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소외의 시학
'봄밤', 소외의 시학
  • 이상용
  • 승인 2025.08.2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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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이 보여준 것과 도달할 수 없었던 이유

1.

강미자 감독의 <봄밤>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조만간 유튜브 채널 《튜브의 시대》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이 글은 이후 조금은 더 나아간 생각의 정리다). 대화를 준비하면서 망설였던 부분이 있었다. 지면이나 여러 자리를 통해 원작과 영화의 관계를 다루고는 했지만, 원작의 독서가 영화 자체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도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끝내 읽어 볼 생각을 한 것은 ‘인물’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70분이 조금 안되는 상영 시간 동안 쉼 없이 마주하는 것은 영경(한예리)과 수환(김설진)이다. 영경과 수환이 술자리에 있는 모습을 반복하여 보고, 영경을 업고 가는 수환의 모습과 함께 김수영의 시 「봄밤」을 읊조리는 장면을 듣고, 요양원으로 이사한 후 외출증을 받는 영경을 두 차례 지켜보며, 그녀를 기다리는 휠체어에 탄 수환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목격하고, 귀환을 하기 전 편의점에서 술을 사고 마시는 영경을 반복하여 본다. 다음 날처럼 보이는 장면은 꽤 시간이 흐른 후의 날들일 수 있다. 그저 행위의 순서이자 반복이다. 이 반복의 구체성은 바로 다음 날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전혀 다른 날의 장면일 수 있다. 영화는 두 인물이 행하는 반복을 점점 더 '무중력'의 시공간으로 올려놓는다.

 

ⓒ 영화 <봄밤>

어쩌면 영화의 반복은 소멸이자 죽음일 수 있다. 반복 속에서 점점 소멸해 가는(나빠지는) 그들을 본다. 류마티즘의 수환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해 가고, 영경의 귀환은 하루, 이틀, 사흘… 점점 더 늦어지는 것으로 보인다(영화 속에서 정확한 일자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반복은 쇠락이나 소멸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복 속에는 서로를 향해 가는 운동의 지속이 있다. 영화 초반 술집에서 대화를 나누고, 술에 취한 영경을 업고 가는 수환의 이동과 이에 호응하는 시를 읊조리는 영경의 목소리가 등장하고(이 영화의 시 낭송은 운동처럼 들린다), 그녀가 집에 누워있으며, 잠시 후 귀가하는 수환의 반복되는 움직임을 본다. 물론, 이 움직임은 서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잠깐 그렇게 보일 수는 있다. 세상의 버려진 존재들이 서로를 보듬는 어떤 기운은 느껴진다. 하지만 쇠락해 가는 두 사람은 함께 파멸해 간다. 두 사람이 함께한다는 것은 죽음을 연기하거나 지연시키는 것과는 상관없다. 같이 있고자 하는 지향성으로만 나타난다.

이 지향성의 대표적 예는 영화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요양원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방'이라고 부르는 이 장소를 향해 모여든다. 술에 취하기 위해 혹은 술에 취한 채 귀환하는 영경의 방향도, 영경을 기다리는 수환의 시선도 방을 중심으로 서로를 향한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기어 가며(한 사람은 술에 취해, 한 사람은 휠체어에서 떨어져) 만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절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쇠락해 가는 반복 가운데, 지독하게 서로를 찾거나 기다리며, 서로를 향하는 운동을 반복한다. 

거기에는 특별함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영원함을 꿈꾸는 청춘의 사랑이 아니라 유한함을 알기에 반복하는 사랑이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한 희망이나 기대 없이, 현재를 반복하는 인내의 사랑이다. <봄밤>이 무언가 달라 보였다면, <봄밤>이 감성의 다른 영역을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유한함 속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영원하지 않다. 지독하게 소멸해 가면서도, 지독하게 서로를 찾는 이들의 모습은 앙상한 뼈대만을 남긴다.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말라가면서 사랑의 충실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봄밤>은 그런 제목이다. 제목 속에서 봄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제목 안에는 밤이 함께 있다. 촬영된 장면을 포함하는 검은 이미지, 때로는 식별 불가능해 보이는 화면의 어두움이 이들의 봄과 함께 있다. 봄이 사랑이라고 우긴다면, 밤은 죽음이다. 밤은 머지않아 '사이렌'의 경적으로 가득 채워질 불안하고 불길한 시간이며,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봄과 밤은 그렇게 하나의 제목으로 완성된다. 사랑의 이미지, 죽음의 그림자, 봄과 밤 사이에 놓여 있는 나이든 연인의 현실 속에서 <봄밤>은 떠나고, 기다리고, 다시 만나고, 망각하고, 사라지고, 소실되어 버릴 것 같다가도 한없는 울음으로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선사한다. 

