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기운과 함께 주말이 지나는 동안 베를린의 주요한 시상 부문들이 발표되었다. 진작에 정리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계획과 자주 어긋난다.
1.
먼저 황금곰상을 수상한 <드림스>는 같은 제목을 지닌 동일한 부분에 상영된 미셸 프랑코의 <드림스>가 아니다. 제시카 차스테인을 비롯해 이전보다 훨씬 대중적으로 접근한 프랑코의 영화와는 다른 노르웨이 영화 <드림스>다. '다우 요한 하우거루드'의 영화를 이전에 유심히 본 적은 없다. 다만, 영화를 보자마자 북유럽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고(아니면 프랑스), 영화를 보는 동안 떠올린 것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였다. 무엇보다 그의 저서 『유혹자의 일기』가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녀의 이름이 요하네스다. 키에르케고르의 작품 속 주인공도 요하네스다. 다른 점이 있다면, 키에르케고르의 주인공은 젊은 여성을 흠모하는 남자 요하네스이고,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선생님을 연모하는 소녀 요하네스다.
하우거루드 감독은 키에르케고르의 고전을 가져와 영화적 버전인 동시에 여성의 비전이자 현대적 버전으로 재해석한다. 영화의 주된 흐름은 요하네스의 내레이션을 통해, 요하네스의 일기장의 사연을 통해 흘러나온다. 심지어 소녀의 일기장을 엄마가 읽기도 한다. 소녀 요하네스의 마음은 키에르케고르의 작품처럼 사랑을 향한 단계를 형성하는데, 처음에는 그녀를 향한 아름다움에 매혹되고(심미적), 둘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 시작되며, 종교적 단계를 향하는 여정이 펼쳐진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철학자들에게 이 단계는 진리를 향한 열정이겠지만 요하네스(남자든 여자든)의 마음에는 사랑이라는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된다.
사실, 이 영화를 보자마자 국내에 소개하고 싶어서 베를린에 있을 때 컨택을 이미 했는데 고맙다는 답이 왔지만, 지속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필자가 속한 영화제가 아니라 더 큰 국내 영화제에서 소개가 될 수밖에.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은 이 정도로 해두고자 한다. 꽤나 고전적인 에세이틱한 영화인 동시에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차분하고 수줍은 장면들이, 일상의 풍경 속에서 아름답게 흘러간다.
2.
이번 베를린 영화제 경쟁 상영작의 전반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결혼한 여성과 노년의 인물들이 많다는 점이다. 결혼한 여성들은 상당 부분 육아 혹은 출산과 관련한 공포를 드러내는데, <마더스 베이비>가 대표적이다. 여주인공은 아이를 출산한 이후 산부인과의 주치의를 비롯한 인물들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잘 울지 않고 소리에 반응이 없는 아이를 이상하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그것은 공포 영화 장르의 경계까지 다가가는 정도의 수준으로 향한다. 병원을 수상하게 여긴 주인공이 다른 의사들을 찾아가 상담을 받아도 아이가 정상이라고 언급한다. 그렇지만 의심이 깃든 마음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간다. 급기야 남편마저 아내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다.
여성의 출산 공포는 양육의 문제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마리엘이 알고 있는 것>에서도 엄마를 비롯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에게 제대로 다가가지 못한다. 영화의 비중은 마리엘보다는 오히려 부모에게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마리엘의 부모의 마음을 아는 능력이 생기는 현상과 달리 사춘기 소녀를 알지 못하는 부모의 상태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간극을 극단적으로 내비춰 보인다. <내가 다리가 있다면 널 걷어차 버릴거야>의 엄마 린다 또한 남편이 부재한 상태에서 아이들이 이상한 증세를 보이자 이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한국의 암울한 저출산 문제를 우려하지만, 베를린에 소개된 유럽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양육의 어려움과 공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노년을 보여주는 대표작은 은곰상을 수상한 <블루 트레일>이 대표적이다. 아마존의 노인 강제 이주 지역을 중심으로 이곳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테레자의 모험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비행기를 타려고 해도, 배를 타고 나가려고 해도 양녀의 허락과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급기야 경찰에 의해 체포가 되고, 또다시 탈출하지만, 그녀의 신변은 보호라는 이름아래 통제된다. 하지만 아마존의 자연을 대하는 여러 장면들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자연의 풍경은 노인의 삶과 뒤섞여 관객들로 하여금 변화와 순환에 적응하도록 이끈다. 영화의 후반은 테레자가 또 다른 여성 노인을 만나게 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하게 친밀해지며, 이 과정에서 삶의 목적은 탈출만이 아니라 친구를 사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철학에 이르게 된다. 초반부터 평점이 높았던 이 작품은 아주 뾰족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연과 인간 그리고 늙음에 관한 장면들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놓는다.
