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의 영화는 사막에서 시작하여, 사막을 닮은 우주에서 끝난다. 드니 빌뇌브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를 언급하는 것은, SF 감독인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 같다. 거대한 행성 위로 태양빛이 떠오르며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흘러나오는 오프닝은, 전례 없는 시네마틱한 경이를 선사했다. 이후 등장한 모든 우주 SF 영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면서 영화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런데 오프닝 다음 씬에서, 큐브릭은 사막의 풍경으로 이동한다. 고정 숏으로 고요히 정지된 사막의 풍경들은 “사진적인 체험”으로 다가온다. 그 뒤로 유인원과 동물들이 등장하고, 태초의 살육이 일어나는 현장이 등장한다. 유인원이 뼈 도구를 공중으로 던지자, 갑자기 시간은 수천 년을 도약하여 2001년의 매끈하고 하얀 우주선으로 매치컷(Match Cut) 된다.(『큐브릭-그로테스크의 미학』, 제임스 네어모어, 컬처룩, 2016. p.275.)
스탠리 큐브릭의 미학을 정리한 제임스 네어모어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장에서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를 언급한다. 그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성냥불을 끄는 클로즈업이 모래 언덕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와이드 숏으로 바뀌는 매치컷 되는 전설적인 장면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비견되는 숭고한 파노라마라고 표현했다. 그의 논지가 갑자기 점프한 것처럼, 사막과 우주 사이에는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연결 고리가 있다.(Ibid. p. 286)
<듄 파트1>(2021) (이후 <듄>) 역시, 사막과 우주가 통합된 공간이다. 영화의 주 무대인 ‘아라키스’는 ‘모래 언덕(Dune)’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막 행성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가 홀로그램 책을 영사하여 아라키스 행성에 대한 지식을 쌓아갈 때, 사막의 원주민인 '프레멘'의 모습과, 이들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신성한 환각제 ‘스파이스’가 생산되는 사막이 차례로 등장하고, 다음 컷에서는 거대한 원통형의 우주선 ‘하이라이너’가 우주 공간을 유영한다. 이 우주선은 프레멘이 숭배하는 거대한 사막벌레 ‘샤이 훌루드’의 원통형 형상을 닮아있다. 영화사적으로 상징적인 사막과 우주 사이의 거대한 도약이, <듄>에 이르러 다시 반복된다.
드니 빌뇌브는 <듄>의 메이킹 필름북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막은, 우리가 품은 실존적인 두려움을 현미경처럼 확대해서 보여준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과 동떨어진 곳에서 현기증이 날 만큼 무한한 시공을 직접 대면하면 마치 벌거벗은 느낌이 든다. 사막은 우리 인간들이 처한 상황을 최면처럼 되새겨 준다. 기쁨, 겸허함, 우울이 사막이 불러내는 감정이다. 때로는 불모의 공포를 불러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사막은 인간이 처한 조건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원초적인 감정들이 선연하게 드러나는 장소이다. 원초적인 감정들은 때로 죽음을 향한 충동으로, 때로는 죽음에 대항하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무한한 시공을 대면할 때, 인간의 존재 의미는 미미해지고 그로부터 겸허함, 우울, 죽음을 향한 충동이 일어난다. 반대로 사막에서는 불모에 대한 공포가 역으로 생을 향한 의지를 고양하기도 한다. 큐브릭이 그린 최초의 살인 현장처럼, 사막의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려는 본능이 폭발할 때, 타자를 향한 폭력이 발생한다.( <듄 메이킹 필름 북>, 타냐 라푸앵트, 문학수첩, 2021, p. 8.)
