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고넨(Epigonen)'이라는 말은 요즘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후계자나 추종자라는 뜻을 지닌다. 테베의 왕이었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고 떠난 후, 두 아들인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번갈아 테베를 통치하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먼저 통치권을 잡은 에테오클레스가 임기가 끝난 후에도 왕권을 넘겨주지 않고, 폴리네이케스를 쫓아낸다. 아르고스로 간 폴리네이케스는 이곳에서 아드라스토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아드라스토스는 자신의 딸을 폴리네이케스와 결혼시키며 왕위를 복권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로 인해 등장하는 것이 '테베를 공격한 아르고스의 7장군'이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군]에 따르면, 이들은 폴리네이케스를 포함하여 7개의 관문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폴리네이케스는 에테오클레스와 맞붙다 죽음을 맞이하고, 아르고스의 7장군 중 살아남은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십 년 후, 아들들이 테베를 다시 공격한다. 이때 7명의 장군의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에피고노이(Epigonoi)', 즉 에피고넨의 복수형이다. 희랍어 '에피고넨(Epigonen)'은 "뒤에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아들들은 관문을 통과하고, 복수에 성공한다. 이들의 도움으로 에테오클레스의 아들 라오다마스가 쫓겨나고, 폴리네이케스의 아들 테르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른다. 후대의 약속이 결국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이나 인문학 분야에서 '에피고넨'은 단순한 후계자라는 뜻보다 '아류'에 가까운 의미로 쓰인다. 본류나 기원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아버지를 의식하는 용어이자 한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에피고노이들이 테베를 정복했다는 의미는 사라지고, '후대'라는 위치만이 남는다.
오늘날 이를 대신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에피고넨'을 요즘 용어로 번역해 보자면 '짝퉁'일 수도 있다. 디지털 복제가 일상이 된 시대에서 아버지와 아들, 기원과 아류를 구별하는 것이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 컨트롤 C + V가 난무하는 시대를 지나, Chat GPT와 같은 AI가 정리한 답을 가져와 붙이는 시대에서 더 이상 기원은 없다. 감히 아버지들의 복수를 위해 뛰어드는 '에피고넨'은 없다. 아버지들의 정보를 무한히 증식하고, 아버지들의 명예를 나눠 가질 뿐이다. 에피고넨이라는 용어가 사라지는 이유는 희랍어의 낯설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이미 '에피고넨'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피로해졌기 때문이다. 피로는 지혜를 망각시키며, 무한 증식하는 정보의 얽힘만이 아날로그의 속도를 광탈하면서 모든 것을 점유한다.
흑백요리사가 쏘아올린 것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 요리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의 인기는 개인적으로 의외였다. 이전에 보던 스타 셰프들을 백수저의 자리에 배치하고, 새로운 셰프들을 흑수저에 배치하는 것이 무엇이 새로울지 다가오지 않았다. 인기를 누리던 스타 셰프들의 방송 출연이 한동안 줄어든 탓에 이들의 대거 등장을 보는 반가움은 있었지만,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라는 오리지널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첫 경연은 두 명의 심사위원이 80명에 달하는 흑수저 요리사의 음식을 먹어본 후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쇼미 더 머니>의 첫 번째 경연을 연상시킨다. 또 다른 경연인 가면을 쓴 백 명의 일반인이 참가하여 평가하는 방식은 넷플릭스의 시리즈 <더 인플루언서>에서도 이미 보았던 방식이다. 음식과 관련된 셀럽들이 참가한 경연도 새롭지는 않았다. 매번 경연의 방식을 달리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다수의 경연은 이미 여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친숙해진 방식들이었다. 다만, 이를 요리 무대로 변용하는 방식은 흥미로웠다.
