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의 감염성
'퀴어'의 감염성
  • 이현동
  • 승인 2025.09.01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토록 개인적인 정치 없음의 정치"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둔 <퀴어>(2024)는 그 퀴어란 직설적인 제목답게 여전히 관객들에게 낯설고 드문 감각의 영화였다. (<첼린저스>(2024)가 8.8만명, <본즈 앤 올>(2022)이 6.2만명, 그리고 <퀴어>는 2.8만명) 관객 숫자를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판별할 수 없지만, 퀴어적인 것은 여전히 메인스트림에는 진입하기 어렵다는 것을 방증하는 숫자다.

그럼에도 그가 동성애를 다룬 영화를 찍는 이유는 흥행의 욕심이라기보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루카 구아다니노가 욕망 3부작의 마지막인 <콜 미 바이 네임>(2017)을 찍은 후 동성 간 성적 관계의 경험을 인터뷰로 공개한 후 퀴어성은 그를 명멸하는 주체가 되었다. 이번 역시 루카 구아다니노가 <퀴어>를 찍은 후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듯이 17세에 윌리엄 S. 버로스(William S. Burroughs)의 원작 소설인 『퀴어』를 읽고 이 영화를 예전부터 제작하기를 기대해 왔다고 밝힌 것하고도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에 버로스의 영향권 아래서 그의 작품의 의의를 추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 영화 <퀴어>

버로스는 미국 현대 역사의 문화적 트렌드를 견인하던 ‘비트 세대'에 속한 작가다. 비트 세대는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를 연결하는 문화적 흐름을 기반으로 한 운동으로 이 운동이 발발하는 데에는 여러 시대적 궤적이 함께 했다. 히피문화, 케네디 대통령 암살, 루터 킹 목사 암살,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및 반전 운동, 68혁명, 여권운동, 인종차별 반대 운동 등은 기존 체제를 반동하면서 발생했다. 이 시기에 버로스는 사회적 금기와 언어 실험, 권력 해체에 집중한 급진적 분파로 소설가뿐 아니라 시각 예술에 대한 관심을 표출한 아티스트였다. 그는 1944년 모르핀을 시작으로 헤로인 중독자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 마약 중독 체험 수기를 기록한 <정키>(1953)를 선보이며 대중들의 주목을 끌었다.

『퀴어』는 자신의 욕망과 더불어 1952년 무렵에 아내였던 조안 볼머를 사고로 사망하게 한 후에 썼다. 버로스는 ‘윌리엄 텔 놀이‘를 하다 총을 아내에게 겨누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을 겪고 이 책을 기록했다. 윌리엄 텔 놀이는 스위스 독립을 위해 아들의 머리 위에 얹은 사과를 화살로 정확히 쏘는 시련에서 유래된 놀이다. 버로스는 아내의 머리에 유리잔을 올려놓고 이 놀이를 하다가 총을 쏘아 죽이고 말았는데, 책에선 언급이 없지만 이 놀이로 연상되는 장면이 영화 <퀴어>의 후반부에 등장하기도 한다.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동성애를 강하게 탄압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외설스럽고 노골적인 이 책은 그의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었고, 1985년이 돼서야 정식으로 출판이 되었다. 버로스는 젊은 남성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주인공 '리'를 통해 자신의 절망과 욕망을 문학이란 장치를 통해 드러내려 했다. 또한 이 책은 아내를 살해한 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는 내면의 균열과 타인과 연결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출하는 데 동원되었다. 『퀴어』는 버로스의 가장 내밀한 층위의 자기 고백적 측면을 지닌 셈이다.

한편, 17세 무렵의 어린 시절 루카 구아다니노가 포착한 『퀴어』에서의 욕망은 버로스의 유명한 문장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는 "언어는 외계에서 온 바이러스라고 말했다.”(Language is a virus from outer space). 구아다니노 또한 2016년도 플레이 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노암 촘스키를 언급하며 영화를 언어로 생각하는 것을 선호하며 형식과 서사가 결합한 감각과 보편성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려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루카 구아다니노 ⓒ 영화 <퀴어>

보이지 않는 욕망을 포착하는 것, 구아다니노의 시선은 늘 무의식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의 영화언어는 서사적인 설명보다 정서와 감각에 치중된 모호하고도 기이한 것처럼 움직이는데, 그래서 그의 영화는 선명하기보다 선언적이며 정치적이기보다 개인적이다. 버로스와 구아다니노가 말하는 감각의 '감염'이란 몸에 스며들듯이 통상적인 규범을 벗어나 무규범적인 욕망을 끄집어내는 행위 자체로 보인다.

반면에, 70년생인 구아다니노에겐 버로스가 경험했던 시대의 자원이 없다는 걸 염두하면 올곳이 개인적 차원으로서만 영화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다. 그는 네오리얼리즘의 선두 주자인 루치노 비스콘티나 베르나르도 베르툴루치를 동경하면서도 <강박관념>(1943), <레오파드>(1963)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몽상가들>(2005) 같은 영화를 연출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재능의 한계라기보다 시대적 한계에 가깝다. 마르크스주의라는 좌파 문화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이 거장들에 비해 구아다니노는 그런 색채가 옅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전쟁과 국가, 정치라는 거대한 담론이 사회질서를 요동하게 했던 시대에 살던 그들과 달리 구아다니노는 개인적 경험과 감각 속에서 그들의 영화를 감응했던 시절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구아다니노가 청소년 시절에 이탈리아 공산당 청년부(Communist Party Youth Wing)에 가입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공산당 신문에 글을 기고하곤 했는데, 어느 날 신문 편집부가 포르노 배우 인터뷰를 한 구아다니노의 기사를 싣는 것을 반대한다는 성명문을 내자 크게 반발하여 떠났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때 그는 교훈을 배웠다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단어에는 이러한 '개인적‘인 사건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추측을 하게 된다. 구아다니노는 이번 영화 <퀴어>에서도 버로스가 나타내려 했던 어떤 결핍과 절망을 개인 차원으로 전환한 낭만적 회고처럼 보이게 한다. 이때 시간의 경계를 자신의 언어로 해결하기 위해 그가 동원하는 장치 중 하나는 ‘창'이다.

