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반복 구조로 본 미국 영웅주의의 해체
[NETFLIX]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반복 구조로 본 미국 영웅주의의 해체
  • 변해빈
  • 승인 2025.10.28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실패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기"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에는 영웅이 부재하다. 미국 시카고를 향해 출처 불명의 핵탄두미사일이 날아오는 18분 동안, 백악관을 비롯한 정부 고위층 관계자들이 이에 대응하는 상황을 담은 이 영화에는 위기에 맞서 앞장서는 인물이 없다. 영웅으로서의 자질 문제와는 다른데, 그간 '캐스린 비글로'의 주인공들을 향한 평가는 언제나 양극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평이 어떻든 적어도 이전의 인물들이 이야기의 중심부로 지정될 만큼의 주요한 소임을 맡아왔다면 이 영화에는 그런 위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희소한 젠더성이 만들어 내는 위험한 매혹도(<제로 다크 서티>(2012)), 전쟁과 테러리즘의 트라우마로 쓰인 광기 어림도(<허트 로커>(2010)), FBI 요원과 강도의 반목하는 두 힘들의 소용돌이 치는 심연도(<폭풍 속으로(1991)) 특정 인물로 대표되지 않는다. 알려졌다시피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18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상황들을 다각도로, 세 번 반복해 보여주면서 잦은 컷 전환까지 동원해 여러 인물 사이를 숨 가쁘게 옮겨 다닌다. 관객도, 영화도 어디 하나 온전히 정착할 수 없게 한다. 장을 넘어갈 때마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바뀌지만 이 시도는 얄팍한 단면의 인식을 경계하며 무언가를 다시 보라는 취지와 거리가 멀다. 진실과 거짓 사이를 교정하는 쪽은 더욱이 아니다.

 

ⓒ 넷플릭스(NETFLIX)

그럼 왜 반복하는가. 반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어가는가. 먼저 반복을 통해 제공하는 건 인물의 '모습'인 것 같다. 수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무형의 음성, 혹은 디지털 기기에 갇혀 납작한 가상의 상으로 존재하던 인물들이 반복을 통해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서서히 덩어리로 지각되고 그 신체들이 일으키는 활동이 물리성을 가지면서 인물의 '물(物)'이 감각된다. 행위의 정당성이나 선악의 판가름을 위해 이를 확인시키기 이전에 거기 무언가 '(드러나) 있다'라는 사실 자체가 장면의 운동성을 만들고 영화의 진행을 이끈다는 게 중요하다. 불필요한 서론 없이 핵탄두미사일이 발사된 상황으로 유입한 이 영화는 시작부터 각 인물의 '물'을 예민하게 담는다. 협소한 통로를 민첩하게 가로지르거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방을 분주히 돌아다니거나, 어딘가를 맹렬히 혹은 공허하게 응시하는 모습에서 분출되는 정념으로 단순히 눈의 활동을 촉진하는 게 아니라 분주함의 활동을 상황으로 보여주고, 관객도 머리 이전에 그 분주함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유입되게 한다. 인'물'이 가시화되면서 그들이 가로지르는 집무 공간의 규격화된 배열도 눈에 들어오고 인물과 상호작용하는 사물의 '물'도 현장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세부적인 대상으로 감지된다(예컨대 달리는 인물과 함께 덜컹거리는 휴대폰 카메라 화면, 인물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 느리게 닫히는 문의 속도와 애매하게 남은 문틈에서 느껴지는 어떤 긴장감). 프레임의 몸체를 관장하는 촬영 감독 배리 애크로이드의 역동적인 카메라 무빙이나 편집의 유려한 리듬이 만들어 내는 영화의 운동도 물론이다.

있다는 것,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캐서린 비글로우 영화에서 중요하다. 사실상 첫 번째 장에서부터 영화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지 존재 자체를 감추었다 뒤늦게 풀어놓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안 보인다는 게 관건이다. 주로 인물의 모습은 관객의 입장에서 생김새에 대한 호기심의 문제라든지 캐릭터에 유입되는 일차적인 관문으로 언급되지만, 감독이 그런 쪽을 말하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는 픽션으로서의 영화를 체험하는 것에 해당할 뿐이기도 하다. 예컨대 북한 정보 전문가 애나 박이 휴가를 보내던 도중 영문 모른 채 걸려 온 수화기 너머에서 대통령과 비대면한 상황. 대통령의 모습이 제대로 등장하지 않은 작중 시점에서 대통령(혹은 대통령을 누가 맡을 것인가)은 요주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만 어쩌면 그건 관객의 몫에 불과하다. 마지막 장에 도달하기 전까지 대통령은 검은 모니터 화면 뒤편의 음성으로 존재를 드러낼 뿐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관객, 이야기 내 인물들, 이야기를 가지고 노는 감독의 입장은 다르다. 물론 음성으로는 전해지지 않은 상황, 그러니까 대통령조차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종의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그걸 영화가 아주 은밀하게 감추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거듭하건대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가 반복을 통해 쌓는 것은 진실을 푸는 실마리나 새로운 인식 체계가 아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건 물의 이미지들이다. 그저 음성이나 2D의 상이 아닌, 그 음성과 상의 주체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물의 이미지를 지난하게 펼쳐 보인다.

