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빈의 영화의 파편으로부터] 걷기, 넘어짐, 몸을 가누고 선 동작의 홀림
[변해빈의 영화의 파편으로부터] 걷기, 넘어짐, 몸을 가누고 선 동작의 홀림
  • 변해빈
  • 승인 2025.01.0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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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프레임: 타르코프스키에서 비올라까지
ⓒ 영화 <거울>(1975)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거울>(1975)에는 인물의 걸음을 좇는 인상적인 쇼트가 존재한다. 인물은 여러 개의 문과 복도, 구조물 사이를 비집으며 어디론가 분주히 걸어간다. 뒤이어 그 까닭이 밝혀지기로는, 돌이키기 어려운 종류의 실수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불신이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지만, 사실상 영화는 그 상황 자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중하게 묘사된 것은 영문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어지는 '긴 걸음' 자체다. 해당 쇼트에서 상황의 긴박함을 제시하는 건 빠른 속도감이나 과장된 역동성이 아니다. 인물은 서두르되 결코 달리지는 않는 속도로 걷는다. 그 가운데 이상하게도 화면에 슬로우를 걸었다는 착각을 주는데, 그로 인해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난데없이 현시된다. 인물의 몸을 무겁게 잡아끄는 것들에 관한 의식으로 하여금 보는 이의 조바심을 건든다(유독 굼뜨게 펄럭이는 긴 코트 자락의 속도(감), 길게 공명하는 구두 굽의 울림이 걸음이라는 시각적 요소에 영향을 끼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개인 단위의 착시일 수도, <거울>의 다른 쇼트에서 활용된 실제 고속 촬영의 영향이기도 할 터이다. 어느 쪽이건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수직 수평으로 이동하는 물질의 움직임을 눌러 찍어 속도(감)를 지연시키는 것으로, 특히 무언가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며 물리적인 시공간이 손상되는 상황에 노출된 인물의 처지(vulnerare)와 연관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무너짐의 하강 운동으로 강조되는 건, 방향을 위반해 거슬러 올라가려는 어떤 몸의 '동작'이었다. 물론 이것은 의미를 뚜렷이 알 수 없는, 예컨대 공중부양과 같은 몽상의 이미지로 인물의 무의식을 대변하려는 영화의 요소만을 일컫지 않는다. 앞의 걸음 쇼트 내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인물의 걸음(중력을 거스르는 몸동작)은 서로의 방향을 거스르고, 이 두 운동이 서로를 방해한다는 사실이 의식됨으로써 시간과 그 안의 행위가 엇박을 내고 있다는 착란이 야기된다. 그것은 빳빳하게 중심을 유지하려는 신체 부위와 밑으로 내려보내는 기관 등이 뒤섞인 하나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천연덕스러우면서도 그것을 의식할 때 지나친 것이 되는) 만물의 총체 안에서 인간을 논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우리 자신의 기본을 이루는 것, 곧 자기 몸을 가누고 옮기고 통제하는 운동을 과도하게 의식시키는 이미지로부터 인생의 걷잡을 수 없는 성격과 그로 인해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homo patiens)의 공통 조건을 암암리에 감각케 하는 것이다.

 

ⓒ 영화 <파란입이 달린 얼굴>(2018)

가만 생각하면 영화 속에서, 또는 움직이는 이미지 속에서 나타나는 걷는 행위는 이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어디론가 향해서, 무언가를 위해서 걸어간다고 할 때, 방점은 '어디'와 '무엇'에 찍혀 있기 때문이다. 그 방점을 쇼트로 구분할 수 있다면, 각각 하나의 쇼트를 차지하는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에 걷는 모습을 담은 쇼트가 끼워진 형태일 것이다. 여정이 길수록 걸음과 그 걸음을 담은 쇼트는 길이가 늘어나고 개수가 많아지겠지만 어쨌건 이동 수단으로서의 두 다리의 움직임, 이동은 일련의 '과정'으로 뭉툭하게 묶어버린다. 저 앞에 있는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지 걸음 자체에 중심점이 있다고 여기진 않는다. 흔히 어떤 인물들을 '산책자'라고 부를 때마저 그 산책은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잊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남과 엇갈림을 만드는 야속한 장치로서, 시와 글을 써내기 위한 뇌의 운동으로서 사색의 가치를 논하거나 여유와 고독을 부조한다. 혹은 우연에 호응하며 현실에서 간과된 삶의 질을 구체화하는 데 핵심이 있다. 그도 아니면, 우리가 목적 없이 무작정 걷는다고 표현할 때 그 걸음은 공공연하게 마음에 가득 찬 무언가를 해소해야 하는 사명을 떠안은 몸짓이 된다.

