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장의 위기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다가온다. 시대 흐름에 역행하려는 듯이 극장을 초월적 감각 체험에 이르는 제단으로 삼는 영화가 늘었다. 사운드와 촬영 등 감각적인 장치를 통해 극장의 가치를, 영화 매체의 고유성을 호소하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흐름에 의문이 생긴다. 영화 매체의 고유성과 각 씬의 효과를 감각적 자극으로 환원하고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테크닉에 의존한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나아가 괴물을 보는 자가 곧 괴물이 된다는 니체의 아포리즘마냥 체험에 대한 종교적인 숭배가 흔히들 도파민이라 부르는 자극적인 동시대 미디어와 공모한다는 의심까지 밀려든다. 당연히 “영화에 더는 기적이 없어”라는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 속 대사는 심금을 뒤흔든다. 다만, 그 감동은 씨네필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탑건: 매버릭〉(2022)과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2025)은 극한의 스턴트를 소화하는 톰 크루즈를 인셀, A.I 등 동시대 문제를 소환하고 해결하는 영화의 수호성인으로 그려낸다. 올리비에 락세의 〈시라트〉(2025)는 벙커처럼 큰 우퍼의 진동과 지뢰 폭발음을 동일시한 사운드에 기반하는 일회성 체험에 의존한다. 레이브 파티로 영화를 종교적인 체험의 장소로 설계해 관객에게 초월과 현실 간의 낙차를 체험하도록 하는 가학적 방법론을 선택한다. 감독은 타르코프스키와 브레송 등 종교적 주제를 다룬 거장을 언급하면서 알리바이를 만들기까지 하며, 영화의 윤리적 모호성을 방어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있다. 그의 신작 〈누벨바그〉는 영화를 종교적으로 숭배하지 않고도 극장이 존재하는 이유를 증명할 수 있는 영화다. 링클레이터는 되려 영화를 누추하게 만든다.
〈누벨바그〉의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다. 제목 그대로 누벨바그 시대의 이야기를 그리며 『까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 가운데 유일하게 장편 데뷔작을 못 찍은 장-뤽 고다르의 고군분투를 담는다. 이 설정부터 시네필로의 자신을 드러내려는 듯하다. 장-뤽 고다르는 홀로 데뷔작을 찍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그는 전설로 남을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60)를 찍기 위해서 할리우드 스타 진 셰버그와 장-뽈 벨몽도를 섭외한다. 그다음 투자자를 감언이설로 설득해 제작비를 모으고 제작진을 모으기 시작한다. 프리 프로덕션부터가 주먹구구로 진행된다. 영화는 〈네 멋대로 해라〉가 크랭크인한 이후 2주 간 촬영 현장을 중점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장-뤽 고다르의 연출 철학에 따라서 촬영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어느 날은 촬영을 갑자기 멈추기도 한다. 배우와 스태프, 투자자 모두 속앓이를 하는 와중에 고다르는 홀로 자신만만하다. 이상하게도 영화를 찍다가 멈추고 그날마다의 기분에 따라서 찍는 고다르에게 〈보이후드〉(2014)와 〈비포 선라이즈〉(1995)를 찍는 링클레이터가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누벨바그〉는 링클레이터의 오랜 파트너인 홀리 젠트와 빈센트 팔모 주니어가 13년 가까이 쓴 각본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오래전부터 링클레이터는 트뤼포와 고다르의 광팬을 자처했다. 나아가 이 영화에 관련된 에피소드, 촬영 횟수까지 외운다고 할 정도로 애정을 드러냈다. 다만, 영화는 누벨바그를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재현하되 그 재현이 안기는 감동에 무관심하다. 흑백으로 드러나는 60년대의 촬영 방식과 프랑스어 대사, 고다르를 둘러싼 프랑스의 영화계까지 모든 것이 감겨 있는데도 이 영화는 누벨바그 시대와 거리가 멀다. 그에게 누벨바그는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 가깝다. 누벨바그를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도 그 재현은 혁명이 아니라 그 혁명을 되풀이하는 데에 그치고 말 것이다. 〈400번의 구타〉(1959)을 인생 최고의 영화라 이야기하던 그는 누벨바그 감독의 즉흥적인 촬영 방식을 따르려 했다. 이처럼 〈누벨바그〉의 재미는 놀이와 진지함이 적절히 균형을 이룬다는 데에서 생긴다. 그 균형은 이 영화의 느슨한 전개와 갈등 없는 갈등 구조에서 생긴다.
