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빈의 영화의 파편으로부터] 의문을 품는 것이 전부일지라도 의문을 품기
[변해빈의 영화의 파편으로부터] 의문을 품는 것이 전부일지라도 의문을 품기
  • 변해빈
  • 승인 2025.06.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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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닌 감각이 필요한 <블루>와 <해피 아워>가 거리를 좁혀주지 않을 때"
ⓒ <블루>(1933)

데릭 저먼의 다큐멘터리 영화 <블루>(1933)는 오직 파란색으로 이뤄진 스크린 화면과 그 너머에서 운동하는 각종 사운드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타이틀 시퀀스 및 엔딩 크레딧이 차지한 몇 분을 제외하고 79분 동안 파란색으로 뒤덮인 스크린을 보며 정체불명의 사운드와 조우하게 된다.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데릭 저먼은 파란 음영의 형태로 외부 세계를 지각할 수 있었고, 그러한 신체적 반응을 스크린이라는 물질과의 관계성을 통해 표현했다. 다소 거칠게 결론짓자면 <블루>는 상실된 신체 감각이 야기하는 문제를 전하는 데 있어 (이를 사회적인 고립과 소외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현실 바깥의 관념 체계를 일상적인 감각의 문제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일상적인 감각의 문제에서부터 자기 존재의 모호함까지 논하는데 이것 자체를 (이론적으로 접근하기보단) 실감각 형태로 알게 한다. 그야말로 감독 스스로가 느낀 것을 관객 또한 스스로 느끼게 했고 느끼는 정도에 따라 <블루>에 대한 반응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게다가 <블루>가 감각을 다룬 영화에 그치지 않고 감각적인 '체험'의 차원으로 일컬어지는 데엔 지각, 감각, 인식 따위의 과정이 어떻게 촉발되는지를 예민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작품에 출연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주어질 뿐 우리는 그것을 직접 알아차리기 어렵다. 주어진 정보에 다소간 편승하게 된다. 혹은 인물들의 이미지를 보고 누구인지 알아차릴 때보다 신중함을 갖춘다. 사운드, 특히 말은 어떤 활자, 억양, 뉘앙스 같은 요소가 종합적으로 엮이며 서술적인 양태를 갖추므로 시간에 귀속된 무언가여서다. (이미지에 비해서도)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내지 않는다. 이 점을 고려할 때 그런 말의 전달을 방해하는 <블루>의 이미지의 부재와 소음의 존재는, 어쩌면 말에 담긴 내용물 이전에, 음성의 질감과 형태감과 조형적인 특성과 같은 것에 덩어리 채 부딪혀 보는 게 중요하다고 전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가 제한되면 다른 하나가 활성화되는 신체 기능의 재분배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작 <블루>가 청각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게끔 권유하는 영화는 아니어서다. 데릭 저먼은 사운드의 정체를 더 잘 파악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불균질한 소음이 무방비로 뒤섞여 겉돌게 만든다. 직접적인 정보를 내포한 내레이션이 존재하지만 그 내용이 전하는 함의만큼이나 자막의 개입 여부에 따라 체험의 차원이 달라진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자막의 여부는 청각의 활성화를 돕는가, 방해하는가? 언어의 장벽에 따라 달라지는 체험은 또 어떤가? 자막의 개입은 원색의 블루가 장악한 이 영화에 아무런 티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의 연상선에서, 우리는 데릭 저먼이 겪는 고립과 소외에 온전히 대입될 수 없을지 모른다. 무언가를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블루>를 '보는' 환경을 벗어날 수 없으며, 나의 시감각이 이미지와 사운드 간의 간격을 지각하는 것에서부터 이 체험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운드의 묘연한 정체가 주는 불안정함은 '이미지 없는', 더 정확히는 '없음을 향해 조작된 이미지'를 보는 행위 없이 의미를 전달할 수 없어서다. 이미지(시각)와 사운드(청각)에 대한 감각이 모두 요구되고 있고, 이들 사이의 긴장감을 겪는 것이 중요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블루>는 광선과 음파에 관한, 아니 그걸 전달하는 공기를 다루는 영화이다. 공기 중의 보이지 않는 진동을 감각의 일부가 아닌 온몸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영화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스크린 앞이라는 장소와 그 앞에 내가 위치한 상황에 관한 영화다. 스크린 밖으로 뻗어 나와 우리 몸을 휘감는 맹렬한 푸른 광선, 디지털 음파에 79분간 쉬지 않고 노출된 몸의 시달림 곧 일종의 패닉(말장난 같지만 'Blue Screen of Death')에 관한 영화다. 우리는 그런 시달림으로부터 점차 선명해지는 죽음의 임박, 중단을 향해가는 감각의 역설적인 활성화를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감각하게 된다. 거듭 말하건대 그런 감각을 안다고 말하는 일, 죽음의 냉담함 앞에서도 솟구치는 데릭 저먼의 예술적 열망을 몸으로 접속한다는 것은, 모종의 경계를 잘 통과해서가 아니라 이를 불가능하게 하는, 혹은 불가능하다는 의식으로부터 비롯된 정서적인 작용일 가능성이 높다.

