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티모스의 냉소가 닿지 못한 곳: 〈부고니아〉의 정치적 실패
란티모스의 냉소가 닿지 못한 곳: 〈부고니아〉의 정치적 실패
  • 김경수
  • 승인 2025.11.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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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무의미한 인간 혐오"
ⓒ 영화 <부고니아>

<부고니아>의 오프닝은 윙윙거리는 벌의 날갯짓 소리로 시작한다. 이윽고 벌이 여왕벌과 꽃, 벌집 주위를 비행하는 영상이 차례대로 삽입된다. 이때 화면 너머에서 조용한 나레이션이 들려온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테디(제시 플레먼스)다. 미국의 한 한적한 마을에 사는 그는 거대 제약회사 옥솔리스의 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양봉을 은밀한 부업으로 하고 있다. 그의 허름한 집 뒤편에 있는 벌통을 보면서 지구 종말을 직감한다. 옥솔리스의 공해로 여왕벌이 둥지를 떠나는 군집붕괴현상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카메라는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이미지지만, 란티모스의 영화에서는 낯설게 다가오는 이미지다. 지금껏 란티모스는 폐쇄공포를 만드는 미장센, 왜곡된 렌즈 등으로 영화 밖 현실과 단절된 세계관을 그려왔다. 이 맥락에서 영화의 오프닝은 영화와 영화 바깥의 세계가 연결되는 통로로 다가오든데, 이는 그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부고니아>는 장준환의 괴작 <지구를 지켜라>(2003)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다. 원작의 광팬인 아리 에스터가 제작자로 참여했으며, 드라마 <석세션>(2018-2023)의 각본가 윌 트레이시가 각색을 담당했다. 여기에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엠마 스톤이 합류하면서 영화의 규모는 대폭 확대되었다. 가부장제나 왕실의 패권 다툼, 연애 등 미시적 권력의 작동을 그리는 데에 집중했던 란티모스에게 기후위기와 레드넥, 가짜뉴스와 음모론 등 트럼프 이후의 미국을 그려낸 동시대적인 소재를 다루는 <부고니아>의 시나리오는 꽤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 고대 그리스의 풍습을 빌린 제목은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다루는 란티모스의 영화 미학과 이어져 있다. 그는 보통 감정이 결여된 캐릭터를 폐쇄적인 공간과 그 공간 속 폭력적인 상황에 배치한 다음에 그 캐릭터의 본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현했다. <부고니아>는 그의 스타일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안타깝게 란티모스의 스타일은 시나리오와 부정교합을 이루고 있으며 트럼프 이후 미국의 현실을 담는 데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란티모스의 통제된 미장센으로 그리기에 미국의 현실은 불규칙적이고 유동적이어서다.

 

ⓒ 영화 <지구를 지켜라>

<부고니아>를 이야기하기 전 이 영화의 원작인 <지구를 지켜라>의 서사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정체불명의 헬멧을 쓴 이병구(신하균)는 오밤중에 만취한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백윤식)을 외계인으로 지목한 다음에 납치한다. 영문도 모른 채 지하실에 감금당한 강만식은 본인이 외계인이 아니라 항변한다. 이병구는 꼼짝하지 않고 그에게 온갖 고문을 감행한다. 우선 외계인과의 텔레파시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을 삭발하고 발등 피부를 때밀이로 벗기고 물파스를 칠한다. 그다음 500볼트에 달하는 전기를 흘려보낸다. 한때 전설로 불렸으나 지금은 서열 다툼에서 밀려나 경찰서 식당 직원으로 일하는 추상철(이재용)은 강만식 납치 사건을 접하게 된다. 추상철을 동경해 형사가 된 서울대 출신 신입 형사는 그를 은연중에 도우며 병구를 함께 추적한다. 관객은 강만식과 이병구의 심리전과 추상철의 추리를 번갈아 접하면서 누가 외계인인지 오리무중에 빠진다. 이병구의 말대로 과연 강만식은 외계인일까. <부고니아>는 강만식과 이병구의 심리전을 중심으로 서브플롯을 제거하는 작업을 감행했다. 우선 중년 남성 강만식을 영향력 있는 여성 CEO로 설정했고, 이병구와 순이 커플은 테디와 그의 사촌 동생으로 변경했다. 그다음 추상철의 서사를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여러 소품과 음악을 다르게 설정했다. <지구를 지켜라>의 핵심적인 모티프를 반 정도 가져온 셈이다. 형식상으로는 챕터를 분할하고, 그 챕터 사이에 평평한 지구의 이미지를 삽입해 지구 평면론자를 냉소한 데에 있다.