〈누벨바그〉에 관한 인터뷰에서 링클레이터는 누벨바그라는 시기가 영화 역사상 가장 펑크록과 닮은 시기라고 보았다. 거기에 장-뤽 고다르를 비웃는 건 당연하다고까지 말한다. 그 비웃음에는 존경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장-뤽 고다르는 웃긴 괴짜이면서도 허세를 부리면서도 불안을 숨기는 천재 록스타다. 링클레이터가 이 영화를 그의 전작 가운데 〈스쿨 오브 락〉(2003)에 비유한다. 물론 대규모 영화인 〈스쿨 오브 락〉에서는 잭 블랙이 고다르 역할을 했다. 이번에는 처음 데뷔하는 배우인 기욤 마르벡을 기용했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아마추어리즘을 수행하는 과정이다.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완성하듯이 이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단순히 누벨바그 시기를 브레송 영화를 보듯이 자연주의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충실하게 재현한 데에 그치지 않는다. 미장센은 극사실적으로 설정하면서도 캐릭터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인위적인 매력을 불어넣는 독특한 스타일에 있다. 이 영화는 노스탤지어나 사실적 재현에 그치지 않고 영화와 서브컬처 사이를 느슨하게 오가며 영화의 종교화를 무색한 것으로 만든다.
〈누벨바그〉의 오프닝부터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영화 속 장-뤽 고다르는 끝까지 선글라스를 잘 벗지 않는가" 보통 전기영화처럼 장-뤽 고다르를 있는 그대로 그리려 했다면 영화는 그 배우가 고다르와 어떤 개성을 공유하는지를 끈질기게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전혀 외모가 비슷하지 않아도 그런 노력이 있어야 관객은 인물을 받아들인다.
〈누벨바그〉에서 링클레이터는 고다르의 서사적 깊이를 더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고다르를 주인공으로 그리려 하기보다는 하나의 기호로 그려낸다. 선글라스를 쓰고 거들먹거리는 제스처가 곧 고다르라는 것이다. 장-폴 벨몽도와 진 셰버그를 연기한 배우도 마찬가지로 실제 장-폴 벨몽도와 진 셰버그의 제스처를 흉내낸다. 이는 영화의 작법이라기보다는 애니메이션의 스토리텔링에 가깝다. 사이토 타마키는 캐릭터와 캬라를 나눈다. 캐릭터는 서사적 깊이가 인물을 구성하는 작법을 따른다. 캬라는 그 캐릭터의 외양 혹은 모에화된 기호가 곧 그 인물을 구성하는 작법을 따른다. 즉 장-뤽 고다르는 그의 유년기와 영화 혁명을 이루려는 평론가로의 깊은 야심 등으로 구축되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저 고다르스러운 기호로 제작된 캐릭터다.
고다르뿐만 아니다. 링클레이터가 그린 장-뤽 고다르와 에릭 로메르, 아녜스 바르다, 프랑수아 트뤼포 등 수많은 누벨바그 감독이 등장할 때 링클레이터는 마치 증명사진을 보는 듯한 태도로 이름을 자막으로 띄운다. 마치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보는 듯한 건조한 톤의 촬영으로 인물을 소개한다. 아녜스 바르다는 키가 작고 동그라며, 단발이다. 에릭 로메르는 어딘가 고집스럽다. 장 피에르 멜빌은 과묵하며, 로베르 브레송은 거리에서 영화를 찍는다. 고다르는 선글라스를 벗는 순간 고다르가 아닌 것이다. 〈네 멋대로 해라〉의 촬영장과 에피소드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각 장소는 사실적으로 건조하게 그려지면서 각 캐릭터와 에피소드는 장난과 웃음, 활기로 넘친다. 이러한 묘사는 각 인물의 성격을 기호화하며 캐릭터에 모에화된 매력을 더한다. 이 언밸런스가 곧 영화적 체험인 것이다.
