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2020)은 <우리들>(2016)과 <벌새>(2018)에 이어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본 가족 서사로 환원되곤 한다. 윤단비는 스스로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 같은 대만 뉴웨이브에 대한 애정을 표하였으며,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한국 독립영화계의 가족과 아이를 중심으로 한 서사 경향도 이러한 견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송경원은 그의 글에서 이 영화가 대만 뉴웨이브가 보여주는 구체적인 시대의 감각과는 달리, 시대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추억을 구축하는 점을 염려한다. 동시에 그는 고전의 스타일을 체화한 뒤 재창작한 작품으로서 이 영화를 옹호할 여지도 있음을 지적한다. 송경원의 논점은 대만 뉴웨이브에 영향을 받은 한국 독립영화들이 고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에드워드 양과 허우샤오시엔에 대한 정론의 시각으로 한국 독립영화를 보는 것을 넘어서, 눈앞에 놓인 현재의 영화를 그에 합당한 새로운 틀로 보아야 할 것을 역설하는 것으로 읽힌다.
<동동의 여름방학>(1984), <하나 그리고 둘>(2000) 등, 대만 뉴웨이브 영화에서 아이의 시선이 보여주는 것은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에서 발견되는 삶의 진실이다. <남매의 여름밤>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서사 상 중심이 되는 아이인 옥주는 사춘기라는 과도기적인 시기에 놓여있으며, 이는 쌍꺼풀 수술을 위해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지점이 발단이 되어 옥주는 아버지가 판매하는 신발을 훔쳐 팔고, 도주하다가 경찰서로 불려 간다. 그렇다면 이 서사가 보여주는 것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보는 삶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는 이 사건을 통해 사춘기의 옥주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가?
<남매의 여름밤>이 어린아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삶의 진실을 통한 성장이 아니라 젠더적으로 그것이 가로막히는 순간이다. 한국 독립영화의 특정 경향이 아이-가족 서사를 통해 순수와 성장의 구조를 보여주었다면, <남매의 여름밤>은 그 구조를 비틀어 은밀한 방식으로 여성 서사 혹은 소수자의 서사를 건든다. 그리고 그것은 <벌새>의 어렴풋한 희망보다도 더욱 비관적이다. 옥주가 견디고 있는 삶의 무게는 단순히 사춘기의 혼란이 아니라 가부장 이데올로기 아래서 여성으로서의 젠더와 소수자 정체성을 직면하는 과정이다.
앞서 언급한 장면을 다시 돌이켜 보자. 옥주가 쌍꺼풀 수술을 위해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달라 말할 때, 일차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 소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할아버지의 생일잔치 장면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환기된다. 동주가 갑자기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일 선물로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하고, 아버지는 춤을 춰보면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다. 동주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할아버지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고모는 웃으며 동주에게 스마트폰을 사줘야겠다고 말하는데, 이때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어딘가 시큰둥한 옥주의 얼굴이다. 다음 씬에서 옥주는 어차피 아버지는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을 것이라며 동주에게 괜한 짜증을 낸다. 동주는 옥주를 놀리며 안에서 화장실 문을 닫고, 옥주는 밖에서 닫힌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영화는 문이 열리는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고모의 말을 들은 옥주의 얼굴과 동주를 향한 짜증으로의 연결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옥주의 쌍꺼풀 수술은 가로막히고 동주의 스마트폰은 허용된다. 여성에게는 가로막히고 남성에게는 허용되는 구도. 물론 옥주와 동주의 성별 차이가 이 가족이 보여주는 차별에 본질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 차별에 초점을 두었다면 영화는 스마트폰을 갖게 된 동주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아버지는 아직 어린 딸의 '성형수술'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과 무관하게 옥주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옥주는 스마트폰은 허용되고 쌍꺼풀 수술은 무시당하는 이 상황을 차별로 받아들인다. 또는 영화는 옥주의 시선에서 이 구도를 젠더적으로 비교한다. 옥주가 닫힌 문을 두드리는 것은 그것이 끝내 그의 내면 안에서 해소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그렇게 옥주는 첫 번째 좌절을 통해 자신의 젠더적 한계를 실감하고 체화한다.
옥주가 느낀 젠더적 한계가 '닫힌 문'을 통해 가시화되었듯, 영화 내에 등장하는 집의 구조와 문의 여닫힘은 하나의 사회 구조 안에서 권력과 저항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할아버지의 집은 2층집이며, 그 사이를 잇는 계단은 각층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오즈의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협소하다면, <남매의 여름밤>의 계단은 비교적 개방적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계단의 출입을 가로막으며 1층과 2층을 구분 짓는 문이 존재한다. 계단의 출입을 막는 닫힌 문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영화에서 이 문은 두 번 닫힌다. 첫 번째는 2층에서 재봉틀을 돌리는 옥주가 동주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문을 닫는 장면이다. 여기서 특별히 서사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재봉틀의 등장은 의미심장한데, 이는 곧 옥주가 여성의 젠더 정체성을 스스로 학습하는 과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첫 번째 닫힌 문의 장면에서 2층은 여성에게만 진입 가능한 작고 대안적인 세계이다.