어쩌면 당연한 말, 동영상 속에서 걷지 않는(움직이지 않는) 인물을 상상하기란 오히려 어렵다. 시간이 고정된, 평면적 회화 안에서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시간의 진행을 가지는 영화 속에서 살아있는 인물이 아무 움직임 없이 서 있기만 하다면 어딘지 기이해진다.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것과도 분명 다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적어도 명상과 수면, 혹은 죽음이라는 명분이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인간이 가만히 서 있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문일 것이다. <파란입이 달린 얼굴>(김수정, 2018)은 바로 이 지점에서 착안해 몸뚱어리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문인 현실을 기술한다. 인물은 때때로 지나칠 정도로 움직이지 않고 산 송장처럼 멀뚱히 서 있곤 해서 그 육체성은 보는 이가 대리해서 무안과 가혹함을 느끼다 못해 거추장스럽게 만들기까지 한다. 그런대로 살아갈만한 어떠한 방법도 수단도 찾기 어려운 인물에게는 몸뚱어리로 버티고 선 것이 살기 위한 유일한 창구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에선 모멸스럽고 거북한 자기 현실에 살을 맞대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정지성이기도 할 터이다.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이 영화의 엔딩은 인물이 아무리 기다려도 인간다움을 위한 구원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몸짓, 이른바 인간으로서 서 있는 자세(人)의 우악스러움으로부터 전한다.

 

ⓒ <끝없음에 관하여>(2019)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그러한 모습을 축이 애매하게 엇나간 부감 쇼트로 담아내어 인간을 비롯한 피사체를 조금도 미학적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리란 감독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확인시킨다. 그 반면 인물들이 '있는(being)' 모습을 회화적 구도로 담은 것으로 익히 알려진 '로이 안데르손'은 프레임이라는 영화의 얼굴(성)로부터 고독과 권태와 덧없음이 엄습하는 정서적인 혼란을 탐미적으로 다룬다. 시공간을 우중충하게 비워둘 것, 인물들의 피부를 얼룩덜룩 표백할 것, 그들의 몸(동작)을 무겁게 늘어트릴 것.... <유, 더 리빙>(2007),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2014)에 이은 <끝없음에 관하여>(2019)가 보이는 몸짓들은 짜여진 규격에 맞춰서 혹은,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가동하면서 시작과 끝도, 그 어떤 대상도, 의지도, 욕구도 가늠할 수 없이 존재하는 파편적 쇼트의 나열과 상응한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이렇게 엄격한 양식을 관객이 마주하게 한 뒤 무언가 잃고 없는 분명한 인물들의 아연실색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에 조응하지 않는 화면 앞에서의 시선의 공허함을 제공한다. 장면을 보조하는 내레이션은 버젓이 보이는 걸 그대로 기술하는 데 그친다. '어떤'이라는 몰개성의 수식("어떤 남자를 보았다")은 다음 장면, 그다음 장면이 와도 '어떤'으로 남으며 그 수식의 주체만이 가질 수 있는 문제를 남기는 이중성을 가진다. 살아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살라는 작중 의사의 진단은 일차적으로 화면 앞의 공허와 무능력함을 비통하게 느낀 관객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한 화면을 열어젖혀 보여주며 관객에 주도권을 내어주고 있음에도, 이 하나의 쇼트는 마치 하나의 캔버스와 같이 작동한다는 사실. 이는 전체의 단면이자 정황에 불과할 뿐이어서 누군가의 행위를 빠짐없이 본다는 게 얼마나 의혹을 주는지, 이 점에 동조하게 만든다.