 

ⓒ <해피 아워>(2021)

머리가 아닌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데, 관객이 완전히 거리를 좁히게 두지 않는 건 뭐라고 해야 할까. 정보를 이해하거나 암기하는 뇌의 활동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해보고, 무언가 되어보고, 느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로부터 비로소 완성되는 영화. 그러나 <블루>가 그러하고, 애초에 모든 인간이 그렇듯 무언가를 동등하고 동일하게 감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이 같은 시도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단지 역설을 조성하는 장치로 그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가능성에 관한 것조차 여러 번 말하는 것과 한번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는 그 차이를 떠올리며 조금 더 말해보자. <해피 아워>(하마구치 류스케, 2021)의 워크숍 장면은 신체의 감각을 여닫는 행위로부터 관계에 대한 화두를 언급한 또 다른 사례이다. 워크숍에 모인 사람들은 다른 이의 뱃속 소리를 듣거나, 이마를 맞대어 상대의 생각을 읽어내거나, 서로의 몸을 지지대 삼아 동시에 일어서는 몸짓을 수행한다. 그러기 위해 어둑하게 조성된 환경이 있고, 인물들은 눈을 감아 귀를 열고, 상대방을 향해 너무 가까이 밀착하며, 휘청거리다 넘어진다. 둔감하고 무심하게 여겨 온 부분을 활성화하려면 단연 몸에 밴 익숙한 부분을 닫아야 한다. 상대를 잘 알기 위해 대면한다는 개념은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등을 진 인물들의 몸짓으로 비틀어진다. 상대의 생각을 알아맞히는 과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사실 진위 여부를 일일이 증명해 내는 과정과 거리가 멀다. 스스로의 몸의 감각을 찾고 느끼며 사적인 신체 경험을 특권화하는 것으로 시작된 워크숍은 인원수를 늘려가며 동반 혹은 공존 개념을 불러온다. <해피 아워>는 워크숍 장면을 통해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살아가는지, 세계에는 어떠한 소통적인 행위가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한 사유를 머리가 아니라 몸의 감각을 빌려 제시한다. 그러니 어쩌면 단지 그들이 거기 동시적으로 존재했었다는 것 이외에 <해피 아워>에서 중요한 건 없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말하면 <해피 아워>는 타인과의 거리를 초월적으로 극복해 나가며 특별한 관계의 형상을 보여줄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관계적 내막이 더 펼쳐진 극 후반부에 이를수록 세계라는 광범위한 단위로 묶인 인물들이 아닌 개인 단위로서 인물들이 보인다. 하마구치는 인물들에게서 감지되던 불안한 징후를 소거하기보다 실현시킨다. 가족, 친구, 공동체를 비롯한 관계적 형상을 설계한 뒤 그들 중 누군가를 유령화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존재하던 것은 부재한다. 알았던 것, 알고 있는 것, 알 수 있는 것 간의 차이는 견고해진다. 하마구치의 인물들은 흔하게 하지 않을 법한 말을 서로에게 꺼내 놓는 상황 안에 자주 놓여 있고, 그것이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라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실제 태도가 아니라 그럴듯하게 조성된 분위기 혹은 정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방대한 러닝타임과 방대한 대화를 자랑하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정작 무언가를 (말)하면서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를 살해한 겁니다"). 혹은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에 관해 의문을 표하는 것으로 무언가를 (말)한다("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할 필요가 있을까"). 준의 재판 장면. 인물들의 관계를 사건화하는 특수한 환경을 조성한 이 장면은 준이 그 자신에 대해 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끝내 준이 스스로 행방불명될 때 그는 밝혀질 수 없는 의문이 되며 통과할 수 없는 막이 된다. 하마구치의 영화는 겉으로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예컨대 내면, 심연, 실재 등으로 분류되는 것들을 조금 더 보여주고 더 말해내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동시에 뭔가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도 준다. 이 이중성이 이따금 영화에서 느껴지는 서늘하고 섬뜩한 기운의 실체인 것 같다.

