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선데이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담은 6분짜리 영화 <멜팅>(톰 앤더슨, 1965)을 보면서, 관습적으로 읽어내게 되는 것은 시간의 영향과 그에 따른 물질의 상태변화다. 카메라는 고정돼 있고 높게 쌓아 올린 아이스크림은 냉각되었던 기억에서 빠져나와 서서히 구조적인 와해를 겪는다. 고체에서 액체로, 고정형에서 비고정형으로, 섭취를 기다리는 가능성의 대상물에서 과거형의 잔재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부여하는 미션은 관객 역시 영화와 동일한 속도의 시간 영향을 받으며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고, 형체가 무너지고, 복원되지 않는 상황으로 치닫음을 경험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흥미로운 건 오브제로서의 아이스크림에서 느껴지는 과도한 구체성이다. 목이 긴 유리볼 하단부에 딸기시럽을 둘렀고 아이스크림을 높이 쌓고 꼭대기엔 붉은색 체리 한 알이 올려진 딸기 선데이(이하 '아이스크림'). 사용자가 밝혀지지 않은 익명의 오브제, 본연의 기능을 상실해 가는 오브제에 부여된 시각적인 정보량이 단지 녹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기엔 구체적이지는 않은가? 달리 말해 <멜팅>이 보여준 건, 가령 얼음과 같이, 녹아내리는 쪽으로 상태 변화하는 어느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닐 수 있다.
화면을 마주하고 주어진 상황을 파악한 관객이 가장 먼저 상상 혹은 기대할 것을 떠올려 보자. 추측건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체리 한 알이 굴러떨어지는 모습일 것이다. 체리라는 부가적인 요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이 하강 운동은 40초 무렵 찾아온다. 그리고 이는 <멜팅>의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이후 화면에서 발생하는 운동은 비교적 미미해 보인다. 두껍게 쌓아 올린 아이스크림은 유리볼 안쪽에 (의외로) 얌전히 안착하고 바깥으로 향한 방울들은 유리볼 곡면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느리게 미끄러진다. 그러니까 체리가 추락한 40초 무렵 이후부턴 거대한 이벤트랄 게 없다. 도달한계점에 너무 이르게 다다르고 남은 5분여 동안 기대할 만한 게 마땅치 않다. 더군다나 애당초 상온에 둔 아이스크림이 '어떻게' 녹을 것인지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멜팅>을 끝까지 보았다면, 그 이유는 뭘까. 가장 단순하게 접근하면 아마 극 후반부,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할 것이란 기대를 했을지 모른다. 혹은 녹는 모습만 보여주는 게 진정 <멜팅>의 전부일 것이라는, 허무함에 대한 확인을 받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허무를 견디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까지가 <멜팅>의 완성일 것이다. 그렇게 도출된 '의미'가 바로 변화한다는 것에 대한 사유다.
사실상 우리는 <멜팅>이 시간을 내포한 영상물이 아니라 해도 아이스크림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하고 말았을 것이다. 무엇인가 그저 존재하고 있을 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때는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시간의 선형적인 흐름을 극복하지 못할 때,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변화하는 것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가.