대체로 이러한 인간의 모습에는 기계(성)이나 사물(성) 같다는 판단이 덧씌워진다. <끝없음에 관하여>에서 영화의 각 프레임 외곽을 유심히 보면, 문과 서랍 따위가 어정쩡하게 열려 있거나 사물의 가지런하지 않은 배열을 발견할 수 있다. 시선 바깥에 숨겨진 그 영역 안의 어지러운 광경을 통해 이 과묵한 인간들이 안기는 비약을 능력껏 가늠하라는 것일까. 앞서 <파란입이 달린 얼굴>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인간의 정지성을 논할 때, 그 몸들의 움직임은 사물 일부에 귀속된 것마냥 철저한 배열-'가만히'의 몸짓으로-을 드리운 바 있다. 그런데 안데르손 영화의 핵심은 주어진 이미지의 기술된 사실이 한계에 부딪힐 때, 기계도 사물에도 없는, 인간에만 있고 인간일 수밖에 없게 하는 감정으로의 투시적 요법에 있다. 그러니까 감독이 보려는 건 저기 저 화난 남자의 보이지 않는 눈물을 상상할 줄 아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 사이의 대치이다. 잃고 없음의 공허와 권태, 지칭 없는 원통한 감정이 팽배한 상황 등 인간의 모순 사이에서 찾은 인간적인 문제들을 응시하는 것으로서 몸의 물리성이 중요하다.

 

ⓒ <The Quintet of the Astonished(놀라움의 5중주)>(2000)

앞의 작품들이 인물이 몸짓을 조율해 만든 부동성에 주목한다면, '빌 비올라'는 슬로우모션으로 오히려 인간의 미세한 움직임을 잡아내 부동할 수 없음을 짚어냈다. 그는 초 단위를 분 단위로, 분 단위를 시간 단위로 지체시켜 스틸 사진처럼 보이게 했다. 슬로우 모션을 전폭적으로 활용해 우리 인간의 지극히 단순한 움직임을 생소한 것으로 전환시킨다. 때문에 그의 영화들 역시 얼마간 사진이나 회화를 대할 때의 감상법을 요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상물임을 알리는 초미립의 움직임들이 인식되면서부터 그 사실은 서서히 깨진다. 가령 <The Quintet of the Astonished(놀라움의 5중주)>(2000)는 다섯 명의 인물이 각자의 육체성을 활용해 바깥으로 정념을 표출하는 모습을 고속촬영해 보여준다. 슬로우모션에는 조금의 비움도 없다. 지나가야 할 것을 붙잡는다. 중요하지 않은 마디 단위의 움직임마저 낱낱이 박제하는 데 일가견 있다. 극단적 점유는 순환과 환기의 공간을 확보하지 않는다. 압박의 끝은 질식이다. 이러한 사유는 단연 몸이 실존적 문제를 다루는 데 유용한 도구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몸은 거저 주어진 것이면서도 관리해야 하는 무언가이며, 의도 없이 의도가 되고, 통제 가능성을 가지고서도 통제 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원흉을 짊어진다.

하나의 형상이 떠오른다. <덤플링즈>(프룻 첸, 2004)에서 인육에 손을 댄 후 모든 것을 잃은 한 인물이 뭔가를 짊어지고 가던 모습이. 거기서 짊어진 건 아마 가진 것(인간성마저) 없이 누더기가 된 몸뚱이, 죽어 없어지지도 않은 몸뚱이일 것이다. 성가시고 수선스럽지만 덕지덕지 붙어서 떨쳐낼 수 없는 것. 온갖 고됨과 질타를 받으면서도 어쨌든 같이 가야 하는 것. 여린 영혼의 겉을 안전하게 감싸고 있어서 생의 조건을 빼앗는 위협으로부터 지켜내는 한편, 언제라도 바닥으로 꺼질 고비를 버티고 선 생의 조건 자체가 되기도 하는 어떤 경계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빌 비올라는 형체를 드러내지 않던 사건들이 서서히 밀려오고 치닫고 고조되는 상황을 자주 조성하며, 거기서 인물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르르 넘어지는 혼돈과 마주하게 한다. 갓 걸음마를 떼는 아이가 아니고서야 인간이 넘어지는 모습이란,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고 꺼림칙하다. 아닌 게 아니라 넘어짐은 좌절과 절망의 비유로 그런 몸짓으로 도식화되어 왔다. <The Raft(뗏목)>(2004)에서 빌 비올라는 화면 양쪽에서 인물들을 향해 물살이 갑자기 치고 들어오며 혼비백산이 된 상황을 응시한다. 이때 감독은 시작부에서 인물들이 미동 없이 서 있을 것을 요청하여 물살이 화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진 화면에 슬로우가 걸렸단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다. 마치 버스 정류장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사진 찍은 것처럼 친숙한 광경이다. 그러다 고속 촬영된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건 우리가 움직임을 통제할 수 없는 물이 화면에 등장하면서부터다. 관객의 시선에서 슬로우 걸린 이 물은 실제의 가파른 속도보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물들은 물을 피할 새 없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일쑤다.

