빚, 죄책감 같은 아주 구체적인 조건들이 인간을 움직인다.

그래서 내 영화 속 인물들은 나의 초상이라기보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결과에 가깝다. 나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내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통과해서 어떤 인간의 상태에 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몸을 빌려 비개인적인 고통을 찍고 싶다.

김민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면. 항상 외톨이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왔다. <무산일기>의 전승철이 어쩔 수 없는 정체성으로 인해 소외당하는 인물이라면, <산다>와 <이 세상에 없는>의 정철은 스스로 세상과 벽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

박정범

아마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을 겪으면서 세상과의 소통은 영화나 글로만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이 세상에 없는>에서 정철이 하는 대사처럼, 아무도 없는 우주에 나 홀로 우주선을 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한 사람을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지 않나. 그런 나를 반영한 캐릭터가 영화에 나와서 세계와 싸우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박정범의 자본주의 모독

ⓒ 영화 <산다>

김민세

노동하는 몸에서 읽어낼 수 있는 또 다른 맥락 중 하나는 속죄다. <산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철이 문짝을 등에 지고 가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이런 노동의 모습은 그 자체의 의미를 넘어 어떠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동이 속죄라면, 이들의 죄성은 무엇일까.

박정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조건이 있지 않나. 부와 명예를 떠나 소소한 성취감을 통해 사람은 만족감을 느낀다. 내 영화는 이러한 보통의 행복이 불가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에게 행복이 왜 불가능한지 역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자본주의, 이 안에서 가난은 원죄나 다름없다. 엄청난 천재로 태어나서 기회를 잡지 않는 이상 계급을 넘어설 수는 없다. 이 고도 자본주의가 만든 감옥 속에서 보통의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구원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구원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배려와 친절. 예를 들면 부모에게 계속 학대받는 것 같은 옆집 아이가 어느 날 계단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말을 걸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 그때 손을 내미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내 영화는 보통의 행복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산다>에서 정철이 떼었던 문짝을 다시 달아주었다고 못 받은 돈을 받지는 못한다. 문짝 없이 살았던 아이의 부모가 돌아온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정철은 사람이 되었고, 이 아이는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궁극적인 구원은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의 시도를 통해 끝내 무언가는 변화한다.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내 영화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김민세

<파고>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상이와 예은이 바닷속에서 서로의 몸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 예은이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박정범

예은이 이제는 바닷속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느낌만을 전달하는 것이 내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믿을 만한 누군가가 생겼다는 것. 그것이 기적인 셈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연수가 상부에 전화하며 이 섬 전체를 두고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다시 시작했다는 듯이. 이런 뫼비우스의 띠 같이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변화가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김민세

자본주의 안에서 가난이 죄가 되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화폐로서 돈의 이미지에 주목하게 된다. 주로 '누군가가 훔쳐 달아난 돈'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에, 돈이라는 것 때문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지 반복해서 새롭게 보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화폐로서 등장하는 돈이 소재를 넘어 주요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이다. 자본주의 혹은 돈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

박정범

대부분의 생물은 무언가를 소비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소비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빼앗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뺏고 뺏기는 관계 안에서 인간의 최대 행복을 위해 만들어낸 시스템이 자본주의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는 쉽게 교환 가능한 화폐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탐욕을 낳았다. 화폐는 모든 것을 효율성의 가치로 획일화시킨다. 심지어 성까지도. 시대가 지날수록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무언가를 도구화하고 소비한다. 수치심 없이 탐욕만이 가득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에게 수치심이 없는 상태는 곧 문명이 무너지는 것과 동일할 테다. 예술만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근데 더 이상 아무도 책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는 세상이기에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이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동시대 예술가의 사명이겠지.

김민세

<무산일기>와 <일주일>, <파고> 등에서 돈은 현금화된 지폐로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돈을 주고받는 손의 몸짓들, 혹은 떨어진 돈을 줍는 몸짓들이 기억난다. 근데 요새는 지폐를 많이 안 쓰지 않나. 지엽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연출자에게 이건 큰 문제라 생각한다. 영화는 몸짓과 이미지로 작동하는 매체이기도 하니까.

박정범

변화에 맞추려면 신용 카드나 삼성 페이로 결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겠지. (웃음) 몸짓뿐만 아니라 내러티브 또한 변화할 것이다. 예를 들면, 지갑을 훔쳤다고 신용 카드를 몰래 쓸 수 없지 않나. 옛날에는 몰래 훔친 돈을 써도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 와서 훔친 신용 카드를 쓴다는 것은 감옥에 들어갈 각오를 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렇기에 지금의 인물들은 동시대에 맞는 또 다른 정서와 욕망을 가질 것이다.