드니 빌뇌브의 초기작 <마엘스트롬>(2000)에서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죽음에 대항한 투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류와 화해할 수 있다.” 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그가 뿌리를 두고 있는 초기 인디 영화들에는, 자신과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폭력적인 인간과, 그 현장에서 생존하여 또 다른 생명을 지키려는 인간의 팽팽한 대립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몬트리올 폴리테크닉 대학의 실제 총기난사 사건을 영화화한 <폴리테크닉>(2009)이 있다. 총기 난사 사건의 생존자인 발레리(카린 바나스)는 시간이 흘러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빌뇌브가 작가로서 입지를 다진 <그을린 사랑>(2010)을 기점으로, 폭력성에 대한 해부는 사막을 배경으로 한층 표현적인 양상을 띤다. <에너미>(2013),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이후 <시카리오>),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그리고 다시 <듄>에 이르는 작품들의 비주얼적인 톤은, 생명이 떠나간 황무지 같은 사막의 이미지 안에서 공명한다.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내전 속에서 태어난 쌍둥이 남매 시몽(막심 고데트)과 잔느(멜리사 데조르모-풀랑)가, 어머니 나왈(루브나 아자발)의 과거 행적과 자신들의 출생의 기원을 추적해가는 서사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배경은 오랜 내전을 겪은 레바논 땅이며, 이 사막 위에서 가족 간의 폭력, 복수, 정치적인 결단, 내전의 참상이 벌어진다. <에너미>와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붉고 혼탁한 대기로 가득 찬 디스토피아적인 대도시의 풍경을 보여준다. <시카리오>에서도 마약 카르텔의 온상인 멕시코 후아레스에 진입하는 카메라가, 도시 주변의 모래 사막을 극부감 혹은 버즈 아이 뷰(Bird’s eye view)로 조망한다. 이때, 드니 빌뇌브의 초연하고 냉담한 카메라는, 신성이 사라진 땅에서 조물주의 시선을 대체한다.
사막에는, 화염처럼 불타오르는 인간의 표정과, 모든 것이 소강되고 빠져나간 상태의 벌거벗은 인간의 표정이 공존한다. <그을린 사랑>의 원제는 <화염(Incendies)>이다. 과거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에서, 나왈은 타오르는 불꽃 같은 사람이다. 연인이 자신의 혈연에게 살해당하고, 갓 태어난 아이와 생이별을 할 때도, 그리고 감옥에서 15년 간 ‘노래하는 여자’로 살아갈 때에도 나왈의 눈빛은 형형하며, 삶을 향한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하지만 수학적인 역설이 낳은 거대한 부조리를 직면한 후에 그녀의 눈빛은 소강상태에 이르고, 어머니의 긴 침묵 앞에서 아들 시몽은 격렬한 분노를 토해낸다. 나왈의 표정은 <에너미>의 아담, <시카리오>의 알레한드로,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의 표정과 오버랩 된다.
나아가 인간의 고유함과 인간성이 완전히 말살되었을 때, 인간은 도구화되며, 무기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디오헤드(Radiohead)의 노래, <You and Whose Army?>가 삽입된 영화의 오프닝은, 분노에 찬 레바논 소년병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모습을 롱테이크에 담았다. 무자비하게 깎여 나가는 이들의 머리카락은, 전쟁이 그들의 개성과 인간성을 점차 말소할 것임을 암시한다. 소년병들의 이미지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똑같이 민머리를 한 채 무기력하게 착취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변주된다. 니안더 월리스(자레드 레토)의 사무실 복도에 줄 세워져 있는 전 세대 레플리컨트 모델들은, <시카리오>에서 벽 안에 선 채로 죽어있는 시체들의 충격적인 오프닝 장면을 상기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 K(라이언 고슬링)는 동족인 레플리컨트를 제거하도록 훈련된 용병이며, 전반부에서는 감정이 거세되어 있다. (단, 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추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감정의 동요를 느끼고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도구화된 인간들은 하나같이, 사막의 뜨거운 폭력을 오랜 기간 겪은 후에 전소되고 난 잔재와 같은 표정을 띠고 있다.
수학과 언어로 구현되는 폭력의 역설
비주얼리스트로서 빌뇌브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사막이라면, 스토리텔러로서 그는 수학과 언어의 논리로 폭력이 만들어내는 부조리를 구현한다. 수학과 언어는 각각 고유한 논리와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증명과 해석의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많은 부분 정합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 체계를 쉽게 벗어난다. 이를 양극단에서 명징하게 보여주는 두 작품은 <그을린 사랑>과 <컨택트>(2016)이다.
