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 더 선샤인 인>(클레어 드니, 2017)의 마지막, 영상이 지속되는 도중 엔딩 크레딧 자막이 나타난다. 대체로 이는 극 내용을 모조리 보여준 뒤, 컷으로 분리해 내보내기 마련이므로 (단순한 접근이긴 해도) 의식될 만하다. 인물들의 대화는 아직 끝날 기미가 없어 보이기에 더욱이 이 배치는 갑작스럽다. 장면 내용보다 일찍이 종료되는 것이 엔딩 크레딧 자막이란 점도 그렇다. 부수적인 장치로 여겨지곤 하는 크레딧을 잘 읽게 하려는 걸까"? 화면 안 인물들의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긴 자막이 줄줄이 나열될 때, 극 내외부 요소의 시각적인 공존은 섞여 들 수 없는 두 요소 사이의 실질적인 간극을 수반한다. 이러한 간극으로부터 관객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산만해지는 주의력의 문제를 겪는다. 즉 엔딩 크레딧 자막의 성급한 등장은 그것을 읽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드는 전략이 되기엔 미흡하다. 어느 한 군데 몰두할 수 없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리해서 인물들의 대화에마저 제대로 된 몰두가 불가능한 상태가 조성된다는 게 관건이다.
누군가에겐 이를 논하는 것조차 무의미할 것이다. 관객은 어느 때가 되면 허구 바깥으로 빠져나갈 대비책을 갖춘다. 이에 맞춰 극의 열기를 서서히 감속하는 영화도 있다. 그런 이유로 엔딩 크레딧의 등장을 곧 극장을 나서야 할 때로 받아들인 이라면 <렛 더 선샤인 인>의 마지막 장면쯤은 통과해 버려도 무관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물론 이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서둘러 엔딩 내용을 말해 보자. 이자벨(줄리엣 비노쉬)은 믿음을 주지 않는 남자들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집착한다. 영화는 그가 형성한 불안정한 관계를 파편적으로 보여주고, 그 끝에 어느 역술가와 나누는 대화를 엔딩 장면으로 구성한다. 스스로의 미래를 점치고 싶어 하는 이자벨에게 역술가는 말한다. "지금은 당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세요. (...) 나머지는 그냥 놔둬요.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 기다리되 마음을 오픈하세요. 그럼 됩니다." 이미 종결된 관계, 이 사실을 단념하지 못하는 인물, 미래로 개방되는 가능성의 점괘, 그리고 영화의 끝. 온전한 몰두를 방해하는 장면 구성에 비해 대비를 다차원으로 이룬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엔딩 장면이 중요하지 않은 적은 없다. 몇 시간 동안 일궈온 극의 흐름을 마지막 몇 초로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것이 엔딩이다. 통상적으론 극의 엔딩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없던 이가 할 수 있게 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로 하여금 어떤 변화를 감지한다. 그런데 <렛 더 션샤인 인>은 마땅한 변화가 감지되지 않기에 허무하며, 그 허무가 중요하다. 장면이 안긴 정념이 극 안에서 생성된 반응과 밀착되지 않고 바깥에서 겉돈다는 게 인상적이다. 운을 점치는 엔딩에 다다르기까지, 영화는 인물들의 관계가 어떻게 어그러지는지를 모두 지켜보게 했으므로, 이때의 우리는 다시금 남자들과의 가능성을 점치려는 이자벨의 행위가 무의미함을 알지 않던가. 하지만 그에 비해 이자벨의 근심하는 얼굴은 역술가의 단호함에 비견되는 호소력을 지녔다. 그럼 꿰뚫어 보는 시선은 어떤가. 날카롭기보다 이상한 나른함이 있다. 현실(성)과 직결되지 않는 행위와 그 운동이 장면의 느슨한 리듬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일까. 무엇보다 불신의 순간 터트린 역술가의 비명이 있었음을 기억할 때, 그가 내뱉는 말은 이 엔딩에 덧없음의 감각을 씌운다.