3.
아마 일부 시네필들은 홍상수의 신작에 대한 글이 적히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매년 한 편 정도, 최근에는 매년 두 편 정도의 새 영화를 내놓는 홍상수 영화에는 개인적으로 일정한 기대감과 피로감이 있다. 이 선입견은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번 술자리가 벌어지지만 ― 베를린을 떠난 전 집행위원장 샤트리앙(자신은 지금 무직이라며 일요일에 와서 베를린을 돌아다니고 있고, 오후에 있을 홍상수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던, 그 자신이 홍상수 영화에 출연한 바 있는)과 올해 베를린에서 마주쳤던 마크 페란스 프로그래머(평론가)처럼 반복되는 풍경에 소주는 신기한 한국의 기호품으로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바 있다 ― 술자리의 기대감은 어느새 감정의 소모와 말들의 공격으로 치닫게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세월이 가면서 술자리에 대한 호감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숙취가 문제이기보다는 의미없는 말들이 맴도는 현실이 그다지 싱그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가 비춰주듯이 그 순간에 날카로운 우리의 본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때로는 억눌린, 때로는 추악한, 때로는 귀여운 그 모습들이 종종 홍상수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다. 이번 신작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가 여기에 들어맞는다. 주인공은 시인이다. 시인은 자신의 여자 친구를 여주에 데려다주다가(차로 서울서 여주까지는 한 시간 반 이상이 소요된다)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여자 친구의 아버지와 인사를 하고, 여자 친구의 언니와 함께 점심을 먹고 신륵사를 구경하고, 귀가해서는 집에서 기르는 청계닭으로 만든 삼계탕과 함께 거나한 술자리가 펼쳐진다. 저녁상을 준비한 것은 여자친구의 어머니다. 여자 친구의 가족들을 차례로 상견례 하는 과정인 동시에 막걸리, 와인 그리고 마지막에는 위스키까지 등장하는 술의 향연이 벌어진다.
자연이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술을 통한 실수가 벌어진다. 그것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시인 동현은 집에서 나와 필요한 만큼만 일을 하며 미니멀한 삶을 사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데, 여자 친구인 준희의 집에서 동현을 바라보는 주요한 시선 중의 하나는 그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유명한 변호사인 아버지는 영화 속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는 명망있는 인물이다. 특히, 준희의 언니는 동현이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할 때마다 자주 이 말을 반복한다. 그렇다. 홍상수 영화 특유의 반복으로 가장 앞에 서 있는 말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뒤에 있잖아요."
술김에 나오는 동현의 폭발은 이 말에 대한 반박에서 비롯된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계급적 분화, 세간의 시선과 시인 동현의 추구, 서로의 말들이 엇갈리면서 하룻 동안의 이야기는 반복과 변주 속에 흘러간다. 친숙한 홍상수의 영화지만 확실히 새로운 배우들과 함께하는 에너지는 조금은 다른 결을 느끼게도 만든다. 대부분의 홍상수 영화에서 그러하듯이 술김에 읊조리는 동현의 시는, 기대나 예상과는 달리 그다지 훌륭한 것은 아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속화된 양상들이 이 영화의 인물들을 채운다. 효심의 기호를 지닌 준희의 아버지도, 또 다른 시인인 준희의 어머니도, 마음의 병이 있다고 하는 준희의 언니도, 동현을 좋아하지만, 어딘가 미묘한 태도가 느껴지는 준희도,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억누른 채 살아가는 시인 동현도 적절히 속물적이고, 적절히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여주의 한 전원주택에서 만나 신뢰를 쌓아가다가 결국 실패한다.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부부의 대화는 동현에 대한 평가들로 이뤄지는데, 세속적이면서도 인간적이다. 본래, 인간이 그러한 존재이고, 홍상수는 어김없이 이 점을 반복하여 다룬다.
