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이완민, 순수를 간직한 얼굴
[Interview] 이완민, 순수를 간직한 얼굴
  • 김민세
  • 승인 2025.07.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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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누에치던 방>(2016), <사랑의 고고학>(2022)

이완민의 영화를 떠올릴 때면 프레임 한편에 자리 잡은 꼿꼿한 여성의 몸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올곧이 지탱하고 있는 몸을 통해 얼어붙은 겨울의 한기에, 뜨거운 여름의 열기에 저항한다. 그리고 이들은 언젠간 찾아올 다음 계절과 함께 변화할 것이다. 이완민이 기다리는 것은 그 변화의 순간이다. <누에치던 방>(2016)의 '미희'는 그토록 찾던 친구에게 매정하게 거절당하고, <사랑의 고고학>(2022)의 '영실'은 길고 쓰라린 실패 끝에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이 순간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이들이 어떻게든 변화하리라는 사실이다.

이완민은 <누에치던 방>의 작업이 일종의 치료 과정 같았다고 설명한다. 그래서인지 이완민의 영화 속 인물들은 현재에 충실히 놓여있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끝나지 않는 과거의 상흔을 계속해서 돌이켜 보고 그 미로 속에서 하염없이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들의 몸은 그 모호한 시간성을 붙들고 있는 영화적 장소가 된다. 기억을 비롯한 많은 것들은 '지금 이곳'의 프레임에서 미끄러지고 비정형적으로 증식하지만, 꼿꼿이 자리 잡고 천천히 움직이는 이들의 신체만은 숭고한 형상으로 우리의 눈에 각인된다.

보이지 않는 폭력과 상처로 둘러싸인 그의 영화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순수를 간직한 얼굴들이다. 한국이라는 땅이 지닌 고통의 역사에 있어서 그 순수의 형상은 환상 내지는 착각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완민은 끝내 그 순수를 지켜내기 위해 영화를 찍는다. 그것이야말로 이완민의 영화가 담고 있는 형상과 몸짓이 숭고한 용기와 사색의 순간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이완민 감독 ⓒ 김민세 기자

김민세 영화평론가

<사랑의 고고학>(2022) 극장 개봉 이후 2년 정도가 지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가.

이완민 감독

한동안 일상 유지에만 전념하며 지냈다. 일단은 생계 활동을 하고 있다. 평균 주 2회 대학에 출강하고 있는데 수업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다음 장편 작업 또한 구상 중인데 본격적으로 초고에 이르진 못했고 이런저런 수집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김민세

학생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꾸었다고 들었다. 어린 시절 영화에 대한 기억은 어떠한가.

이완민

중학교 시절부터 비디오를 많이 빌려봤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레오 카락스', '타비아니 형제', '라스 폰 트리에' 감독 등의 영화들. 당시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이런 걸 만드는 직업이 있다면, 그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바로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미디액트라는 기관을 통해 영화를 배울 기회가 생겼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레오 카락스는 아직까지도 큰 애정을 품고 있는 감독이다. 후에 접한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도 좋아한다. 한국 영화로는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를 계속 챙겨보고 있고, 미디액트에서 수강했던 박찬옥 감독님의 영향도 받았다.

 

김민세

박찬옥의 <질투는 나의 힘>(2002)과 <파주>(2009) 중에 무엇을 더 좋아하는 편인가.

이완민

<질투는 나의 힘>을 압도적으로 더 좋아하고, 단편들도 모두 좋아한다.

 

김민세

본인의 작업에 영향을 준 작품 이야기를 더 들어볼 수 있을까.

이완민

<사랑의 고고학>을 작업할 때는 루이스 브뉴엘의 <이상한 정열>(1953), 로베르 브레송의 <온순한 여인>(1969),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1985), 샹탈 아커만의 <갇힌 여인>(2000) 같은 영화를 참고했다. 특히, 배우들과의 대화와 인물 관계 설정에 있어 도움이 되었다.

 

김민세

프랑스 파리의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다고 알고 있다. 그곳의 영화 교육 경험은 어떠했는가.