링클레이터 〈네 멋대로 해라〉의 스태프, 누벨바그의 주역 등 수많은 이의 얼굴을 동등한 위상으로 그리려 하는 목적에서 이런 스타일을 선택한다. 모든 감독의 얼굴은 각자의 서사 없이도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다. 이렇게 이름을 나열하는, 속된 말로 네임드라핑이 그 감독을 아는 시네필만을 위한 특권이라는 비판도 사실은 무의미하다. 링클레이터는 지식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쌓는다. 이때 관객은 누가 누군지 몰라도 나중에 검색할 수 있는 특권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누벨바그는 이때 찬양하고 신화화된 시간이 아니다. 이 영화는 누벨바그에 활동한 감독의 서사를 아는 이에게는 누벨바그의 서사를 한 데에 압축한 영화가 될 수 있고, 아닌 이에게는 유입의 가이드가 된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 극장판 같다. 영화를 종교적 체험이라고 특권을 더하기보다 이 영화는 영화를 서브컬처의 층위로 끌고 내려와 관객을 들게끔 하려고 한다. 영화의 원초적 재미가 감각적인 기법을 통한 텍스트의 고맥락화가 아니라 텍스트의 무의미라는 듯 말이다.
〈누벨바그〉는 진심으로 무의미한 영화다. 긍정적인 의미로 모든 씬에서 웃고 떠드는 것 외엔 어느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차라리 릴스라 해도 될 법하다. 뤼미에르 형제가 포착한 〈눈싸움〉(1986)을 보는 듯한 천진난만함까지 마음에서 샘솟는다. 영화 제작자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고다르는 계속 능청부리고 농땡이를 피워서다. 느슨한 소동극을 보는 동안 미소가 생기는 것도 어떤 절박함도 느껴지지 않아서다. 엔딩 크레딧에서 이 영화가 이루어낸 성취를 나열하는데도 딱히 감동이 밀려오지 않는다.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았을 법한 선택이다. 다만 크레딧을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인물의 시행착오와 거기서 생기는 삶의 보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누벨바그〉와 가장 유사한 콘텐츠는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문호 스트레이독스!〉다.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 근대문학의 거장인 다자이 오사무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을 모에화한 여성향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각 캐릭터는 현실 속 작가의 소설을 초능력으로 가공한 이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캐릭터와 일대일로 매칭되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2차 창작에 가까운 셈이다. 일례로 자살시도를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는 고지능을 가진 캐릭터이며 계속 자살을 시도하는 모에화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그가 쓰는 스킬은 인간실격!으로 이 다른 캐릭터의 몸에 손이 닿는 순간 그 이능력을 무효화한다. 다자이 오사무에게서는 자살시도라는 기호를, 소설 『인간실격』에서는 제목의 기호만 빌린 셈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근대문학을 살리기 위한 국가 지원 프로젝트가 아니다. 작가 이름이 카프카인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냥 이 설정이 재밌어서 쓴 것에 불과하다.
링클레이터의 〈누벨바그〉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링클레이터의 〈누벨바그〉는 누벨바그의 안내서이면서도 누벨바그가 얼마나 재밌는지 그 재미를 일반 관객에게 돌려주는 진정한 상업 영화다. 아마추어리즘을 주제로 하면서도 곳곳에 섬세한 터치를 더하면서 그 재미를 배가한다. 차라리 이 영화는 〈누벨바그〉가 아니라 〈극장판 누벨바그!: 장-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찍기 대소동!〉 정도로 개봉했어야 마땅하다. 이 영화는 영화의 체험이 반드시 종교적이어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느슨함으로 창작자를 초대한다. 이 영화가 감독이 언급했듯이 펑크 록의 저항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위기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영화를 찍어가는 태도야말로 저항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