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재] 꿈에서 깬 얼굴들
[장건재] 꿈에서 깬 얼굴들
  • 김민세
  • 승인 2026.04.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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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지도, 혹은 마음의 풍경으로서 장건재의 영화

영화는 제작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개별 영화의 스타일을 비롯한 시각적 전략은 감독 개인의 미학보다 제작 환경의 효율성에 따르기 마련이고, 미국으로 대표되는 영화의 역사는 이 체계를 정교화하는 과정이었다. 한편,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이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자본의 논리에서 '독립'한 이들의 영화는 영화를 둘러싼 여러 요소들-제작비, 로케이션, 배우, 스태프 구성 등-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야 하고, 그 방법을 실천하는 과정이 곧 영화의 미학과 직결한다. 가령, 이들은 투자사의 투자를 받기보다는 제작 지원 사업의 도움을 받거나 사비로 제작비를 충당한다. 또한 세트를 만들기보다는 야외로 나가거나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선에서 실제 로케이션을 모색한다. 그리고 소규모의 스태프들, 서로 간의 신뢰로 묶인 배우들과 함께하거나 때로는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제작 여건은 단순한 한계가 아니라 하나의 영화가 탄생할 수 있는 독자적인 환경이며, 독립영화 감독이 지닌 공통의 숙명은 그만의 환경을 어떻게 구축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는지에 대한 고민하는 일이다.

개별 독립영화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 자체로 대안적인 제작 환경과 방법론을 내포하고 드러내는 텍스트가 된다. 최근 한국의 사례를 돌이켜 보았을 때,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를 거친 한국 독립영화가 유독 반복하여 보여주는 것은 창작자로서의 자아를 드러내는 자기 반영적 소재다. 영화감독, 배우, 소설가, 시인 등의 직업을 가진 주인공을 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며, 이때 영화 촬영 현장, 창작 워크숍 현장 등은 적지 않게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독립 예술영화의 제작 환경이 축소되고 있는 실상과 무관하지 않다. 제작 환경의 축소에 따라 감독들은 '큰 세계'를 상상적으로 구성하기보다는 비교적 그들의 일상과 가깝고 지속적인 관찰이 가능한 '작은 세계'를 들여다본다. 이 '작은 영화'들에서 내용과 소재보다는 구조와 실험이 두드러지는 이유 또한 재현의 반경이 좁아진 환경 속에서 '무엇을 보고 들려줄 것인가' 보다 '어떻게 보고 들려줄 것인가'가 중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의 독립영화들이 창작자를 주인공으로 다소 피상적인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반복은 곧 지금의 영화가 새로운 가능성을 더듬어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장건재의 영화는 동시대 한국 독립영화의 경향과 단순히 나란히 놓이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영화는 앞선 사례들과 유사하게 자기 반영적인 방식에서 출발한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소박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신혼부부(<잠 못 드는 밤>(2012)), 일본 시골 마을을 떠돌며 사전 조사를 하는 영화감독(<한여름의 판타지아>(2014)),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2022)), 연기 워크숍을 지도하는 선생님(<최초의 기억>(2025))이라는 점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감독의 분신에 가까운 캐릭터임을 의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감독 개인의 반영을 넘어선 하나의 독자적인 인물로서 영화 안에 살아 숨 쉰다. 이들은 감독의 목소리가 아닌 그 인물로서 발화하고, 그만의 리듬으로 영화 내외부를 거닐며, 몇 년간 적지 않은 독립영화들이 벗어나지 못한 일상성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이상한 경로를 거쳐 낯선 장소에 도달한다. 즉, 장건재의 영화는 지난 몇 년간 한국이라는 영화 제작 환경이 지닌 곤경과 한계를 통과하면서도, 오늘의 독립영화가 맞닥뜨린 매너리즘을 일찍이 교란하는 듯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 결과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그의 영화들은 어느새 정형화된 한국 영화의 풍경을 향한 비평으로서 다가온다.

 

1.