 

ⓒ 영화 <무산일기>

김민세

<무산일기>와 <산다>에는 교회가 나오고, <파고>에서는 작은 성당이 등장한다. <일주일>에서는 부처상 앞에서 절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크든 작든 종교의 소재를 계속해서 건들게 되는 이유가 있을까.

박정범

사실 내 모든 영화는 나의 바이오그래피인 것 같다고 느낀다. 정말 어렸을 때 친한 친구들과 동네 교회를 많이 다녔다.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매일 기도하며 왜 우리 집은 점점 불행해질까 생각했다. 신은 나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해 일탈도 했고, 돌아온 탕자처럼 다시 교회에 나가는 과정을 반복했다. <무산일기>에서 전승철이 잠을 자기 위해 교회에 갔다가 문이 잠겨 철거촌으로 향하는 장면도 그런 생각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교회는 모든 힘없는 양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는데 왜 밤에는 잠겨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인본주의자 내지는 자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는 나에게 철학의 일부다.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종교를 믿는 행위에는 어떤 진실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이 깨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나의 관심사다. 그것을 계속 믿을 것인가 혹은 져버릴 것인가. 그런 순간에 <산다>의 정철은 문짝을 지고 가고, <이 세상에 없는>의 지수는 구덩이 안의 사람들을 모두 풀어준다.

김민세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는 용서다. 앞서 말한 정철과 지수의 초월적인 행동은 결국 용서를 위한 과정 아닐까.

박정범

그렇다. 스스로 용서와 거짓말을 함께 정의 내리곤 한다. 가령 거짓말로 세상을 다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거짓은 언제나 유죄인 것이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타인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분명히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그것을 감내할 용기 없이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기만이라 볼 수 있겠지. 그리고 그 용서의 과정에 따라오는 고통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용서하는 마음의 깊이의 문제다.

 

ⓒ 영화 <125 전승철>

김민세

겨울 영화가 많다. 인물들이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서리고, 올겨울을 어떻게 넘길지에 대해 고민한다. 특히 <125 전승철>은 겨울이 아니라면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다. 겨울이 주된 배경이 되는 이유가 궁금하다. 겨울이면 촬영 현장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박정범

내 영화에서 겨울은 계절이라기보다 '조건'이다. 겨울에는 인간의 숨이 보인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생존의 흔적이 입김으로 드러난다. 몸은 굳고, 손은 얼고, 걷는 일조차 노동이 된다. 그 물리적인 감각을 좋아한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가장 잔인하게 드러나는 계절이 겨울이라 생각한다. 내 영화 속 인물들이 겨울을 넘기는 문제는 단순히 날씨의 문제가 아니다. 돈이 없고, 집이 없고, 일이 없고, 관계가 무너진 사람에게 겨울은 세계가 자기 몸을 직접 공격하는 시간이다. 물론 겨울의 현장은 힘들다. 하지만 그 힘듦이 화면에 남는다. 배우의 입김, 굳은 어깨, 얼어붙은 손, 말이 줄어드는 얼굴 같은 것들은 연출로 만들어낼 수 없는 진실이다.

김민세

<산다>에서 정철은 봄이 되면 필리핀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겨울이 끝나는 곳 혹은 겨울이 없는 곳이 어떤 이상향처럼 제시된다.

박정범

완전한 이상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장소를 옮겨도 자기 고통을 함께 가져가기 마련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상을 필요로 한다. 봄, 따뜻한 나라, 여행 같은 말들은 인물들이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겨울이 끝나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사실 그것은 희망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거짓말에 가깝다. 그런데 인간은 때로 그런 거짓말 때문에 하루를 더 산다.

김민세

겨울을 배경으로 한 <무산일기>, <일주일>, <산다>, <파고>에서 반복해서 보게 되는 것은 철거된 곳이나 황량한 폐허의 풍경이다. 특히 <무산일기>의 몇몇 순간들은 마치 철거 공간이 도리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그 폐허로부터 무엇을 느끼는가.

