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DFF season2] 정승오 '철들 무렵' 뒤틀린 돌봄의 시대
[NDFF season2] 정승오 '철들 무렵' 뒤틀린 돌봄의 시대
  • 김민세
  • 승인 2025.10.3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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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남도영화제 시즌2 광양 개막작
ⓒ 영화 <철들 무렵>

이상하게 뒤섞인 세 가족이 있다. 단역 배우를 전전하는 정미는 암에 걸린 아버지 철택의 간병을 맡는다. 철택과 20년 넘게 별거 중인 현숙은 어머니 옥순의 구순 잔치를 준비한다. 그리고 철택의 형 관택은 종종 아들의 눈치를 받으며 손자 동민을 돌본다. 가족을 돌본다는 책임 안에서 느슨하게 엮인 세 갈래의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를 되짚으며 픽션을 넘어선 리얼(real)의 민낯을 드러낸다. 그곳에는 분노와 설움으로 가득한 얼굴들,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의 역사를 지나온 얼굴들이 있다.

첫 장편인 <이장>(2019)에서 한국 가부장 문화의 잔존을 유쾌한 화법으로 풀어냈던 정승오는 더 강렬한 유머와 통찰로 돌아왔다. <이장>이 남겨진 세대들의 분노와 연대에 관한 이야기라면 <철들 무렵>(2025)은 과거의 세대가 지닌 상처를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다. 90세 여성의 입을 빌려 한국 근현대의 과거를 성찰하고, 끝내 미래를 향해 전언하는 야심 또한 놀랍다. 그리고 암 투병 중인 철택을 연기한 기주봉은 근래의 한국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준다.

 

정승오 감독 ⓒ 코아르CoAR

김민세

두 번째 장편 <철들 무렵>을 남도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하였고, 두 번째 상영까지 마친 시점이다. 부산에서 먼저 공개되었지만, 남도영화제 개막작으로서 감회가 어떠한지.

정승오

친할아버지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작고하셨고,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거의 못 들으며 자랐다. 이번 영화가 광양에서 열리는 남도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할아버지의 고향이 광양이었다고 하시더라. 영화를 통해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오게 된 건데, 여러모로 신기하고 운명적인 느낌이다.

김민세

부산과 광양에서 만난 관객들은 어떠했는가.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정승오

어제 극장 상영 때 이 영화를 세 번 봤다고 하는 관객이 있었다. 부산에서 두 번 보고 광양까지 찾아준 것이 감사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큰 의미로 다가오는구나 싶었다.

 

김민세

단편 작업부터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다뤄왔다. 가족 영화는 2010년대 이후 한국독립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테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스스로 가족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게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승오

가족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작업에 임하진 않는다. 2013년에 찍은 첫 단편에서 시작해 10년 넘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인데, 이쯤 되면 '내 안에 어떤 패턴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일단 내가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는 동력은 개인적인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간접적인 경험이든 직접적인 경험이든, 그것에 흥미를 느끼든 분노를 느끼든, 기쁨을 느끼든. 이것을 그 순간에 내버려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나에게는 그 표현의 매체가 영화인 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인식할 때는 그 사람의 지인이나 갖고 있는 배경, 사회적 역할 등을 보곤 하지 않나. 하지만 타인에게서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때는 그가 가족 안에 머물러 있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가족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을 흥미로워하는 것 같다.

김민세

철택과 정미의 서사부터 시작해서, 현숙과 옥남의 서사, 관택과 동민의 서사 등. '가족'이라는 단어로 엮인 다양한 서사들이 한 데 엮인다. 시나리오 작업 과정에 있어서 여러 가족 서사들이 어떻게 엮이고 뻗어나가게 되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는데. 누구의 이야기를 먼저 떠올렸는가.

정승오

첫 장편 <이장> 이후, 다음 작품을 준비하던 찰나에 코로나가 터졌다. 영화 산업 전반에 제동이 걸리는 시기였고, 내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조급함과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다 2022년 김정은 감독의 <경아의 딸> 작업에 참여 중일 때 아버지의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부터 작업과 간병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간병이라는 걸 처음 하다 보니 힘들고 작업은 작업대로 안 되는 시간을 오래 겪다 보니 내 안에 많은 것들이 쌓이더라. 분노와 열패감 같은 감정들이 쌓였고, 이걸 어떻게든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간병하는 딸과 환자 아버지의 이야기만 있었다. 그렇게 초고를 완성해서 보니까 너무 감정 쓰레기통인 거다. 내 안에 있던 많은 것들을 다 쏟아내고 있는 글이었다. 이 글로는 영화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머리와 마음을 식힌 다음에 내 가족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없는 사람이고 나의 아버지도 없는 사람이다.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서로 돌보는 것인데, 이게 그야말로 비극이고 공포더라. 나는 외아들이고 아버지는 혼자 살다 보니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근데 이 공포감이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젊은 세대들도 언젠가는 간병을 받는 순간이 올 수도 있고.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자녀로서 해야 할 역할이나 부모에 대한 짐을 져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히 아직까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과연 가족 안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떠올랐고,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이것을 나와 내 부모의 이야기로만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현재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하게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옥남의 캐릭터는 과거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동시대의 가족의 풍경은 여러 면이 전복되고 섞여 들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어린 자녀를 부모가 돌보고 부모가 늙으면 자식이 돌보는 관계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부모는 나이가 들어도 자녀를 돌봐야 하고, 자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부모를 돌봐야 하는 상황들이 많아진 것이 이유인 것 같다.