영화에 더 볼 것이 남지 않은 '것 같'고 장면이 무의미한 '것 같'이 보이게끔 말이다. 나아가 무의미함이 요점인 장면에서 그 무의미함을 적극적으로 감각해야 할 때, 관객의 긴장을 완화하는 엔딩의 배치나 구성의 산만함을 도입한 것은 왜일까. 느슨하게 지나쳐도 되는 무언가처럼 말이다. 어쩌면 <렛 더 션샤인 인>의 엔딩의 결정적인 점은, 이와 같이 단순히 지나칠 수 없단 점을 역으로 조준해 낸 걸까. 종결이 주는 무게 없이, 무의미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엔딩은 같은 이유에서 가볍게 넘겨지지 않는다.
간혹 우리는 '끝이 없어' 완결성을 거부하는 영화의 끝을 마주한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끝없음에 관하여>는 한 남자가 길목에서 자동차를 살피는 모습을 멀찍이 응시하며 막을 내린다. 어떠한 앞뒤 배열 없이 존재하는 엔딩은 극을 '닫는' 소임을 다하기엔 불충분한 요건을 갖췄다. 그다음 뭔가 더 남았을 것 같고, 보이는 그대로 길목 위에 우두커니 방치된 느낌이다. 이 광경은 일상의 대수롭지 않은 파편일 수 있지만, 체계를 갖추고 돌아가던 한 구조에 발생한 원인 미상의 오작동(고장난 자동차)을 의식하자면 막막하다. 이 양가적인 인상을 동시에 지니기에 '끝없는' 삶의 형태를 은유한다는 결론엔 쉬이 도달할 수 있다. 시간 배열을 바꾸거나 반복해 구조적으로든 서사적으로든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장률이나 홍상수의 영화적 사유를 삶의 안개 같은 면과 대입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한 편의 영화가 완결성을 거부할 때, 그 틈엔 가능성뿐 아니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데서 발발하는 고립감, 닫히고 갇힌 느낌도 공존하는 셈이다. 여전히 계속되는 것들, 충만한 지속이 주는 권태와 씁쓸함 말이다.
'끝'을 미루고 유예하는 현상은 '클로드 샤브롤' 영화에서도 중요한 화두다. <랑페르(지옥)>(1994)의 엔딩에서 남자는 아내를 살해한다. 정신 착란에 빠진 그는 창문 앞을 서성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바깥의 어둠은 창문 앞 남자의 상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그 자신에게 반사해 돌려보낸다. 클로드 샤브롤에게 있어 엔딩은 극 내내 조짐을 보이던 것들이 실현되는 기점이다. 유전적 영향 혹은 되풀이되는 운명론적 반복의 형상은 감독의 영화를 관류하며 미로로 만든다. 이 미로를 반영한 "SANS FIN(끝이 없음)"이라는 자막은 그의 또 다른 영화 <의식>(1995), <초콜릿 고마워>(2000), <악의 꽃>(2003) 등에선 장면 안으로 기습 침투하는 엔딩 크레딧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장면은 아직 상연되는 중이지만, 극의 종료를 알리는 표식은 이를 무시한 듯 떠오른다. <렛 더 션샤인 인>이 주의력을 분산하는 쪽이었다면 클로트 샤브롤의 영화들은 과도한 몰입을 유발해 초조하고 압박감을 준다. 인물들은 극의 마지막, 누군가를 죽였거나 죽이기를 실패한 상태이며 그 사실이 발각되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또는 발각된 직후의 여파를 가장 또렷하게 감지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악의 꽃>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은폐한 인물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굴며 인파 속에 섞여 든다. 살인에 실패한 <초콜릿 고마워>의 인물은 피아노 연주 곡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동요되지 않은 듯한 인상 너머엔 곧 들이닥칠 상황을 미루고 보는 강한 방어의식이 존재한다.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여기서 끝나는 영화는 답을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장면은 오래 지속된다. 이 엔딩들은 그런 미룸을 지속하기 위한 장치이다. 따라서 "시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이지", 비극을 물려준 <악의 꽃> 속 노인의 말엔 현재(성)의 숭고는 없다. 전적인 끝도 아니며, 지극히 유추되는 미래를 유예할 때의 미련함과 암담함이 있을 뿐이다.