최소한 강미자 감독은 이러한 앙상한 방식, 뼈대만으로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해 보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궁금해 지는 것은 뼈대의 뒤쪽에 있을 법한 이야기의 흔적이다. 원작을 읽어 본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이 영화를 조금은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영화의 뼈대를 채워줄 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독서를 한다.

 

ⓒ 영화 <봄밤>

2.

확실히 소설에는 다른 인물들이 있다. 먼저 소설 처음에는 영경의 나이 든 언니들이 등장한다. 영선과 영미. 두 언니는 영경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의 평균 정도의 수준에서 요양원에 있는 영경을 찾아오고 관여한다. 언니들은 이야기의 포문을 열면서, 두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을 건드린다. 영경이 수환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며, 언니들은 두 사람의 사연을 말하기 시작한다. 소설에서 보게 될 이야기는 두 사람이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이다. 언니들은 두 주인공의 여정이 지난 후에 설명적으로 도입하는 구실을 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결혼식 뒷풀이 자리에서 수환과 영경이 마주하는 장면이다. 영경은 술을 마시고 있고, 모두가 쓰러진 자리에서 유일하게 깨어있는 다른 인물이 수환이었다. 영화는 이들의 첫 만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보여줄 따름이다. 사실, 영화가 보여준다는 것은 때로 수많은 말보다 더 직접적인 이해를 제공할 때가 많지만, 이 영화는 보여준다는 것이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다. 상황은 놓여 있지만 각각의 장면은 갈증(정보)의 해소이기보다는 증폭에 가깝다. 유일한 설명의 방식은 반복에 있다. 어째서 두 사람은 반복하며 살아가는지, 반복하여 사랑하는지, 그렇게 죽어가고 망각에 이르는지를 보여줄 따름이다.

수환에게도 주변 인물은 있다. 어머니 기순과 형 수철이다. 수환은 수철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 불편한 형제의 이미지로 어머니와 수환 사이에 놓여 있다. 이 또한 한국 서사의 평균적인 긴장감(형제 간의 시간)을 자아내는 정도다. 어머니는 걱정많은 인물이다. 어느 정도는 예상되는 근심많은 어머니의 모습은 수환을 둘러싼 가족 환경을 보여준다.

 

ⓒ 영화 <봄밤>

그러나 영화는 가족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두 사람이 술자리에서―소설에도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배치는 다르다―자신의 과거사를 말하는 장면이 유일하다. 영화는 오로지 두 사람에게 집중한다. 이러한 태도는 영화 초반 장면에서도 제시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결혼식 뒤풀이 장면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쓰러져 있다는 데 있다. 직관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모두가 술에 취한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도 기이해 보인다. 모두가 죽은 듯 고요한 순간에 두 사람만이 깨어 있다.

강미자 감독은 죽어가는 것은 두 사람이지만, 이들의 첫 만남은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세상 혹은 세상 사람들은 죽어 있는 것 같은 상태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깨어 있다고. 조연으로 등장한 결혼식 하객들도 극단에서 오래 활동한 배우들이 대부분인데, 강미자 감독은 이들에게 얼굴을 지워버리는 연기를 요청했다. 주변을 지움으로써 이 세계에 마치 죽어가는 두 사람만이 있는 것처럼, 두 사람에게 충실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그것은 영화 전체의 방향을 이룬다. 

영화는 공간도 희미하게 만든다. <봄밤>을 시칠리아에서 촬영했어도, 이 영화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제주도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이 장소의 매력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순간 영화의 시간마저도 희미하다. 시간의 흐름은 존재하지만, 요양원으로 귀환하는 영경이 하루만인지, 이틀만인지 알 수가 없다. 돌아왔다는 사실만 있을 뿐 구체성은 희미하다. 영화는 관계성도, 공간성도, 시간성도 지워버리거나 희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가운데 부각 되는 것은 오직 두 사람이다. 현실에서는 엄청나게 매력적인 캐릭터도 아닐 텐데, 희미한 시공간 속에 존재감을 뿜어내는 두 사람을 통해 영화의 시공간을 구성하는 데 이르고 있다. 그것이 이 영화의 모험이다. 