<지구를 지켜라>는 2000년 봄부터 구상을 시작해 2003년에야 개봉한 영화다. 영화 속 소재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미국 영화뿐만 아니라 일상과 서브컬처 등 다양한 출처를 가진다. 이 영화의 출발점은 한 영화 잡지에 실린 안티-디카프리오 커뮤니티다. 디카프리오가 외모로 지구인을 홀리는 외계인이라는 음모론에서 모티프를 빌린 것이다. 거리에서 우연히 받은 전단지 속 라엘리안 무브먼트에서 병구 캐릭터를 구상했으며 어머니가 등에 문지르는 물파스에서 물파스 씬을 가져왔다. 나아가 장준환 감독은 <유주얼 서스펙트>(1995)와 <세븐>(1995), <프라이멀 피어>(1996), <식스 센스>(1999), <파이트 클럽>(1999) 등 90년대 중반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반전 영화의 문법을 빌린다. 보통 반전 영화에서 주인공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설정되고 관객은 그 시점을 따라간다. 영화 속 조연이나 악역은 주인공의 믿음 혹은 인식을 시험하며 치열한 심리전을 펼친다. 관객은 두 진실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그다음 예기치 못한 반전이 다가온다. 일관성 있는 주인공의 시점이 사실은 정신분열증, 편집증, 기억상실증 등 정신적인 혼란에 의한 것이며 지금껏 믿은 진실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반전의 충격 효과는 크다. 관객은 이야기를 역행해 반전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물색하고 충격을 저만의 논리로 소화하려 노력한다.

<지구를 지켜라>는 당시 유행했던 반전 영화의 문법을 근대화를 향해 직진한 한국의 윤리적 파국을 설명하는 논리로 구체화한다. 후반에 이르러 관객은 병구에게 트라우마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병구의 가족사는 한국의 노동자가 경험한 산재를 한 데에 압축한다. 병구의 아버지는 탄광촌에서 죽고, 어머니는 화학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불치병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다. 병구의 첫 애인은 노조에 가입했다가 용역 업체에게 구타당해서 죽는다. 병구는 트라우마를 드러낼 마땅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90년대 중반에 드라마 <X-파일>의 유행을 기점으로 보편화된 오컬트와 미스터리, 외계인 책을 통해 본인만의 음모론적인 서사를 구축한다. 병구가 외계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음모론을 만드는 과정은 장준환은 <지구를 지켜라>를 제작하는 과정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 영화는 정신분산적이고 편집증적인 서사로 말할 수밖에 없다. 둘의 심리전을 기성 권력에 밀려난 추상철 같은 아웃사이더가 아닌 이상 경찰은 절대 추적할 수 없다는 반항기는 덤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장준환은 정체불명의 모자를 쓴 괴짜인 이병구(신하균)와 사기와 기만을 일삼은 대기업 회장이면서 취객인 강만식(백윤식) 둘 다를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설정하는 구도를 설정한다. 병구가 어머니를 잃고 약을 복용하는 환자로 드러날 때 관객은 자연스레 믿음이 흔들린다. 엔딩에 이르러 강만식이 Innovation이라고 적힌 물류 창고 위에서 외계인과 교신을 시작한 순간 관객은 이병구(신하균)과 강만식의 심리전을 이병구의 시점으로 처음부터 되짚어보도록 강제된다. 영화학자 토마스 앨세서는 이런 경향의 영화가 몰입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관객-영화의 관계의 위기를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때 에피소드는 관객이 해석해야만 하는 정보로 전환된다. 이는 복수(複數)의 진실 사이에서 마땅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인식론적인 혼란과 이어진다. 나아가 이는 이 혼란을 무기로 삼을뿐더러 진실을 짜깁기하고 왜곡해 이 혼란을 조장할 수 있는 자본가의 힘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의 스타일은 자본가의 힘을 의도적으로 모방한다. 강만식이 병구에게 분노 유전자를 설명하는 순간은 이 영화의 스타일이 가지는 힘을 드러낸다. 강만식은 병구가 추상철을 처리하러 간 사이에 탈출해 병구의 일기를 읽고 그의 서사를 본인이 저지르는 폭력을 합리화하는 데에 전유한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1968)를 패러디한 이 시퀀스는 외계인으로 드러날 자본가가 오래전부터 인류의 정신을 지배했다는 알리바이로 작동한다. 강만식은 인류에게는 분노 유전자가 있으며 이 분노 유전자를 제거하는 실험을 위해 어머니를 동원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인간의 야만적 본성이 자본주의에 어울리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일종의 자연이라고 합리화하는 논리로 이어져 있다. 이때 장준환은 의도적으로 여러 B급 영화를 짜깁기해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만든다. 이 연출은 이 영화가 자본가에게 가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다.