다른 한편에선 아이스크림에 물리적 인력이 개입될 것인지에 대한 감시의 태도가 <멜팅>을 보게 만드는 이유 같다. 실온에서 자동적으로 무너져 가는 아이스크림의 형태는 인위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이미지이다. 극중엔 어떠한 부수적인 외부 인력이 가해지는 장면이 없고, 우리 인간은 아이스크림과 보고 보여지는 상태로서만 상호작용할 뿐이다. 그런데 이 거리를 훼손하지 않고, 단지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기 위해 <멜팅> 앞에 끝까지 머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일례로, 현재 마주한 장면의 미래를 상상하기를 중단할 수 없는 관객들은, 체리의 추락과 같이, 이 영화의 전개가 자신의 상상과 부합하고 충족할 것인지 은근히 가늠하며 그걸 지켜본다. 이때의 호기심 혹은 감시의 태도는 비인위적인 융해 현상이 온전히 보존되기를 바라는 쪽이 아니다. 화면 안팎의 관계를 정확히 구분하는 쪽도 아닌 것 같다. 가늠한 바가 충족 혹은 미달되는 순간에 대한 (과하게 말하면) 불순한 계산적 태도를 부인하긴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우리는 <멜팅>이 하강 운동에 관한 영화임을 기억해야 한다. 톰 앤더슨은 아이스크림을 위로 쌓아 고도를 만들고, 도구를 활용해 공중에 붕 띄웠다. 이로써 녹아'내리는' 형상은 더 극대화된다. 디저트는 기본적으로 액체류나 분말류에 점성을 내고, 단단하게 뭉치고, 고체로 둔갑시키는 과정이 수반된다. 크림과 같이 가벼운 터치에도 변형될 취약함을 지니고 있으나 어쨌건 부피가 팽창된 것. 그런 뒤 저항 없이 으스러지는 촉감이 상찬으로 여겨지는 것이 디저트의 세계다. 그러니 디저트류는 (극단적으로 분류하면) 하강 운동이라는 미래를 예정한 존재들이다. 하강 운동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비탄의 정서에 가깝게 붙어 있다. 눈물을 연상시키고 죽음으로 귀결되는 불길한 이미지를 닮아있다. 그러니까 상승 운동하는 기체는 분해되면서 육안상 소멸되지만, 하강 운동하는 액체는 원래의 구조가 붕괴된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지반 개념이 존재하는 현실 원리 안에서, 하강 운동은 상승 운동이 지닌 영적인 느낌이나 경계 너머라는 인식을 주지 못한다. <멜팅>의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려 유리컵 또는 테이블 위에 안착하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외부적인 힘에 맥 없이 순응하는 존재를 보여주기 더할 나위 없는 소재다.
그렇다면, <멜팅>의 아이스크림은 눈물이나 죽음의 이미지처럼 비탄스러운가? 영화 전반에 깔린 스산한 곡조의 배경음이 그 분위기를 더한다는 생각도 든다. 건축사이자 디자이너 '엔도 케이'는 건물을 설계할 때 사용하는 실측 스케치 기법을 활용해 디저트를 드로잉한 바 있다. 디저트의 단면을 분해하며 그것의 건축학적인 구도를 가시화했다. 가령 컴포트, 차무스, 파이 따위를 층층이 쌓은 딸기 파르페 단면도. 엔도는 글라스 내부에서 층을 이룬 재료들의 관계를 마치 건물의 공간 구성 요소를 살피듯 세세히 기록했다. 레시피의 기능이라기엔 공간적인 견적을 매기는 실측에 해당하는 엔도의 작업은, 그림을 그리는 몸의 감각을 거치며 공간을 거닐듯 디저트를 신체적으로 익히는 데 중점을 둔다. 다시 말해, 각종 재료가 섞이고 겹치고 어떤 순서로 쌓여서 하중을 어떻게 견디는지 따위를, 우리 몸이 경험할 수 있는 차원으로 다룬 셈이다. 수채화의 컬러를 입히고 컬러가 서로 섞이고 종이에 스며드는 감각으로 치환된 섭취의 감각. 이는 섭취가 이루어진 공간에 대한 인식, 또 섭취를 위해 발생한 공간적인 이동에 관한 몸의 전반적인 기억의 문제로도 확장된다.
그러니 다시 <멜팅>으로 돌아가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당연한 이미지를 보며 모종의 비탄을 느끼거나 혹은 느끼도록 유도하듯 보이는 건 아이스크림의 붕괴로부터 우리 신체가 겪은 각종 하강 운동의 경험을 떠올리거나 무의식에 몸으로 익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을 보며 몸의 조직이 분해되고 중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그 밖에 어떠한 이정표가 없음을 확인했을 때 밀려오는 허무는 (우리가 의식하는 것보다 더 깊숙이) 아이스크림과 마치 몸체를 공유하기라도 한 듯 그 변화에 전념한다는 데서 오는 것 같다.