이완민

파리에 유학을 가겠다는 결심으로 떠난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반대로 가출을 멀리한 격으로 유럽에 머무르게 되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중 마침 파리에서 홍상수 감독님의 <밤과 낮> 촬영을 위한 현지 조단역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현지연출부로 지원했고, 촬영에 합류하면서 파리에 가게 되었다. 이후에 파리에 머물게 되면서, 체류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파리국제영화학교와 파리 3대학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김민세

레오 카락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만큼 프랑스에 대한 개인적인 동경 같은 게 있었을 것 같다.

이완민

그냥 멀리 떠나야 뭔가 할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레오 카락스 감독님이 파리 3대학에 재학했다는 정보를 뒤늦게 접하고 반갑긴 했다.

 

김민세

첫 장편을 만들기 이전에 단편 작업을 이어왔다고 알고 있다. 주로 실험적 형태의 극영화라는 말로 설명되는 것 같은데, 그 시절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들어볼 수 있을까.

이완민

그때는 영화를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박찬옥 감독님의 미디액트 수업 때 '대사 없이 다섯 컷 분량의 영화 만들기' 등의 과제를 수행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에는 정해진 형식 없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작업을 이어갔고, 영화학교에서 단편 작업들을 추가적으로 했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인 유학생에 대한 영화를 찍기도 했고, 당시에 놓였던 환경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 <누에치던 방>

김민세

<누에치던 방>도 다소 실험적인 극영화라 볼 수 있지 않나. 실험과 극의 경계를 명확히 나눌 수는 없겠지만, 극영화가 지닌 관습적 요소를 비틀어 독자적인 서사구조를 만들고 있다. 가령 이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나,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말이다.

스스로의 작업을 돌이켜보았을 때, 실험이라는 틀과 그것을 통해 말하는 서사 중에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 방법론에 있어서 무엇이 먼저인가.

이완민

크게 두 축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서사를 전달해야 한다기보다는 '기리고 싶은 어떤 순간'에 집중하는 것 같다. 좋아하는 많은 영화들에서도 기릴만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얼굴, 표정 같은 것들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에릭 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1987)에서 주인공들이 해가 뜨기 직전에 새들이 우는 시각을 기다리다가 그들이 원했던 것을 듣는 데 실패했을 때 속상해하는 인물의 상태, 그리고 상대방이 그를 달래는 순간과 같은 순간들 말이다. 로메르는 그 순간을 기릴만하다고 판단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보존하고 싶은 감정이나 마음의 상태들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서사를 엮어가고 끼워맞추는 식으로 작업을 해오는 것 같다.

다른 한 축은 자기 연구에 대한 측면이다. 나는 아직까지 자기 연구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영화 안에서도 나의 감정을 탐색하려 하는 면이 있다.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이 감정은 무엇이고 이 상태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는지에 대한 탐색 말이다.

 

김민세

'기리고 싶은 순간', '보존하고 싶은 순간'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누에치던 방>의 출발이 되는 그런 순간은 무엇이었는가.

이완민

소위 순수한 표정, 밝은 표정을 봤을 때 굉장히 신기해하고 보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한 인물이 그러한 순수한 대상을 발견하게 되고 쫓아가게 되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김민세

어떤 인물에게서 그런 순간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완민

'김유영'이 그런 인물이다. '유영하다'는 단어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이지만 상처받지 않은 상태에 있는 인물에 관심이 있었고, 실제로 있을까 싶은 그런 환상적인 인물을 설정해 보고 싶었다.

 

김민세

감독님의 두 장편 작품 모두 계절감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누에치던 방>은 겨울이 배경이고, <사랑의 고고학>은 수년 동안의 긴 시간을 담고 있음에도 여름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독립영화의 프로덕션 여건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두 작품에서 계절은 쉬이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완민

겨울과 여름을 둘 다 좋아한다. 첫 영화에서는 겨울 영화를 찍고 싶었고, 두 번째 영화에서는 여름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그 극단이 주는 힘이 좋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인물 또한 어떤 극단적인 상태에 놓인 인물들이어서 그 캐릭터를 좀 더 극대화하는 데 있어 계절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물론 그사이의 계절들도 모두 좋아한다. 그 극단의 직전 혹은 직후이기 때문에.