위의 영화들이 추상적이고 암시적인 장면의 인상과 구조를 통해 이를 읽어낼 관객의 능동성과 조망하는 능력을 요구한다면, 장면에 불가역적인 충격을 가함으로써 관객을 꼼짝없이 묶어내는 영화의 엔딩도 있다. 깨진 유리창을 비추며 막을 내리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아바스 키아로스타미, 2013)이나 개구리 비가 쏟아지는 기상천외한 사건을 담은 <매그놀리아>(폴 토머슨 앤더슨, 1999) 엔딩에 발생한 전조 없는 타격감은 이때껏 유지되어 온 영화의 기조와 리듬을 단박에 중단시킨다. 상식과 이성으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연루되지만 이로써 풀리지 않던 문제는 단순해지고 무언가 명확해진다. <렛 더 션샤인 인>은 파괴하는 대신 오히려 내버려 둔 듯하다. 역술가의 진단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고, 그 말이 지시하는 바가 알아 온 사실과 부합해 그럴듯해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또한 누구든 쉬이 포섭할 가능성(barnum effect)을 지닌 공허한 무언가다. 여기저기 떠돌면서 실질적인 시간성에는 정작 포섭되지 않고 현전도 가지지 않는 언어다. 그런데 우리와 달리 상황(극) 안의 존재인 이자벨은 역술가의 말에 몰두한다. 지나치게 몰두하는 존재는 어딘가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그는 시무룩해졌다가 금세 기대감으로 들뜨길 반복하며 역술가의 말에 동요된다. 때문에 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 쇼트에서 인물이 지어 보인 표정은 임의적이다. 표정의 종류가 무엇인지보다 그것이 얼마나 유지될 것인지가 더 짙은 잔상을 남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관객이 엔딩 장면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보는 일은 필수적인 것 아닐까.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 때 인물은 그렇지 않은, 이 간극이 생겨나고 거기서 비롯된 정서가 장면을 완성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은 이자벨의 표정이나 감정선이기 이전에 남자들의 태도이다. 남자들은 이자벨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것대로만 움직인다. 거듭해서 말을 바꾸거나 말을 바꾸기 위해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가능성의 잔인한 지점은 영화의 극단적인 점프 컷으로 강조된다. <렛 더 션샤인 인>은 (적어도 밤에서 낮이 되기까지 걸리는) 실재의 시간 단위를, 하나의 쇼트가 다음 쇼트로 전환될 때 걸리는 (거의 지각되지 않는) 시간 단위로 분절하고 축약하고 생략해서 인물들 사이의 변화가 순식간에 벌어진 것처럼 조작한다. 영화는 매끄러운 화면 전환보단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한다. 이로써 우리가 지금 보고 알게 된 사실 다음으로 전혀 다른 무언가가 올 수도 있다는 점을 열어둔다. 언뜻 자유롭게 들리지만 그 가능성 틈새로 인물들은 이자벨과의 관계를 빠져나간다. 가만 보면 '이음매'를 가지는 쇼트와 쇼트는 다르게 말해 '절단면'을 지니는, 또는 절단 가능성을 지닌 관계 내의 무언가다. 감독은 물질로서의 영화의 근원에 대한 상상을 유도하고 영화의 기본 역량을 토대로 비물질적 정념을 포획한다. 쇼트와 쇼트가 이어져 당도한 영화의 끝이 이어져 온 것의 중단을 암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로부터 인간 존재의 임의적이고 불완전함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한다. "마음을 오픈하세요"하는 말이 화면을 장악한, 가능성이 열어젖혀진 영화의 끝에서 말이다.
또한 계속 달라지는 건 이자벨의 몸짓이다. 그녀는 주어진 공간을 불필요하게 돌아다닌다. 이를테면 이자벨이 뱅상의 사무실을 찾아가 불만을 표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앉았다가 일어서고, 잠시 공간을 걸었다가 다시 앉고, 앉은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그 밖에도 이자벨이 의도치 않게 길목을 거닐거나, 충동적으로 일행을 앞지르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상대와 술래잡기하며 간신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자주 발견된다. 혹은 그 피로감을 호소하며 드러눕는다. 몸짓은 정신을 반영한다. 혼란을 잠재우려면 역설되게 산만함이 요구된다. 영화는 인물의 몸짓으로 짐작할 수 없는 순간에 고정된 프레임 안의 운동을 중단하거나 단시간에 운동의 종류를 바꾼다. 장면의 일관된 운동이 흔들리며 인지능력에 훼방을 놓는 때는 그 표면적 운동과 달리 어떤 깨달음이 분명하게 잠입하고 있다.