<멜팅>이 딸기 선데이 아이스크림의 상태변화를 전시하는 한편, 127분짜리 영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야자키 히토시, 2007)에서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가 등장하는 구간은 10초 남짓이다. '이치고(い ちご) 케이크'도 아닌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라는 거추장스러운 어감이 주는 부담을 짊어지며 관객에게 도착한 이 영화는 끝에 이르러서야 제목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시킨다. 애증 관계인 두 인물이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를 서로 건네고 받는 모습은 유의미하다. 하지만 영화가 이 모습을 위해 내달리는 쪽도 아닐 때 영화의 속셈은 빤하다. 디저트는 이런 속임수에 탁월한 소재다. '데비 한'이 개똥을 주워 모아 알록달록 초콜릿으로 둔갑시킨 「달콤한 세상」(1998)'이 있고, 여성들을 유혹하는 마성의 남자들 콘셉트로 시작해 트라우마를 파고드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민규동, 2008)도 그렇고, 션 베이커의 영화들에서 지속적으로 존재감을 나타내는 프렌차이즈 도넛들이 대조적인 현실을 시각화하는 데 일조한 점은 이미 유명하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의 달콤함을 음미하는 영화가 아님은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이하 '스트로베리')의 극 도입부부터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후 죽으려고 했으나 어영부영 살아있는 사토코(이케와키 치즈루), 관을 침대로 삼아 기상하는 콜걸 아키요(나카무라 요코), 오피스 레이디 치히로(나카고시 노리코), 예민한 몸짓으로 백지 캔버스를 채우는 일러스트레이터 도코(나나난 키리코)을 연달아 비춘 영화는 도쿄의 쓸쓸한 밤 풍경을 이어낸다. 영화는 간간히 그녀들을 대관람차 앞에 세우고, 앙증맞은 악세서리를 부착하고, 알록달록한 과일을 들려 보내지만 이는 정한석이 "달콤하고 향긋하며 안락하기 이를 데 없는, 위험천만할 때조차 아늑해 보이는"(<씨네21>, 700호) 2000년대 일본 영화들을 통칭하며 사용한 표현, '케이크 무비'스러운 쪽이다. 누군가는 도쿄를 떠나고 누군가는 그 변화를 응원하며 마무리되는 엔딩 장면에서 비로소 웃는 아키요의 얼굴은 신은 없다는 현실 논리를 말하면서도 현실을 뭉뚱그려 낙관하고 만다.
대사가 거의 없거나 건조한 혼잣말에 실어 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전하는 것이 <스트로베리>의 미덕으로 알려졌지만, 또한 이 영화는 역겨움(Ekel)에 대한 영화다. 케이크의 달콤함 대신 <스트로베리>에 난무하는 것은 다른 이에 대한 저주, 구역질, 더듬어지는 신체, 그리고 남성들의 정액 따위다. 감독 야자키 히토시의 영화에는 많은 섹스신이 존재하고 장면은 길게 촬영되지만, 관능적이라거나 에로틱한 인상을 능가하는 역겨움이 자리한다. 감독에게 섹스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행위의 끝에 배출되는 정액이다. 이는 위험하고 불결하고 끝끝내 자기 존재에 대한 심오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으로서 경계의 대상이다. 치히로의 얼굴로 정액이 떨어지는 장면은 먹은 음식을 토하는 도코의 장면과 교차로 이어지고, 폭력에 의해 임신한 아키요가 좋아하는 상대와 섹스하는 행위는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자기 신체를 거의 정화하는 행위에 가깝다.
영화의 역겨움은 여성 신체가 겪는 두려움을 야기하는 문제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의 역겨움에 대한 문제로 확장된다. <오후의 미풍>(1980)의 레즈비언 인물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남성과 섹스했지만 임신하며 스스로가 부정되고 <봄은 사자처럼 온다>(1990)에서 하나의 자궁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근친한다. <감각: 그녀의 초상>(2019) 오프닝에 나열되는 식물이나 과일의 육질 조직을 찍은 사진들이 자아내는 모종의 불쾌함은 그것들이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시킨다는 데 있다.