 

ⓒ 넷플릭스(NETFLIX)

여기까지 말했을 때 드는 위화감. 영화가 따라붙어야 하는 대상은 핵탄두미사일 격발지가 아닌가? 그러니까 누가 대체 미국을 공격하는가에서 '누가'의 문제. 그간 캐서린 비글로우의 오랜 집념을 따라 인물들은 직감 내지는 본능이 이끄는 단서에 의지해 유령을 쫓아오지 않았던가. 그 유령의 실체를 사살해 기어이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 피로한 심리 싸움과 눈속임을 뚫거나 그 안으로 들어가 죽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또는 탄탈로스적 파멸에 이르는 자발적인 발걸음을 향한 집요한 응시, 그것에 대한 갈증은 이 영화의 '물'의 팽배함과 맥을 나란히 한다. 그런데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이례적으로 유령 쫓기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유령으로 지정되는 대상 또한 예상을 벗어나 있다. 격발지를 색출하려는 인물들의 대화가 있긴 하지만 이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일촉즉발의 말(대사)들에 섞여 너무 쉽게 휘발되어 버린다. 대량으로 생산된 말(대사)들은 정작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웅성거림'으로 뭉그러진다. 군사적인 결정 과정에서 주요 핵심 인사들은 위계적으로 명령을 전달 및 승인하지만 행정상의 절차상 이들이 반복하는 코드명은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들린다. 많은 이들이 이더러 미국 영화 혹은 미국이라는 국가에 뿌리내린 영웅주의와 전문가주의, 무분별한 찬미적 태도를 비트는 시도로 읽어냈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반복을 제자리걸음의 다른 이름처럼 다룬다. 그게 의도인데, 캐서린 비글로우는 이야기를 거듭 18분 전으로 돌리고 반복이 선언된 이후부터 관객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반복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를 요구하고 어딘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반복은 무의미하고 무력하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은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미래로의 이동이 제한된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에는 끊임없는 현재만이 있다. 변화해야 할 것을 변화될 수 없게 만든 이 영화는 그래서 시간의 자연적인 연장 대신 인위적인 공간감으로 팽배하다. 세 개의 장, 세 개의 칸, 세 개의 도형을 덩어리째 배치한 듯한 이 영화는 시간을 마비시키고 공간적인 것으로 만든다. 공간적인 것으로의 경직화의 과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효율적 시스템의 무력함과 합리성의 붕괴로 이어진다. 각종 기관으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건 그러한 공간의 붕괴이다. 인물들은 영화 내내 생존을 위한 방향을 탐색하고, 안전거리를 측정하고, 그러기 위해 실제의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는 통신의 제스처를 보인다. 그러나 공간을 패쇄할 뿐 거기 생존을 위한 경로는 없다.

 

ⓒ 넷플릭스(NETFLIX)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흔한 재난물에서 볼 법한 '이후'의 시간을 다루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당장 대통령이 위기에 어떤 대응을 실행에 옮길 것인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명료한 답을 내리지 않으면 관객은 상상한다. 문제는 그 상상의 경로마저 석연치 않다는 것인데, 이때 캐서린 비글로우가 말하려는 것은 영화 바깥에 생겨나는 상상에만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그 방향을 반대로 뒤집어 영화의 안을 상기해야 한다. 만들어진 이야기인 이 영화의 안으로 들어가서 현실을 시뮬레이션하기. 허구에 빼앗긴 현실을 스크린 안에 실재인 것처럼 다루기 위해 쉼 없는 총격전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한 발의 총성이 있기까지의 정적의 압박감을 응시해 온 캐서린 비글로우가 짊어진 이중의 문제. 허구가 깃든, 그러니까 현재로서는 실감과는 거리를 둔 이야기를 어떻게 관객의 현실처럼 그릴 것인가의 문제. 이에 대한 캐서린 비글로우의 해답은 여전히 돋보이고 관객은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라는, 실패의 역사 내부로 들어가 보게 된다. 폭탄이 터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허둥지둥하는 인물들의 몸짓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난무한 공간으로. 그렇다 해서 그것이 실패가 예견된 현실을 허망하게 받아들이라는 식은 영화와 달라 보이는 건 이 공간을 계속해서 기억의 성질로 바꾸고 있어서인 것 같다. 반복, 그것은 기억의 문제다. 감독의 기억은 결코 긍정의 기운을 띄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정적이 감도는 현실을 무척 소란스럽게 응시하게 만들 수 있음은 언제나 증명해 왔다. 여전히 그 재능이 돋보이는 영화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