백수저 요리사들은 실명으로 등장하지만, 흑수저 요리사들은 자신이 불리고 싶거나 제작진이 제안한 캐릭터 이름으로 등장했다. 흑수저 요리사들의 이름은 웹툰이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처럼 나름의 호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방식도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JTBC의 인기 프로그램 <싱어게인 - 무명가수전>에서는 참가자들이 모두 번호로 등장한다. 이들이 본명을 알리기 위해서는 탈락을 하면서 이름을 보여주거나 최종 10명에 올라 본명으로 경연을 벌일 때 일어난다. SNS가 발달한 시대에 참가자의 본명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이런 캐릭터화 또는 신비화 방식은 독자들의 참여도나 관심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새로운 유행이라 할 수 있다(또한 제작진이 JTBC의 <싱어게인-무명가수전>, <유명가수전-배틀어게인>의 연출자라는 사실도 이러한 요소들이 도입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흑백요리사>는 새로운 아이디어라기보다는 한국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여러 요소를 끌어왔다는 인상을 준다. 서바이벌 에피고넨의 종합이며, 다소 식상해진 경연 방식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빠른 속도감과 변화를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경연 방식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가장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은 두 명의 심사위원이 눈을 가리고 시식하는 경연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맛"으로만 요리를 평가한다는 객관적 가치를 내세운다. 일부에서는 이 경연이 가장 새롭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이 경연 방식을 생각하면서, 이 프로그램에 대해, 이 인기에 대해, 그리고 이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다른 요리 경연 대회에서 이러한 방식을 택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존의 요리 프로그램도 맛의 순수성이나 이러한 경연 방식의 가능성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요리를 경험하는 데 있어 시각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을 배제하는 방식은 맛의 순수함이 아니라, 동시대 요리의 본질을 왜곡할 가능성도 크지 않을까? 실제로 화면에 등장하는 시식 장면을 보면 접시 위에서 정성스럽게 플레이팅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소한 이 경연은 심사방식을 경쟁자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거나, 그 사실을 알고도 경쟁자들이 플레이팅을 무시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맛만큼이나 플레이팅이라는 멋이 요리의 기본값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제가 되었던 정지선 셰프의 바쓰는 맛을 본 심사위원들이 아니더라도 화면을 통해 관객들이 느끼는 맛의 멋이 있었다. 화면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심사위원은 눈을 가린 채 평가했지만, 관객들이 이 심사 결과에 쉽게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각을 통한 맛의 공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간극은 경연 방식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완성된 요리의 시각적 깊이를 맛보지 않은 채 오로지 혀와 후각으로만 맛을 본다는 것은 순수한 평가가 아니라, 불완전한 평가일 수 있다.
맛의 순수성이 제작의 방향에서 그토록 중요한 요소였다면, 경연 전체를 통해 일관성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달라지는 경연 방식은 맛의 순수성에 대한 추구라기보다는, 회차마다 색다른 미션을 부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가면을 쓴 백 명의 심사위원의 존재감이 순수한 맛을 위한 것이라기엔 부족하고, 먹방러들이 주문하는 요리가 맛에 대한 추구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심사위원 두 명은 해산물 리조또를 선택했지만, 다른 일반인의 최종 선택은 가자미 미역국이었다. 백종원은 자신들과 일반 심사위원들의 차이를 리조또의 익힘 정도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안 음식에서의 익힘 정도인 알 덴테는 한국인에게는 설익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먹방러들의 주요한 선택 중 하나였던 랍스터는 비싼 재료에 대한 관심이 현실적인 선택임을 보여준다. 각 경연마다 다채로웠던 경연 방식들은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를 지그재그로 넘나든다. 이것이 이 프로그램의 성공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맛에 대한 순수한 추구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 프로그램의 본질은 다채로움의 구현에 더 가깝다. 가면을 쓴 백 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먹는 광경을 보면서, 한 사람이 "묘하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보니까 너무…"라고 말했을 때, 이 프로그램의 본질을 건드리는 것처럼 들렸다. 한 마디로, 이 프로그램은 묘한 광경의 연출이자 연속이었다.
혹여 맛의 오감 차원(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에서 감각을 중시하는 경연 방식이 필요했다면, 어떤 경연은 오로지 냄새만으로, 어떤 경연은 단지 눈으로만, 어떤 경연은 촉각으로만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청각을 제외하고 각기 다른 감각만으로 요리를 대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 그것이 맛의 순수성을 구축하는 데 더 근본적인 접근이 아닐까. 동시에 묘한 광경들을 연출했다는 점에서(재료가 공개되는 냉장고의 어마어마한 모습도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적인 요소를 그 어느 요리 프로그램보다 강조한 셈이다.
물론, 또 다른 매력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계급장 떼고 동일선상에서 경쟁을 시작하는 반면, 백수저 요리사 20명과 흙수저 요리사 80명으로 나누는 구도는 다소 뻔하지만, 그 비율 자체는 흔치 않다. 흙수저 요리사 80명이 백수저 요리사와 대결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1차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현실의 불평등이 공정함과 무관하다는 출발점은 지금의 현실을 비춰보게 만든다. 이러한 구도는 드라마틱한 연출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흙수저의 반란과 상승에 관객들은 기대를 걸고, 유명 셰프들이 패배하는 모습을 통해 흥미를 제공할 수 있다. 오늘날 사라져가는 속담 중 하나가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완벽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대중적으로 무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유명 셰프들을 제치는 장면은 충분히 관심을 끈다. 2:8의 구성이다 보니 흙수저 요리사의 등장이 도드라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화면에 자주 담긴다. 여러 측면에서 2:8의 비율은 유명인보다는 무명한 도전자들에게 더 많은 애정을 기울일 조건을 만들어 준다. 계급 대결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언더독의 상승과 새로운 얼굴을 맞이하는 반가움이다.