김민세

계절감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서, 감독님의 작품 속 인물들은 굉장히 예민해 보인다. 계절이나 날씨 같은 외부적인 것에 매우 촉각적으로 반응한다는 인상도 든다. <사랑의 고고학>에서 인식이 영실에게 '유리로 만든 악기 같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다소 재밌는 표현이 작품 속 인물의 상태를 잘 설명하는 것 같다. 영화 전반에 깔린 불안정함이 인물의 정서나 심리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지닌 육체로서 그것에 반응하는 듯한 디테일이 느껴진다.

이완민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생각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인물의 불안정함을 염두에 둔 적은 없다. <누에치던 방>에서는 인물의 바싹 마른 상태가 겨울에 어울린다 싶었고, <사랑의 고고학>에서는 사랑의 절절함이 여름과 맞닥뜨리는 어떤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몸은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영화 <사랑의 고고학>

김민세

감독님의 영화에서 인상적인 쇼트들은 배우가 액팅할 때가 아니라, 리액팅할 때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사랑의 고고학>에서 영실이 인식이 작업한 전시 영상을 보고 소파에 몸을 기대어 눕는 장면, 인식의 마지막 통화를 들으며 무언가를 차분히 적어내리는 장면 등. 인물들이 자신이 마주한 세계를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저항할 때, 그리고 자신의 몸에 솔직하게 반응할 때 느껴지는 숭고미가 있다.

이완민

배우들이 잘해준 영역인 것 같다. 기본적으로 촬영 이전에 배우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고, 현장에서는 배우들이 표현하는 것들을 최대한 열어놓는 편이다.

 

김민세

사전에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하는 편인가. 인물의 정서나 백스토리 같은 부분이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을 열어두는 편인가, 자세히 이야기하는 편인가.

이완민

인물별로 리딩을 철저히 하는 편이고 전체 리딩도 두어 차례 하는 편이다. 전체 리딩을 하는 이유는 각자 어느 맥락에서 자신이 등장하고 어떤 역할인지 이해하며 서로의 협업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개별 리딩 때는 어조라든가 인물이 이 말을 하는 이유 같은 굉장히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함께 이야기하고 만들어 나간다. 아무래도 독립 프로덕션을 하다 보니까 현장에서 이야기하면 지체되고 돈이 줄줄 새는 상황이 도래하기 때문에. (웃음) 그걸 사전에 막고자 배우들과 이야기를 미리 다 끝내야 한다는 것이 내 안의 원칙으로 정해져 있다.

 

김민세

현장이나 로케이션 환경에 따라 즉흥에 따르는 부분은 없는가.

이완민

예외적인 경우에 약간의 수정을 요청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인식의 가스라이팅이 성립하려면 인물의 관계에 있어서 섬세하게 조율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영실이 인식에게 너무 빨리 질리거나 화를 내게 되는 점들. 전체의 맥락에서 이런 부분은 눌러야겠다 정도로 조율하고 세부적인 것들은 배우들이 만들어 가는 것 같다. 편집할 때도 배우 연기 중심으로 편집하는 편이어서 연출적으로나 편집적으로 튀거나 이상하더라도 좋은 연기가 있는 테이크라면 그 테이크를 선택하고, 현장에서도 그런 테이크가 나올 때까지 계속 가는 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어진 상황 안에서의 즉흥을 시도하기도 한다.

 

김민세

콘티적인 부분 또한 세부적으로 다 정해두고 촬영하는가.

이완민

콘티를 따로 그리지는 않는다. 다만 마찬가지로 촬영의 경제적인 측면을 위해 로케이션 헌팅 때 미리 촬영감독님과 이야기를 한다. 현장에서는 마스터 촬영을 기본적으로 하고, 그다음에 필요가 있는 것들을 촬영하고 시간이 안 되면 접는 식이다.

 

김민세

<누에치던 방>과 <사랑의 고고학> 모두 독립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독립영화라는 매체 특정성이 작업에 어떤 방식에 녹아들고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

이완민

독립영화의 정의에 대해 말할 때면, 창작자에게 연출권 혹은 최종 편집권이 있는지의 여부로 이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에게는 이 방식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영화 제작은 나에게 생업과 분리된 일이고 나의 필요 내지는 좋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상품으로써 영화를 만드는 것은 큰 관심이 없다. 이때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려면 제작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늘 강하게 있고, 그러지 못할 때는 소규모로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사랑의 고고학>은 제작 지원을 여러 군데에서 받아서 임금 관련한 문제를 해결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었다. <누에치던 방>은 카메라 현물 지원 같은 간접 지원 및 후반 지원 정도를 받았기에 예산 면에서 훨씬 축소된 상태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의 한계가 있지만 그것에 수긍하면서 만들게 된다.

