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나 그리고 둘>(2000)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대부분 셋 중 하나다. 어린 소년 양양이 들고 다니는 카메라가 포착한 '세상에 볼 수 없는 절반'에 대한 인식이거나, 아버지 NJ가 도쿄에서 첫사랑 셰리와 재회하는 여정과 딸 팅팅이 이웃집 소녀의 (전)남친 패티와 겪는 데이트를 교차 편집한 구조에 대한 분석이거나, 혹은 영화의 원제 <Yi Yi(하나 하나)>를 따라 결혼식 이후 NJ, 어머니 민민, 딸 팅팅 그리고 막내 양양이 겪는 각각의 여정을 쫓는 것이다. 영화는 결혼식 날로 시작하여, 그날 저녁 쓰레기통 옆에 쓰러진 할머니의 침묵을 지나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마무리된다. 흩어졌던 가족은 할머니의 임종과 함께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
그런데 이번 4K 리마스터링 버전(2025년)으로 다시 본 <하나 그리고 둘>은 이러한 통념을 비껴갔다. 이번에는 양양의 카메라 든 모습이나 그가 찍은 뒷모습 사진이 아니라, 양양의 손에 쥐어진 '풍선'이 눈에 들어왔다. 풍선의 등장은 영화의 시작과 거의 함께한다. 양양은 결혼식 피로연장을 장식하는 풍선들 앞에 서서 우리에게 뒷모습을 보여준다. '뒷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지만, 풍선이 양양의 트레이드마크인 카메라보다 먼저 등장한다는 사실은 더욱 흥미롭다. 이 풍선은 곧바로 양양을 놀리던 소녀들에게 복수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던 양양은 담뱃불에 터지는 풍선을 보고 힌트를 얻는다. 그는 풍선을 들고 소녀들에게 다가가 터트린 뒤 달아나고, 놀란 소녀들은 엄마 품에 안긴다. 양양은 이 풍선을 다음날 학교에도 가져간다. 학교 장면을 보면 양양은 또래보다 체구가 작아 보인다. 이 소년이 왜 주변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풍선 덕분에 자신의 배를 불룩하게 만들며 양양은 당당히 앞에 나설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은 "학교에 가져오지 말아야 할 것을 가져온 학생이 있다"며 양양을 일으켜 세운다. 선생님은 "콘돔을 왜 가지고 왔냐"고 묻는다. 그러자 양양은 콘돔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한다. 나아가 "선생님은 제가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했다"고 따진다. 이 반문은 영화의 주제이자 양양의 카메라와 직결되는 "본다는 것", 그것도 '직접 본다는 것'의 문제와 연결된다. 식물인간 상태인 할머니 앞에서 엄마 민민이 "할머니에게 말을 걸라"고 할 때 유일하게 거부하는 인물이 양양이다. 이유는 "할머니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본다는 것'에 대한 양양의 태도는 이미 수많은 평자가 논의한 바 있다.
이것은 콘돔이 아니다
이 글의 관심사는 양양이 소녀들에게 복수한 후 자신감 있게 학교로 가져온 그 풍선의 정체다. 양양의 주머니 속에서 풍선(혹은 콘돔)을 꺼낸 선생님은 의외로 "이번만은 봐주겠다"라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이중으로 된 풍선의 모양은 꽤 기묘해 보인다.
이 장면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 언론 기사들은 양양이 들고 온 것이 콘돔이라고 단정한다. 유튜브 영상들도 이 장면을 설명하며 "어른들의 눈에는 콘돔이지만, 순수한 아이에게는 풍선일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을 덧붙인다. 흔한 관습적 프레임이다.
정말 그럴까. 학교에 들고 온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백히 이중 구조다. 처음 배에서 꺼냈을 때 아이들은 "풍선 안에 풍선이 있다"고 외친다. 선생님이 양양의 주머니에서 꺼냈을 때도, 그것은 흰색 테두리를 가진 풍선과 안쪽의 분홍색 풍선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실제 콘돔은 그런 모양일 수가 없다. 이것은 삼촌의 결혼식장에서 가져온 것으로 짐작되는 파티용 풍선이다. 선생님이 이번 한 번만 봐주겠다며 순순히 물러난 이유도 간단하다. 그것이 진짜 콘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한 오인은 고자질만 믿고 양양을 추궁하던 선생님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일어난다. 조금만 검색해 봐도 이 장면에서 양양이 들고 온 것을 '콘돔'이라 말하는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꽤 많은 이가 교실 장면에서 양양이 콘돔을 들고 왔으며, 이것이 어린아이의 순진성 혹은 순수한 시선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설명한다.