<그을린 사랑>에서, 나왈은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언장에 수수께끼 같은 힌트를 남긴다. 첫째, 너희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지 않았고, 아직 살아있다. (수학자인 잔느와 동료는, 아버지가 전쟁에서 죽지 않았을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미지 변수’라고 부른다.) 둘째, 너희에게는 또 다른 형제가 있다. 이들에게 각각 편지가 전달되면, 내 이름을 새긴 비석을 새겨도 된다. 나왈의 유언은, 마치 수학 문제에 주어진 조건식과 같다. 두 남매는 각자 양쪽의 과거를 파헤치다가, 거대한 ‘하나’의 비극 안에서 다시 조우한다.
간략히 말해서, 이 이야기는 현대판 오이디푸스 비극이며, 나왈은 아들을 ‘남편’으로 맞이한 중동의 이오카스테이다. 여기에 소포클레스 비극의 원형을 수학적으로 표현해주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 ‘1+1=1이 될 수 있을까?’ 시몽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수학자 잔느는, 잠깐의 정적 끝에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수학적 논리 체계에서 ‘1+1=1’은 거짓 명제다. 그러나 인간사에는 ’1+1=1‘이 참이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을린 사랑>의 원작 희곡인, 와즈디 무아와드의 <화염>에서는 같은 장면의 대화가 다르게 전개된다. 잔느는 시몽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또 다른 수학 이야기를 꺼낸다. 그것은 ‘콜라츠 추측 (Collatz conjecture)’이라는 가설이다.(『화염』, 와즈디 무아와드, 지만지드라마, 2019. pp. 164-166.)
풀어 설명하면, 모든 자연수에 대하여 그 수가 짝수이면 2로 나누고, 홀수이면 3을 곱해서 1을 더한다. 어떤 수로 시작하든 항상 1에 도달한다는 가설이 콜라츠 추측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임의의 자연수를 위 식에 대입해보면, 숫자는 알고리즘을 타고 변화하다가 1이라는 종착점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콜라츠 추측은 80년 동안 누구도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학적인 명제나 정리가 아니라 여전히 가설에 머물러 있다. 모든 미지 변수를 넣더라도 아주 높은 확률로 1이라는 숫자에 도착하지만, 그 원리만은 아직까지 누구도 증명해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을린 사랑>의 인물들은 알고리즘에 대입되는 숫자들처럼, 매 순간 각자의 원칙과 신념이란 알고리즘에 따라 선택을 내린다. 나왈은 죽은 남편 와합(하메드 나젬)의 복수와 대의를 위해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죽인다. 그 결과 민병대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니하드가 있는 지역의 난민캠프를 학살하고, 그를 저격수이자 악명 높은 고문관 아부 타렉(압델가포르 엘라지즈)으로 키운다. 그 결과, 나왈은 평생토록 찾아 헤매던 아들을, 감옥에서 자신을 성 고문하는 교도관, 남은 평생 동안 증오할 원수로 만난다. 이러한 종착점은, 삶의 부조리가 보여주는 폭력적인 양태이다.
<그을린 사랑>에서 수학자 잔느와,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말하는 나왈이 각각 수학과 언어를 표방하는 인물이었다면, <컨택트>에는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와 이론 물리학자 이안 도넬리(제레미 레너)가 수학과 언어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들은 지구에 등장한 7개의 발이 달린 외계 생물체, ‘헵타포드’와 소통하기 위해 소집된 각계 전문가들이다. 루이스는 언어학자답게 단어와 문장 구조를 분석한다. 인류의 근간이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이안은, 외계어의 형태와 수학적인 패턴에 집중한다. 이들이 헵타포드와 대화를 시도하는 몬태나 주의 평원은, 미디어에 비춰지는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 즉 사막의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외계에서 온 메시지를 해석하여 전 인류에게 전한다. 그렇다면 은유적으로 헵타포드의 비행체는 속세와 단절된 신전이며, 두 사람은 인류에게 미래의 메시지를 전하는 무녀, 혹은 선지자라고 할 수 있다.