박정범

폐허는 모든 것이 쓰러지고 사라지는 과정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다시 무언가가 시작될 공간이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쫓겨나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새집을 꿈꾼다. 그렇기에 그곳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장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아이러니에 끌린다. 그렇지만 그곳을 비극적으로만 보고 싶은 것은 아니다. 폐허 안에는 분명 절망이 있지만 다시 시작하려는 인간의 마음도 있다. 그 두 가지 정서가 충돌하는 순간, 폐허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영화적 사건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인물이 서 있는 사회적 조건이기도 하면서, 그 인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김민세

앞서 겨울이 일종의 조건이자 위기로 작동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인지 <이 세상에 없는>이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모습은 다소 낯설다. 처음부터 여름의 배경을 염두에 둔 것이었나.

박정범

처음부터 여름의 감각이 필요했다. 겨울이 외부의 위기라면 여름은 내부의 열기처럼 느껴진다. 습하고 숨이 막히고 모든 것이 쉽게 썩는다. <이 세상에 없는>의 인물들에게는 차가운 고통보다 안에서 부패하고 끓어오르는 감각이 더 중요했다. 겨울이 사람을 얼어붙게 만든다면 여름은 사람을 무르게 만든다. 감정이나 기억, 죄책감 같은 것들이 더 쉽게 번진다.

김민세

<이 세상에 없는>의 후반부는 잎이 무성한 숲이 중요한 영화적 무대로 기능한다. 그 숲과 <산다>의 앙상한 나무들이 놓인 공간은 다르다. <이 세상에 없는>의 공간이 숲속으로 이행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정범

<이 세상에 없는>의 숲은 피난처이면서 길을 잃는 장소다. 잎이 무성한 숲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서는 시야가 막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산다>의 앙상한 나무들은 고통이 바깥으로 드러난 풍경이었다. 마치 뼈처럼 말이다. 반면 <이 세상에 없는>의 숲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그 숲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마음과도 닮았다. 그 안에서 인물들은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앞서 <이 세상의 없는>의 후반부를 판타지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곳은 세상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간이다. 현실 바깥의 판타지라기 보다는 인간 내부의 가장 깊은 장소인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

 

보통 사람과 보통의 서사

ⓒ 영화 <이 세상에 없는>(2019)

김민세

많은 작품에서 스스로 연기했다. 그만큼 배우를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 고민이 엿보인다. 최근의 사례를 짚어보자면, <이 세상에 없는>의 배우들은 대부분 비전문 배우였다고 알고 있다. 당시 그들과 함께했던 비화를 들어보고 싶다.

박정범

비전문 배우가 거의 전부였다. 원호 역을 맡은 박종영 배우는 영화 출연 경험이 있었던 친구지만, 지수 역의 문예진 배우를 비롯한 대부분은 소개와 오디션을 통해 섭외했다. 영화를 위해 6개월간 연기 연습을 했는데, 그 사이 시나리오가 바뀌면서 배역이 삭제되어 떠나게 된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이 많은 작업이다. 사실 크랭크 인 이후에 시나리오가 한번 크게 바뀌었다. 원래 결말은 주인공인 내가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아이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촬영에 들어가고 나서도 그 결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 결말에는 질문이 없었다. 도전이나 모험이라기보다 답을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촬영 절반 쯤 지나 새로운 방향이 떠올랐다. 원호가 괴물이 되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갑작스럽게 내러티브의 방향을 틀어야 하는 위험한 결정이었지만, 촬영감독은 흔쾌히 받아들여주었다. 박종영 배우를 비롯한 배우들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을 기꺼이 감당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용기가 있기었에 가능했던 작업이다.

김민세

전라 상태로 숲을 뛰어다니는 연기는 배우로서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리스크 속에서 그 전라의 모습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정범

배우도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성기는 원호의 외로움, 슬픔, 분노, 적개심, 그리고 야만을 뜻한다. 관객들은 그것에 연민을 느낄 것이라고 설명하니 끝내 하겠다고 하더라. 나를 믿고 그런 용기를 내주어서 정말 감사했다. 앞으로도 그런 장면을 소화할 배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김민세

원호의 나체를 보고 장률 감독의 말을 떠올렸다. <망종>(2005)에 대한 인터뷰에서, "남성은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다 사람 같지만 나체로 있을 때는 다들 멍청하고 바보 같다"고 한 말이다. 나체가 된 원호에 대한 주석이 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박정범

인간이 발가벗지 않는 이유는 수치심이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이 사라지면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 탐욕만이 남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은 수치심 없이 탐욕만이 가득한 시대다. 가령 영상 클립을 보다 보면 의도치 않게 의도치 않게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여성들의 영상이 흘러나온다. 내가 봐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런 영상을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보고 웃는 시대다. 이 인터넷 세상 안에서는 보여주는 사람이든 보는 사람이든 수치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발가벗은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셈이다.