이 글의 관심사는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를 따지는 데 있지 않다. 어째서 관객들마저 이 혼란에 동참하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선생님은 고자질을 근거로 양양을 추궁한다.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주눅이 든 양양의 목소리를 들으며 관객은 손쉽게 그것을 콘돔이라 단정해 버린다. 이때 관객의 위치는 '말만 듣고(교실 장면만 보고)' 양양을 추궁한 선생님이거나, 양양의 물건을 '얼핏 보고' 고자질한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혼란은 감독의 의도일까, 아니면 우연의 결과일까.
영화 속 양양의 의문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뒷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양양의 가족도,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물이나 사건을 전체적으로, 혹은 제대로 보지 않는다.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유튜브 시대를 맞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제대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 교실 장면에서 양양의 손에 들린 풍선을 제대로 응시하지 않고, 주변 상황과 선생님의 추궁, 웃어대던 아이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스킵'해 버린다. 우리는 영화의 장면이나 주요한 사물에 충분한 시선을 기울이지 않은 채, 그저 흘깃 보고 지나칠 뿐이다.
풍선의 세계
이 풍선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집 안 욕조에서 혼자 노는 양양의 손에 들린 장난감이 되기도 하고, 양양을 고자질한 것으로 짐작되는 소녀에게 복수하기 위한 '물풍선 폭탄'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물풍선을 맞은 이는 소녀가 아니라, 양양에게 "콘돔을 가져왔다"고 추궁하고 사진을 보며 "예술가 납셨다"며 조롱하던 선생님이었다. 물벼락을 맞은 선생님의 호통과 추격을 피해 도망쳐야 했지만, 물풍선이 빗나간 것이야말로 또 한 번의 통쾌한 복수 아닐까.
<하나 그리고 둘>에서 풍선은 두 번이나 복수의 도구로 쓰인다. 한 번은 결혼식에서 자신을 놀리던 소녀들에게, 다른 한 번은 빗나가는 바람에 자신을 압박하던 선생님에게. 선생님이 맞은 물풍선은 원래의 목표에서 빗나간 결과였다. 양양은 자신을 고자질하고 깐깐하게 굴던 소녀를 맞추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빗나감은 '제대로 된 복수'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물을 넘어 사건의 어떤 측면을 볼 것인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이 '빗나감'은 더욱 흥미로운 사건으로 이어진다. 호통치며 쫓아오는 선생님을 피해 양양은 시청각실로 도망친다. 시청각실에는 자연과학에 관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이곳이 일종의 '학교 극장'이라는 점에서, 양양 혹은 영화의 주요 주제인 '본다는 것'과 연결된다.
그런데 안도하는 것도 잠시, 양양은 물풍선을 맞춰야 했던 그 소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다.' 공교롭게도 소녀의 치마가 문에 걸리는 바람에 팬티가 노출된다. 양양은 그것을 '본다.' 변태적인 시선인가 싶지만, 사정은 단순하지 않다. 소녀는 어둠 속에서 자리를 찾아 헤매며 서 있고, 그 모습이 양양의 눈에 크게 들어온다. 동시에 양양의 클로즈업은 분명 매혹된 시선을 드러낸다. 스크린에서는 천둥번개 현상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오지만, 소녀를 바라보는 양양의 마음이야말로 천둥이 치는 것만 같다.
이전까지 양양의 카메라는 눈을 대신하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하고자 했으나, 이 장면을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간 시선을 보여준다. 양양의 '본다는 것'은 이제 카메라를 통한 뒷모습이나 이면이 아니라, '매혹된다는 것'을 본다. 그것은 깊게 보는 것이다. 이전의 보기, 카메라의 보기가 '이면성'에 관한 문제였다면, 시청각실의 보기, 소녀의 보기는 대상을 향한 '마음의 시선'이자 '깊이 보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풍선 폭탄이 이끈 길이었다. 시청각실에서 뒤늦게 들어온 소녀에게 매혹된 양양은 이후 수영장에 있는 소녀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소녀의 수영복을 바라보고(이 또한 변태적 시선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충분히 매혹된 소년의 행동으로 보인다), 수영하는 소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부터, 이 영화를 두고 수많은 이들이 이야기했던 양양의 '카메라'는 사라진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매혹되는 것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넘어, 양양의 매혹된 시선은 소녀의 세계를 탐구하기에 이른다.
