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없는 영화(세상)는 가능할까
인간 없는 영화(세상)는 가능할까
  • 김경수
  • 승인 2025.07.2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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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젤너, 네이선 젤너의 〈사스콰치 선셋〉, 긴츠 질발로디스 〈플로우〉

우리는 인간 없는 세상을 사유할 수 있을까. 종말은 인간의 오랜 공포 중 하나다. 성경 속 노아 방주와 요한 계시록부터 시작해 인류의 문명에는 항상 종말에의 공포가 깔려 있다. 자연재해부터 기후 위기까지 다만 종말은 언제나 인간다움이 사라져 가고 있고, 그 인간다움을 되살려야한다는 공포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즉, 종말은 언제나 괴물화되었다. 괴물(monster)의 어원이 라틴어인 드러내다(monstrare)이며 중세에는 신이 인간에게 경고하기 위해 보내는 신호에 가까웠다. 인간 없는 세상은 결국 인간다움, 문명이 종말한 세상을 경유해 문명으로 되돌아오는 경로로 쓰인 셈이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영화 가운데 안토니오니 미켈란젤로의 <일식>(1962)과 스탠리 크레이머의 <그날이 오면>(1959),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키스 미 데들리>(1955)의 엔딩을 그 사례로 들 수 있을 듯하다. 안토니오니는 아무도 없는 이탈리아의 도로를 카메라로 조망한다. 그 도로로 피에로(알랭 들롱)이 활보한다. 인간보다 큰 증권가의 기둥, 유동하는 증권 거래 차트, 우연히 뒤에서 자행되는 살인을 포착하는 카메라(<블로우-업>) 등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사물이 인간을 압도하는 그의 영화 세계를 완성하는 듯한 순간이다. 안토니오니에게 인간 없는 세상은 인간의 통제 가능한 범주를 넘어선 세계, 도구를 만드는 인간인 호모 파베르가 종말한 세계다. 반면 <그날이 오면>은 핵전쟁 이후 아무도 없는 거리를 조망하고, <키스 미 데들리>는 핵이 폭발한 후 두 연인이 해변가에 서서 겁에 질려서 텅 빈 세계를 본다. <그날이 오면>과 <키스 미 데들리>에서 인간 없는 세계는 핵전쟁이 만드는 절멸을 경고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인간 없음은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역설이었고, 이에 따라서 진정한 인간 없는 세상은 그려지지 않은 셈이었다. 이런 사유는 지금도 계속된다. 논픽션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은 저서 『인간 없는 세상』을 통해 인간이 사라진 이후의 지구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사고 실험을 통해 분석했다. 인간이 사라진 후에야 생태계가 제자리로 복원된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본 <사스콰치 선셋>와 <플로우>는 이런 맥락에서 문제적인 작품이다. 두 영화는 야생의 비-인간을 주인공으로 삼고, 언어를 박탈해 비-인간을 애써 의인화하지 않는다. 두 영화야말로 인간 없는 세상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라는 오랜 상상을 시각화한다고 할 수 있다.

 

ⓒ 영화 <사스콰치 선셋>

<사스콰치 선셋>, 인간 없음의 으스스함

<사스콰치 선셋>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이 영화가 1부와 2부로 나뉘는 점이다. 사스콰치 무리는 숲을 통과하던 중 포장도로를 보고 머뭇거린다. 그 중 한 마리가 앞장서서 손으로 도로를 조심스럽게 만진다. 그다음에야 무리는 도로 한가운데로 향한다. 그때 사스콰치 무리의 대장(제시 아이젠버그)이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본다. 불협화음이 가득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도로가 수평선 끝까지 펼쳐진 풍경이 드러난다. 사스콰치 무리는 한꺼번에 급작스러운 광분에 사로잡힌다. 사스콰치 무리는 도로 한가운데에다 똥과 오줌 등을 마구 분출한다. 왜인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는 설명을 생략하고 사스콰치 가족이 언제, 어떤 순간에 똥과 오줌을 싸는지 생리 현상의 원리와 타이밍이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카메라도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며 사스콰치는 정체 모를 울음소리만 낼 뿐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나름의 패러디일 것이다. 유인원이 모놀리스를 발견했을 때 소리를 지르는 구도와 비슷하다.) 무엇도 설명하지 않는 이 뻔뻔스러움을 무기로 삼는 태도에 놀라고 말았다. 이 뻔뻔함이 1부에서는 웃음을, 2부에서는 으스스함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만 안길 수 있는 체험이다.