헵타포드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언어와 과학은 무기이자 선물이다. 루이즈는 정부 기관의 의뢰를 받아 이라크 반군 동영상의 페르시아어를 해석해주지만, 이 때문에 반군들은 전부 몰살된다. 하지만 솅 장군(티지 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군사 도발을 멈추게 할 때, 언어는 인류에게 선물이 된다. 둘째, 분열을 그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전언이다. 이안은 헵타포드가 만든 무수한 원을 3차원으로 분석하여, 분수 1/12을 뜻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헵타포드의 12개의 착륙지가 오랜 분쟁 지역(시에라리온, 수단, 베네수엘라, 러시아 흑해)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을 모아 세계는 하나가 되라는 뜻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언어와 과학의 순수한 힘만으로 분쟁이 종식되는 영화적인 상황은, 사실상 유토피아에 가깝다. 더욱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목격하고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말이다.
끝으로, 헵타포드는 비선형적인 시간관을 배우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은 선형적인 언어를 배우고 이에 따라 사고한다. 그리고 비극이 일어났을 때 그 이후의 시간을 고독하고 불행하게 보낸다. 그러나 언어 결정론에 따라서, 비선형적인 철자법을 쓰면 비선형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딸이 태어났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희귀병에 걸려 죽었다.’ 루이즈에게 일어난 사건의 순서이다. 비선형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바꾸면, 다음 문장이 가능해진다. ‘딸은 죽는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컨택트>의 초반부에 나오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은 그렇게,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을린 사랑>의 나왈은 삶에 일어난 모든 비극에도 불구하고 두 자녀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함께 있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단다.”
두 영화의 수학적인 역설은, 과거로부터 대물림된 폭력을 1이라는 숫자로 극명히 보여주거나, 또는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유토피아의 세상을 1이라는 숫자로 구현한다. 전자는 돌이킬 수 없이 끔찍하고, 후자는 다다를 수 없이 요원한 세상이다. 이 역설의 귀결점이 되는 <에너미>와 이후의 작품들은 두 극단적인 역설 사이에 위치한다. <에너미>를 기점으로 빌뇌브의 작품에는 이원화되고 자아 분열된 캐릭터의 쌍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난 인물들은, 통합된 삶으로 회귀하기 위해서 도플갱어를 죽이거나(<에너미>), 죽이는 데 실패하거나(<시카리오>), 도플갱어를 되찾거나(<프리즈너스>), 화해하는 결말(<블레이드 러너 2049>)에 이른다.
2013년작 <에너미>는,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라는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드니 빌뇌브의 설명에 따르면, 이 소설은 정부(情婦)를 떠나 다시 아내에게 돌아가려는 남자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결혼반지를 낀 남자가 비밀스러운 스트립 클럽에 입장한다. 배경이 전환되면서, 역사학 교수인 애덤과 단역 배우 앤서니(제이크 질렌할 1인 2역)라는 두 도플갱어가 만나고, 앤서니가 아담의 연인을 탐내다가 같이 차 사고를 당한다. 다음 날, 아담 혹은 앤서니는 비밀 클럽으로 입장하는 열쇠를 받는다. 결말에는 커다랗게 확대된 거미가 방안을 장악한다.
위 결말에 대해서는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아담은 독재자의 통치 방식에 대해 반복적으로 수업을 한다. 이때 그는 스스로 거미줄의 반복되는 패턴에 갇혀있는 먹이처럼 보인다. 이를 보았을 때 거미의 의미는, 남편의 바람을 알고 통제하는 독점욕이 강한 아내 헬렌(사라 가던)이 된다. 혹은 스트립쇼에 등장하는 독거미와 깨진 차창에 나타난 거미줄 모양처럼, 결혼 제도 밖에 도사리는 위험한 (성적인) 유혹일 수도 있다. 어쩌면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처럼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몰락하는 가부장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드니 빌뇌브는 <필름 코멘트(Film Comment)>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한 인간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에 대한 위협, 내면 자아의 일부를 제거할 만큼 무의식의 힘이 세져서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 대한 감독 스스로의 걱정을 반영한 작품”이었다고 개인적인 소회를 밝혔다. 현재의 조건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 온전히 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불안감, 충동 조절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이 도플갱어와의 조우, 갈등, 그리고 둘 중 한 명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프리즈너스>는 ‘잃어버린 신발 한쪽 찾기’라는 그리스 모노산달로스 신화의 테마가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두 4인 가족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들은 각각 비슷한 나이 대이고, 둘째 딸들이 동시에 유괴된다. 신실한 기독교인인 켈러(휴 잭맨)은 직관과 본능으로, 지능 장애가 있는 이웃 알렉스(폴 다노)를 용의선상에 놓고 불법적인 수사를 감행한다. 한편, 마을의 담당 형사 로키(제이크 질렌할)는 증거 중심의 원칙적인 수사를 표방한다. 프랭클린(터렌스 하워드)과 낸시(비올라 데이비스)는 켈러의 판단을 의심하고 그의 폭력성 앞에 경악하면서도, 알렉스에게 애원하고 회유하면서 켈러의 불법 행위에 공모한다. 영화는 이성과 본능, 맹목적인 믿음과 회의주의의 대결을, 거울 같은 캐릭터들로 보여준다.
