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든, 영화든, 전시든 해마다 힙스터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지'로 불리는 작품이 있다. 올해는 네오 소라의 <해피엔드>인듯하다. 당연히 이 영화에는 힙한 요소가 가득하다. 감독이 타계한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이라는 점부터 충분하다. 여기에 모델 출신의 두 배우 쿠리하라 하야토와 (감자라 불린) 히다카 유키토의 인기도 마찬가지다. 윤성현의 <파수꾼>(2010) 등 10대의 방황과 활력을 그리는 성장 서사, DJ와 <아키라>(1988)를 보는 듯한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라는 세련된 이미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등 씨네필적인 레퍼런스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우정이라는 낡고 보편적인 감성까지 영화의 요소 하나하나가 젊은 관객을 매혹할 만하다. 그런데 <해피엔드>를 둘러싼 선풍적인 인기와 그를 둘러싼 비판적 시선을 볼 때마다 든 생각이 하나 있다. '왜 이 영화를 보고 웃기다'는 글을 쓴 사람은 드문가.
개인적으로 <해피엔드>는 코미디 영화에 가깝다. 영화의 엔딩을 볼 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장 세상이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웅장하고, 우울한 신시사이저의 음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간이 나와서다. 음악이 흐르기 전 유타(쿠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걸어가던 중 양 갈래로 갈라지는 육교의 한가운데로 향한다. 카메라는 두 배우의 뒤에 서서 둘의 발걸음을 조심스레 따라간다. 육교 끝에 도착한 유타와 코우는 잠깐 대화를 나눈다. 분명 여기까지는 뭉클했다. 카메라가 두 배우를 따라갈 때 육교 건너편에서 역광이 비쳐와서 스크린을 뒤덮는다. 이때, 영화는 컷을 통해서 역광을 마주하기 전과 후를 구분한다. 이 순간 역광은 단순히 노을이 지고 있다는, 한 시절이 끝나간다는 쓸쓸함을 만드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마치 육교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기 전의 세계에서 통과하는 듯한 감흥을 자아낸다.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유추해 보았을 때 네오 소라 감독은 이 씬을 롱테이크로 찍으려 했을 것이다. 영화 전체가 하나의 환상적인 세계인 듯한 아련한 감흥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통로라는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이 통로를 지나며 <해피엔드> 속의 다섯 학생은 저마다의 꿈을 따라서 흩어져 가고 <에반게리온: 다카포>(2021)의 엔딩처럼 찬란한 현실에 안착하게 된다. 이 영화는 기대를 배반한다. 그다음 유타가 가슴을 장난스럽게 꼬집기 시작하고 영화의 프레임이 멈춘다. 그때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과연 둘은 학교라는 세계를 통과했을까 의심이 들었다. 편집 감독의 장난에서 시작했다는 이 프리즈프레임은 <해피엔드>를 둘러싼 비평의 핵심이 되었다.
<해피엔드>를 본 관객이라면, 이 음악이 오프닝에서 흘러나온 음악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해피엔드>의 오프닝은 별나다. 차라리 당혹스럽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카메라는 붉은 조명이 점멸하는 어두운 도쿄의 도심을 하늘 위에서 찍는다. 이때 웅장한 음악은 관객에게 이 영화 속 세계관이 디스토피아라는 심증을 느끼게 한다. 거기에 이 붉은 조명은 (감독이 사랑한다고 직접 이야기한) <아키라> 등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반복해 드러나는 시각적 코드이기도 하다. <해피엔드>는 그다음 급작스럽게 카메라를 아래로 내린다. 마치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이 아래로 틸팅하는 카메라는 어디서 끝날지 모른다. 이 카메라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에서 앨리스가 지하 세계로 빨려드는 감흥을 준다. 이후에야 유타와 코우가 장난으로 교장의 차를 뒤집는 등 메인 사건이 등장한다. 즉, 이 영화에서 학교라는 세계는 환상적인 공간인 셈이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과장법으로 학교라는 세계가 동화 속 세계라는 사실을, 장난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리얼리티, 진정한 정치적 저항을 이야기하는 일은 왜인지 새삼스럽다. 이 영화는 리얼리티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인터넷 밈과 정치적 유희의 세계, 환상에 불과해서다. 영화는 이 사실을 분명히 오프닝과 엔딩에서 드러낸다. 영화를 본 관객은 이 세계를 서둘러 나가야 한다. 유타와 코우가 살았던, 그리고 살아갈 세계는 딱 거기서 끝난다.