장건재의 초기작에서 반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도적 교육에 반항하는 남학생 캐릭터다. <학교 다녀왔습니다>(1998)에서 <꿈속에서>(2007), <회오리바람>(2009)으로 이어지는 그의 소년 캐릭터는 어김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다니며, 순수한 열정으로 여자 친구에게 구애하고, 교복을 입은 채로 담배를 태우는 탈선을 즐긴다. 이 소년들이 보여주는 일상적 차원의 일탈은 기존의 충무로 영화에서 볼 수 있던 불량 청소년의 모습과는 다르다. 마치 일기장을 들추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고하듯, 장건재의 초기작은 1990년대에 장르화된 한국 남학생의 전형을 자기 반영의 방법을 통해 일상의 차원으로 옮겨놓은 결과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교생의 사랑 이야기와 실제 그의 학창 시절 과거가 얼마나 일치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이쯤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초기작에 있어 자기 반영성은 꽤 중요한 문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상성은 그 실천의 과정에서 드러난 태도다. 이것은 그만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충무로 바깥에 놓인 독립 감독의 제작적인 현실에 비롯할 것이다.

또한, 그의 초기작 속 소년은 자기 반영인 동시에 고전영화의 낭만성을 은밀하게 되살리는 존재다. 등교하지 않은 채 밖을 거닐고, 때로 질주하고, 끝내 학교 담장을 넘어 뒷산을 오르는 이들의 모습은 어떻게 보더라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속 앙투안 드와넬이다. 한편, 흥미롭게도 <회오리바람>의 제목은 극 중 태훈과 미정이 흥얼거리는 노래 '인생의 소용돌이(LeTourbillon de la Vie)'에서 인용한 것인데, 해당 곡은 트뤼포의 <쥴 앤 짐>(1962)의 주제곡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프랑스 누벨바그로부터 영향받은 감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초기의 장건재는 특정 미학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반영적 이야기를 거칠게 스케치하는 것만으로 어떤 영화적 실천이 가능할지 시도해 보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자신의 지난 삶을 누벨바그의 낭만적 인물들과 겹쳐두고 시네필적 상상을 영화로서 이뤄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회오리바람>으로 대표되는 그의 초기작들은 여러 의미에서 낭만적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듯한 영화다.

첫 장편인 <회오리바람> 이후로 그의 영화가 지닌 자기반영적 성격과 일상성은 보다 제작 환경의 측면과 연관하기 시작한다. 가령, <회오리바람>이 자기반영적인 시나리오에서 출발해 그것을 재현하는 과정이었다면, 이후의 작품은 제작적인 환경에 맞추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서 고려 대상이 되는 제작 환경이란 무엇보다 장소의 문제다. 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장소, 즉 촬영이 가능한 로케이션을 설정하는 일은 그 자체로 돈과 시간이 드는 일이다. 그래서 장건재는 만들어진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해 컨셉적인 공간을 세팅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 돈과 시간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장소에서 이야기를 발견한다. 그는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써놓고 그것에 맞는 생활감을 지닌 집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독립 제작의 환경 안에서 효율적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곳이 자신의 신혼집이기 때문에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잠 못 드는 밤>). 혹은 어느 지역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쓰고 적합한 로케이션과 투자처를 물색하는 것이 아니라, 각 영화제의 지원으로 주어진 로케이션 안에서 가능한 이야기를 상상한다(<한여름의 판타지아>, <달이 지는 밤>(2020), <최초의 기억>).

제한적인 제작 환경 안에서 서사를 비롯한 영화적 요소들은 확장되기보다 오히려 그 한계에 맞춰진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 자체의 한계를 의미하진 않는다. 장건재는 오히려 현장의 연출과 관련해 '열린 태도'와 '즉흥성'을 발휘해 유의미한 순간을 끄집어낸다. 나아가 그 제한으로 인해 장소는 더욱 구조적으로 다가온다. 카메라가 반복해서 담고 있는 한정적인 공간들이 미니멀한 서사의 선(線)에서 중요한 변곡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잠 못 드는 밤>에서 부부가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는 직장의 공간과 끝내 그 둘이 다시 모이는 신혼집의 공간.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1부와 2부라는 서로 다른 서사가 중첩되며 두 차례 반복되고 변주되는 공간.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에서 분절된 서사의 빈 부분을 보충하며 오가는 교수 연구실과 연극 극장의 공간. 그리고 <최초의 기억>에서 영화 안과 바깥을 구성하며 픽션성을 교란하는 무주와 서울이라는 공간. 장건재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오가고, 반복해서 거닐고, 분절되어 있으면서도 서로를 보충하는 공간은 그 자체로 서사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틀로써 기능한다.