그런데 왜 역겹게 느껴질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관이라지만 굳이 그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생리적인 기능이 제한된 어머니를 보살피는 인물이 주인공인 <감각: 그녀의 초상>의 생식기는 곧 모체에 근원적인 이해를 두고 있다. 어머니와의 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물의 모체로의 회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큼이나 두려운 것으로 간주된다. 역겹다라는 감정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즉각 피하게 되는 무언가에 관한 신체 반응이다. 단지 어떠한 대상을 보거나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소 경험한다는 착각이 들고 곧장 신체가 반응해서 생성되는 느낌 중 하나가 역겨움이다. 앞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야자키 히토시 영화에서 반복해서 발견되는 성매매, 폭력, 근친, 성적 페티시즘에 관한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우리 신체에 실질적인 양태로 현현하는 흔적을 남긴다. 신체에 발생한 일은 한번 그렇게 된 이상 잊혀지지 않고 없던 일이 될 수 없다. 세계는 유동적이어도 변하지 않는다. 스크린을 사이에 둔 이 거리감에도 당장 그것을 신체로 경험한 것처럼 위험을 감지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근육을 경직시켜 역겨움을 느낀단 사실을 몸 안팎으로 표출하게 되는 건, (앞서 <멜팅>을 보며 지나친 몰입에 빠지는 이유와도 같이) 내제된 관객의 기억(유사 경험)이 건드려지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런데 역겹다고 말하는 와중에 야자키의 인물들은 그런 역겨움의 대상물을 역겹게 대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집착한다. 어떨 때 우리는 역겨운 걸 다르게 느낄까. <스트로베리>에 기반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답은 사랑을 언급하는 것일 테다. 사랑이 넘치거나 사랑이 모자라거나. 그런데 감수성에 기반한 수용의 정도는 인물들이 그런 것이고 우리가 그런 인물들의 모습까지 이해하려는 데에는 코스마이어의 지식 개념이 활성화된 경우 같다. 역겨움의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 지식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다고 의식되거나 역겨움에 대처함으로써 승리 차원의 무언가 보장될 때 우리는 역겨움으로부터 색다른 국면을 바라보게 된다. 말하자면 당장의 이 역겨움 이외에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관람을 지속하게 만든다(이 생각이 가식이고 지저분한가?). 새삼스럽게 강조했지만 사실상 관객의 미래에 대한 호기심, 가늠, 상상, 감시의 태도가 없다면 관람의 행위는 공허해질 것이다. 진부한 논의긴 해도, 영화보기의 태도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맞닿는다고 <스트로베리>는 말하는 듯하다. "~했으면"하고 자주 공상하는 사토코의 말에서 당장 들끓는 욕망이나 언행을 일치시켜 보겠다는 치열함이 느껴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신을 향한 사코토의 기도와 같이 미신에 기댄 미래에의 호기심, 가늠, 상상, 감시의 태도를 제외한다면 사토코의 삶을 지탱하는 건 별로 없어 보인다.
인물들이 현재의 삶을 버티는 데 있어 그 도달한계점을 숨기지 않으며 시작한 <스트로베리>가 극의 말미, 관계의 실패를 마주하고 변화를 도모하는 모습을 그리는 건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다. 흔히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나간다고 할 때, 이 영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상황을 가능한 끝으로 몰아붙이는 이들, 혹은 끝을 기어이 보아야만 하는 이들에 관한 영화다. 사토코는 나이 든 성매매 업소 사장에게 고백을 받은 뒤에야 그곳을 빠져나오고 치히로는 상황을 회피하는 전 연인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아낸다. 분실된 그림을 다시 그리는 일에 좌절하던 도코는 차라리 모든 그림을 제거하며 아키요는 더 이상 상대방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을 때까지 치닫는다. 더 이상 무언가를 지속할 수 없을 때까지. 변화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스트로베리>는 인간이 변화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영화다. 시간 아래의 존재인 인간은 늘 변화하고 있지만 언제나 그것을 사건화해서야 변화를 도모하는, 그래서 변화하는 것을 외부로 드러내어 주는 사물들이 언제나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관찰 대상이 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의 미미한 존재감을 불평할지라도, 결국은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의' 얄궂음이 영화의 중심을 붙잡고 있듯이 말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