<해피엔드>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지진이 잦은 근미래가 배경이며 극우 정권이 들어선다. 총리는 대국민에게 긴급사항을 알리고 영구 독재를 꿈꾼다. 고등학교 3학년인 유타와 4대에 이어서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 조선인 코우는 금지된 음악인 디제잉을 즐긴다. 또한 둘의 세 친구와 함께 음악동아리를 운영한다. 어느 날 학교 교장이 새로 산 차가 세로로 우뚝 선다. 그 차는 얼마 안 지나서 지진으로 인해서 무너져 부서진다. 교장은 범인을 색출한 끝에 코우와 유타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코우와 유타가 증언을 거부하자 학교에 A.I 감시 시스템인 파놉티를 설치한다. 코우는 시도 때도 없이 불심검문을 당하면서 학교 친구 후미의 영향으로 본인의 소수자적 정체성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코우와 유타는 서서히 불화하고 나머지 친구도 각자의 삶을 도모한다. 이 단순한 서사의 빈틈을 채우는 것은 유머다. 청소를 방해한다든지, 깜짝 파티를 연다든지, (아마도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을 패러디한) 다른 두 인물이 하는 말을 멀리서 상상한다든지, 기계적으로 벌점을 매기는 파놉티의 감시를 교묘하게 피한다든지 장난이 그들 사이에 오간다. 이 장난은 수많은 필자가 부재해 있다고 지적하는 정치적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장난의 힘, 유머의 힘을 신뢰하는 영화다. 굳이 클로즈업이 아니라 멀리서 이들의 행보를 찍는 것도 이들이 서 있는 풍경과 이들의 유희적인 움직임을 한꺼번에 포착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네오 소라는 성인이 아니라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로 강제로 시스템 안에 머물러야 하는 부자유와 거기서 생기는 우정을 이야기한다. 성인이라면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모이지 않는다. 고등학교가 환상적인 공간으로 그려지는 이유도, 성인으로 자라나서 서로 정치적 성향이 달라지더라도 친구를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상상적인 봉합이 가능한 장소가 학교뿐이어서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네오 소라가 정치적 자아를 발견하기 시작한 시기가 대학생 때라는 점이다. 평범한 학생인 그는 미국에서 유학할 때 동일본 대지진을 둘러싼 이슈를 시작으로 정치적 운동을 시작한다. <해피엔드> 속의 일본 고등학교는 고등학교인데도 어쩐지 미국 학교의 풍경에 가깝다는 인상을 남긴다. 다인종으로 이루어진 유타와 코우와 어울려다니는 5인방의 구성은 왜인지 일본 학교라기보다는 미국 학교에서 볼 법한 구성이다. 90년대 미국 컬트 영화 <조찬클럽>(1985)의 구성을 보는 듯하달까. 이 학교에는 입시를 둘러싼 스트레스도 사라져 있다. 이런 초국적적인 학교는 근미래라는 영화적 허용이 아닌 한 좀처럼 현실에서 보기가 어려운 풍경이다.