<사스콰치 선셋>은 베르나르트 회벨만스가 이야기한 미지동물학(cryptozoology)의 주인공 중 하나인 사스콰치의 행보를 따라간다. (말이 사스콰치지 관객은 제시 아이젠버그와 라일리 키오, 그리고 감독 중 한 명인 나단 젤너 등 배우가 사스콰치 분장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안다.) 사스콰치는 살아있다는 증거가 없다. 숲을 헤매던 사람이 발견한 흔적이나 목격담 안에서만 살아 있는 존재다. 인간은 사스콰치를 생물학적으로 해부한 적 없다. 발자국이나 몽타주 등으로 그 생김새를 유추할 뿐이다. 나아가 이미 미지동물학이 도시괴담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사스콰치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는 곳마다 사스콰치 뮤지엄이 있는 정도다. 미지의 자연과 인간의 망상 사이에 있는 유령적 존재인 사스콰치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삼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사스콰치는 CG로 그려질 때 완전히 상상의 존재가 된다. 어설프더라도 사스콰치가 어딘가에 있다는 상상을 더하려면 코스프레를 하고, 그들이 할 법한 행동을 허구로 그려내는 작업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사스콰치의 행동 대신에 그들이 머무르는 장소에 카메라를 오래 들이민다. 이때 심도는 깊지 않다. 사스콰치와 자연은 하나로 어우러져 있어서 이 둘의 소통은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이런 설정 하에 네 배우의 사스콰치 코스프레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설정이다.

 

ⓒ 영화 <사스콰치 선셋>

<사스콰치 선셋>이 영화 속 자연을 재현하는 윤리는 거기에 있다. 자연을 배경과 타자로도 대하지 않고 허구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보겠다는 마음 말이다. "이야기는 세계를 이해하게 하고 세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허구적 장치이지만 쓰러진 나무, 낙엽, 버섯, 개구리들의 버려진 숲을 생명이 생동하게 하는, 살아 있는 장소로 만드는 실제적 힘이기도 하다."[1] 네 배우는 이 규칙에 따라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복잡한 감정 연기를 포기하고 본능에 따르는 과장된 연기를 한다. 나아가 이 영화의 또 다른 개성 중 하나인 계절의 흐름도 이 윤리를 따른다. 사스콰치는 계절에 따라서 움직인다. 계절은 사스콰치가 바꿀 수 있는 생의 조건이 아니므로 이 영화의 서사도 계절을 중심으로 분할하되 서사와는 무관하게 흘러갈 뿐이다. 이에 적응하는 것도 자연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다.

<사스콰치 선셋>의 서사를 점잖은 언어로 정리하면 이 영화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상스러움을 무기로 관객을 무방비하게 한다. 따라서, 잠시 실례를 무릅쓰고 노골적이고 상스러운 말을 꺼내려 한다. 영화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두 사스콰치는 숲 한가운데에서 떡친다. 심지어 아이가 보고 있어도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으며 시도때도 없이 수상쩍은 수신호를 보낸다. 사스콰치 가족은 정착하지 않고 자연을 유랑한다. 호기심에 스컹크의 방귀에 코를 대기도 하고 가시덤불에서 열매를 따먹고 생선을 날것으로 잡아먹는다. 네 가족은 막대기를 나무에 두드려 서로를 부르는 신호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가 사라질 때마다 서로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 장례를 할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어느 날 사스콰치 하나가 사라진다. 숲에서 독버섯을 잘못 먹은 탓이다. 독버섯의 부작용으로 발정이 난 사스콰치는 수풀 안에 숨은 퓨마와 짝짓기를 시도하다가 죽는다. 나머지 가족은 장례를 치르고 유랑을 시작한다.

이처럼 영화의 1부는 네 가족의 생활과 생리적 매커니즘을 소개하는 데에 집중한다. 기승전결 등 이야기의 구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몬티 파이튼>이나 <SNL>처럼 스케치 코미디를 보는 듯한 민망하고 저질스러운 상황만 이어진다. 화장실 개그라기에는 주류 문화에 대한 위악적인 포즈가 부재해 있고 되려 순수하다는 인상을 준다. 화장실 개그가 아니라 화장실에서 펼쳐지는 개그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듯하다. 이 때문에 <사스콰치 선셋>의 1부를 볼 때, 서사가 사라져 있다는 데에서 당혹감을 느끼기보다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다. 서사의 구조나 그 대상이 하는 행동의 이유와 감정선을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거기에 명상이나 요가에 흘러나올 듯한 목가적이기만 한 OST가 상황에 느낄 수 있는 거부감을 더는 아이러니를 만든다. 이 영화의 매력은 목가적인 이미지와 더러움이 공존하는 자연의 입체적인 형상을 그리는 데에서 생긴다.