집으로 돌아온 양양은 세면대에 물을 받아 머리를 담근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녀처럼 물속에 들어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양양은 한참 동안 수영장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가방을 놓고, 모자를 벗고, 수영장 안으로 뛰어든다. 깜짝 놀랄 만한 이 행위 속에는 대상과 동일하게 행동하려는 양양의 실천, '보기의 행동'이 드러난다. 보는 것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소녀와 수영장에 대한 응시를 넘어, 소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본다. 그 속에 소녀는 없겠지만, 소녀의 마음과 즐거움을 알 수 있는 길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말이라는 행위, 그리고 풍선의 진실
풍선을 통해 소녀로 이어지고, 소녀를 통해 수영장에 뛰어드는 양양의 행동을 이해할 때, 엄마 민민이 요청했던 "할머니에게 말을 걸라"는 요구를 거부했던 양양이 마지막 장면에서 편지를 읽어주는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할머니가 누워있을 때는 온 가족이 자신만의 독백 혹은 고백을 늘어놓았지만, 돌아가신 후에 유일하게 말을 건네는 이는 양양이다.
"할머니 제가 크면 뭘 하고 싶은지 아세요? 사람들에게 그들이 모르는 일을 말해주고 싶고,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무척 재미있을 거예요. 아마 어느 날 전 할머니가 가신 곳을 알아낼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게 되면 할머니를 만나러 사람들을 데리고 가도 될까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특히 새로 태어난 아직 이름도 없는 사촌 동생을 볼 때면, '이젠 늙었나 보다'라고 항상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요. 저도 사촌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나도 '나이 먹었나 봐'라고요."
카메라를 놓고 소녀의 세계로 들어가려 했던 양양의 실천은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말)로 이어진다. 놀랍게도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모르는 일을 말해주고 싶고", 할머니가 가신 곳(죽음)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아낼지도 모르며, 그곳에 가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하는 수준에 이른다. 양양의 탐구는 보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탐구로 확장된다. 그것은 마음의 시선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예술가로서의 미래를 고백하는 순간이다. 양양의 시선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농담이 덧붙는다.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이젠 늙었나 보다"를 자신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대사는 영화 초반부,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온 후 피로연장으로 향하던 NJ와 팅팅의 대사와 정확히 겹쳐진다. 당시 팅팅은 할머니가 "이젠 늙었나 보다"라고 하시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뜻을 들려주는 것은 양양이다. 양양은 이름 없는 어린 사촌을 보면서 자신도 이제 늙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늙음은 그런 것이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며, 시간의 흐름에 의해 자연스럽게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지 그 자체에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 또한 양양이 시간을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할머니가 떠난 후 어린 조카가 탄생하였고(결혼식 장면에서 신부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그 사이 양양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자리로 옮겨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돌아가시기 직전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말을 했던(유일한 환상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는) 팅팅은 그 말의 의미를 끝내 깨닫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것은 여전한 독백이고 고백이며 자기 치유다. 하지만 할머니가 누워있을 때 말하기를 거부했던 양양은 결국 할머니에게 자신의 경험을 되돌려주며 진정한 소통의 시간을 이룬다. 이때 쓸 수 있는 말은 이심전심(以心傳心), 염화미소(拈華微笑), 심심상인(心心相印)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와 양양은 통한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Yi Yi)>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도 이 지점에 닿아 있다. 제목인 '이이(一一)'는 단순히 숫자 1과 1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앞모습과 뒷모습, 내가 보는 세상과 남이 보는 세상, 그리고 어제와 오늘이 겹쳐지며 비로소 완성되는 삶의 총체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늘 자신의 눈에 보이는 '하나'의 진실만을 믿으며 살아가지만, 영화는 그 이면에 여전히 우리가 보지 못한 '또 다른 하나'가 숨 쉬고 있음을 일러준다.
양양은 카메라를 통해 남들의 뒷모습을 찍어주었고, 풍선을 통해 보이지 않는 내면을 띄워 보냈으며,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인사를 건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던 소년의 다짐은, 에드워드 양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약속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불완전한 '하나'로 시작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면을 응시하려는 노력, 타인의 뒷모습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해질 때, 우리의 '하나'는 비로소 외롭지 않은 '둘'이 되고, 온전한 세상이 된다. 양양이 할머니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처럼, 우리도 언젠가 나이 듦을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난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삶의 이면이며, 그토록 시선이 닿기 어려운 지점이 아닌가. 그것이 양양 혹은 에드워드 양이 그토록 보여주고 싶었던, 우리가 아직 다 보지 못한 삶의 얼굴일 테니까.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