결국, 주인공 동현은 늦은 밤 몰래 달을 보러 갔다가 미끄러져 상처가 나고, 이른 새벽 이 집을 탈출한다. 연인에게 사랑을 다짐하며, 그녀의 집안으로부터 달아난다. 이 아이러니는 단순히 홍상수의 감각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단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제대로 자연을 볼 수 있을까. 아니, 그 자연으로부터 어떠한 말이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오로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속물적 근성과 욕망 그리고 이것들이 뒤엉켜 솟구치는 현실의 언어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4.
베를린에서 본 대부분의 중국영화는 확실히 좋지 않았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많은 작품들이 정치적인 부분에 민감하고, 한때 중국 5세대 감독(장 이모우, 첸 카이거 등)의 신작을 대거 소개하면서 1980년대 후반에 앞서나갔던 시절이 있지만 요즘의 중국 영화들은 봐주기 어려운 정도다. 그럼에도 일정한 편수가 상영되는 것은 관행이든 뭐든 편안하지는 않다.
먼저, 비비안 취의 <날고 싶은 여자>의 자매 이야기는 스릴과 범죄 장르를 끌어당기면서 영화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영화다. 동어반복을 뭐 이렇게 계속하는지, 언니는 영화 현장의 스턴트 연기로 고생하면서 억압을 받고 있고, 동생은 그러한 언니와 접촉하지만, 매번 누군가에게 쫓기고 탈출한다. 정말 지겨운 이미지의 연결들이다.
감독상을 수상한 <삶의 터전>은 서구인들이 선호하는 동양의 오리엔탈리즘이 진하게 반복되는 영화다. 1980년대 중국의 변방 지역에서 벌어지는 장례식과 결혼식의 이야기들은 안 봐도 본 것 같은 상황들의 연속이다. 집안의 바보형의 행적과 죽음, 시집가기 싫어하지만 가야 하는 여주인공, 이 집안의 최종 연장자인 할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뭐 이야기의 파편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참으로 진부했다. 특히, 이 영화에서 힘주는 트래킹 쇼트는 정말 견디기 힘든 예술 영화의 허세다.
심지어는 마켓에서 관람한 로테르담 타이거 혹은 밝은 미래 부분의 중국 영화들도 볼 때마다 특정 부분에서 눈을 감게 되었다. 그것이 중국의 정치적 현실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야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를린에 온 지인과 이러한 부분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중국 내의 영화가 최근에 좋은 것을 본 적은 없고, 중국 바깥에서 망명객이나 유학생들이 만든 중국영화들은 여전히 훌륭하다고 말한 바 있다.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이다.
5.