한

ⓒ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특히,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제작적 여건의 한계를 활용하는 그의 연출적 장기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당시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한국이 싫어서>(2023)의 영화화 작업이 연기된 상황에서 그는 새로운 두 가지 작업을 병렬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주희 역의 김주령과 함께 <잠 못 드는 밤>의 주희와 느슨하게 연결된 스핀오프를 구상한다. 팬데믹으로 그가 근무하는 학교가 비어 있었기에 자신의 연구실을 활용했으며, 시간이 가능할 때마다 일주일 혹은 한 달의 간격을 두고 긴 호흡으로 촬영했다. 동시에 그는 호진 역의 문호진을 포함한 배우들과 별도의 연기 워크숍을 진행한다. 워크숍은 연극 극장을 배경으로 한 단편 영화 제작 실습으로 이어졌고 그 단편은 주희의 이야기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별개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두 영화는 하나의 영화로 완성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를 오마주한 영화다. 이에 대해 장건재는 "1962년 작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무대를 파리의 거리에서 2022년 한국의 실내극으로 옮겨 와 만들고자 했던 것이 출발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초기작에서부터 누벨바그의 활력과 낭만성을 자기 반영적 서사 안에서 구현하고자 시도한 바 있으나,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에서 아녜스 바르다를 불러오는 것은 다른 맥락으로 다가온다. '1962년 파리의 거리'에 있던 아녜스 바르다와 '2022년 한국의 실내'에 있는 장건재 사이의 간극. 코로나 시대의 장소, 한국이라는 땅, 그리고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환경 안에서 그는 거리가 아닌 실내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한계 안에서 적응된 결과로서 또 다른 영화를 만든다. 교수 연구실과 연극 극장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은 사회적 거리 두기의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그곳은 이혼을 앞둔 부부의 이야기가 지닌 분절의 감각을 체화하면서도 코로나 시대의 트라우마를 함축한 장소로서 작동한다.

장건재에게 자기 반영과 일상은 단순한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제작 조건을 가능한 서사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거리를 거닐던 소년들의 초기작에서 코로나 시대의 실내극까지, 그의 영화는 축소된 조건을 받아들이며 갱신을 거듭한다. 그렇다면 그 장소 안에 놓인 구체적 인물들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들은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어떤 몸짓을 보여주는가? 이 질문이 유효한 이유는 제한적인 제작 환경 안에서 영화의 밀도를 결정짓는 요소가 무엇보다 배우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 영화 <잠 못 드는 밤>

2.

장건재는 배우와 긴밀하게 협업하는 연출자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배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스스로 인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소 자기 반영적인 극 중 인물들이 각자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령, <잠 못 드는 밤>은 '30대 신혼부부의 일상'이라는 자기 반영적인 시놉시스로 시작해서 배우들과 함께 이야기를 구상한 결과다. 그는 주인공은 어떤 직업을 갖고 있을지, 배우 본인은 결혼 이후의 부모 관계와 출산 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배우에게 질문하고 그것을 영화 내부에 반영한다. 또한 <잠 못 드는 밤>의 많은 장면들은 정해진 대사 없이 즉흥 연기만으로 만들어졌다. 장건재는 수없는 테이크의 반복을 통해 배우의 진실한 목소리가 발생하는 순간을 기다리다가 포착하는 방식을 택했고, 그런 면에서 그는 기다림과 포착을 중시하는 다큐멘터리적인 연출자다. 여기서 '진실한 목소리'란 '연기하지 않는 연기'이며, 이로 인해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존재하는 모양은 감독 개인의 반영으로서 경직된 것이 아니라 다성적인 측면을 가진다. 다시 말해, 장건재는 자신 안에서 나온 이야기의 권리를 오롯이 배우에게 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스크린상으로 보이는 것보다 배우가 연기 중에 무엇을 느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그의 태도는 이러한 그의 연기 연출론을 증명한다.