 

창밖의 풍경, 안과 바깥

프랑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영화는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라고 말했다. 그는 카메라의 기계적인 권능을 통해 영화는 현실을 존재론적 흔적으로 담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바쟁은 현실의 보존(리얼리즘)을 영화의 본질로 보지만, 창밖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올곳이 순수하거나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크게 인지하지 못했다. 영화는 선언적일 수 있지만, 본질주의가 아니다. 반대로 영화감독 장 옙스탱은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기법을 통해 새로운 지각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이 논의는 바쟁이나 엡스탱 사이에서 누가 낫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성이란 바쟁에 근거한다면 손쉽게 위계화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 필자는 회의적이다).

영화 안의 풍경을 통해 밖을 보는 시선의 문제를 재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아다니노의 영화는 현실을 굴절한다. 이 영화를 돌아보면서 토드 헤인즈의 영화를 상기하기도 했다. 더글라스 셔크의 <순정에 맺은 사랑>(1955)을 원작으로 한 <파 프롬 헤븐>(2002)이 동성애 영화로 재탄생했을 때가 그러했다. 한편으로 이미지의 기능이란 오로지 현실을 지각하기보다 희망을 지각하게 하는 감염적 특성이 있다. 인지적 특성보다 감정적 기능으로 돌입하는 이미지는 나도 모르는 창을 부수고 나올 틈을 마련하게 한다.

이런 측면에서 빛이 통과하는 자리, 세계와 세계가 연결되거나 단절되는 자리를 나타내는 <퀴어>는 유난히 '창문'이 많이 등장한다. 먼저, 구아다니노는 자연풍경, 빛, 공간 자체를 단순한 배경이 아닌 정서와 미학을 담는 ‘캐릭터'로 취급한다. 풍경의 물리적 존재감을 화면에 구현함으로써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되는데, 간혹 창문 밖 풍경이 잔혹하리만큼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가령 리(다니엘 크레이그)가 머무는 집 거실과 몇몇 공간에는 밖을 묘사하는 창문이 있는데, 이 창문은 밖의 아름다움을 충만히 묘사할 만큼 프레임을 채운다. 대표적으로 리와 유진(드류 스타키)가 처음 성관계를 할 때, 영화는 중간에 창문을 인서트하고 노을이 지는 창밖 풍경 아래에서 입맞춤을 나눈다. 리가 마약을 하고 있는 것을 간파한 의사를 찾아갈 때의 뒷 배경도 통창으로 된 창문이며, 나이가 든 리가 침대에 누워 예전을 회상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전 배경에도 창문이 있다. 구아다니노의 영화는 외부와 차단되지 않고 개방된 상태에서 그 경계를 회피하지 않고 맞선다.

 

그 경계 사이를 규명하는 장치들은 창문뿐만은 아니다. 영화 초반에는 뷰 마스터(View-master)가 등장한다. 동그란 원반 모양의 필름(슬라이드 디스크)을 끼우고, 암전된 상태로 입체적으로 사진을 보는 이 장치는 마치 다른 세계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이전 시대의 VR(Virtual Reality) 장치처럼 보인다. 이 장치 안을 보는 리의 시각은 오로지 빨간색 수건을 든 남성 투우사를 응시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오로지 구아다니노의 시각이다. 원작에는 뷰 마스터가 없는 걸 고려해 보면 명확하다. 이어서 리와 유진이 영화관에서 장 콕토의 <오르페우스>(1950)를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울을 통해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장면은 어쩌면 시뮬라크르로 증식된, 엄밀한 의미에서 가공된 세계관을 진실로 소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울은 거울 그 자체”라는 영화 대사는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현존으로 견인하는 영화가 소유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가장 이 영화에서 시선을 이끄는 기법은 이중 노출인데(double exposure), 이 또한 마찬가지다. 이 초현실적 기법은 한 프레임 안에 두 장 이상의 이미지를 겹쳐 보이도록 하는 기법이다. <퀴어>에서 이 기법은 주로 리가 유진에게 접근하는 상상을 할 때 사용하는데, 이는 버로스의 입장을 고려하면 죽은 아내에 대한 회상처럼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현상하는 방식이자 시공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퀴어>는 버로스에 대한 구아다니노의 해석일 뿐 아니라, 그의 동성애 경험이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영화 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구아다니노는 왜 이를 연결하면서 전시하듯 보여주는 걸까? 그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서로 침범하는 방식으로 '퀴어'적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퀴어를 특정 제단에 올려놓지 않고, 내적 양식을 관통하여 관객들에게 전시해 놓는다. 곧, 그 경계 사이를 넘어가는 방식의 문제를 골똘히 고민하는 작가인 셈이다. 결국, 구아다니노에게 있어 퀴어란, 혼돈 안에서 화려하게 만개하는 욕망의 이미지다. 시선 안과 시선 밖의 모든 이들에게 버로스와 함께 작업을 했던 너바나의 음악이 시대의 규정 없이 오늘날에도 호명되고 있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