 

ⓒ 영화 <부고니아>

안타깝게도 <부고니아>는 원작 <지구를 지켜라>와 비교했을 때 담론의 깊이가 얄팍하다는 결정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클로즈업과 부감 등을 남발하며 각 오브제의 과잉된 존재를 강조하기만 하지, 각 에피소드의 연결은 단절되는 완성도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영화의 문제점은 다양하다. <부고니아>는 00년대 이후 좌파 담론을 겉핥기로 소비하는 영화라는 인상을 준다. <부고니아>는 오프닝에서 벌집과 여왕벌이라는 상징을 통해 노동자와 자본주의, 생태주의 담론을 느슨하게 연결하려고 한다. 여왕벌은 지구를 떠나려 하는 미셸 풀러로도,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생태 재난의 은유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부고니아>에서 CEO 미셸 풀러는 자기계발 담론을 되풀이하는 인플루언서로 활동한다. 미셸 풀러는 자율 출퇴근과 워라밸 등 허울 좋은 회칙을 만드나 그 회칙은 사실 개인이 자율적으로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기만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논리는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피로 사회의 논리, 신자유주의의 노동 규율이 "해야만 한다"라는 강제성에서 "할 수 있다"라는 자발성으로 변화했다는 논리와 유사하다.

미셸 풀러는 잘 관리된 이미지로 "할 수 있다"라는 자발성에 환상을 더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때 벌은 꿀을 박탈당하는 와중에도 이 환상에 홀려 끊임없이 꿀을 채취하고 운송한다는 점에서 플랫폼 노동자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살인적 플랫폼노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려고 한다. 분명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하다. 란티모스는 미셸 풀러의 기만을 재현하면서도 테디의 노동, 옥솔리스 직원의 불만은 다루지 않는다. 이 영화 속 은유는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지 않으며 위압적 이미지를 위한 악세사리로만 쓰이고 만다. 이는 계급 담론에서마저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그 누구에게도 이입하지 않으려는 란티모스의 시선이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다. 이 시선은 지금까지의 란티모스 영화에서 충분히 유효한 관점이었다. 일례로 <더 랍스터>에서 연애를 강제하는 사회와 비-연애를 강제하는 공동체는 둘 다 전체주의와 극단주의에 기반한 집단이라 동등한 냉소가 가능한 것이었다. <부고니아>에서 냉소와 인간 혐오는 다르다. 이미 미셸 풀러와 타인 사이의 계급적 불평등이 전제되어서다. <지구를 지켜라>의 납치는 그 불평등을 조정하는 설정이었으나 <부고니아>에서 납치는 그 불평등을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된다. 이 점에서 두 영화의 정치적 문제가 갈린다.

<부고니아>의 냉소는 전방위적이며 모든 인간을 냉소하는 탈정치적인 시선으로도 이어진다. 초반부에 무술 수련과 테디의 준비 운동을 번갈아 드러내면서 둘을 쌍둥이로 그린다. 미셸 풀러와 테디가 각자 자기계발 담론에 복무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미셸 풀러는 인플루언서로의 이미지 관리에, 테디는 음모론 팟캐스트와 살아남으려면 남성성을 길러야만 한다는 매노스피어 풍의 음모론에 복무한다. <지구를 지켜라> 속 병구가 일방적으로 강만식에게 당하는 비겁하고 연약하고 병적인 존재라면 <부고니아>는 둘을 팽팽히 대립하게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이 둘 중 누가 진실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없도록 유도하는 연출이 탈-진실 시대에 걸맞은 연출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또 두 극단주의자 사이에서 도니가 자살하는 희생양으로 그려내 정치적 양극화의 비극을 그리려 한 것일까.