 

ⓒ 영화 <철들 무렵>

김민세

옥순이 과거의 축을 담당하는 인물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어린아이 동민이 있다. 옥순이 과거를 대변하는 시점에서 계속해서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현재 혹은 미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동민은 오히려 말이 없고 무언가를 지켜보는 시선으로서만 존재한다. 세대의 차이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에 접근하는 두 인물의 대비가 흥미로웠다.

정승오

옥순의 내레이션은 그녀가 성당의 낭독극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점에서 펼쳐진다. 낭독하는 내용은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들인데, 그분의 소설은 치열했던 한국 역사의 기록물처럼 느껴지지 않나. 그렇기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절부터 현재까지 곡절의 시기를 관통하고 견뎌온 옥남은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낭독하는 것만으로 자기 본인이 겪었던 일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내레이션을 통해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자식들에게 “니들은 이제 과거다.”라고 말하며 독립을 선언하는 것의 빌드업이 되길 바랐다. 옥남 개인의 독립이라기보다는 나아가 거의 100년을 견딘 그 세대가 비로소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미래를 보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캐릭터가 동민이다. 옥남이 스스로 자식들에게 “과거”를 말했다면 동민은 할아버지 관택에게 “니가 내 미래다.”라는 말을 듣는다. 미래를 대변하는 캐릭터로서 동민은 엔딩에 다다라 자기가 돌봐야 할 식물에 대한 일기장을 기록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세대들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남았으면 했다.

김민세

옥남의 내레이션이 견인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푸티지의 이미지들이다. 낯선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화에서 펼쳐지는 서사와는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푸티지들이 아니기 때문에 혹자는 낯설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여러 고민과 선택의 과정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정승오

시나리오 과정부터 고민 없이 무조건 해야겠다고 결심한 장면이었다. 기록물로서의 푸티지와 박완서 선생님의 텍스트가 겹쳐진다면 내가 보여주고 싶은 세대의 역사를 확실히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민세

그 이미지와 텍스트 둘 사이를 오갔을 때, 한국 근현대사라는 역사를 되짚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다.

정승오

삼박자가 묘하게 어우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문호의 글과 개인의 낭독과 실제를 담은 푸티지가 어우러진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김민세

그런 면에서 노가다 현장으로 향하는 철택의 모습과 민주화 시위 당시를 담은 푸티지가 교차하는 시퀀스는 압도적이다. 그 시퀀스에서 기주봉 배우의 얼굴은 픽션을 넘어서 피부로 맞닿는 역사의 얼굴로서 다가온다.

정승오

철택은 자신의 역사를 도드라지게 말하는 인물은 아니다. 입고 있는 옷, 듣는 음악, 그리고 관택의 말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철택의 청년 시절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뿐이다. 나는 86세대가 보여주고 저항했던 시간 덕분에 현대의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 사람들은 나의 부모 세대이기도 한데, 그 세대도 이제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자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시기를 겪고 있다. 혼자이고 벌어온 돈도 없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너무 안타까운 거다.

나의 아버지와도 간혹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울분과 설움이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 울분이 영화에서는 철택이 아우성을 지르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이후 조금이라도 자신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러 가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건데. 그 시점에서는 분노의 아우성을 지르던 감정을 삭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같은 생각 말이다. 집에서 일터로 향하는 와중에 80년대의 푸티지가 삽입된다면 철택이 자신의 과거를 복기하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정승오 감독 ⓒ 코아르CoAR

김민세

늙어감과 죽음을 내포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소 무겁게 흘러갈 수도 있으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톤을 내내 잃지 않는다. <이장>이 대사와 상황에서 발생하는 우스꽝스러움을 포착하려 노력했다면 <철들 무렵>은 보다 형식적인 면의 시도들이 많이 느껴진다. 이를테면 철택의 입원 치료를 묘사하는 과정이 그러하다. 유머는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정승오

아무래도 취향의 면이 크다. 가령, 미셸 프랑코의 <크로닉>(2015)처럼 호스피스 노동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싸움이나 갈등을 통해 민낯이 드러날 때 그 모습이 오히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심각함과 익살스러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내밀한 가족사와 욕망을 다루면서 동시에 인간의 웃긴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말을 고를 힘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말이 뾰족하게 나가고 그 말에 서로 상처받곤 한다. 그런 경험을 돌이켜 보면, 상황이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또 얄밉고 불쌍하다고 느껴진다. 그런 감정들을 작품 속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김민세

<이장>에 비해 동시대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 영화이다. 가령, <이장>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엔딩 즈음에 2G폰으로 메시지를 받는 것을 보여주는 인서트 숏이다. 반면 <철들 무렵>에서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두 편의 영화를 걸쳐, 시대를 반영하는 방식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정승오

인지하지 못했던 지점이다. 예전에 아날로그 세대라고 여겨졌던 사람들도 지금은 대부분 디지털로 넘어온 시점이다. 자동화가 익숙해진 이 시대는 누구든지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을 요구하지 않나. 이것은 나아가 생존의 문제이고 기성세대가 그것에 나름 적응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기성세대가 유튜브를 보고 웹을 통해 소통하는 풍경들이 자연스럽다. 그런 시대 현실의 모습이 영화 속 캐릭터가 디지털을 대하는 태도들로 반영된 것 같다. 항암실에서 두 노인이 만나 서로 영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60대 여성이 에어팟을 끼고 맥북을 다루는 장면이 이제는 낯설지 않은 시대이다.

김민세

<철들 무렵>은 언제쯤 극장 관객을 만날 수 있을지. 나아가 준비하고 있는 다음 스텝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다.

정승오

내년 개봉이 목표이다. 다음 작품으로는 여러 작업을 구상 중인데, 원작 기반의 작품도 있고 오리지널 작품도 준비 중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가족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가족 삼부작 타이틀을 장식하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웃음)

[인터뷰 김민세 영화평론가]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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