<The Deluge(홍수)>(2002)에서는 또 어떤가. 인물들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물살이 쏟아지자 가차 없이 쓸려가고 넘어지고 마네킹처럼 몸이 휙휙 접힌다. 영화는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관객이 왼쪽 외화면을 경계하게 만들지만 다시 한번 그 짐작을 깨며 속절없음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카메라 맞은편에 배경처럼 세워져 있던 석조 건축물 실내이다. 조형적 견고함을 배신하고 그야말로 엉뚱한 곳에서 난데없이 쏟아지는 위협(물살)으로 인해 인물들은 온몸으로 그것을 맞닥트리는 운명에 처한다.

 

ⓒ <The Passing(지나가는 것)>(1991)

그러므로 빌 비올라가 인간은 볼 수 없지만 기계의 슬로우모션으로 밝혀낸 삶의 진실이란 지극히 인간적이다. 비움 없는 이음매의 압박과 무관하게도 세상에는 숱한 비의소적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너무 느리기 때문에 프레임 하나하나가 스틸사진처럼 인식되지만 또한 너무 느리기 때문에 각 프레임이 우리의 인식 체계 안에서 조립되어 하나의 '행위'이자 '의미'로 지어지는 데 시간이 조금 더 소요되고, 소통은 더딜 수밖에 없으며, 되려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아무리 느린 속도로 진행되어도 대비할 수 없는 충동과 위협은 진행되는 것이다. 당연히도 현실에서 그런 초미립의 움직임을 일일이 의식한다는 건 드문 경험일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제정신으로 살 수 없게 할 것이다.

빌 비올라의 또 다른 작품 <The Passing(지나가는 것)>(1991)은 살아 있는 것의 기본 조건인 숨소리를 증폭해 들려준다. 규칙적인 들숨, 날숨에 불과한 이 간명한 숨소리는 그것을 불필요하게 의식하게 만들며 숨을 쉰다는 것이 걸리적거리는 일이 되고 버거울 수 있음을 알린다. 음소거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까지. 그로 하여금 매 순간은 존재(숨 쉼)와 부재(숨 멎음) 사이의 사건으로 지각된다. 이 극단적인 저울질이 지속되는 동안 화면에는 반대로 구심점을 잡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이미지들이 나열된다. 시공간이 뒤섞이고 각자 다른 속도를 지닌 이미지들은 감긴 눈꺼풀 바깥에서 어른거리는 빛의 얼룩처럼 존재감은 있으나 구체화하지는 않는다. 거머쥘 수 있는 것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우리 인간은 끝끝내 파악할 수 없는 것들과 맞닥트리는 과정인 삶과 어떻게 호흡하는가, 묻고 있다. 물론, 이 질문을 의식하며 사는 순간 삶은 질식을 주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과정에서 유념할 건 카메라(프레임)의 고정성이다. 사각 프레임은 기본적으로 내외부를 구분하는 경계다. 그런데 언급했다시피, 빌 비올라의 작품에서 더 의식되는 건 현실과 허구 사이의 명제가 아니라 프레임의 고정되고 경직된 성격과 대치되는 만물의 특성이 화면 안에서 만들어 내는 변형이다. <불의 여인>(2005)에서 빌 비올라의 카메라는 하늘로 맹렬히 솟구치는 불을 응시하면서도 결단코 움직이지 않으며 가장 상공에 위치할 연기를 비추지 않는다. 태워 없애는(소멸) 불의 가능성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되려 그는 바닥의 물웅덩이로 추락하는 인간의 형상을 발생시켜 프레임 상부에 집적된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동시에 인물의 무게에 따라 상공으로 튀어 오른 물방울이 불과 시각적으로 맞닿아 생기는 경계면을 만든다. 그 순간 바닥으로 추락한 인간의 육신은 상태 변화하는 만물의 원리에 따라, 다시 말해 불과 물의 대치로부터 죽음의 절대성 아닌 다른 통로를 찾게 된다.