<잠 못 드는 밤>의 한 장면은 배우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나누는 실제 대화를 자연스레 촬영한 과정에서 탄생했다. 당시의 배우들이 실제로 결혼한 상태이거나 결혼을 앞둔 한국의 30대 남녀였기에 이러한 즉흥적인 포착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야기는 촬영 사전 단계뿐만 아니라 촬영이 진행 중인 현장 내부에서도 발견된다. 일본 나라현의 작은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이러한 다큐멘터리적 포착의 순간으로 가득하다. 영화의 1부는 영화감독 김태훈이 고조시 곳곳을 거닐면서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인터뷰이로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실제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며, 그들이 이야기하는 내용 또한 자연스러운 인터뷰 상황 안에서 발화된 것이다. 촬영 당시 장건재는 비전문 배우와의 원활한 협업을 위해 카메라 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어로서 자신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2부의 러브 스토리를 위한 질료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1부와 2부는 장건재가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드는 방법론을 여실히 드러내는 구조다.1부가 감독으로서 배우에 대한 경청의 태도를 드러낸다면, 2부는 그 경청의 과정에서 탄생하는 이야기이자, 배우가 자신의 목소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잠 못 드는 밤>과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 배우와 연기에 대한 그의 탐구가 지속되는 방식은 거칠게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전문 배우에게서 '연기하지 않는 연기의 순간'을 끌어내는 방식이며, 하나는 비전문 배우가 영화 내부에 자연스레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방식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이후의 장건재는 이 두 가지 방식을 다양한 각도로 실천할 수 있는 캐릭터 내지는 이야기의 형식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그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직업적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만남을 위해 어딘가로 방문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김태훈은 감독으로서 영화를 찍기 위해 일본의 소도시 고조로 향하고, 공무원 유스케와 현지 주민 겐지에게 마을 소개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달이 지는 밤>의 민재는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고향인 무주로 돌아와 공무원으로 취직한다. 그는 군청 공무원으로서 마을 어른들의 집에 방문해 안부를 살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때 영화감독과 공무원이라는 직업적 특성은 낯선 타인의 장소에 진입할 수 있는 전제가 되며, 직업이라는 약속의 상황 안에서 놓인 이들은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그만큼 이들의 인상적인 모습은 조심스레 악수를 청하면서 손을 내미는 몸짓, 발화자의 말에 따라 주변을 둘러보는 몸짓,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몸짓에서 발견된다.

 

ⓒ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김태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고조 주민들, <달이 지는 밤>에서 민재의 근무 중에 등장하는 무주 주민들은 현지 비전문 배우들이다. 그렇기에 영화감독과 공무원이 타인의 장소에 방문해 질문하고 경청하는 모습은 곧 연기자로서의 전문 배우가 비전문 배우와 만나는 방법이다. 또는 픽션으로서의 영화가 논픽션의 존재에 발을 들이고, 말을 걸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를 수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질문과 대답 그리고 경청이라는 하나의 형식. 이 형식 안에서 비전문 배우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전문 배우들은 그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연기하지 않는 연기의 순간에 다다른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와 <최초의 기억>처럼 본격적으로 워크숍 형태의 영화를 만들기 이전부터, 장건재는 배우가 진실한 목소리를 획득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워크숍 영화라는 장소를 더듬어댄다. 이때 신혼집과 고조, 무주는 그 워크숍이 펼쳐지는 장이 된다. 나아가 이 장소들은 세계의 기척을 드러내는 풍경으로서 인물들을 한 아름 감싸안고, 배우들은 이에 자연스레 감응하는 방식으로 조화를 이룬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에서 상황은 달라진다. 주희에게서 볼 수 있는 몸짓이 연극과 교수로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임은 어김없지만, 이번에는 타인의 장소에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소로 타인이 들어온다. 그의 교수 사무실로 찾아온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고민과 상처들을 털어놓고 주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죽음 앞에 놓인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여기서 장건재는 연기에 대한 또 다른 메타포를 발견한 것 같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달이 지는 밤>의 경청이 조심스레 손을 건네며 타자의 세계에 스며들기 위한 태도였다면,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의 경청은 타자의 틈입을 받아들이고 그에게서 자기 자신의 얼룩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다. '연기하지 않는 연기'는 연기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놓인 세계에 직관적으로 반응하는 것인 한편, 끊임없이 '나'와 타자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끈질기게 답을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학생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죽음을 더듬어대는 주희와, 반복되는 연극 안에서 결혼 생활을 겹쳐보는 호진의 모습은 결국 이러한 연기의 속성을 꿰뚫는다.