<해피엔드>는 마술적 사실주의 영화라 봐도 무방하다. 유타와 코우가 교장의 자동차를 세로로 우뚝 세우는 과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말로 얼버무려진다. 둘을 둘러싼 세상은 마술적이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파놉티라는 시스템도 허술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고등학생이 만든 망상적 세계관이라 부르는 일이 더 마땅하다. 이 영화의 뻔뻔함은 이 영화를 두고 언급되는 수많은 영화와는 거리가 있다. 이 영화가 재일 조선인의 리얼리티를 다루었으며, 중간에 교장실을 점거할 때 1960년대 일본의 저항 가요가 흘러나왔다는 이유로 오시마 나기사의 정치 영화를 언급하는 일은 당연하다. 또 달리는 주인공을 두고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1985)을, 암울한 도심 풍경이 학생 개개인의 무의식에 침투하는 과정을 두고 에드워드 양 영화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디테일 곳곳에서 이 영화의 정치적 문법이 장-뤽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1960)에서 가게 이름을 "멋진 신세계"로 설정한다든지, <알파빌>에서 파리를 근미래의 파시즘이 도래하는 장소인 알파빌로 그려낸다든지 하는 장난을 닮아 있다는 점이다. <알파빌>도 레트로한 설정을 근미래로 가공하는 영화라 볼 수 있다. <해피엔드>는 그 뻔뻔함을 계승한다. 유타와 코우가 폐공사장에 디제잉하는 공간을 꾸리는 등 도시 점거는 60년대 상황주의자가 하는 전략에 가깝다. 이처럼 이 영화의 영화적 공간은 논리적이지 않고 전부 풍자적 과장이 깃들어 있다. 이 영화를 볼 때 나만 웃긴가라는 생각을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는 <해피엔드>가 실제 고등학교의 생생한 풍경이 아니라 한 인간이 정치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연습을 하는 공간으로의 학교를 찍어서다. 영화에서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묘사는 학생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느냐 마느냐에만 치중해 있다. 일례로 <해피엔드>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후미는 오로지 정치적 자아만 가지고 있다. 후미는 인텔리 계층으로 그려지며 코우를 제외한 다른 친구에게는 말을 건네지 않는다. 시위를 주도하고 공론화를 하는 선봉대장인 셈이다. 파놉티의 피해자이며 자위대 교육에서 배제당한 당사자가 정작 시위에서 빠지고, 공론화하는 사람은 정작 다른 사람인 경우는 운동 현장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갈등이다. 마지막으로 각자의 사정으로 활동을 그만두거나 그 안에서도 계급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도 흔하다. 또 단식 투쟁의 버거움도 시위 현장에서 견뎌야 할 고충 중 하나다. 네오 소라의 정치적 자아는 처음부터 유머와 과장, 농담과 풍자 등 "웃음 행동주의"(스르자 포포비치)에 기반해 있다. 정치적 저항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의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 저항의 부재도 아니다. 유머가 곧 정치적 저항이라는 태도에 더욱 가깝다. 네오 소라는 정치 운동에서 생길 수 있는 갈등을 유머로 승화한다(물론 이 유머가 누군가에게는 안 웃길 수 있겠다).
되짚어볼수록 <해피엔드>를 정치적인 영화라 언급하는 일은 겸연쩍다. 보수주의자이자 속물로 그려진 교장은 진정으로 타격해야 할 적이 아니다. 교장도 본인이 사회에 나가야 할 이 학생이 이어갈 정치적 투쟁의 스파링 상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후미 또한 이 투쟁이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이 영화의 모든 투쟁은 정치적 영화의 연습에 가깝다. 이를테면 교장에게 충격을 가하는 방식도 독보적이다. 교장의 차를 무너뜨리고, 교장의 행동을 패러디한다. 교장실을 점거하는 전통적인 점거 시위가 발생하나, 사실 이 시위를 무너뜨리는 원인은 갑자기 <아키라>의 세계에서 건너온 듯한 코우의 코스프레와 김밥 덕이다. 마지막까지 감독은 학생이 입은 옷 뒤에 새겨진 반으로 갈라진 자동차 자수를 드러내면서 교장을 비웃는다. 이처럼 교장을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일상을 불규칙하게 흔들리게 만드는 유머가 곧 세상을 구한다고 믿는 셈이다.
<해피엔드>는 유머를 긍정한다. 유타와 코우가 파놉티에 저항할 때도 감시할 수 있는 골목 너머에 서있으면서 그 규율에 찬성하는 학생 선도부장을 놀린다. 그 규율의 기계적 딱딱함이 되려 우리를 옥죌 것이라는 듯이. 베르그송의 말대로 웃음은 기계적 행동에 대한 처벌이다. 이 영화는 유머의 생기로 기계적 시스템이 되어가는 권위주의 사회에 저항하는 셈이다. 이 영화를 유머 영화로 보았을 때 유타와 코우의 갈라섬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고 반박할 수 있을 듯하다. 아니다. 정치적 개인주의자 혹은 체념주의자에 가까운 유타는 집에서 추방되었으나 농담의 힘으로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버틸 수 있다. 코우는 다소 진지해졌우나 유타의 장난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농담의 힘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프리즈프레임이 웃긴 이유는 세상은 망했다고 자조하는 두 남자의 허세 어린 농담을 보는 듯해서다.
네오 소라는 우울한 음악과 유머의 아이러니로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이 둘의 장난에 진지할 것인가, 함께 장난할 것이냐. 마치 이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정치적 반응을 예고한 듯한 이 프리즈프레임은 우리에게 웃음의 힘을 각인한 채로 풀린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