 

ⓒ <해피 아워>(2021)

<해피 아워>에는 인물들이 마주보고 응시하고 들여다보는 몸짓과 태도가 있고, 그러한 상황을 촬영한 쇼트가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말로 설명 안 되는 꺼림칙한 기운이 감돈다. 우카이가 이혼 소송 중인 준에게 집요하게 질문하던 때, 재판장에서 남편 코헤이가 준을 뚫어져라 볼 때, 우카이가 인파에 둘러싸인 아카리를 먼발치에서 관찰하다시피 할 때 의중 모를 불안감이 치고 들어온다. 그렇다고 우카이나 코헤이에게 특수한 설정이 부여되는 것도 아니다. 꺼림칙하긴 하지만 하마구치는 특정 인물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이분화할 수 없도록 끌어간다. 한편에선 (익히 알려졌다시피) <해피 아워>의 비전문 배우들이 보여줄 수 있는 훈련되지 않은 인간(배우)의 신체에서 끌어낸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오해하고 있는 것도 같다. 인위에서 멀어지면서 연기가 비인위에 가까워지고, 그렇게 해서 낯설어진 대상을 불안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소설가 노세의 낭독회 장면, 서사를 부여받지 않은 단역 인물들의 모습. 정확히 무엇이라고 짚어낼 수 없지만 극의 흐름에 매끄럽게 순응하지 않는 듯한 이물감이 꺼림칙함의 원인일 수도 있다. 여하간 그게 무엇이든 단역 인물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의 눈에 어떻게 보이려고 한다기보단 그냥 있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네 친구 아카리, 사쿠라코, 후미, 준이 여행지에서 "처음 뵙겠습니다"하는 상황극을 펼친다. 이는 단연 서로를 더 잘 알고 더 가까워지려는 맥락에서 개입된 역설적인 풍경이다. 이들은 저마다의 근심이 있고 이를 모조리 공유하려 하지 않지만 그런 마음을 비난하려 하지 않는 태도가 있다. 차라리 이기적이고 갈등하는데, 그게 (숨김없다기보단) 숨김없으려는 태도로 기능하고 있어서 가증스럽지 않다. 오히려 장면의 애틋한 감응을 완성한다. 하지만 동시에 부정형의 예감도 든다. 인물들이 내뱉는 말이나 태도가 겉과 속이 달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인물들이 볼 수 없는 걸 관객은 볼 수 있어서 느껴지는 무엇 같다. 우리는 인물에 밀착된 말이나 감정뿐만 아니라 이를 둘러싼 상황 혹은 서사로 인식의 범주를 더 넓혀서 영화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인데, 이를 더 자세히 말하기 위해 앞의 꺼림칙한 쇼트들의 공통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우선 인물들은 다른 이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 혹은 얼굴을 영화의 카메라가 정면으로 담아낸다. 정면 구도에 따라 인물들은 허구와 현실의 벽을 넘고, 평소라면 우리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계'가 무너지는 걸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해피 아워>의 정면 쇼트는 의중을 알 수 없는 것을 볼 때의 긴장감으로 가득하고, 이로써 계의 무너짐은 무의미해진다. 이 쇼트 자체가 외려 수수께끼가 되기 때문이다.

정면 쇼트에서 군더더기 없는 것은 카메라가 인물들의 얼굴을 촬영하는 모양인 것이지 그 내용물이 투명한가는 다른 문제다. 준이 여행지 버스에서 만난 행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를 떠올려 보자. 이들의 만남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성사되었고 낯선 상대와의 즉흥적인 대화라기엔 결코 가볍지만 않은 교류를 한다. 그런데 준이 조금 더 자신에 관해 보여주자(이혼 소송에 관한 사실) 행인은 곧이어 그 현장을 빠져나간다. 물론 행인이 보인 행동이 곧 그 사람의 마음이라 확정할 수 없고, 그 마음이 뭔지 알 수도 없다. 이 또한 그저 시기적으로 우연이 맞물린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행인이 거리감을 두는 그 순간 다시금 인물의 정면 쇼트가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동일한 시공간에 공존하며,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우리는 그러한 환경 안에서 타인을 인식하고 나아가서는 알게 된다. 반복하건대 그럴 때마다 꺼림칙하고 불안한 기운이 형성된다. <해피 아워>는 경계를 깨는 것으로 이해되어 온 장치를 통해 경계를 설명한다. 심지어 정념으로 그 경계를 인식하게 한다. 간격, 단절, 거리감 등을 유발하는 생물학적이고 원초적인 꺼림칙하고 섬뜩한, 불안의 정서를 유발하고 직접 감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 전반적인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느끼게 되고 느끼는 정도에 따라 영화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흥미롭게도 하마구치는 그걸 느끼게 해서 인물들이 말하고 영화가 보여주는 것 이상 가까워질 수 없게 거리를 만들고, 영화 안에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가져갈 수 없게 했다.