워크숍 영화라 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이 파고드는 것은 바로 이 문제다. 연기라는 것이 타자의 세계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 목소리로 발화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 목소리를 내는 얼굴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영화는 연기 워크숍의 일환으로 무주에서 촬영한 극중극 1부로 시작한다. 두 명 혹은 세 명으로 짝지어진 인물들은 무주라는 한 장소에서 각자의 서로 다른 고민과 기억,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2부가 시작되면 1부의 이야기는 영화였음이 밝혀지고,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이 워크숍의 마지막 단계인 모방 독백을 준비하며 각자의 상처를 고백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최초의 기억>의 무주는 영화라는 픽션의 시간과 무관하게 세계의 기척으로서 존재하는 <달이 지는 밤>의 무주와 다르다. 극중극을 위해 픽션화 된 무대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 <최초의 기억>의 무주는 주희의 교수 사무실, 호진의 연극 극장처럼 '나'와 타자가 독대하고 공존하는 내면적 공간처럼 작동한다. 배우라는 몸은 무주의 풍경 안에 놓이지만, 그들이 자기 자신의 기억을 꺼낼수록 풍경은 오히려 배우라는 몸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3부에 다다라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은 '나'도 아니면서 타인도 아닌 존재를 드리운다.3부에 걸쳐 장건재는 '나'와 세계를 겹쳐 놓음으로써, '나'와 타자를 마주 보게 함으로써, 그리고 '나'와 타자의 등을 맞댐으로써 배우와 연기를 구성하는 몸과 목소리의 관계를 탐구한다.

장건재는 인물이 풍경에 자연스레 감응하는 몸짓을 포착하고, '나'와 타자 사이에 있는 모호한 존재의 목소리를 끌어내는 데 영민한 연출자다. 처음으로 소설 원작을 영화화한 <한국이 싫어서> 또한 배우의 몸과 목소리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탐구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그 중심에는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향한 한국 여성 계나, 그리고 그를 연기한 고아성이 있다. 장건재의 영화는 종종 그러했지만, <한국이 싫어서>에서 유독 계절감과 그것에 감응하는 몸은 중요하게 다가온다. 서울의 겨울에 떨고 있는 계나의 몸과 뉴질랜드의 여름에 피부를 그을린 계나의 몸. 고아성은 서울과 뉴질랜드라는 각각의 세계에 자연스러운 몸과 몸짓으로 반응함으로써 스크린 내에 현존한다. 그렇기에 끝내 햇볕에 그은 피부로 서울로 돌아온 계나의 모습은 보다 이질적이다. 또한 영화 내내 일인칭의 시점으로 흐르는 계나의 목소리. 계나의 내레이션은 원작 작가 장강명이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그리고 장건재가 직접 취재하며 듣고 기록했던 유학생과 이민자들,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위해 몸부림치는 젊은 한국 여성들의 목소리다. 그 또한 한국 여성으로서 발화자의 위치에 선 고아성의 목소리는 계나라는 개인의 서사를 뛰어넘는 다성적인 차원으로 다가온다. 이때 계나의 몸과 목소리는 인물과 배우에 대한 장건재의 작가적 접근이 정치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3.