프랭클린과 낸시의 딸 조이(카일라 드류 시몬스)가 범행 현장에서 탈출해서 돌아오면서 수사는 전환점을 맞이하고, 나머지 한쪽인 애나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조이가 켈러가 범행 현장에 있었다고 말하면서, 캘러는 잠재적 용의자인 알렉스와 같은 처지가 된다. 자신이 잡으려던 괴물이 되어버린 켈러는, 진범이라는 또 다른 괴물을 대면하는 순간에 세상으로부터 사라진다. 이 긴 추적극은, 세상에 존재하는 똑같은 호루라기 중 하나를 찾는 것, 즉 지하에 감금당한 켈러를 찾는 것으로 종결되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과거의 두 소년이 겪었던 비극과 트라우마가, 마약에 취해 멍하니 앉아 있는 두 소녀에게도 전승될 것이며, 폭력은 또다시 반복될 것임을 영화는 어둡게 전망한다.
<시카리오>도 마찬가지로, ‘1+1=1’이 될 수 있을까?라는 수학적인 역설을 다르게 보여준다. CIA의 소노라 카르텔 소탕 작전에 투입된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는,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지식이 통하지 않음을 느끼고 공포와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CIA의 팀장 맷 그레이버(조쉬 브롤린)가 고용한 정체불명의 고문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가 팀에 합류한다. 멕시코의 전 검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누구보다 작전을 용의주도하게 이끌어가며, 적시에 나타나 케이트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러나 자신의 개인행동을 저지하려는 케이트의 방탄복을 향해, 그는 서슴없이 총을 쏜다. 결말에서 알레한드로는 CIA와의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사적인 복수를 실행하려는 암살자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법질서를 수호해야 할 멕시코 정부의 얼굴이자 잔인한 무법자의 얼굴이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며, 아군인 동시에 적군이다. 케이트가 끝내 총을 내려놓는 것은, 그를 쏜다 한들 이 거대한 카오스를 없앨 수 없음을 자각한 것은 아닐까?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LAPD 의 블레이드 러너 K에게는 2명의 도플갱어가 있다. 한 명은, 유전자 배열이 똑같지만 다른 성별을 가진 미지의 존재이다. K는 동족을 사살하는 업무 수행 중에, LA대정전 사태 이전에 임신이 불가능한 레플리컨트들로부터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적을 전해 듣는다. K는 자신이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 누군가로부터 이식된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기억일 수도 있다는 물증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일지도 모르는 아이를 색출하다가, 유전자 배열이 똑같고 성별만 다른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한 쌍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하나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어떻게 둘일까? 여기에서 다시 수학적인 역설이 발생한다.
