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세의 한국독립영화 편지] '뤼미에르'의 바다, '홍상수'의 바다에 관한 에세이
[김민세의 한국독립영화 편지] '뤼미에르'의 바다, '홍상수'의 바다에 관한 에세이
  • 김민세
  • 승인 2025.11.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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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그 투명하고 불확실한 형상에 관하여"

202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진행한 ‘위대한 영화 10편 리스트’에서 홍상수가 선정한 첫 번째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항구를 떠나는 보트>(1895)다.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카메라이자 영사기 장치를 발명해 최초로 영화를 제작한 이들이며, <항구를 떠나는 보트>는 당시에 만들어졌던 <열차의 도착>(1895),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1895)과 함께 파리의 한 카페에서 상영된 최초의 영화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 영화 <항구를 떠나는 보트>(1895)

<항구를 떠나는 보트>의 내용은 작은 보트 위의 사람들이 노를 저으며 파도를 헤쳐 나가는 것이 전부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으며, 몇십 초 간의 한 쇼트만이 영화 전체의 분량이다. 당시의 기술적 여건으로 인해 뤼미에르의 초기 영화들은 모두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으나, <항구를 떠나는 보트>가 보존하고 있는 감각은 확연한 차별성을 지닌다. 널리 알려진 <열차의 도착>에는 비어 있는 플랫폼에 열차가 도착하는 움직임에 따라 처음-중간-끝이라는 내러티브가 존재한다면, <항구를 떠나는 보트>는 최소한의 내러티브의 기척조차 지워버린 영화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노를 젓고, 파도는 출렁이길 반복한다. 내러티브적인 사건과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에 남아있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뿐이며, 그 감각의 중심에는 바다라는 변화무쌍한 존재가 놓여있다. <열차의 도착>의 열차의 움직임이 근대의 효시라면, <항구를 떠나는 보트>의 바다의 움직임은 탈서사의 이미지다.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래프를 ‘미래 없는 발명품’이라 말하며, 영화의 미래를 부정했다. 영화는 그저 가정 안에서의 소박한 눈요깃거리에 머물 것으로 생각했으며, 상업적, 예술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영화는 예술이 되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문학과 연극의 컨벤션, 스토리텔링 등을 활용하면서 영화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서사’를 전달하는 매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는 ‘문학의 시녀’가 되었다.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발생한 ‘필름 다르’라는 연극을 표방한 영화는 일찍이 수명을 다했으며, 문학의 정전을 기반으로 한 ‘시적 리얼리즘’ 영화는 감독이 아닌 시나리오 작가의 영화라며 프랑수아 트뤼포에 의해 비판받았다. 영화는 단순히 현실의 부분을 기록했던 뤼미에르의 액추얼리티 필름에서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매체로 변모하며 수명을 이어갔지만,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가 독자적으로 지닐 고유한 예술성을 상실했다.

 

한편, 홍상수는 마치 이러한 초기 영화의 발전 과정을 반대로 거스르듯이 영화를 찍고 있다. 내러티브는 느슨해지고, 이미지는 내러티브에 종속되기보다는 자기 완결적으로, 때로는 추상적으로 나아간다. 그의 영화에서 ‘바다’의 형상이 점하는 위치 또한 변화한다. <해변의 여인>(2006),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 <하하하>(2010)에서 배경이 되는 장소의 차원에 머물러 있던 바다는 <다른나라에서>(2012)와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에서 욕망과 꿈이 어른거리는 다소 초현실적인 장소가 된다. 심지어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한 장면에서 인물은 바다를 매개로 공간과 서사를 이상한 방식으로 과감히 뛰어넘는데, 그것에는 내러티브라는 관습과 작별하겠다는 어떠한 단념의 태도가 있다.

<인트로덕션>(2021)에 이르러 홍상수는 영화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하나씩 소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컬러는 흑백이 되고, 3막의 구조가 만드는 내러티브 또한 보다 단순해진다. 홍상수 본인이 연출과 동시에 촬영까지 맡으며 제작 환경과 현장 스태프마저 간소화 되었다. 즉, 홍상수는 ‘카메라’와 ‘나’, 그리고 ‘내가 보는 세계’만이 존재하는 환경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이때 어김없이 바다를 담고 있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한 남자가 겨울 바다 안으로 몸을 던지는 이미지. 현실을 그저 바라본다는 면에서 다큐멘터리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불확실로 가득한 이미지. 그 형상에 다다르면 내러티브는 파괴되고, 파도와 물보라의 움직임이 만드는 추상성만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항구를 떠나는 보트>의 바다가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 그리고 세계와 내가 만난다는 감각만을 보존했듯이, <인트로덕션>의 바다는 그 투명한 영화의 감각만을 지켜내는 영화적 장소가 된다. 그 순간 홍상수는 뤼미에르가 된 것만 같다.

초기 영화와 동시대 영화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영화의 ‘영화됨’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형상으로 남아있다. 한편, <열차의 도착>의 열차가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도착하는 것과 달리, 뤼미에르의 보트와 홍상수의 인물은 바다의 파도를 거스르며 작은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 발걸음은 내러티브를 운반하는 거대한 움직임과 반대되는 작고 사소한 움직임이다. 이들은 내러티브라는 도구로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세계라는 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보다 촉각적이고 순수한 모험의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한다. 바다는 영화의 투명한 본질을 담고 있는 장소이며, 홍상수는 뤼미에르의 바다로 돌아가 그 순수한 모험을 다시 시작한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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