장건재의 영화는 제한적인 장소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인물은 그 장소에 자연스레 현존하는 방식으로 스크린 안에 놓인다. 카메라는 그 장소와 인물이 친밀하게 교감할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찾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드라마틱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장건재의 영화는 일상적임을 넘어서 때로 소박하게 느껴진다. 이때 우리가 자주 보게 되는 이미지는 두 사람이 한 프레임에 놓인 숏이다. 두 사람이 한 프레임 안에서 각자의 몸짓과 목소리로 존재함으로써 조화를 이루고, 카메라는 긴 시간 동안 그 과정을 지켜본다. 다시 말해, 장건재가 카메라를 놓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자연스레 공존할 수 있는 장소를 구획하는 일이다. <회오리바람>의 태훈과 미정을 담은 숏과 여관방이라는 장소. <잠 못 드는 밤>의 주희와 현수를 담은 숏과 신혼집이라는 장소.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남녀를 담은 숏과 숲속 마을의 빈집이라는 장소. <달이 지는 밤>의 남녀를 담은 숏과 유령이 돌아다닌다는 집이라는 장소.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의 주희와 손님을 담은 숏과 교수 사무실이라는 장소. <최초의 기억>의 한 커플을 담은 숏과 목욕탕이라는 장소. 여기서 숏과 장소라는 말은 어느새 구분되지 않으며, 장건재는 이러한 두 사람을 담은 숏의 장소적 가능성에 매혹당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잠 못 드는 밤>에서 신혼부부의 일상적 거리감을 담아내기 위해 4대 3의 화면비를 선택한 사례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영화 <최초의 기억>

두 사람이라는 장소를 응시로 이루어진 그의 영화의 행간을 수놓는 것은 그 인물들이 걷거나, 질주하거나, 어디엔가 몸을 싣고 이동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발걸음을 맞추며 길을 따라 걸을 때.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질주할 때. 몸을 실은 자동차나 배가 매끄럽게 움직일 때. <회오리바람>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소년은 <잠 못 드는 밤>에서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부부가 되고,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차를 타고 산속으로 향하던 영화감독은 <한국이 싫어서>에서 한국을 떠나 택시와 배에 몸을 싣는 여성이 된다. 이동의 경로와 규모는 다르지만 그때마다 장건재는 공간 안에서 인물들이 움직이는 이동의 감각만이 만들 수 있는 힘을 믿는다. 그리고 그 순간은 언제나 가슴 뛰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이 이동은 두 사람의 숏, 곧 두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몸짓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향하는 장소는 언제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영화가 결말에 다다르는 어느 순간부터 인물들은 그 전과는 다른 리듬으로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동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상한 장소에 도착한다. 가령, <회오리바람>의 후반부.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서 서성이던 태훈은 학교를 빠져나와 담을 넘고 뒷산을 거닐기 시작한다. 겨울 햇빛 아래서 가쁘게 숨 쉬는 태훈이 숙였던 고개를 들면 황량한 사막이라는 초현실적인 풍경이 있다. <회오리바람> 이후, 그의 영화에서 이런 극단적인 초현실의 이미지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인물들이 걷게 되는 낯선 경로는 여전히 초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잠 못 드는 밤>의 아내 주희가 잠에서 깨고 남편 현수를 찾기 위해 홀로 아파트 단지 안을 헤맬 때. 곳곳에 수목이 놓인 지극히 일상적인 단지 내의 풍경은 잃어버렸던 자전거가 뜬금없이 발견되는 순간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의 공간이 된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의 배달부가 대학교 건물 복도를 가로지르며 걸을 때. 주희의 사무실만을 지켜보고 있던 영화는 방 밖으로 나가 새로운 공간을 보여주더니, 분절되어 있던 호진의 연극 극장을 상상적으로 이어버린다. 이 경로를 잇는 인물들의 걸음은 좌표를 알 수 없는모호한 장소로영화를 데려다 놓는다.

때로 유령적 존재들이 현실의 이미지 안으로 갑작스레 침범할 때 장건재의 세계가 지닌 모호함의 효과는 극대화된다.<회오리바람>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와 태훈을 부르는 미정, <잠 못 드는 밤>에서 현수의 회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희와 그 옆의 아들,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김태훈 앞으로 두 차례 등장하는 어린 소녀, <달이 지는 밤>에서 살아 남은 자들의 공간을 배회하고 새벽녘의 거리를 따라 걷는 망자들, <한국이 싫어서>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계나가 뒤늦게 마주하는 죽은 경윤이 그러하다. 두 사람의 이미지를 비트는 존재들. 이들은 현재의 이미지에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가능성을 불러오고, 이승의 이미지에 저승의 기척을 불러온다. 누군가의 등장으로 인해 시공간을 비롯한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조차 뒤틀리는 순간 장건재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봉합하기 보다는 그저 그것의 출현을 단절없이 지켜보는데, 그 무심한 응시야 말로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표면적 일상성을 더욱 기묘하게 만든다.

