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글리 시스터' 괴기 속의 따뜻함, 여성을 소외시키지 않는 바디 호러
'어글리 시스터' 괴기 속의 따뜻함, 여성을 소외시키지 않는 바디 호러
  • 김경수
  • 승인 2025.10.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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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수단화하지 않는 바디 호러의 가능성

올해의 괴작이다. 에밀 블리치펠트 감독의 데뷔작 <어글리 시스터>는 그런 찬사를 들을 만하다. 사실 <신데렐라>(1950)를 바디 호러로 재해석한다는 설정을 보았을 때 의심이 앞섰다. 줄리아 뒤쿠르노의 <티탄>(2021), 코랄리 파르자의 <서브스턴스>(2024) 등 최근 유행하는 페미니즘 바디 호러의 인기에 편승하는 작품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획기적인 오프닝을 본 순간 생각이 뒤집혔다. 흔히 잔혹 동화라 부르는, 캐릭터나 상황 등 동화의 요소 중 하나를 정반대로 뒤집어서 치기 어린 포즈만 남기는 각색의 클리셰를 답습하는 영화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이 영화는 관객의 기대한 바를 거스르는 독창적 발상, 예기치 못한 전개와 노골적이고 뻔뻔한 태도로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힘이 있다.

 

ⓒ <어글리 시스터>

<어글리 시스터>는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엘비라 가족이 마차를 타고 몰락한 명문가 아그네스(레아 소피 로흐 네스)의 성으로 떠나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엘비라의 어머니 레베카(안네 달 토르프)는 신분 상승을 위해 곧 죽을 아그네스의 아버지와 결혼해서 유산을 상속받을 속셈이다. 한편 엘비라(레아 미렌)는 잘생긴 왕자 율리안(아이작 캄모스)이 쓴 시집을 읽고 몽상에 잠긴다. 그 시는 좀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상징으로 가득하다. 이 몽상은 필름을 보는 듯한 필터와 과장이 깃든 조명이 더해져 눈부시고 희뿌옇다. 레베카의 계획대로 아그네스의 아버지는 얼마 후 돌연사하나 그가 유산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심지어 성은 압수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때 아그네스는 율리안이 참석하는 파티의 초청장을 받고 엘비라도 아그네스의 도움으로 무도회에 갈 기회가 생긴다. 엘비라는 그날부터 고풍스러운 외모의 아그네스와 달리 평범한 자신의 외모를 어떻게든 고치려 애쓴다. 레베카는 신분 상승을 위해서 엘비라를 부추긴다. 이때 관객은 곧장 알아챌 것이다. 둘 가운데에 신데렐라가 될 캐릭터는 어차피 아그네스라는 사실을.

특히, <어글리 시스터>는 <신데렐라>의 대중적 이미지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는다. 유리구두도 없고 의붓언니의 악행도 노골적이지 않다. 하늘색 드레스만 등장할 뿐 가장 대중적인 신데렐라라 할 수 있는 디즈니 <신데렐라>의 영향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의붓언니의 시점을 따르는 구조는 <신데렐라>를 한 차례 비튼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소설의 영향이 더 강하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에밀 블리치펠트 감독은 체코 감독 바츨라브 보를리체프가 1973년에 찍은 <신데렐라의 세 가지 소원>을 보고 자랐다.) 차라리 이 영화는 여성혐오가 팽배했던 19세기 말의 유럽 풍경을 풍자적으로 그리려는 목적으로 <신데렐라>의 원형과 동화적인 정서를 가져온 리믹스에 가깝다. 그림 형제의 <신데렐라>가 1812년에 초판이, 1857년에 개정판이 나온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영리한 설정이다. 우선 원작과 다르게 의붓자매를 못생기게 그리며, 신데렐라를 몰래 돕는 비둘기의 존재가 지워졌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운운하면서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점잖은 여성을 기르려 하는 고전적인 교훈은 서사 밖으로 내쳐진다. 율리안을 음담패설을 즐기는 캐릭터로 설정하고, 귀족이 모인 무도회는 폭력적인 성적 대상화가 가득한 시장처럼 그리는 등 동화의 판타지를 벗긴다. 마지막으로 그림 형제의 판본에서는 적혀 있으나 디즈니의 <신데렐라>에서 삭제한 엔딩을 선택한다. 의붓언니가 황금 구두에 발을 맞추려 제 발을 자르는 장면이다. 잔혹한 장면이 영화를 만든 이유로 보일 만큼 노골적으로 강조된다. <어글리 시스터>는 동화의 톤을 가져와 잔혹한 현실을 보여주되 그 잔혹한 현실을 관객이 견딜 수 있도록 풍자적인 효과를 만든다.