과거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주최한 포럼에 참석했을 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는 관계자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좋은 영화라고 해서 스태프를 착취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는 맥락이다. 그래서 늘 최선보다는 차선,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만들어본다는 생각이다.

 

ⓒ 영화 <사랑의 고고학>
ⓒ <누에치던 방>

김민세

<누에치던 방>에서 인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현재의 축에 놓인 인물들은 과거의 누군가를 추억하고 새로운 누군가에게 자신의 추억을 투영하는 방식으로 그 결핍을 채우려 한다. 구조와 인물을 통해 유희하는 영화는 근래에 자주 보이지만, <누에치던 방>처럼 그것이 정치성과 역사성의 담론으로 구체적으로 달라붙는 영화는 찾기 힘들다.

이완민

<누에치던 방> 작업을 하면서는 마음의 지도를 그린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 안에서 나에게 자리 잡고 있던 것들을 다 끄집어낸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연결함에 있어서 편하다 불편하다 정도의 기준으로 연결을 지었다.

김민세

그 지도를 그리는 데 있어서 선행하는 마음들, 그때 갖고 있던 마음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완민

일단 유년기의 친구를 자꾸만 찾게 되는 나의 상황을 발견했다. 성년기에도 그런 친구를 만들 수 있을지, 그리고 그 방식이 어떠해야 할지도 궁금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내 안에 굉장히 많은 왜곡이 있어서 그 왜곡들을 바로잡고 싶었다.

김민세

어떤 의미의 왜곡을 말하는 것인가.

이완민

당시에 내가 무엇을 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감, 혹은 어떤 것들에 대한 동경, 이런 것의 실체에 다가가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학창 시절의 입시나 청년기에 각종 시험 준비로 인한 상처에 직면해 보고 싶었다. 유희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느낌, 스스로를 치료한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도망하고자 하고 마주치기 어려워하는 감정들을 불러 모아서 실체를 직면하고 변화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김민세

영화에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과거에 일어났던 부모의 억압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듯한 인물들이 존재한다. <누에치던 방>의 미희와 <사랑의 고고학>의 영실이 그러한데, 이들이 부모와 만나는 장면들을 보면 전체적인 흐름에서 묘하게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담고 있는 시간대에서는 부모가 이미 늙거나, 힘이 없어진 존재라는 점이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부모의 캐릭터에 대해 설명한다면.

이완민

부모나 학교는 한 사람이 성장해 감에 있어 이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가장 가까이서 지도하는 존재인 것 같다. 나에게는 한 사람에게 그런 규율이 끼치는 영향이 언제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의 부모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지 아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마냥 부정적인 빌런으로서의 부모를 설정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어떻게든 잘해보려는 욕심과 그것이 잘 안되는 상황이 있는 것이고, 그런 상황들을 주변에서 종종 보았기에 영화 안에 담게 된다.

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당시 부모 세대가 겪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어머니 같은 경우는 가부장 사회 안에서 겪었던 것들로 인해 이럴 수밖에 없겠거니 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더라. 한편, 다음 세대가 경험치에 따라 부모 역할에 있어 또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도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다.

 

ⓒ 영화 <사랑의 고고학>

김민세

<사랑의 고고학>에서 영실은 물성을 가진 육체로서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인식은 음악, 스크린, 휴대폰 속 화면, 전화통화 너머로의 목소리 등으로 드러난다. 다소 도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영실이 고체적이라면 인식은 액체적 혹은 기체적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인물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기성의 영화가 젠더를 다루는 방식을 뒤집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완민

몸 대 음악, 스크린, 전화 통화 등이 만드는 대비는 인지하면서 작업했다. 작업과 별개로 언제나 주체가 되는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많은 영화에서 여성이 대상화되는 것을 어릴 때부터 보면서 커왔기 때문에. 자기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드러나는 여성 서사에 각별한 관심이 있다.