김민세

이승연 배우와도 많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몸짓 또한 주의 깊게 보게 되는데, 특히 <산다>에서 수연이 연극 오디션장에서 몸으로 슬픔을 표현하는 모습이나 스스로 자학하는 모습들은 정철이 보여주는 고행의 몸짓과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배우로서 접근하기 어려운 연기였을 것 같은데 준비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가.

박정범

감정을 설명하기보다 그 인물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 지를 오래 이야기한다. ‘슬프다, 아프다, 괴롭다’ 같은 말 보다 그 사람이 왜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지를 찾으려고 한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이 있고, 말보다 몸이 더 정직할 때가 있다. <산다>의 수연이 보여주는 모습은 단순히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인물은 이미 말의 영역을 지나온 사람이다. 그래서 몸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거나 파괴하려고 한다. 그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몸이 상처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트라우마는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몸이 먼저 말한다. 이승연 배우는 그런 상태를 아주 섬세하게 이해한다. 겉으로 크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쌓인 고통이 어느 순간 밖으로 새어 나오는 방식을 찾아내는 배우다.

 

ⓒ 영화 <이 세상에 없는>(2019)

김민세

장편 작업 때마다 본인의 실제 아버지를 배우로 기용하고 있다. 돌이켜 보았을 때 그는 일련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어른 같아 보인다. 이 비극적인 세계에 필요한 어른이라고 할까. <125 전승철>과 <무산일기>에서 형사로 나오긴 하지만, 형사라기 보다는 수갑만 들고다니지 아버지나 동네 아저씨 같은 친근한 느낌이지 않나.

박정범

<125 전승철>과 <무산일기>의 형사는 실제로 승철을 아버지처럼 챙겨주던 형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였다. <이 세상에 없는>의 아버지는 다소 다른 맥락으로 접근한 것 같다. 예전에는 특정 세대나 공동체의 부정적인 모습을 볼 때면 ‘저 사람들 왜 그럴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그런 문제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비롯해 세계가 병들어가는 모습이 결국 우리 어른들의 책임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어른이라는 존재는 지금의 아이들을 책임질 아버지와 어머니에 다름없다. 꼭 자신의 피가 섞인 자식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누군가의 아들딸이지 않나. 한 번 더 생각하면 내 아들딸인 것이나 마찬가지고, 크게 확장해 보면 이 세계의 문제 역시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생긴 변화한 생각들이다.

김민세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는가에 대해 낙관적인 편인가. 항상 고통으로 가득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듯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박정범

그것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면 문명은 사라졌을 것이다. 아무리 이상한 사건들로 가득한 세상이라도,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극소수고 나머지 99퍼센트의 보통 사람들이 문명을 지키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충돌과 후회, 반성을 반복하면서. 이성복 시인이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를 쓰는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 아름다움으로 살아가기에 불가능에 가까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름다움을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불가능하므로 포기하지 않고, 믿고, 전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간한다.

김민세

감독 본인의 아버지가 유사 아버지 같은 존재로 출연하긴 하지만, 정작 실제 아버지처럼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이 세상에 없는>에서 정철의 아버지로 등장하지만 사실 세상을 떠난 뒤 이승을 헤매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한편 <일주일>과 <산다>, <파고>에는 아버지 잃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거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거나, 아버지와 강제로 떨어져 있다. 이 아이들은 왜 아버지를 잃어야 할까.

박정범

어른들의 부재를 드러내고 싶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끌어주고, 보듬어주고,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계는 삐걱거리고 있다. 심지어 <파고>에서 예은을 아버지처럼 키운 상훈조차 예은이 겪은 피해를 묵인하고 있었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아이들의 노멀 라이프를 지켜주는 어른이 없으니 여성들끼리 연대하게 되는 것이 <파고>의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없는>에서 정철의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이유는 그가 아직도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어른이 부재하기 때문에 홀로 히키코모리처럼 생활하며 아버지의 환상을 불러온다. 만약 정철이 정상적으로 부재를 극복했다면 아이들의 어려움을 보고 바보같이 행동하지 않고 신고를 하는 등의 평범한 시스템에 따라 행동했겠지. 어른의 부재로부터 오는 결핍 때문에 두려워하고 도망치는 것이다. 그런 불합리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하나다. 아군이든 적이든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산에서 내려가는 것이다.