이자벨이 공간을 정신 사납게 가로지르는 상황은 그림을 작업하는 장면에서도 발견된다. 화가인 그는 온몸으로 캔버스 위를 휩쓸고 다니며 안료를 거칠게 긋고 덧칠하고 떨어트리며 족적을 남긴다. 작업 과정상 예기치 않게 생긴 군더더기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타시즘(Tachisme) 기법을 닮았다. 이 장면에서만큼 이자벨의 산만함과 즉흥성은 다르게 보인다. 날렵하게 획을 긋는 가속 운동엔 질질 끄는 미련이나 어딘가 구속된 점이 없다. 절대적인 현재와 달라붙은 몸짓이라야 가능하며 이자벨을 진단해 온 산만하고 성급한 면모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여긴 없다. 얽매이지 않은 자유의 느낌. 이자벨이 전시를 감상하는 모습은 있지만 정작 그녀의 그림이 완성된 장면은 없는데, 그러니 그녀의 그림은 더욱이 분석되기를 거부한다. 인물에 대한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간극이 존재함을 회화적 언어를 토대로 탐험하게 한다. 그런데, 다시 엔딩으로 돌아가서, 실존과 동시에 주어지는 비가역적인 측면을 앞세운 점괘가 장면을 지배한 이 순간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역술가와의 긴 대화에선 이자벨이 응시자 앞의 이미지로 자리하며, 실존 이전의 시간을 단정 지을 때 작동하는 형식과 틀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에 비해 그런 관념적인 측면에 묶여 경직된 느낌이 없다. 어쩌면 <렛 더 션샤인 인>은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는, 다시 말해 인물에게 씌워진 이미지가 분석되고 간파되는 상황이 좀 다른 기조를 띌 순 없는지 실험하는 것 같다. 인물이, 한 존재가 회화적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것에 관해 말이다.
그러므로 <렛 더 션샤인 인>의 엔딩이 표방하는 동떨어진 상태나 산만함의 전략 자체보단, (다른 인물들과 장면들에선 결여된) 그 아래에 존재하는 깊은 전념의 상태를 중요하게 보고 싶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이자벨의 태도에 관한 판단 자체보단, 이런 판단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걸 전부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의 절박함, 나아가 그 절박함을 넌지시 전하는 장면의 회화적 언어의 측면이 인상적이다. 잘 지내지 못한다는 말을 달고 살던 이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찾은 이 상황을, 줄리엣 비노쉬는 동일한 피사체의 변동성을 시각적으로 포착해 내는 회화 기법처럼 연기한다. 동일한 구도의 스크린 안에서 표정을 짓고, 여러 방식으로 숨을 쉬고, 돌발적인 딴짓을 취하며 포획되길 기다린다. 거기엔 단지 상대의 시선이나 미사여구에 휘둘린다는 표현으론 담아낼 수 없는 더 광범위한 무방비의 상태, 다시 말해 실존적 외로움을 고뇌한다는 것에 있어서 더 이상 숨길 것 없는 진실함이 있다. 그러한 진실 됨이라면, 역술가의 역량도 다른 측면에 존재한다. 비록 실체가 없고 거짓말에 불과함을 알지라도 시치미 떼고 상대의 무방비함에 보조를 맞추는 대화의 성질. 동정에서 비롯된 호의나 변호가 아니며, 심층적인 현실 도모보다도 우선시되는 건 이들이 사랑 앞의 동등한 두 인간이란 사실이다. 관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단 걸 알면서도 사랑에 동요되어 온 이에게 기꺼이 동요할 줄 아는 대화의 풍경. 동일한 방향을 향하는 대화가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야 펼쳐진 것은 너무 뒤늦은 걸까. 하지만 그런 마음에 대한 감정적 동요가 결코 주입되는 문제가 아님을 상기하면 이 배치는 가장 적절해 보인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