백수저 요리사들이 <쇼미 더 머니>나 <스트릿 우먼 파이터2>에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연출처럼 한정된 공간 구도를 보여주는 배치는, 대다수 요리 프로그램에서 접하는 평면적인 화면을 벗어나고자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 넓은 경연장은 이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시각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큰 무대는 수많은 조리기구와 식재료, 요리사들로 빼곡히 채워진 세계이다. 이 단순함은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구도를 강조한다. 편집 속도 또한 장점이다. 방송 프로그램으로 제작되는 경우 우승자가 등장하기까지 매주 방영되는 회차마다 비교적 긴 호흡을 유지할 수 있지만, 넷플릭스 시리즈물로서 단기간에 관람할 수 있고, 그에 맞는 속도감을 살린 편집은 대결의 흐름을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이끈다.
캐릭터, 섬세함의 대체제
결국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것은 대결의 시각적 구도이지, 개별 요리의 섬세한 과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맛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개별 요리의 집중도나 레시피를 제공하지 않는 <흑백요리사>는 최근 '레시피 천국'이라 불릴 만큼 범람했던 요리 프로그램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것은 서바이벌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함이다.
맛이 완성되기까지 필요한 과정은 일종의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재료를 다듬고, 조리하고, 완성하는 과정은 따지고 보면 지루한 반복이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프로그램에서 이연복 셰프의 요리 과정이 나올 때마다 놀라게 되는 것은(심지어 홈쇼핑에 나올 때에도 마찬가지다) 재료 손질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이다. 15분이라는 제한 시간이 주어진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도 5분 이상을 재료 손질에 사용한다. 그것은 어떤 요리로 완성될지가 재료를 다듬는 과정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흑백요리사>에서 요리의 세부를 보여주는 비중은 적다. 쉼없이 요리 과정이 지나가지만 서사의 중심에 있는 것은 계급 전쟁으로 인한 갈등과 팀별 대항전이 벌어질 때마다 생기는 불화들이다. 이 또한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무수히 보았던 장면들이다. 이를 대신하여 여타의 경연 프로그램들처럼, 세부를 삭제한 채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캐릭터들이다.
'만찢남'처럼 만화를 통해 요리를 배웠다고 하는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승우 아빠'처럼 자신의 유튜브명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승우 아빠의 모습은 어마어마한 요리 장비의 과시를 통해 전시된ㄷ). 그 외에도 요리하는 돌아이, 이모카세 1호, 철가방 요리사, 나폴리 맛피아 등의 이름이 프로그램 전체에 걸쳐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눈에 띈 인물 중 하나는 '급식대가'였다. 하지만 급식대가의 신화는 새로운 요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그 시절의 요리가 자극하는 향수의 결정체였고, 이후 다른 프로그램에 등장해서도 급식대가는 본분에 충실한 음식을 선보인다.
<흑백요리사>가 새로운 요리 캐릭터의 전시장이라면, 최소한의 의미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급식을 위한 주방에서 묵묵히 음식을 해 온 이에게도 리스펙트를 보내줄 수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 '급식대가'가 눈에 띈 이유다. 하지만 <냉장고를 부탁해2>에 등장한 급식대가가 다른 요리사들을 누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급식대가의 강점은 요리의 세부에 있지 않으며, 대량으로 일정한 요리를 균일하게 만드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부탁해>보다는 백종원의 급식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백 패커>에 더 적합한 인물로 보인다.
결국, 캐릭터의 고유한 요리보다 압도적인 것은 캐릭터의 사연이다. 빠른 전개 속에서 세부로 등장하는 것은 요리 방식이나 과정이 아니라 개별 인터뷰이다. 이 장면들은 <하이큐!!>나 <귀멸의 칼날>과 같은 애니메이션(만화)에서 빈번하게 활용되는 경기 장면 사이사이에 각 캐릭터가 배구를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귀살대에 들어갔는지를 보여주는 회상 장면의 기능과 유사하다. 오늘날 대중문화 속에서 플래시백의 기능은 서사적 보완물이기보다는 빠른 속도의 편집 가운데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로 기능하면서 컨텐츠를 채우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양상을 <흑백의 요리사>도 반복한다.