 

ⓒ 포토그래퍼 강현후​​​​

김민세

<이 세상에 없는>의 엔딩에서 정철을 비롯한 무리들은 죽어가는 원호를 업고 숲을 헤매다 부부가 살고 있는 평범한 민가에 도착한다. 부부의 도움으로 상황이 정리되는 와중에 카메라는 숲속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담은 프레임으로 시점을 변경한다. 이 엔딩과 대한 자세한 생각이 궁금하다. 특히 아버지의 존재를 불러오는 마지막 숏은 액자식으로 여러 시선과 프레임이 겹쳐보이는 인상이다.

박정범

영화의 중간에 정철과 지수는 부부의 집을 몰래 지켜보면서 이들의 모습이 마치 텔레비전 안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텔레비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부부의 일상이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는 원호를 중심으로 판타지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게 죄를 저지르고 난리를 치던 이 남자가 죽음의 위기 앞에서 눈을 뜨는 순간은 부부의 아기가 울음소리를 낼 때다. 이 아기는 과거의 자신이자 미래의 희망이다. 판타지가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에 원호가 이제는 현실로 돌아가고 어른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제목이 <이 세상이 없는>이다.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불러오는 이야기이고, 이 세상에 없는 판타지적인 이야기니까. 마지막 숏에서 불러오는 아버지의 시점은 곧 관객의 시선이다. 관객이 정철의 이야기라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면,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는 영화관의 A열 쯤에 앉아서 영화를 함께 보고 있는 것이다. 정철이 부부의 집을 보면서 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도 관객이 서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 나누길 바랐다.

김민세

아버지의 뒷모습을 걸고 정철 무리의 상황을 담고 있는 마지막 숏은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지속된다.

박정범

암전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관객은 영화가 끝났다고 받아들인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과 등장한 사람,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사람 모두 계속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김민세

자본의 논리 안에서 세상은 더 알 수 없는 곳이 되어가는 것 같다. 자본주의 안에서 죄가 되는 것, 혹은 자본주의의 악마성을 반복해서 영화 안에 다루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해 최근에 새로이 느끼는 것들은 있는가.

박정범

드라마를 포함해 네다섯 편의 시나리오를 써두었는데, 지금까지 만들었던 영화들과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긴 하다. 사랑과 신념을 통해 누군가가 희생하고 끝내 세계를 구원하는 이야기. 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이야기다. ‘기적 같은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내 영화들 공통의 화두인 것 같다. 가족을 소재로 쓰고 있는 시나리오도 있는데, 보편적인 가족의 위기를 다루다 보면 결국 자본주의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 사기를 당하거나, 사고가 나거나, 아프거나, 죽는 순간 어떤 가족이든 경제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나이가 되면 가장 많이 받는 연락 중 하나가 부고 소식인데, 누군가의 부재가 한 가족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런 변화 속에서 인간이 자본주의 앞에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다. 내게 영화적 소재란 결국 인간의 불행이고, 그 불행의 시작은 자본주의 안에서 벌어지는 충돌인 경우가 많다. 지금도 그 충돌을 어떻게 새롭고 낯설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예전 영화들이 청춘 드라마나 사회 드라마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누아르와같은 범죄 드라마의 형식 안에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도 관심이 있다. 또 블랙코미디처럼 위트와 풍자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에도 흥미를 느낀다. 결국 내가 오래 붙들어온 이야기들을 조금 다른 형식과 문법으로 풀어내면서 더 많은 관객과 만나고 싶다.

 

김민세

독립 영화를 비롯한 한국 영화의 제작 여건이 쉽지 않다. 변화하는 제작 환경 속에서 새롭게 시도해 보고자 하는 방식이 있는가.

박정범

많은 사람들은 팬데믹 이후 영화 산업의 무게추가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플랫폼으로 기울어졌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변화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 OTT를 통해 관객들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나라와 장르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작품을 바라보는 기준도 많이 달라졌다. 관객이 변하면 영화 역시 변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젊은 세대가 점점 더 빠른 정보와 자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책을 읽거나 예술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며 사유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다. 게다가 AI를 피할 수는 없다. 아직 부족한 점은 있지만 정말 단시간에 저렴하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도구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AI에 의존하고 싶진 않다. 주요 장면은 실사로 촬영하고 나머지 장면은 AI로 생성하는 방식은 가능할 것 같다.