 

ⓒ <해피 아워>(2021)

<해피 아워>의 전반부가 함께 존재하기 위해 계획 또는 규칙이 개입된 풍경을 봤다면 후반부는 우연과 접속하거나 스스로 계획 또는 규칙을 깨트리는 상황을 보여준다. 인물들이 만나고 함께 존재하는 설정은 그것 자체에 비중이 있다기보다 서로 흩어지고 떠나고 혼자가 되기 위해 조성된다. 사라지며 미궁이 되는 준은 더할 나위 없고 아카리, 사쿠라코, 후미 또한 의문스럽다고 여겨지는 쪽으로 선택하고 행동한다. 인물도 영화도 그 의문스러움을 걷어내려 애쓰지 않는다. 사쿠라코는 남편에게 외도한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지만 솔직한 건 그러한 상황이 존재했다는 것, 곧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것이지 어떤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되었는지에 관해선 알지 못한다. 사쿠라코는 그 원인도 그 이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스스로도 '모른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았지만 말한 것. 남편은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하고 사쿠라코에게 묻는다. "어떤 눈?"하고 되묻는 사쿠라코는 자기 스스로도 모르기 때문에 반문한 것일까, 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이 다른 이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를 묻으려는 것일까. 사쿠라코는 연이어 "그냥 보고 있을 뿐이야"라고 덧붙이고 이 순간 카메라는 다시금 인물을 정면 쇼트로 담아내는데, 그녀의 말처럼 정말 '그냥 보고 있는 것'도 같고 숨은 의미가 담긴 것도 같다. 그렇다면 '그런 눈'에 숨겨진 그것은 뭔가. 슬픔일 수도 있고 원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정확하게 어떤 눈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하고 어중간한 그 선이 인물을 그 인물 자신일 수 있게 한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할 때 인물들은 다른 이에 의해 묘사되지도, 관찰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영화의 권능으로도 간파되거나 정의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해피 아워>가 타인을 알 수 있는가의 물음으로 시작해 타인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 위한 영화와는 다른데, 하나는 타인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시간적으로 뒤(결론)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앞(전제)이기 때문이다.

<해피 아워>는 타인에 대해 알 수 없다, 더 정확히는 아는 만큼만 알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전반에 깔린 영화다. 이를 비관이나 절망의 형태로 부각하기보단 그런 것이 사실이고, 그럴 수밖에 없음이 보편적인 정서로 공유된다. 인물들은 준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이미 늦은 시점일 때, 이 시점이 인물들 사이 벽을 만드는 요체가 아니라 뭔가를 알고 싶다는 욕구를 건드리고 생겨나게 한다. 다른 하나는 <해피 아워>는 나에 관한 영화라는 점과 연관된다. 인물들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고 뱉어내는 말, 자신의 행위, 자신의 상황을 알고 싶어하는 쪽 같다. 말하자면 어떠한 거리감을 좁혀야 한다면 그건 나와 타인의 거리가 아니라 나와 나의 거리이다. 우리가 영화의 정면 쇼트를 보며 의심하는 것은 그 인물의 정체나 태도 따위이기 이전에 거기서 '내'가 느끼는 정념의 실체와 그 원인이다. 이것이 정확한 것인지 의심하기까지 한다. 다른 이에 관해서 알 수 없다는 건 확신하고 용인 가능한 반면, 나를 알 수 없다는 건 인식하지 못하거나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보고 들은 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의심하고 더 알려고 해야만 완성되는 영화. 그런데 그 대상이 결국은 내가 뭘 겪었고 느끼는지이며 그걸 에워싸고 있는 내 상황일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해피 아워>는 카메라를 등진 인물의 뒷모습을 비추며 답한다. 이것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라고 말하면서 전부 다 보여준 것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변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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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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