현실 속 인물들이 이질적인 장소로 걸어 들어가면서, 또는 현실 속으로 이질적인 존재가 출현하면서 그의 영화는 환상성에 가까운 풍경으로 나아간다. <회오리바람>의 뒷산은 사막이 되고, <잠 못 드는 밤>의 아파트 단지는 숲이 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달이 지는 밤>의 거리는 기억 속의 존재와 망자의 혼이 떠도는 장소가 되고,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의 캠퍼스 복도는 미로가 된다. <한국이 싫어서>의 돌아온 한국은 죽은 자와 대화하는 장소가 되고, <최초의 기억>의 모방 독백을 담고 있는 프레임은 인물들이 공유하는 내면의 심연이 된다. 현실의 시공간에 또 다른 시공간의 기척 내지는 잔상이 은밀하게 드리우는 순간. 어딘가를 계속해서 거닐고 이동하는 장건재의 인물들은 이 다층적인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는 순간을 찾아 떠도는 것 같다. 특히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에서 미로 같은 캠퍼스를 헤매다가 비약적으로 도착한 집의 이미지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는 주희와 호진의 연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연극이 펼쳐지지만,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하던 그 시절은 이미 먼 과거가 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세상을 떠난 주희는 유일하게 그 집에 부재한다. 그리고 주희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집 안을 자연스레 채우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의 마지막 숏은 어떻게 보더라도 유령의 시선을 떠올리게 만든다. 과거와 망자의 기척을 지닌 그 집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맴돌던 장건재의 영화가 끝내 도달한 매혹적인 장소다.

그렇다면 과연 장건재의 영화에서 일상을 초현실로 변모시키는 동력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태훈이 내뿜는 겨울의 차가운 입김을 따가운 햇빛 아래의 땀방울로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 이 초현실적인 풍경 내지는 존재가 떠오르는 순간은 모두 장건재의 인물들이 지닌 순수한 염원과 관련한다. 연인과 재회를 바라는 마음, 결혼 생활의 위기와 불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 영화의 완성을 꿈꾸는 마음, 죽은 자를 애도하는 마음, 그리고 지금의 '나'를 만든 땅과 기억과 트라우마 사이에서 구원을 바라는 마음. 이 마음의 여정에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적은 없지만, 순수하리만큼 맑고 투명한 믿음이 있다. 이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지속을 장건재의 영화 속에 남아있는 소년성의 징표라고 볼 수는 없을까. 여기서 소년성은 기성의 가치가 만든 세계를 의심하면서 잊히고 지워진 주변부를 끊임없이 배회하는 몸짓으로 조직된다. 그렇기에 끝내 영화의 종착지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풍경은 그 뜨거운 마음으로 세계에 부딪히던 소년들이 마주하는 신기루다.

 

ⓒ 영화 <한국이 싫어서>

4.