 

ⓒ 영화 <봄밤>

그것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인물들은 장소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시간으로부터 이탈해 있다. 심지어 두 인물 사이에서도 이러한 방식을 발견한다. 수환이 술에 취한 영경을 업고 귀가할 때에도, 영경이 김수영의 「봄밤」을 읊조릴 때에도, 두 사람은 함께 공유하기보다는 따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고독' 혹은 '소외'야말로 이 영화의 강력한 정서다. 두 사람이 정겹게 대화를 나누거나 끌어안는 장면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반복되는 시의 낭송은 두 사람을 묶기 보다는 영경에게 오롯이 속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 영화의 마지막은(소설에서도 유사하지만), 알코올성 치매로 인해 수환 혹은 수환의 죽음을 잊어버린 채 울고 있는 영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울고 있지만 영경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어렴풋하게 느끼거나 자신의 증세로 인한 것으로 여길 따름이다. 그것은 결국 홀로 있는 이미지다. 편의점에서 술을 마시는 영경의 모습, 외부로 걸어나가는 영경을 지켜보는 수환의 눈길이 그 어떤 장면보다 오래 기억되는 것은 이 영화가 고립을 짊어지는 영화이고 소외의 영화이고, 홀로 남게 되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함께 있어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슬픔을 관객에게 전한다. 

 

3. 

그런데, 소설에서는 유별나게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다. 수환을 돌보는 간병인 '종우'다. 영화에서도 다른 주변 인물에 비해서는 비중이 있다. 요양원에 상주하는 의사나 편의점의 알바생보다 그의 역할은 눈길을 끈다. 임종을 지켜본 인물인 탓도 있을 것이다. 영화와 달리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는 소설 속 종우는 영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대로 수환과는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그 중에는 개인사적인 것도 있다. 

소설 속 종우는, 임종 직전인 수환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수환은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고, 가족들에게 연락한 종우는 그들을 기다린다. 영경에게도 연락을 한다. 하지만 영경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종우는 소설에서 이전에 나눴던 선물 이야기로 말을 꺼낸다. 선물에 대한  언급은 종우와 수환이 영경의 외출을 지켜 본 후 들어오면서 나누는 대화에서 등장했다. 영경의 외출을 지켜보며 걱정하는 수환의 모습에 종우는 툴툴거린다. 그러자 수환이 대뜸 종우에게 묻는다. "여자친구한테 선물해 본 적 있냐?" 종우는 이 말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수환은 자문자답을 하듯 말을 이어간다. "분모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분자라도 늘려야지."

이 말은 소설의 일화와 관련이 있다. 톨스토이의 책을 영경이 읽던 과정에 등장하는 분자와 분모의 비유는 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당신을 위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서 등장한 분자와 분모의 비유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방향을 함축한다. 분자가 사람의 좋은 점이고, 분모는 사람의 나쁜 점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분모보다 분자가 큰 좋은 사람이거나, 분모보다 분자가 작은 나쁜 사람이다. 태어날 부터 가지고 있는 환경이나 성격이 분모라면,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은 분자를 키우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비유이기도 하다.

 

ⓒ 영화 <봄밤>

수환은 자신의 병 때문에 애시당초 분모가 크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영경을 위해 늘린 분자는 기껏해야 그녀를 집까지 업어 오는 일 말고는 해 준 것(분자)이 거의 없기에, "영경이 기꺼운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나마 자신의 분자를 조금이라도 늘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수환의 입장에서는 이 생각이 설득력이 있지만 요양원의 의사나 간병인 종우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일 것이다. 아무려나 종우는 임종 직전의 수환을 보며, 임종까지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선물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종우의 기억과 말이 수환을 향한 선물이자 분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소설 속에서는 강력한 내용이다.

"난 아줌마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떨 때 아줌마가 아저씨 빤히 쳐다볼 때는 괜히 눈물 나요. 아 참, 며칠 전에 아저씨가 선물 얘기 했잖아요? 여자친구한테 주는 선물요."

"여자애들은 선물 받는 거 진짜 좋아해야. 어떨 땐 대놓고 뻔뻔하게 요구해요. 근데 진짜 선물 사달라는 말을 한 번도 안한 여자애가 있었어요."

종우는 초조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수환의 지인들이 도착하기를 바라는 가운데 말을 이어간다. 동호회에서 은경이라는 여자를 좋아했는데, 은경의 친구인 소연이에게 먼저 접근하였다. 소연에게 장난도 걸고, 선물받고 싶은 거 없냐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자 어느새 은경이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결국 종우는 소연에게 이별을 고할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근데 이상한 거 하나 있어요. 내가 왜 이런 얘길 하냐면요, 아줌마 우는 거 보면 자꾸 소연이 생각이 나요."

"내가 은경이랑 사귀기로 하고 소연이한테 헤어지자고 얘기했을 때, 와, 나 진짜 쫄았거든요. 소연이 걔가 막 울고불고할 줄 알았는데 전혀 울지를 않더라고요. 눈은 막 울 것 같은데 끝까지 울지를 않더라고요."