 

ⓒ <어글리 시스터>

에밀 블리치펠트 감독은 19세기를 풍자하려고 19세기의 수많은 명작을 소환한다. 오프닝에서 엘비라가 시집을 읽고 몽상에 빠지는 설정은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속 엠마 보바리와 유사하다. 엠마도 기사도 소설을 본 다음 몽상에 빠져서 환상 속의 남성을 욕망한다. 율리안이 쓴 시는 아르튀르 랭보의 상징주의 시를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 듯한 뉘앙스가 강하다. 율리안은 음담패설에 불과한 텍스트에 개인적인 상징과 에로티시즘, 선언조의 문장 등 의미를 원체 파악하기 어려운 문장을 더해 천재로 보인다. 여성이 파티와 사교계에 진입하여 결혼하는 풍습은 유럽 근대 문학에서 계속 되풀이된다. 영화의 미장센은 인상파가 탄생하기 전 리얼리즘 화풍과 유사하다. 영화 후반에서 흘러나오는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은 19세기 말에 작곡되었다. 이처럼 <어글리 시스터>는 19세기 말 유럽의 예술이 남성중심적인 판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런 판타지가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폭력을 가하게 만드는 코르셋, 혹은 예속화를 만드는 구체적인 과정을 바디호러로 담는다(이런 점에서 수많은 관객이 쇼비즈니스와 70년대의 고전 호러 속 남성중심주의를 파헤친 코랄리 파르자의 <서브스턴스>와 비교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다만, 이 영화의 장점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즘 바디 호러가 갈 수 있는 쉬운 길을 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폴 버호벤을 보는 듯한 블랙 유머와 아이러니, 까뜨린 브레야를 보는 듯한 노골적인 묘사로 성적 억압과 루키즘의 폭력성을 그리되 여성의 신체를 그릴 때만은 과잉을 절제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여성의 신체를 스펙터클화하려는 시도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영화는 외모지상주의가 엘비라를 과정을 드러낸다. 엘비라는 본인의 몽상을 이루기 위해 레베카가 원하는 코 성형수술에 동의한다. 의사는 마취를 진행하지 않은 채로 금속 자로 코뼈를 부수는 수술을 감행한다. 결국 코를 보호하는 금속 보호대를 착용한 엘비라는 아그네스와 예절 학교에서 발레와 궁정 예절 등을 배우기로 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매력 없이 평범하다는 이유로 선생과 학생 모두에게 무시당하며 자기혐오에 빠진다. 엘비라가 당하는 신체적, 정신적 폭력은 멈추지 않고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엘비라의 선생이 그녀에게 음식을 대신 먹어주는 촌충의 알과 구충제를 건네고 살을 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건넨다. 본인의 신체를 파괴해서라도 미의 기준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장치로, 그녀는 외모로 인한 스트레스로 촌충의 알을 먹고 공생하기로 한다. 이후 엘비라의 신체는 안팎으로 끊임없는 폭력에 노출된다. 관객은 엘비라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감각화해 접할 수 있다.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촌충이 엘비라의 복부에서 존재를 드러낼 때의 소리, 남성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는 쇼트, 마치 괴물의 잘린 신체처럼 보이는 엘비라가 폭식하는 스파게티, 무도회장에서 남성 귀족이 여성을 먹을거리로 비유하면서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 존재로 대하면서 속닥거리는 음성 등이 그 사례다. 이런 감각이 중첩되어서 엘바라의 신체에 증상으로 드러난다. 성형과 다이어트는 엘비라의 신체와 정신 둘 다에 점진적으로 장애를 입힐 뿐이다. 엔딩에 이르러 엘비라는 왕자의 눈에 들려고 두 발을 구두의 크기에 따라서 도끼로 자르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하게 되나 그녀의 어머니는 이를 부추긴다. 아그네스는 왕자랑 결혼해서 훌쩍 떠나버리고 만다. 엘비라를 폭력에서 보호하는 사람은 없는 듯 보인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폭력을 묘사하는데도 영화는 그녀의 신체가 완전히 무너지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도록 만든다. 물론, 배 안에서 꿈틀거리는 촌충은 서스펜스를 만든다. 촌충이 언제 그녀의 배를 가르며 폭발할지에 대한 서스펜스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엘비라의 코도 보호대를 풀기 전까지 그 코가 얼마나 망가질지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불러온다. 그다음 이 영화는 그 기대를 배반한다. 반면 <서브스턴스>는 엘리자베스는 수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내장과 육체가 뒤집히는 몬스트로 엘리자 수가 되고 성적 대상화로 가득한 쇼에서 관객을 향해서 뿜는 피가 된다. 이는 남성중심적 미디어에 저항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기는 하다. 또 그런 뒤틀린 육체성이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유구한 폭력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신체가 저항의 도구로 소모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어글리 시스터>는 엘비라의 삶이 이후로도 가능하도록 배려한다. 엘비라를 처음부터 걱정하는 사람은 엘비라보다 어린 동생뿐이다. 기성세대도, 남성도, 부르주아 여성도 이해할 수 없는 평범한 여성의 삶을 걱정할 수 있는 이는 뒤이어 그 삶을 살아갈 동생뿐이다. 엘비라의 동생은 장애를 입은 엘비라를 말에 태우고 동화 바깥의 세계로 나간다. 엘비라는 이후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배려는 엘비라는 희생자도, 실패자도 아닌 주체로 만든다. 할리우드에 항의하는 시위에 가까운 <서브스턴스>처럼 선명한 메시지를 전하지는 않느다. 대신 창작자로 할 수 있는 더 인간적인 선택이다.