두 번째는 할아버지가 신체적 이상 증세를 보인 이후, 아버지와 고모가 남매에게 할아버지의 요양원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이다. 이때 아버지는 1층의 할아버지의 방문을 닫고 계단을 구분 짓는 문 또한 닫는다. 할아버지를 소외시키는 두 번의 닫힘은 가족에게 짐이 되는 남성에 대한 배제인 동시에, 그 배제를 실행하는 또 다른 남성의 권력 작동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2층은 권력이 점유한 공간이며 1층은 그 권력으로부터 유기된, 혹은 권력이 언젠가는 점유할 공간이 된다. 첫 번째 닫힌 문에서 1층이 사회 일반이고 2층이 그사이에 존재하는 틈으로서의 대안적 공간이었다면, 두 번째 닫힌 문에서 이는 전복된다. 성장하는 여성은 대안적 공간을 꿈꾸고, 늙은 남성은 유기된 공간 안에 놓인다.
<남매의 여름밤>의 집과 문, 계단의 구조는 차별과 경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중에서도 '닫힌 문'은 젠더 및 연령을 나누는 명확한 사회학적 경계로 기능하고, 옥주는 영화 전반에 걸쳐 그 경계의 작동 방식을 체험하고 학습한다. 한편, 옥주는 이러한 구조에 틈을 내고 대안적인 제스처를 통해 그만의 공간을 구축하고 소수자와 소통하길 시도한다. 가령, 옥주의 방 안에 놓인 모기장은 명확한 경계로서 작동한 닫힌 문과 달리 보다 유동적인 경계로 다가온다. 그곳은 고모와의 내밀한 대화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며, 남성 동주의 존재를 끝내 받아들이는 공간이다. 또한 옥주는 계단 중턱에 앉아, 1층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는다. 이후의 장면에서 1층과 2층은 닫힌 문으로 나눠지겠지만, 이 장면에서 옥주는 그 경계의 구획을 예감한 듯이 대안적으로 할아버지와 교감한다.
옥주의 대안적 소통의 제스처가 가장 극단적인 형식으로 보이는 때는 영화가 꿈의 구조를 불러올 때이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옥주의 꿈으로 드러나는 다소 인위적인 장면은 이전에 볼 수 없던 어머니의 존재를 소환해 낸다. 그리고 동주가 문을 열고 어머니가 왔다 갔다며 옥주를 깨울 때, 어머니와의 만남이 꿈이었음이 드러난다. 옥주가 눈을 감고 자고 있을 때, 닫힌 문 밖으로 어머니가 왔었고 잠에 빠진 옥주는 그 닫힌 문을 꿈으로 뛰어넘었다. 이 연결 혹은 단절에서 꿈이라는 대안적인 연대의 가능성을 보아야 할까, 그 실패를 보아야 할까. 어찌 되었든 할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이미 떠났다. 시간은 부재를 되돌리지 못한다. 이 두 번째 좌절은 옥주를 밥을 먹다 말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 흐느끼게 만든다.
장례식 후 집으로 돌아온 옥주의 울음은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뒤늦은 실감처럼 보일 법하다. 하지만 이 울음은 영화가 내내 유지해 온 듯한 서정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명에 가까워 보이며, 인과적인 반응의 감정 표현이라기보다는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갑작스레 폭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비명이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 젠더적으로 가로막히던 순간, 할아버지의 죽음 전후로 작동하던 '닫힌 문의 권력 구조', 대안적 제스처로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쓰라린 패배감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아이-가족 서사 아래에 젠더적 실패를 직면하는 여성의 서사를 엮어냄으로써 권력의 구조를 재현해 내는데, 이는 영화가 보여주는 기묘한 노스탤지어와 맞물려 가부장 이데올로기 역사의 단면들을 미시적으로나마 체험하는 듯한 순간으로 나아간다.
<남매의 여름밤>의 비극성은 그 실패 이후로 어떠한 성장의 서사를 보여줄 수 없음에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끝내 옥주의 작은 제스처들을 존중하는 방식을 택한다. 옥주의 울음 이후, 영화는 단 세 숏만을 보여주고 끝을 낸다. 하나는 모기장 옆에서 자고 있는 옥주의 숏이며, 다음은 빈 계단의 중간을 담고 있는 숏, 마지막은 할아버지가 종종 물을 주곤 했던 정원의 숏이다. 마지막 숏이 할아버지의 부재를 확인하는 숏이라면, 앞선 두 숏은 옥주의 제스처가 잔존한 장소다. 그 두 숏은 모기장, 계단 너머로 들려오던 음악, 꿈을 환기하며 옥주가 지배적 구조 안에서 보였던 대안적 제스처의 역사를 되짚는다. 흐느끼던 전날 밤에서 또 다른 아침이 오기까지 변화한 것은 없다. 하지만 <남매의 여름밤>의 마지막 이 세 숏은 부재와 실패를 다시 한번 직면함으로써 가능태로서의 또 다른 미래를 상상하길 잠시나마 허락한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