K의 또 다른 도플갱어는, 타이렐사에서 개발한 홀로그램 인공지능인 조이(아나 드 아르마스)다. 그녀는 K의 가상 연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K의 자아상을 반영한 거울이다. <그녀>(2013)에서 인공지능인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와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처럼, K는 조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관계를 원한다. 하지만 그는 연인이 보급형 제품임을 끊임없이 자각해야 한다. 빗속에서 로맨틱한 입맞춤을 하는 순간에도 상관의 전화가 오면 화면이 정지되듯이, 조이는 늘 불안정하게 명멸한다. 그녀가 특별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K에 대한 모든 것이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이는 결국 프로그램화된 K의 분신이다. 그녀는 K에게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당신은 특별한 존재인 줄 알고 있었노라고 말해준다. 이것은 K가 자기 스스로 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영화는 조이와 사랑에 빠진 조라는, 나르시시즘의 사랑을 보여준다. 실재하는 독립된 타인인 마리에트(맥켄지 데이비스)는, 육체화된 조이를 만나는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성능이 낮은 컴퓨터 그래픽처럼 조이와 마리에트가 미세하게 동기화되지 못 하는 이 기묘한 영상에는, 이상한 슬픔의 정서가 있다. 불완전한 자아상과 타자를 둘 다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끝없이 미끄러지는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이전 세대인 데커드(해리슨 포드)와 레이첼(숀 영)은, 레플리컨트 사이의 사랑이라는 금기를 깨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 반면 조이와 조의 사랑은, 유전자 알파벳 4개와 숫자 0,1의 차이일 뿐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형태의 사랑의 결실도 얻지 못한다.
K가 데커드를 찾아 떠날 때 조이를 이동식 디스크에 이식해가는 장면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데커드와 레이첼의 탈출 장면을 오마주한다. 그러나 매체 의존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조이는, 월리스의 비서 러브(실비아 혹스)에게 허무할 만큼 쉽게 파괴된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라는 인공적인 자아도 파괴된다. 데커드를 만난 이후, 그의 꿈에 나타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인공적인 기억을 만들어 타이렐 사에 납품하는 아나 스텔린(카를라 유리) 박사의 실제 어린 시절 기억을 이식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K는 조이를 상실한 후, 두 번째 도플갱어인 아나 스텔린의 존재와도 화해한다. 데커드가 딸을 만나러 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누군가의 그림자도, 도플갱어도 아닌 그 자신으로만 존재한다. 이 새로운 자아의 출발을 축성하듯, 순수, 정화,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흰 눈이 그의 세상을 덮는다.
드니 빌뇌브의 전작을 모두 경유하여, 우리는 서론에서 언급했던 <듄>으로 다시 회귀한다. ‘폭력의 무대인 사막’과, ‘무한한 시공간으로서의 사막’이라는 두 테마가 <듄>에 이르러 집대성 된다. 폭력의 테마는, 무기인 동시에 선물인 스파이스라는 자원과 연결된다. 스파이스는 프레멘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환각제이며, 동시에 제국의 항법자가 우주 여행을 할 때 필요로 하는 값비싼 자원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프레멘은 짐승 같은 '하코넨'의 압제를 받고, 생태학 실험을 통해서 낙원이 될 수 있었던 아라키스는 스파이스 채굴로 인해 황폐화된다.
즉 아라키스를 지배하라는 황제의 명은 ‘선물이 아닌 선물’이다. 스파이스 생산 장비는 수명을 다해서 부를 창출하지 못하며,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작)과 던컨(제이슨 모모아)이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학살이 일어난다. 하코넨과 황제의 ‘사다우카’ 군대가 레토 공작의 기지를 공격하는 장면은, <그을린 사랑>과 <시카리오>에 나타나는 전쟁 장면과 이미지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신성이 사라진 불모지를 그렸던 전작들에 비해, <듄>에서는 출애굽기의 ‘불타는 떨기나무’의 비유처럼 성스러운 대추야자 나무가 불타오르면서, 압제와 비극으로부터 한 민족과 종교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탄생할 것임을 암시한다.
선물이자 무기가 되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오브제는 ‘크리스나이프’이다. 프레멘인 샤도우트 메입스(골다 로쉐벨)는, 샤이 훌루드의 이빨로 만든 칼을 공격할 무기로서 품고 있다가, 제시카(레베카 퍼거슨)가 계시의 주인공이라고 믿는 순간 그녀에게 헌정한다. 그런데 폴은 같은 크리스나이프로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 죽음을 맞는 꿈을 꾼다. 이로써 무기가 선물이 되고, 선물이 다시 무기가 되는 역설이 순환된다.