 

ⓒ <어글리 시스터>

<어글리 시스터>가 그리는 담론은 인스타그램이 유행하는 시대에 다소 뻔하고 당연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독보적인 스타일이 그런 당연함을 다르게 보게 한다. 동시대의 페미니즘 호러가 1970-80년대에 스튜디오에서 제작했던 블록버스터 규모의 호러 혹은 영미권 호러 거장의 작품에 담긴 담론을 전복하는 데에 치중한다면 이 영화는 다른 노선을 택한다. 마치 이 영화가 디즈니 <신데렐라>에 도전하는 영화가 아니듯 말이다. 이 영화가 환상을 그리는 방법은 미국의 것이 아니라 프랑스 감독 까뜨린 브레야나 베라 치틸로바 등 체코 뉴웨이브가 주는 아름다움과 기괴함과 이어져 있다. 블리치펠트 감독은 이 영화의 촬영을 두고 이 영화는 19세기를 찍되 70년대를 찍는 듯한 감흥을 주는 영화라 했다.

에밀 블리치펠트 감독은 19세기와 60-70년대 영화의 접점을 싸이키델릭이라 보는 듯하다. 다만 이를 유물론적으로 그린다. <어글리 시스터>는 성형 수술과 율리안의 시 등 19세기의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의 저변에 마약이 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엘비라는 눈을 수술할 때도, 발을 자를 때도, 촌충으로 인해 몸이 뒤틀리고 마약을 복용해 고통을 망각한다. 다만 그 마약을 복용할 때의 행복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엘비라의 1인칭 시점으로 환각이 드러나야 하는 순간에 카메라는 한 발 물러선다. 여성이 환각에 빠져 있을 동안에 자행되는 폭력을 드러낸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속눈썹 수술 장면은 속눈썹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해 신체가 훼손될 때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을 극단화한다. 엘비라는 폭력을 보고 있는데도 단 한순간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나아가 엘비라가 스스로 발을 자를 때, 레베카는 그녀에게 코카인을 한 움쿰 들이키게 만든다. 레베카가 엘비라의 발을 자를 때 영화는 노골적으로 엘비라의 발을 피터 잭슨 등 B급 영화의 신체를 보는 듯한 고무로 대체한다. 신체가 잘린다는 생생함을 최대한 덜어내면서도 엘비라에게 자신의 신체가 일종의 덩어리로 느껴질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녀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대신 영화가 노골적으로 그리는 영역은 그녀의 '정신'이다. <어글리 시스터>는 율리안, 어머니 등 여성에게 몽상을 품게 하는 판타지와 마약을 동등한 위치에 두며 그 판타지가 파열하는 과정을 그린다. 빅토리아 시대의 격식이 여성의 성애를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엘비라는 산에서 우연히 율리안을 마주한다. 그는 음담패설을 일삼으면서 바지춤을 내리고 있다. 또 아그네스는 왕자와 만나기 전 마부와 사랑하고 있다. 관객은 아그네스가 마굿간에서 마부와 성관계를 할 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커다란 남근을 볼 수 있다. 타인과 성관계를 경험한 적 없는 엘비라에게 이 남근은 폭력적인 무기로 다가온다. 아그네스와 하인이 성관계하는 이미지는 엘비라에게 전례 없는 폭력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여성이 환각에 빠져 있을 동안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영화는 이 폭력이 여성에게 환상을 심는 주체로 삼되 신체에 무방비로 침투해 예속화하는지를 그려낸다.

 

ⓒ <어글리 시스터>

이처럼 <어글리 시스터>는 여성의 신체와 정신,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최근 유행하는 페미니즘 바디호러의 새로운 방향, 여성이 무너지지 않는 바디 호러란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에밀리 블리치펠트 감독은 코랄리 파르자를 의식한 듯이 이 영화를 제작한다. 수와 엘리자베스를 수단화하는 코랄리 파르자의 자학적인 농담과 비교해 보았을 때 에밀리 블리치펠트의 영화는 한 인간을 절대 소외하지 않겠다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 이 영화를 올해의 문제작이라 한다면 이런 괴기 속의 따뜻함이 깃든 영화를 최근에 본 적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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