"암튼 이상했어요, 집에 간다길래 택시 잡아주려고 서 있는데 갑자기 얘가 코피를 쏟는 거에요. 난 세상에 그렇게 무섭게 코피 쏟는 거는 처음 봤어요. 그 밤중에, 아무짓도 안했는데 코피가 그냥……"

헤어지자는 말에 울지 않던 소연이 코피를 쏟은 이유는 무엇일까. 종우의 이야기에서 소연의 모습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날이 올것임을 소연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종우가 장난을 칠 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종우를 받아들인 것은 소연의 선택이었다. 아무리 시한부의 사랑일지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 이별이 다가오자 순순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부감이 밀려온다. 이 작용을 코피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역반응으로써의 코피. 그것은 눈물보다 진한 인간의 마음이다. 동시에 눈물이 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영화는 종우의 말을 각색하지 않았다. 대신 영화 자체로 보여주고자 했다. 관객들로 하여금 쇠락하는 두 연인을 지켜보면서도 눈물이 나오지는 않게 보여준다. 하지만 눈물보다 더 진한 무엇인가가, 때로는 욕지기처럼 밀려나온다. 70분이 안되는 영화를 보는 동안 관계의 끝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소연처럼), 눈물을 대신해 무엇인가가 분출되는 감정의 파토스를 느끼도록 한다. <봄밤>의 영화적 체험은 여기에 있다. 관객들은 종우의 이야기 속 '소연'이 된다.

 

ⓒ 영화 <봄밤>

강미자 감독은 종우가 임종 직전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촬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편집 과정에서 삭제해 버렸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해버린 사연은 인물을 설명하거나 한정시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영경이 소연을 떠올리게 한다는 종우의 말은, 영경이 자신의 방식대로 인내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동시에 종우 또한 영경에 대해 애처로워하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두 인물을 촘촘히 새워둔 영화 속에서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영화는 각색의 공백과 영화적 체험을 선택한다. 종우가 아저씨, 아저씨를 두 번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어쩌면 부족하지만, 여전히 앙상한 뼈대로 두 사람을 보여주는 행위에 충실하고자 한다.

결핍된 이미지들은 이 영화의 앙상한 뼈대이자 유일한 기초가 된다. 통상적으로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충반함으로 가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둘러싸여 있다면, <봄밤>은 소외되고, 고립된 인을 통해 사랑의 이미지를 구축 한다. 그것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다다를 수 없는 그리스 신화의 탄탈로스의 샘물이거나 시지푸스의 신화다. 한 마디로 갈증과 결핍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신화다.

화면과 화면 사이의 검은 화면으로, 시를 통해 마음을 매개하는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절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유일한 방향 혹은 목적이 있다면 죽음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죽음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 죽음으로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기이함이다. 영화는 죽음마저도 소외시킨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소외의 시학은 이 영화의 앙상함을 단단한 뼈대처럼 보이게 만드는 환상을 이끌어 낸다. 이 가운데 김수영의 시가 있다.

 

4. 

김수영의 시 '봄밤'은 소설 보다 영화에서 더 많이 반복되어 나온다. 3연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말은 "서둘지 말라"이다. 더 정확하게는 "말라"이다. 이를 포함하는 행을 연을 구분하여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가 주를 이루지만 "바라지 말라"와 "당황하지 말라"가 있다. 말라는 금지보다는 인생의 속도 조절처럼, 아직 더 지켜보기를 갈망한다. 어떤 절먕이나 기대감에 휘둘리지 말라며 삶의 속도이자 죽음의 속도를 조율하고자 한다.

 

ⓒ 영화 <봄밤>

영화 또한 단순함 속에 이를 실천하고 있다. 서두르는 법 없이 두 사람을 보여준다. 이들의 사랑을, 이들의 죽음을, 충분하지 않게 생각할 수는 있어도, 최소한 서두르지 않았기에 천천히 두 사람이 감겨온다. 심지어 수환의 죽음으로 인해 영경은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은 치매로 인한 망각이기도 하지만, 서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울음이 쏟아지는 것은한 어쩔 수 없다. 알코올에 의해 감정조절이 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이 또한 현재의 몸이 일어나는 반응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영경의 눈물이 관객이나 독자에 따라 수환의 죽음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상실감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영화는 그 어떤 표현이나 반응도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둘지 않는다. 보여줄 따름이다. 다만, 그것들이 설명되기보다는 다가오기를, 두 사람의 선택과 상실과 망각에 대해 흐느껴 울게 만들기보다는 바라보며 감겨들기를 보여준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한 사랑이 있었고, 봄밤의 목련이 피어났으며, 외출하는 이와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서로가 소외되어 있었지만 몇몇 장면들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 온기에 대한 판단 또한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저 존재했을 따름이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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