 

ⓒ 영화 <사스콰치 선셋>

<사스콰치 선셋>이 문제작인 이유는 2부에 있다. 2부를 관통하는 '으스스함' 때문이다. 마크 피셔의 정의대로라면, 으스스함은 무언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존재의 불일치다. 2부의 으스스함은 사스콰치가 도로를 시작으로 벌목장, 캠핑, 함정 등 본격적으로 인간의 흔적을 발견한 후부터 생긴다. 문제는 도로를 발견했을 때부터 시작해 인간이 전혀 서사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인간의 도구가 사스콰치의 숨통을 조인다. 버려진 통나무는 사스콰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캠핑 속 라디오와 젤리는 도로처럼 똥오줌을 지리게 한다. 사스콰치가 친구로 삼은 닭은 함정에 걸려 죽어간다. 이처럼 영화에서 인류 문명은 사스콰치에게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그려진다. 사물이 우연히 움직일 뿐인데도 어떤 거대한 존재가 그 사물을 조종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가정까지 들게 한다. 특히 사스콰치(제시 아이젠버그)가 물에 잠겨서 죽을 때가 그러하다. 통나무는 사스콰치를 사지로 몰아세운다.

사스콰치가 인류 문명을 발견하는 여정은 마치 H.P.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 고대 크툴루 문명을 발견하는 고고학자의 여정을 보는 듯하다. 크툴루는 인간 문명이 탄생하기도 전에 고대 문명을 건설했으며 이 존재를 발견하는 인간은 모두 미쳐버리는 상상 속 존재다. 안타깝게도 <사스콰치 선셋>의 시공간이 언제인지를 정확히 모른다. 인간 문명이 멸망하기 전인지 후인지 알 수 없다. 영화는 그저 관객을 어딘가에 던졌을 뿐이다. 인간이 사라진 세상에서 사스콰치는 하나씩 죽거나 미쳐버린다. 이는 인간이 자연에게 가하는 폭력이 우주적 공포에 가깝다는 체험을 안기게 한다. 이 체험은 행성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염세주의의 반영에 가깝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스콰치 선셋>는 흔한 환경 영화로 보인다. 이 영화는 우리를 이상한 결론으로 데려간다.

<사스콰치 선셋>는 인간을 선악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존재를 제거한다. 엔딩에서 사스콰치 가족은 느닷없이 사스콰치를 전시하는 박물관에 가게 된다. 거기서 커다란 사스콰치의 조형물을 보게 된다. 영화는 딱 거기서 끝난다. 이 엔딩은 분명 <혹성탈출>의 엔딩을 오마주한 것이다. 감독은 <혹성탈출>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유인원의 조상이 인간임을 마주할 때의 충격적인 구도를 그대로 가져온다. 다만 이 영화는 배경으로 물러나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서서히 안기는 충격을 그리지 않는다. 그저 덩그러니 빅풋 조형물을 사스콰치 옆에다 가져다 둘 뿐이다. 이 천연덕스러운 카메라는 <사스콰치 선셋>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를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박제하고 만다는 흔하디흔한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박물관 안에 사스콰치의 해부나 박제가 있다는 증거는 없다. 또 빅풋은 소문만으로 존재하는 상상의 존재다. <사스콰치 선셋>은 인간 없는 세상의 충격을 무기로 삼지 않는다. 되려 인간 없는 세상을 가정한 후 인간 문명이 사라진 후에도 사스콰치로 드러나는 자연의 신비함을 영영 알지 못할 것이라는 조소로 보인다. 이 영화의 으스스함은 자연의 신비함으로 전환된다.

 

ⓒ <플로우>

<플로우>, 인간 없음의 활기

<플로우>의 아름다움은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에서 생긴다. <플로우>는 검은 고양이와 카피바라, 골든 리트리버, 뱀잡이수리, 여우원숭이가 우연히 한 배에 올라타서 떠나는 여행을 그리는 영화다. 다섯 동물은 무리에서 이탈해버려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존을 택한다. 이 다섯 동물이 각자의 본능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사스콰치 선셋>과 비슷하다. 여우원숭이는 거울의 빛에 따라서, 카피바라는 공존을 바란다. 뱀잡이수리는 날아다니며 동물을 구해다주고, 리트리버는 무엇이든 좋아한다. 이때 어떠한 목적지로 향하는 각자 다른 다섯 동물의 생활은 인간 없는 노아의 방주를 생각나도록 한다. 이 영화 속 동물이 의인화를 거친 듯하다는 의심의 눈초리는 이러한 설정에서 생긴다. 이 영화가 너무 정확히 동물이 가야할 곳을 정하고, 그곳으로 가는 행로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게임적인 서사 구조에서 생긴 것일 터다. 다만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한순간도 정지할 생각이 없이 계속 움직이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플로우>는 이렇게까지 활력을 보이지 않아도 충분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카메라는 되려 서사를 넘어선 과잉의 차원에 이른다.