미셸 프랑코의 신작은 어차피 수입될 것이라 굳이 언급하지는 않기로 한다. 충분히 볼 만은 하다. 아직 한국의 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프랑코는 아닐지 몰라도, 이번 영화가 다소 반등의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스위스의 감독 라이오넬 바이에르의 <셰이프 하우스>는 파리에 거주한 유대인 가족의 이야기다. 영화의 시작은 프랑스 68혁명인데, 이들은 새로운 물결에도 집의 문을 걸어 잠근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처음에는 68혁명이지만 알고 보면 2차 세계대전 이야기인 셈인데, 참으로 이 분야는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뮤지컬, 가족 등의 장르를 변주하면서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은 있었다. 동시에 유럽적인 너무나 유럽적인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개인적으로 피하기 힘든 유혹이다. 그가 매번 영화를 아주 뛰어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기본은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일종의 전기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브로드웨이의 작사가 로렌츠 하트가 주인공이다. 그를 연기하는 인물은 당연하게도 에단 호크. 영화는 단 한 장소에서 두 시간 동안 펼쳐진다. 이곳은 뉴욕의 사디스 바. 영화의 시작은 로렌츠가 바텐더와 대화를 나누며 시작한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As Times Goes By". <카사블랑카>의 음악과 대화들을 영화의 앞과 말미에 깔아두면서 어려운 시절에도 변함없는 우정을(알고 보면 배신과 이별과 과거의 노스텔지어가 뒤섞인 것이지만) 약속하는 할리우드적 엔딩을 따라가고 있다. 이 시절의 재즈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한 단면과 링클레이터가 선보이는 옛영화와 음악에 대한 애정어린 해석들이 충분히 젖어 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이반 푼드 감독의 <메시지>는 개인적으로 많이 기대했던 아르헨티나 영화다. 하지만, 가장 난해한 영화이기도 해서 굳이 필자가 속한 영화제에 상영할지는 물음표다. 많은 부분 침묵과 이미지로 말을 하는데, 국내에 다른 영화제를 통해 빨리 소개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었던 라드 쥬데의 신작 <콘티넨탈 '25>는 끝내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기에 언제가 보게될 영화이기도 하다. 끝으로, <타임스탬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현재로 들어가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교실에서부터 전선의 교실까지 이동하면서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교육의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지탱하거나 세우는 여러 양상들을 따라간다. 처음에는 좀 산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나의 집요한 태도가 영화를 이끌어 낸다. <포화 속의 교실>쯤으로 번역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작품은 영화가 현재의 주요한 이미지의 파편들만으로도 세계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는 이상을 실현한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또한 젊다. 영화는 그렇게 이어진다.
6.
끝으로 관심을 가질 만한 영화들 중에는 컴버배치가 아내를 잃은 후 두 아이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더 씽 위드 페더스>가 있다. 직역하자면 '깃털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제목이다. 이 영화에는 깃털에 해당하는 까마귀가 등장하는데, 직접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CG를 쓰지 않으려고 했던 기획 의도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럴거면 CG를 쓰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실상 단박에 파악하지 못할지라도 이 영화는 포스트 코로나의 영화이기도 하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상징성은 코로나라는 알 수 없는 자연의 재앙으로 보이고,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남겨진 컴버배치는 까마귀를 그리며, 아내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삶을 지탱하려고 애쓴다. 누가 뭐래도 이 과정은 코로나의 시기를 통과하는 메타포다. 컴버배치는 자신의 작업 속에서 점점 더 까마귀의 환영에 시달린다. 그것은 점점 그를 압박해 간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해도 영화는 자주 반복되며, 이미지는 중반 이후 확연하게 힘이 떨어진다. 이 압박감이 심리적인 장면을 반복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컴버배치는 여전히 멋있지만, 또한 과거 할로윈의 가족 모습은 싱그럽지만 공포를 피상적으로 끌어당긴 이 작품의 묘사는 뒤로 갈수록 힘을 잃는다. 특히, 챕터를 통해 영화의 중심적 시선을 제시하는데, '크로우 장'에서 까마귀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더라도, 나중에 '두 아들'이라는 장에서 아이들의 시선으로 아버지 컴버배치를 바라보다가 어느새 까마귀의 시선으로 전환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시선의 견지에 있어서도 일정한 일관성을 구현하는데 실패했다. 애당초 시나리오의 한계로 보인다.
이 외에도 몇몇 흥미롭거나 관심을 가질만한 영화들이 있지만, 가능하다면 국내에서 선보일 수 있는 시점을 만들어 볼 예정이어서 베를린의 일기들은 이쯤에서 접기로 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은 넓고 영화는 많다. 동시에 영화가 많다고 해서 모두가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토록 풍부해진 이미지의 시대에 영화가 보는 세상이 어쩌면 더 좁아졌고, 편협해진 탓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가장 얻고 싶은 것 중의 하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을 통한 충격이다. 그러한 충격을 받기에 너무 많은 영화를 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는 새로운 영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영화를 보고 말할 권리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