김민세

구체적인 장면을 예로 들고 싶다. <사랑의 고고학>에서 가장 번뜩였던 장면은 다름 아닌 영실과 인식의 통화 장면이다. 메시지에서 전화 통화로, 페이스타임으로 넘어가며 숏과 역숏을 구성하는데, 근래의 한국 영화에서 보았던 대화 구성 장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인물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약속하는 계기적인 순간에 걸맞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 장면의 컨티뉴이티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발상이 있었는지.

이완민

보통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이미지를 그대로 시나리오에 옮기는 편이다. 그 컨티뉴이티는 작업에 있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숏의 연결에 있어 분절시킬 부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부분, 메시지, 음성, 화면이 조합되는 방식 등을 고려했다.

 

ⓒ <누에치던 방>

김민세

감독님의 영화 속 인물들은 물리적 폭력은 아니지만, 명확히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인물들은 종종 답답하다는 수식으로 설명되곤 하는데, 동시에 그들만의 방식과 리듬으로 저항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완민

폭력을 다룰 때, 폭력이라 인지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것들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내 영화 속 인물들은 부모나 연인 같은 가까운 관계에서 폭력 상황을 겪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폭력을 규탄하고자 하는 마음과 상대방의 측면을 이해해 보려는 마음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머릿속과 마음속에 무언가는 많은데 어떤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런 상태에 종종 부딪히기에 탐색해 보고 싶었다.

김민세

<누에치던 방>의 유영 같은 인물이 가장 적극적으로 무언가에 저항의 제스처를 보이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실체가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완민

한 번도 무언가에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결국 환상일까 하는 질문과 탐색에서 만들어낸 인물이다. 상처받기 이전의 상태, 그리고 그만의 정의감을 지닌 인물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영화에 종종 나오는 맑게 웃는 표정의 사람들처럼. 다른 예를 들자면,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보면 나이 든 남자가 어떤 소년의 눈부신 상태를 보면서 환상을 품게 되지 않나. 그런 환상으로 대상화하게 되는 인물이라 말할 수 있다.

김민세

앞서 말했듯이, 순수성으로 가득 찬 인물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완민

그런 것들을 보면 우리가 보존해야 할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각자 저런 상태로 나이 들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들. 우리는 종종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나. 그런 면에서 거시적으로는 전쟁이나 재난 상황으로부터 지켜내야하는 것도 생각하게 된다.

김민세

<누에치던 방>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나. 굳이 따져보자면 비극적인 결말이라 생각하는지.

이완민

환상 속에만 있던 학창 시절 친구를 대면했다는 것, 이를 통해 환상을 깨뜨린다는 점에서 이 인물도 변화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실제 시나리오와 촬영에는 채미희가 이근경에게 화를 퍼붓는 장면이 있었다. 반갑게 맞이할 줄 알았던 친구가 더 이상 뭘 같이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는 말을 하니 화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이 채미희에게 변화의 순간이라는 생각에 편집점을 그렇게 잡게 되었다.

 

ⓒ <누에치던 방>
ⓒ 영화 <사랑의 고고학>

김민세

<누에치던 방>과 <사랑의 고고학> 모두 땅을 담고 있는 숏으로 시작한다. 두 영화에서 땅, 혹은 랜드스케이프는 유동적이며 외부에 의해 들춰지길 반복한다. <누에치던 방>에서 얼어붙은 강이 점점 녹는 부분이 그러하고, <사랑의 고고학>에서 땅은 유물의 발굴을 위해 계속해서 들춰진다. 이러한 균열이 일어나는 랜드스케이프는 감독님 영화의 '유리 같은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완민

두 영화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시작하는 점은 의도한 것이 맞다. <누에치던 방>은 학교 운동장에서 운구차가 도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친구를 찾아간 학교 운동장에서 끝난다. 그리고 <사랑의 고고학>에서는 강의를 위해 학교로 들어가는 영실로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연속적으로 느껴져서 재밌었다. 랜드스케이프라고 표현한 자연물에는 계속 눈길이 가고 영화적으로 의미 있다고 느껴진다. 학창시절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하던 것과 연관 있는 것 같다.

김민세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완민

나에게 학교는 엉망진창이었던 공간으로 남아있다. 애국 조회부터 폭력적이었던 선생들, 지금 생각하면 성추행적인 행동도 굉장히 많았고, 배운 것들도 그렇고, 환경이나 학생들이 놓인 상태도, 전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이 그러했다. 나중에 예술 강사 활동을 하면서 7년 정도 학교를 다시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보아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더라. 체벌은 없어졌지만 여러 억압적인 상태에 놓여있다는 생각이었다.

