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2018)는 이미 충분히 말해진 영화임이 분명하다. 많은 평은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1990년대의 배경이 당시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호출하고 있다고 지적했고, 여성 청소년의 성장 서사를 통해 과거의 상실과 고통의 기억을 발굴해 내고 있음을 되새겼다. 이를 통해 <벌새>는 과거를 성찰함과 동시에 지금-여기(2010년대 이후 한국의 여성주의적 운동)의 여성 담론을 꺼내놓고 상호 간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공론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뒤늦게 <벌새>를 다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지닌 기묘한 시간성-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닌 미래를 감지하려는 시간의 감각-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관점들은 이 영화가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까지 잔존해있는 상실의 감각과 유년 시절의 기억을 일깨운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는 몇몇 대중과 평론들 사이에서 노스탤지어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에 화답하고, 그 시대의 감수성에 동참을 요구하는 식으로 소비되는 데에서 그쳤다.
하지만 <벌새>의 중요한 지점은 과거에 대한 성찰과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과거의 회상으로만 포섭되지 않는 시간성의 확장에 있다. 영화가 담아내는 시간은 당시의 현실을 각인시키는 동시에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계속해서 감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성 간의 연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의 가능성은 은희의 상처 입은 귀와, 영지와의 기묘한 접촉을 통해 촉각적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시간을 뛰어넘는 대안적 소통의 양상에서는 <벌새>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고 여성 서사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발화를 언어 그 이상의 감각적 코드로서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동시대에 손을 내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즉, 우리는 <벌새>가 보여주는 과거를 노스탤지어에 빠져 응시하기보다는, 미래/동시대를 향한 영화 자체의 응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명확한 형식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영화가 스크린 밖으로 우리에게 보내는 소통의 제스처를 읽어내기에 앞서, 프레임 내부에서 교환되며 엮이는 소통의 양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필요에 무색하게 우리가 영화 내내 보게 되는 것은 상호 교환적인 소통이 아니라 교환의 실패이다. 가령, 첫 장면에서부터 난데없이 은희는 아파트 집 문을 두드리며 엄마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친다. 은희가 집을 착각해 잘못된 문을 두드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이미 소리를 한껏 지르고 난 뒤이다. 이후 꿈 장면에서도 엄마는 소리치는 은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송신자와 수신자 간의 소통의 오류. 그렇다면 어느 편에서 오류가 일어난 것인가? 송신자의 목소리가 나지 않는 것인가, 혹은 수신자의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은희가 오빠의 손찌검으로 인해 고막이 터질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듣지 못하는 자는 은희가 아니라 엄마인가?
다소 난감하고 초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두 차례에 걸친 소통의 오류는 그 자체로서 서사적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이 두 장면은 시대를 향한 여성의 소리 없는 저항을 메타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다만, 은희는 단지 소리치는 것이 아니다. 이 가정에 어울리는 것은 은희가 홀로 남은 집에서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앞선 두 장면에서 그는 분명히 ‘누군가를 향해’ 말하고 있다. 송신자와 수신자의 구도.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장면이 서사 내부의 또 다른 소통의 구도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없을까? 은희와 영지. 은희가 영지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내지만, 그 소포는 뒤늦게 도착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지는 이미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문을 바꿔볼 수 있다. 애초에 송신자와 수신자의 자리에 빈 부분은 없는가? 보내는 사람과 부쳐진 편지는 있지만 받는 사람이 부재한다. 즉, 은희와 엄마 간의 소통의 오류가 암시하는 것은 영지라는 수신자가 언젠간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지의 부재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은희가 의지했던 타인의 상실만이 아니다. 이는 <벌새>가 내내 보여주었던 여성 간의 상호교환이 불가능함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는 사건이다. 