경계의 역량은 분간을 통해 하나가 절대적인 지배 구조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레임, 하나의 세계 내부에서 움직임과 부동성, 영화적 가능성과 회화적 가능성, 삶과 죽음 따위가 결국 한 끗 차이의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있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 사이를 넘나들며 달라짐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거나 그 불발을 겪거나, 바뀌고 변화할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형태를 수용하는 문이 열린다. <The Deluge(홍수)>의 물이 프레임 사방에서 무아지경으로 쏟아지는 광경을 보며 동시에 내면의 뭔가를 쏟아내는 듯한 경험에 휩싸이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몸으로 부닥치는 이미지에 고정된 눈길은 불안을 상정함으로써 '상처받을 수 있음'이라는 '인간 공통 조건'에 귀속되게끔 하려는 시도다. 아닌 게 아니라, 빌 비올라가 아래로 추락하는 형상을 역재생하고(<트리스탄의 승천>(2005)) 인물들이 얇은 커튼 앞뒤를 오고-가는 행위로부터(<세 여자>(2008)) 암시한 것은 '정화'의 가능성이었다.

 

ⓒ <The Deluge(홍수)>(2002)
<The Raft(뗏목)>(2004)

인간의 몸은 물질이고 눈에 보이는 실체이기에 영화의 경험에서 보는 이를 강력하게 홀리는 대상이다. 프레임의 경계 안팎에서 언어가 되고 번역의 위치에서 지각되어 왔다. 이 사실의 난관은, 단연 인간이 인간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신체를 소유한다는 것의 잔혹성을 모르지 않는다는 데서 온다. 누군가의 몸짓을 통제하는 일이 불가하듯그 함의를 완벽하게 해부하기란 불가하다(그것은 자기 자신도 불가하다). 언제나 확대 해석의 가능성을 요청한다. 일상의 차원에마저 너무나 많다 못해 쓸데없는 것으로 소거되는 몸짓이 늘어날 때, 가능한 동작을 덜어낸 몸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기원을 논한다는 건 결국 그 역설적인 지점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앞의 작품들은 몸, '-짓'이 말하는 바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무언가 말하고 있다는 믿음을 얻기 위한 황무지를 펼친다. 무엇도 수행하지 않을 때마저 어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아주 단순한 것일지라도 몸(짓)은 우리 존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짐'을 투사하는 일종의 스크린이다. 0의, 무엇도 띄우지 않은 고요(stillness)의 영화 스크린이 단지 발광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거기선 반드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듯이.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빌 비올라(Bill Viola, 1951~2024)는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현대미술에 혁신적인 족적을 남긴 미국의 작가이다. 197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그는 비디오 매체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의식, 생명과 죽음, 그리고 초월적 경험을 깊이 탐구하며 예술적 경계를 확장시켰다.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적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그의 작품은 감각적이며 영적 울림을 담아내며, 관객에게 강렬한 정서적 경험을 선사한다. 첨단 기술과 고속 카메라를 활용해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한 그의 작업은 비디오 아트를 순수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The Reflecting Pool (1977-79), The Passing (1991), 그리고 Five Angels for the Millennium (2001) 등이 있다.

빌 비올라는 그의 생애 동안 루브르, 테이트 모던, 구겐하임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이며 현대미술사의 중심에 자리했으며, 한국에서도 서울시립미술관을 포함한 주요 전시 공간에서 그의 작품이 소개되어 국내 관객에게도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2024년 타계하며 예술계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 편집장 주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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