다음으로, 사막은 곧 시간의 상징이기도 하다. “떨어지는 모래 사이로 시간의 공기를 맛본다.”는 대사처럼, 폴이 스파이스를 들이마실 때마다 내면의 ‘퀴사츠 해더락’이 깨어나며, 그는 꿈에 이미지에서 프레멘을 비롯한 연합군을 이끄는 자신의 미래를 본다. 프레멘들의 메시아인 ‘리산 알 가입’은 시공간을 초월해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자를 뜻한다. 그렇게 폴은 미래를 예지하며 <컨택트>의 루이즈로부터 이어지는 선지자적인 캐릭터의 계보를 잇는다.
'칼라단'과 아라키스 사이의 대비는, <컨택트>와 다른 사막의 영화들(<그을린 사랑>, <에너미>, <시카리오>, <블레이드러너 2049>) 사이의 대비와, 서로 대구를 이룬다. 칼라단의 풍경은 <컨택트>처럼 피안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황제의 사절단을 태운 비행체가 칼라단 지상에 내려앉는 씬은, 외계의 메시지를 전하러 지구에 착륙한 헵타포드의 비행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컨택트>의 유토피아적인 평화가 <듄>에서는 제시되지 않는다. 온 우주에 종교 전쟁이 번질 만큼 폭력으로 점철될 미래가 예언되고, 폴은 그 미래를 보면서 고통스러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은 “내 길은 사막 위에 있다.”고 받아들이고 나아가며, 그 여정 위에서 누군가와 사랑하고 연대할 것이다. 드니 빌뇌브의 사막과 우주는 <듄>에 이르러 서로를 마주본다.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비선형적이고 순환적인 시간관을 가진 미래주의자의 시선이다.
사막과 우주의 시네마
사막은 인간의 폭력성이 발현되는 기원이기도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을 마주하는 공간이다. 사막의 광활함 앞에서 인간 존재는 미미해지며, 그 자리에 불모의 공포와 절대적인 고독이 자리한다. 또 한편으로, 사막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지배하는 자만이 생존하고 번성한다. 따라서 사막 위의 인간은, 죽음을 향한 충동과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드니 빌뇌브는 폭력이 어떻게 발현되고 전개되며,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보여주기 위해 사막이라는 기원적인 장소를 선택했다.
그의 사막에는 수학적이고 언어적인 논리로부터 발생하는 역설이 있다. 첫째는 오이디푸스적인 역설이다. 논리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지만 결국 하나가 되어버린 인물들은, 사막을 지배하는 혼돈의 현신이다. 둘째는 유토피아적인 역설이다. 즉, 오래 지속되어온 분열을 그치고, 과거-현재-미래를 하나로 합치라는 미래적인 메시지이다. 이 역설들은 모두 폭력의 대물림과 폭력의 종식을 구현한다. 두 극단 사이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과 공포를 반영한 도플갱어들로 분열한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 안에서, 이 도플갱어들은 우연히 조우하고, 갈등하다 서로를 죽이기도 하며, 화해하고 공존한다.
마지막으로,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사막의 세계이고, 사막은 다시 우주라는 차원으로 확장된다. <듄>의 인물들은 사막 위에서 전쟁과 복수의 참상을 그대로 겪지만, 바로 그 사막 위에서 외계의 목소리, 즉 미래의 전언을 듣는다. 이로써 빌뇌브의 세계관은 하나로 통합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더 광활한 세계관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빌뇌브는 프랭크 허버트와 챠니의 입을 빌려 선언한다(“이건 시작일 뿐이야.”). 우주 위에서 다시 사막을 내려다 볼 때, 혼돈으로부터 해석되지 않은 질서(<에너미>)를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빌뇌브는, 수학적인 추측이 증명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듯이, 인간사의 반복되는 비극과 부조리에 내재된 원리를 파악하고, 그 굴레를 끊어낼 수 있으리라고 조심스레 전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드니 빌뇌브의 카메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부조리와 폭력이 지나간 뒤 남겨진 사막과 우주, 해석되어지기를 기다리는 그 혼돈을 가만히 응시한다.
[글 이지영 영화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