사실 영지는 서사 상에서 주요한 인물로 비치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영지는 은희의 삶에 뜬금없이 틈입했다가 사라지는 타자이다. 영지의 첫 등장은 그가 한문 교실 상가의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인데, 그 이후로 한문 교실에서 은희와 영지가 마주하는 장면은 마치 영지가 주인공인 것처럼 찍혔다. 즉, 그는 은희의 서사에 틈입한 존재임에도 그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은희가 한문 교실에 오기 전부터 그를 기다리는 영지로부터 시작하고, 서사상으로 주어지는 정보에 비해 유독 과하게 영지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영화의 이런 시선은 영지를 또 다른 주인공으로 만들며, 그의 서사를 은밀히 가늠하고 감각하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응시는 그가 언젠가 프레임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이상한 예감을 증명한다. 카메라는 종종 과잉된 응시를 통해 존재의 죽음을 일찍이 애도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영지가 프레임에 존재하는 방식은 유령적 태도에 가깝다. 혹은 영지의 등장은 이 영화를 꿈의 감각으로 만들어버린다. 지금은 좀처럼 찾기 힘든 한문 교실이 갖고 있는 상실의 감각을 오롯이 체화한 듯한 여성. 그는 죽음이 존재하기 이전에 죽음의 공기를 프레임 안에 불러오며, 은희는 이를 통해 오지 않은 미래를 감각한다. 가령, 그의 유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모순적이게도 그가 처음으로 한문 교실 밖에서 등장할 때이다. 은희가 수술을 위해 입원을 한 병동의 어느 밤, 영지는 프레임 안에 손을 넣고 은희를 쓰다듬는데 이 손짓은 이미 죽은 영지가 은희에게 보내는 상상적인 제스처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영지가 은희의 입원 사실과 그가 입원한 병동을 알 확률은 현실적으로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 숏이 영지의 죽음 앞에 도착했는가, 뒤에 도착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지는 영화의 선형적 내러티브와 무관하게 죽음에 대한 공기를 프레임 안에 퍼뜨리며, 시간성에서 벗어난 유령의 존재로서 은희에게 손을 내민다.
은희는 비언어적인 몸짓을 통해 <벌새>의 여성들과 서로 연대하고 접속하길 시도한다. 가령 은희는 지숙과 담뱃불을 나눠 붙이고, 유리의 볼에 입을 맞춘다. 하지만 이러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연대는 미끄러질 운명 아래 놓인다. 지숙은 은희에게 도둑질의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유리는 학기가 지났다는 이유로 자신을 모른 체한다. 하지만 영지와의 접촉은 다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상상적인 유령의 기척으로, 또는 늦게 도착한 편지로 이루어진다. 이 시간의 간극. 또는 지연된 만남. 영지와 관련한 접촉의 제스처는 항상 미래의 상실로 다가온다. 이것은 단순한 교환의 실패가 아니다. 너무 많이 듣는 자, 혹은 무언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귀로서의 은희는 영지를 통해 오지 않은 미래를 감응하는 자로 거듭난다.
영지가 미래/동시대 여성이자 과거를 향한 시간의 축까지 관통하는 유령이라면, 은희는 그 존재의 기척을 촉각을 곤두세워 감각하는 자이다. 여성 청소년으로서의 은희가 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일으킨 이유는 <벌새>가 이 잊힌 감각을 열어젖히고 각자의 미래/동시대 여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 그것을 오지 않은 미래의 순간으로 상상적으로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은희가 뒤늦게 마주하는 성수대교 재난의 풍경이 어쩔 수 없이 1995년의 상품 백화점과 2014년의 세월호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이때 반복해서 돌아볼 수밖에 없는 영지의 손은 애도하는 자에게 화답하는 제스처가 된다.
<벌새>의 마지막 장면은 동년배 여성들을 이리저리 바라보는 은희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 사이로 은희의 시점으로 보이는 학생들의 얼굴을 담은 숏이 끼어든다. 그 위로 영지가 남긴 편지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이때 카메라는 숏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감지하고자 영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것처럼, 은희의 얼굴을 응시한다. 이 숏 안에서 이방인처럼 타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은희는 마침내 유령이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카메라의 시선은 유령으로서의 영지의 시선인가? 또는 유령으로서의 은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라는 영지의 내레이션이 미래의 시제로 우리에게 가닿을 때, 우리는 영지의 시선과 은희의 시선이라는 이중의 응시를, 즉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동시대에 접속하고자 하는 영화 자체의 응시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앞선 마지막 장면을 통해 <벌새>는 유령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영화를 넘어서 유령의 시선 그 자체가 된다. 미래를 향해 발화한 영지의 편지와 미래를 감지하는 자로서의 은희의 응시가 서로 마주 보았던 것처럼, <벌새>는 관객에게 영화가 담지 못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감각하고 그와 공명하길 요청한다. 이는 단순한 노스탤지어를 벗어던진 애도의 방식이며, 어쩌면 우리가 <벌새>를 자꾸만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응시의 윤리 안에서 연대의 미래를 그려보기 위함일 것이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