김민세

감독님의 영화에서는 한국이라는 땅이 갖고 있는 역사의 조각들을 은연중에 체감하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완민

다른 작업을 볼 때도 개인의 기억과 공동의 기억이 어떻게 만나는지 보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실제로 그런 것들이 궁금해서 그런 것 같다. 우리 삶 속에서 공동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런 것들을 재현할 때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망상이나 조작 없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지금은 매체의 역할에 관심이 있는데, 만약 개인이 매체를 끊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 식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 <누에치던 방>

김민세

독립영화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배우들과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배우와의 작업에서 인상 깊은 순간이 있다면.

이완민

첫 작업 때 만났던 '홍승이' 배우와 '이상희' 배우와는 현장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촬영 중에 각자 '이 인물이 왜 이러느냐' 반박하면, 잠시 멈추고 그것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해 보고 반영하는 과정이 굉장히 재밌었다. 홍승이 배우는 '내가 왜 이런 사람을 다 받아줘야 하는가', 이상희 배우는 성숙이 진행하는 수업 내용이나 방식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서로가 갖는 불편함과 의문들을 표현하는 과정이 즐거웠던 것 같다.

아까 이야기했던 것에 이어서, 배우에게서 기리고 싶은, 아카이빙하고 싶은 부분이 보일 때 캐스팅하게 된다. 영화 속의 캐릭터 또한 배우들이 갖고 있는 면면이 나를 건드리는 과정에서 협업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람들한테 연락하고 안부를 묻는 텀이 굉장히 긴 편이라 자주 연락하진 못하지만 언제나 함께했던 배우들을 응원하는 마음이다.

김민세

근래에 인상깊게 보았던 한국 독립영화가 있는가.

이완민

이전에 강박적으로 작품들을 많이 보던 시기가 있었다. 동시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공부한다는 생각이었다. 김수정 감독의 <파란 입이 달린 얼굴>(2015), 이승원 감독의 <소통과 거짓말>(2015), 조민재 감독의 <작은 빛>(2018),김남석 감독의 <12 하고 24>(2019), 정재훈 감독, 이강현 감독, 강유가람 감독. 장윤미 감독, 김경만 감독의 작업 등이 인상 깊었다.

김민세

다큐멘터리나 실험영화, 에세이 영화 등에도 관심이 많은 편인가.

이완민

그런 작업들은 늘 관심이 많다. 왜 이렇게 내레이션을 많이 쓰느냐는 질문에 이 세상에 줄 게 나밖에 없어서라고 답했다는 크리스 마커의 말을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드라마적인 것을 좋아해서 극영화 작업을 하고 있지만, 다른 축에서는 소위 시적 내지 에세이적 작품을 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김민세

시네필로서 영화를 찍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가.

이완민

덕업일치의 삶이 참 좋은 것 같다. (웃음) 좋아하는 영화인들의 연장선상에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상상만으로 행복하다. 환상을 가진 상태에서 보던 시기와 달리 요즘은 감독들의 자의식도 보이곤 한다. 아마도 감독으로서 내 자의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텐데, 그럴 때마다 혼자만의 동료애를 느낀다. 이런 고민들이 있었겠구나 이런 걸 해보고 싶었구나 등이 느껴질 때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다.

 

ⓒ 영화 <사랑의 고고학>

김민세

일상에서 영화 외에 접하게 되는 것들은 어떠한가.

이완민

주 1회 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다. 철학, 문학, 미학 등의 책을 다루는 서점인데, 신작들을 접하면서 화두를 파악하게 된다. 체력 유지 차원에서의 운동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그 외에는 수업 준비에 시간을 쏟는 편이다. 시나리오기초, 미장센연구, 한국영화사 등의 수업을 하는데 좋은 작업을 접할 때면 기쁘다.

김민세

앞으로 계획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

이완민

방학을 틈타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해보고자 한다.

김민세

준비 중인 작업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들어볼 수 있을까.

이완민

90년대 호주가 일부 등장할 것 같다.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음이 굉장한 것이라 감각하게 되는 요즘인데, 그것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 중이다.

[인터뷰 김민세 영화평론가]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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