이 가운데 예외적인 캐릭터가 있다면 에드워드 리 셰프다. 개인의 사연과 요리의 완성을 충실히 절충하였다. 사실 그의 미국인 위치는 특별하기보다는 <미나리>(2020), <파칭코>(2022)와 같은 작품들과 맥락을 함께; 하는데, 그의 인기는 <흑백요리사>의 준우승자 혹은 미국 내에서의 우승자 경력 때문이 아니라, 충실하게 자신의 사연과 요리를 결합한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것을 내보낸 것은 연출자와 편집자의 결정이다.
문제는 본질을 제거한 스토리의 강조가 오늘날 사람들을 어떻게 순응주의자로 만드는가 하는 데 있다. 2011년 월가의 점령 시위에 동참했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그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투쟁을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디카페인' 시위로 말이다."
지젝의 말이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는 끊임없이 사물과 상품의 본질을 가린 채 대체되는 문화의 양상들을 비판한다. 커피의 본질은 카페인이고, 맥주의 본질은 알코올이다. 그러나 이것을 제거한 채 동일한 맛과 향을 낼 수 있다고 강조하는 자본주의와 소비문화는, 본질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를 대체 가능성으로 채운다. 그 결과 카페인의 쓰라림과 알코올의 숙취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소개한다. 커피의 향으로, 숙취 없는 술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고 선전한다. 이것은 보건학이나 건강학의 문제가 아니다. 커피잔과 맥주잔을 들고 그럴듯한 폼을 잡지만 본질은 제거된 채 안전함을 앞세우며 타협하는 풍경이 우리 시대의 본질이라는 성찰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자선단체에 몇 달러를 기부하고, 수익금의 1퍼센트가 제3세계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돌아간다는 스타벅스 카페라떼를 사 마시며 흐뭇해하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하고 결혼 정보 업체가 우리의 사랑을 아웃소싱하게 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적 참여 역시 아웃소싱되도록 내버려 뒀다.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지젝은 월 스트리트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세상의 불평등을 바꾸기 위해서는 공정 무역 커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사랑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결혼 정보 업체를 찾는 것은 자본주의에 자신의 삶을 위탁하는 순응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카페인과 알코올의 고통을 어떻게 되찾아야 할까? 우리 시대의 인기 있는 문화들이 고통의 본질을 제거한 채 선전되고 있다면, 우리 시대의 망각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테베를 공격한 아르고스의 7장군의 아들들인 에피고노이가 10년 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피고노이들의 본질 추구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었고, 자신들이 충분히 성장한 후 테베의 멸망을 이끌어낸다. 장군의 아들로서의 명예욕에 시달린 것이 아니라, 이 전쟁이 다시 반복되어야 하는 정당성을 통해 후계자로서의 존재성을 증명하고자 한다.
에피고넨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낼 때가 이러한 순간이다. 본질을 되찾고자 할 때 문화는 르네상스의 자리를 발견한다. 14세기에 시작되어 16세기 말 유럽 전역에 펼쳐진 르네상스는 에피고넨이었다. 중세를 통과하면서 망각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고대 사회가 인간 중심주의였음을 천명하면서, 지금 시대에 필요한 것이 인본주의임을 보여주려는 선택이었다. 재생, 부활이라는 뜻을 지닌 르네상스는 고대의 아버지들을 따라 새로운 후계자의 반열에 오르며 새로운 문화를 구축해 나갔다.
절대로 이븐하지 않은 현실
"이븐하다"(even)이라는 말은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서 심사위원인 안성재 셰프가 흑수저 요리사를 추리는 2화에서 스테이크를 내놓은 도전자에게 "고기 이븐하게 익지 않았어요."라고 말을 하면서 유행이 시작되었다. even이라는 영단어는 어려운 말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의 용도는 "심지어" 쯤에 해당하는 부사로 암기되었다. 그런데 안성재 셰프가 사용한 단어 "even"은 평평한, 반반한 혹은 고른, 일정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한다. 부사와 형용사의 차이가 하나의 밈이 될 만큼 낯설고 새로운 말이 되었다.