김민세

진행 중인 김예준 복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실제적인 몸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예를 들어, <산다>의 첫 장면에서 펼쳐지는 노동의 몸짓을 AI로 생성해 내는 것은 쉬이 상상하기 어렵다.

박정범

기술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가는 창작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내가 해온 영화들은 다소 오래된 방식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는 다양한 형식과 목소리가 공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는 새로운 기술을 탐험하고, 어떤 영화는 인간과 삶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붙들고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창작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 아닐까. 나 역시 동시대의 감독들에게 많은 자극을 받는다. 그런 건강한 경쟁과 교류가 지속되었으면 한다.

동시에 평론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평론가들이 작품을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담론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감독들도 자극을 받고, 관객들도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다. 좋은 작품을 발견하고 해석하려는 평론가들의 노력, 그것을 함께 즐기고 이야기하는 관객들의 관심이 계속 이어진다면 한국 영화도 충분히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나 역시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웃음)

 

ⓒ 포토그래퍼 강현후​​​​

 

김민세

러닝 타임 또한 영화의 주요한 포맷이다. 이전에 긴 영화는 개봉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긴 러닝 타임의 영화를 고수하게 된다고 했다. <무산일기>는 2시간을 꽉 채웠고, <산다>와 <이 세상에 없는>을 거쳐 점점 길어지고 있다. 긴 러닝 타임의 영화를 고집하게 되는 이유나 나름의 기준이 있을까. 본인이 원하는 호흡 때문일 수도 있고,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나 이야기가 많은 것일 수도 있겠다.

박정범

요즘 쓰고 있는 시나리오들을 보면 솔직히 서너 시간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인물이 많다 보니까. 지금까지도 한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보다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길어지고 복잡해졌다. 가령 이번에 스고 있는 드라마 시나리오의 첫 버전을 제작사에 보여주니까 이런 말을 하더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써오면 어떡하냐. 등장인물이 100명이 넘는데 이건 300억으로도 못 찍는다”고. (웃음)

돌이켜보면 예전에는 서사의 효율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것 같다. 영화가 길어지더라도 그 안에 담긴 가치가 있다면 관객도 끝까지 따라와 줄 것이라는 낭만적인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플롯과 인물이 많아질 수록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가기 버거워진다는 위험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최근에는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더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더 깊이 들어올 수 있는 방식으로 다듬어 가는 일인 것 같다.

김민세

효율성과 경제성은 영화와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인 것 같다. OTT를 비롯한 동시대의 흐름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역사가 그러한 방식으로 흘러왔다. 그중에서도 개인의 창작적 야망과 산업의 경제성이 한국에서 잘 맞아떨어졌던 경우가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감독들의 영화일 것이고.

박정범

2000년대 초반에는 400만, 600만 정도 되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1년에 천만 영화가 서너 편은 나오곤 했다. 지금은 그런 일이 훨씬 드물어졌다. 관객들이 냉정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선택지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 OTT에서는 <왕좌의 게임> 같은 작품들이 등장했고,. <하우스 오브 카드>를 비롯한 수준 높은 해외 드라마들이 전 세계 관객들과 만났다. 관객들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콘텐츠를 바라보는 기준도 높아졌다.

이제는 극장 영화와 OTT가 서로 경쟁하는 관계라기보다, 좋은 콘텐츠가 관객을 만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좋은 이야기와 매력적인 캐릭터, 그리고 지속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은 더 오래 살아남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결국 창작자 입장에서는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관객들이 왜 이 이야기를 봐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김민세

작품 내외를 비롯한 관심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최근 관심을 두고 주목하고 있는 인물이나 사건들이 있을지.

박정범

매일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스크랩을 해둔다. 어떤 이야기를 구상하면 관련된 소재를 모으기 위해 며칠씩, 몇 시간씩 자료를 찾아보곤 한다. 접근 방식은 달라져도 결정적인 화두가 크게 변하진 않는다. 나는 쓰러져 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리고 쓰러져 가는 것은 다시 일어나는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위기와 고통 속에서 변화를 시도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스포츠 드라마에 비유하자면, 나는 우승 장면보다 우승을 꿈꾸며 훈련하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결과가 아니라 그곳까지 가기 위해 견디고 버티는 과정 말이다. 어쩌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도 그런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승리든 패배든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속에 있는 노력이라는 보통의 서사다.

[인터뷰 김민세 영화평론가]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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