란티모스는 둘 사이의 위계를 지우고 둘 다 냉소하려 테디의 배경을 삭제한다. 테디는 시외에 있는 허름한 저택에 살고 있다. 또 그의 어머니도 노동자로 살다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설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가난한 하층민이라는 점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는 레드넥 등을 연상할 수 있는 설정이다. 란티모스는 둘 사이에 무게추를 설정하지 않고 이입하지 않으려 테디의 과거를 삭제한다. 대신 테디가 어릴 적에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풀러의 말대로 그가 에코체임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그의 납치를 사회적 분노가 아니라 이유가 모호한 분노로 그려낸다. 란티모스는 테디의 분노를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풀러의 가스라이팅을 악행으로 그려낸다. 이때 란티모스는 이유 없는 분노를 포장하고자 란티모스는 위압적인 음악을 통해 테디의 분노를 강제적으로 느끼게 한다. 관객은 이 분노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짓눌리며 연루되는 것이다. 란티모스의 중립적인 척 둘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만 그의 인간 혐오와 냉소는 두 극단주의자의 존재감만 터무니없이 부풀린다. 이는 정치적 무력감이 아니라 이 파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지적 관찰자를 자처하고, 이 파국을 유지하는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을 독학했다는 테디, 우주선에 탑승한 후 곧 망할 평평한 지구를 내려다보는 미셸의 시선이 영화의 시선과 이어져 있는 셈이다.

 

ⓒ 영화 <부고니아>

이 영화의 실패는 인간 혐오를 생태 담론과 이으려 하는 데에 있다. 진정 자연을 위하기보다는 인간 혐오에 마땅한 이유를 더하기 위해 자연을 도구화하는 기만적인 사유에 기반해 있어서다. 영화는 과학과 음모론이 둘 다 자연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염세주의를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평평한 지구를 둥그런 원이 감싸며 외계인으로 정체를 드러낸 미셸 풀러는 그 원을 터뜨려 인간을 제거한다. 즉 란티모스는 지금껏 인간의 앎이 세계를 알 수 없으며 극단적인 허무주의와 코즈믹 호러에 가까운 재난이 인간을 심판하리라 생각한다. 이때 영화가 지금껏 이야기한 계급과 생태주의 사이에는 비약보다 단절이 생겨난다. 이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한은 것보다 지구 멸망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에서 드러나는 동시대적 상상력을 게으른 시선으로 되풀이한다.

<지구를 지켜라>의 엔딩이 지구 전체를 부수었다면 <부고니아>의 엔딩은 인간만 제거한다. 란티모스는 시신이 깔린 세계를 몽타주하면서 유쾌한 음악을 깐다. 정치적 무력감을 연출했다고 하기에 이 영화는 이 결말을 아름다운 화풍으로 그리며 도취해 있다. 사실 그의 허무주의는 새롭지 않고 진부하기 짝이 없다. 이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일식>(1962)의 엔딩에서 인간 없는 공허한 세계의 풍경을 그린 적 있어서다. 티모시 모튼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분리한 다음 인간 없이 자연이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생태학을 "자연 없는 생태학"이라는 개념으로 비판한 적 있다. 인간이 이미 자연에 탄생한 이상 자연은 이미 인간의 영향 아래에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란티모스는 이 난제를 헤쳐가기보다는 수많은 타인의 삶을 무의미로 환원하면서 냉소하고, 자연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타인은 죽어도 무방하다는 인간 혐오에 은연중에 복무한다. <지구를 지켜라>의 엔딩이 결국 자본주의의 초월적 힘에 대한 풍자에 가깝다면 <부고니아>는 그 무엇도 비판하지 않는 인간 혐오에 그치고 만다. 그저 이유도, 목적도 없이 무의미한 인간 혐오를 되풀이하면서 그 원인을 제거하는 무책임한 이미지만 나열할 뿐이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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