이븐은 <흑백요리사>의 평가 기준의 대표격이다. 언제나 이븐한 익힘, 간이 고루 배었는가가 문제시된다. 이븐은 가장 기본적인 요리의 자질에 해당하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븐에 대한 열광은 근래의 한국 사회에서 강조되어 온 "공정함"과도 관련된다. 사실 요리 평가 기준으로 이븐함은 심사위원의 역량으로 얼마든지 평가될 수 있지만 오늘날처럼 개인성이 큰 시대에 한 집단이 개인을 평가하는 것을 결코 이븐하게 수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븐함은 이제 기본이 아니라 사회의 목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현실이 이븐하지 않다는 것은 <흑백요리사> 이후 식당의 예약 열기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프로그램을 통해 엿보게 된다. 새롭게 부활한 <냉장고를 부탁해2>에는 기존의 스타 셰프들과 함께 흑백요리사의 출연자들이 등장하였고, 백종원의 새로운 프로그램인 <레미제라블>의 출연자들을 지도하는 크루의 일원으로도 등장했다. 개인의 유튜브도 활성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카페 창업을 돕는 <맛피아와 팝옾카페>라는 유튜브 채널은 우승자였던 '맛피아'를 프로그램명으로 내걸고 있다.
또다시 불어오는 요리 경연대회의 분위기 속에 살아남기 위한 각자의 전략은 있을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경우 요리 혹은 창업 프로그램을 내걸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서사로 끌어들인 것은 인생 갱생 프로그램이다. 요리와 창업으로 사람을 바꾼다는 과한 생각은 백종원이라는 캐릭터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골목식당>에서 화제를 모았던 사연들과 이 프로그램은 겹친다. 포방터를 비롯하여 몇몇 갱생 캐릭터들이 인생역전 드라마이자 백종원을 요리와 창업의 선배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스승으로 이끌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레미제라블>은 이에 대한 적극적 반영인 동시에 또 다른 차원의 인생 역전극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 흑수저 요리사와 함께함으로써 분위기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2>는 새 시즌을 출발한다. 기존의 포맷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진행자도 그러하고, 연예인들에 해당하는 이들의 냉장고를 가져온다는 설정도 동일하다. 15분이라는 시간제한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흑수저 요리사들이 한께한다는 것이다. <냉장고를 부탁해>가 지속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기존의 셰프들을 반복해서 등장시키는 것에 따른 피로도가 있었다. 새로운 셰프의 등장은 비슷한 조건에서 전혀 다른 요리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준다.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이 이전에 인기를 누렸던 캐릭터성을 보완하거나 덮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리 프로그램의 기대감은 크지 않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요리를 통한 세계의 구현을 표방하지만 요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나 이해는 없다. 결국 이븐한 것은 '흑백요리사'들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미디어가 선택할 만한, 호감을 샀던 캐릭터들이 이븐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그것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출연을 통해 이븐하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 식당의 예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이븐한 요리사가 아니라 서바이벌을 통해 생존한 엔터테이너의 신진 세력(캐릭터)인 셈이다.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캐릭터의 연결 고리다. <흑백요리사>와 관련된 밈 중 "이븐하다" 이상으로 선두에 있는 것은 만화가 '김풍'이다. 이미 그는 '만찝남'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고,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기성의 요리사와 여러 차례 맞짱을 떴다. 승률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백수저들이 대거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보기 드물게 흙수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전통의 캐릭터였다.
김풍의 소환은 <흑백요리사>의 인기와 더불어 흙수저를 찾아가는 기원의 탐구가 된다. 확실히 이 점은 흥미롭다. <흑백요리사>를 둘러싼 정보의 발굴에서 요리의 기원을 찾는 일은 드물다. 캐릭터의 기원을 찾아가 '김풍'에 도달한다. 그를 새롭게 발굴하고, 소비하면서, <흑백요리사>의 시즌2를 기다린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는 세부는 더 이상 본질의 세부가 아니라 캐릭터의 세부다. <무한도전>이 어떤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밈으로 소비되면서 모든 오락 프로그램의 기원인 것처럼 이야기되듯 '이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캐릭터의 무한한 소비와 반복적인 밈의 소진에 있다. <무한도전>이든, <흑백요리사>든 분야는 중요하지 않다.
캐릭터의 향연은 밈이 되고, 밈은 밈을 낳는 에피고넨의 확산 속에 세상의 모든 것은 이븐해진다. 이븐하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이븐과 "하다"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다. 말의 기원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무한반복 되면서, 무한도전을 보면서, 배달 음식을 먹으며 흑백요리사를 관람할 뿐이다. 확산의 무한한 가능성만이 이세계에 살아남아 중요한 가치로 소비된다.
과연 우리는 이세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이세계"물의 주인공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너드이거나 루저였다. 그들은 전생이든, 환생이든, 소환이든, 말은 다르지만 결국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방식으로 이세계에 등장하여 새로운 캐릭터로 등극한다. 그곳에서 "나 혼자만 레벨업"하면서 천하무적이 된다. 더 이상 이세계의 캐릭터들은 <나니아 연대기>의 아이들처럼 귀환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영원한 삶을 꿈꿀 따름이다. 그것이 현재 무한한 소비의 가치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