<플로우>는 1인 제작 환경을 유지했던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이 3D 제작 툴인 블렌더를 통해 제작했다. 이 블렌더는 인디 게임을 제작할 때 쓰인 툴이다. <플로우>가 게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안긴다면 이는 철저히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플로우>는 게임의 규칙뿐만이 아니라 게임이 세상을 보는 시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플로우>가 2011년에 제작된 인디게임 flOw를 의식한 듯하다는 추측을 조심스레 해본다.) 영화의 오프닝만 봐도 이 애니메이션이 고양이의 시점을 전혀 빌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의 오프닝은 주인공인 고양이의 시점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되려 물을 떠먹고 있는 고양이가 물에 비치는 형상으로 시작한다. 애니메이션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고양이이자 물이라는 사실을 그린다. 더 정확히 카메라는 고양이의 뒤를 따라간다. 이때 고양이의 속도가 카메라의 속도보다 빠르다. 카메라의 속도는 정확히 물의 흐름에 따라서 디자인된다. 이 영화의 겸손함은 카메라가 한 번도 동물의 시점 숏이나 숏-리버스 숏을 허락하지 않는 데에서 온다.

 

ⓒ <플로우>

<플로우>는 정지라는 감각조차 인간의 발명품이라 이야기하는 듯했다. 카메라는 전지적 시점에 서 있지 않고 되레 동물 인근에 있는 자연 현상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게임의 전지적 시점 카메라는 결국 인간의 행동 반경에 멈추어 있다. 이 영화는 다르다. 카메라는 곳곳에서 동물의 행동 반경을 넘어선다. 특히 고양이가 물에 빠지고, 뱀잡이수리가 구할 때의 카메라는 경이로움을 불러온다. 이 경이로움은 우리에게 전혀 익숙치 않은 활강의 기분에서 생긴다.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잘 구현된 캐릭터 디자인과 동물의 몸짓과 감정, 울음소리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려 한 디테일 등을 칭찬한다. 개인적으로 이 디테일은 동물을 다루는 영화라면 마땅히 지녀야 하는 윤리에 가깝다.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 <플로우>는 그 이상을 카메라로 그려낸다. 이 영화의 활기는 인간 없음이라는 시선을 발명하려는 데에서 생긴다. 개인적으로 카메라에 대한 논의가 전무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자동차와 트래킹 숏 등 기계장치의 힘을 빌려서 자연의 무심함을 그리려 했다. <플로우>는 인간의 손을 떠난 카메라의 장점을 한껏 활용해 인간 없음이 사실은 해방임을 체험하게끔 한다.

<플로우>의 아름다움은 역사성이 없다는 데에서 생긴다. 영화의 전반부는 근대나 그 이전의 가옥으로 보이는 장인의 집과 거대 동상이 드러난다. 그 동상은 수몰된다. 마지막에는 인간의 존재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고대 문명이 등장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마치 인류의 역사가 선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듯하고 동시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영화의 세계관은 정확히 연도를 정리할 수 없다. 인간은 이미 멸망해 있고, 자연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해 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순환하는 체계의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이야기의 시작과 끝도 임의적으로 설정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플로우>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물이라는 사실을 각인하려는 듯하다. 마지막에 물에 반사된 다섯 동물을 통해 결국 이 서사가 되풀이될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이 영화는 따라서 SF라기보다는 퀑탱 메이야수가 이야기한 과학 밖 소설FHS에 가깝다. 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그저 인과율에 속하는 과학과 역사의 영역 바깥에 던져둘 뿐이다. 뱀잡이수리가 하늘 위로 사라질 때도 우리는 왜 그러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늙어서도, 다쳐서도 아니다. 탄생과 죽음을 시체를 통해 드러낼 수도 있을 텐데 이 영화는 급작스레 초월적 영역으로 도약한다. 이 순간에 눈물이 흘렀다. 삶과 죽음의 이분법도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닐까. 이분법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실존의 공포도 사라져 있다.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면 될 뿐이다. <플로우>의 아름다움은 거기에 있다. 이 인간 없는 세상은 전혀 무섭지 않다. 활기로 가득차 있고, 그 세계를 유영하는 체험을 할 때 우리는 인간다움을 벗어날 수 있다. 이 작품의 미더움은 그 체험을 겸손하게 드러내는 태도에 있는 듯하다.

※ 인용

[1] 『애프터 해러웨이』, 김애령, p.10-11, 봄날의 박씨, 2025

[김경수 영화평론가]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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