장건재의 작품 중 유독 동시대에 달라붙어 있는 <한국이 싫어서>는 원작 소설에서 비켜 나간 예상치 못한 순간을 보여준다. 뉴질랜드 학위를 취득한 계나가 해변에서 즐거운 새벽을 보내는 장면에서 영화는 대규모 지진 피해와 어느 한인 가정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 보도, 경윤의 영정사진으로 이어지는 몽타주 시퀀스가 그러하다. 한 국가의 재난, 한 가정의 죽음, 한 청년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숏들의 연속은 어떠한 연상의 과정을 거칠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 순식간에 이루어지며, 어느새 계나는 경윤의 영정사진 앞에 놓여있다. 갑작스러운 서사의 전환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귀국의 경로를 급격하게 뛰어넘는다. 이 점프는 어떠한 장소를 찾아 거닐던 몸짓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여기서 국경을 가로질러 한국으로 도착한 계나의 얼굴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뉴질랜드와 한국 사이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장강명의 원작 소설에서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죽음이 등장하긴 하지만, 계나라는 주인공이 지닌 물리적 동선을 옮겨다 놓을 정도로 인물 개인에 밀접한 죽음이 등장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이 갑작스러운 전환과 그 끝에 놓인 계나의 얼굴은 장건재의 영화에서 반복되어 온 점프의 감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넘는다'라는 말에 어울리게, 장건재의 영화는 종종 여러 경계를 뛰어넘는다. 현실과 꿈의 경계, 혹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 경계 너머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 어떠한 예고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오리바람>의 태현과 미정이 이불을 덮은 채 키스하는 생기 넘치는 숏에서 문 앞에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선생님의 숏으로 뛰어넘을 때. <잠 못 드는 밤>의 현수가 회사 사장과 다투는 격정적인 숏에서 한밤중에 식탁에 앉아 고민하는 현수의 숏으로 뛰어넘을 때.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폐교에서 정체 모를 여자아이를 마주하는 숏에서 방바닥에 누워있다 눈을 뜨는 김태훈의 숏으로 뛰어넘을 때.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의 흑백의 숏에서 컬러의 숏으로 뛰어넘을 때. <최초의 기억>의 극중극 속 카메라가 영화를 보고 있는 이들로 시선을 돌리며 스크린을 뛰어넘을 때. 일상의 풍경 사이로 불현듯 찾아오는 점프들. 그리고 꿈에서 깨는 얼굴들. 그래서 장건재의 영화를 볼 때면 자기도 모르는 새 꿈에 들었다가 예고 없이 깨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앞서 말했듯, 그의 영화가 제한적인 여건 안에서 접근 가능한 일상의 풍경을 주로 담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봤을 때, 그 일상이라는 질료로 꿈이라는 환상적인 감각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경계를 허무는 환상은 특별한 효과나 극적인 사건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공간, 죽음과 기억, 픽션과 논픽션, 꿈과 현실을 예고 없이 이어 붙이고 그것이 만드는 영화적 화학작용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특히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꿈에서 깨는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는 사실과 무관하게 그 구조 자체로 꿈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극히 일상적이었던 거리, 집, 골목, 사물, 그리고 풍경들은 느슨하게 엮인 반복의 구조를 통해 새로운 의미와 영혼을 획득한다. 즉,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일상에서 반짝이는 순간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김태훈처럼, 장건재는 그가 담고 있는 이미지가 항상 그 표면 너머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의 제작적인 환경 안에서 이를 실천한다.

<한국이 싫어서>로 돌아왔을 때, 뉴질랜드와 한국은 그가 지속적으로 이어온 꿈의 구조를 형상화한 공간이다.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서 한국의 겨울과 뉴질랜드의 여름을 수시로 넘나드는데, 이 촉각적인 계절의 이미지들이 만드는 간극으로 인해 마치 겨울은 여름의 전생처럼 보이고, 여름은 겨울이 꾸는 꿈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한국으로 돌아와 경윤의 영정사진을 마주한 계나의 얼굴은 장건재의 영화에서 수없이 봐왔던 꿈에서 깬 얼굴이다. 뉴질랜드라는 꿈의 시간을 중단시키고 현실로 잡아당기는 한국이라는 땅. 그리고 그사이에 놓인 점프의 순간. 꿈에서 깬 얼굴들은 현실적인 자각과 관련하기에 모종의 낭패감이 깃들어 있다. 희망으로 가득한 마음의 여정을 따라 거닐다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현실로 돌아온 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장건재의 영화에서 가장 서글픈 일이다.

 

ⓒ 영화 <최초의 기억>
ⓒ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하지만 때로 이 얼굴들은 단지 어딘가에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 희망을 간직하곤 한다. <회오리바람>의 운동을 끝낸 미정은 바람이 불어오는 화면 바깥을 쳐다보고, <잠 못 드는 밤>의 주희와 현수는 별똥별을 보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1부의 김태훈과 2부의 남녀는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올려다보고,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와 <최초의 기억>의 군중들은 자신 앞에서 펼쳐지는 연극 내지는 영화를 지켜본다. 이 응시에는 어떤 믿음이 있다. 한 사람이 무언가를 볼 때, 다른 누군가도 같은 곳을 보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어쩌면 같은 자리에서 영화라는 작은 빛의 흔적을 올려다보는 것에 대한 것의 메타포. 이 순수한 얼굴과 응시의 풍경들은 어느새 잊힌 만남의 장소로서의 영화관을 떠올리게 만든다. 혹은 영화관이라는 장소는 언제나 영화라는 꿈에 빠지는 곳이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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