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은 내게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장소다. 영화관은 완벽한 영화적 체험을 제공하는 곳이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인위성이 짙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빛이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고 내부 인구수가 한도에 다다르면, 물리적인 공간이 얼마나 넓고 높은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게 된다. 내 몸이 체감하는 폐색감이 이기면 그 완벽한 조건은 오히려 무소용이어서 도중에 영화 보기를 포기하게 되는 일종의 패배감을 경험한다는 것, 이런 이유에서 스크린이 주는 압박을 좀 더 자극적으로 느끼는 덕도 보았었던가.
어쨌든 이런저런 까닭에서 나는 직접 소유 가능한 모니터나 임의적 스크린으로 영화를 관람하는 방법에 호의적인 편이었던 듯싶다. 그러면서 장면을 일시 정지하고, 되감고, 반복 재생하며 선형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도착적인 매력을 알 수 있었고, 일시적으로 강제 침묵하게 된 동영상이 장면 단위, 쇼트 단위로 잘린 여운을 감각하도록 조력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당연히도 매번 그것이 영화 보기에 이점을 주는 건 아니다. 다만 개봉일을 기점으로 한 편의 영화가 한 시기에 집약적으로 이야기되는 그 가파른 호흡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영화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지, 볼 것인지의 문제가 확장된다는 사실은 중요해 보인다.
충분히 말해진 영화라는 건 존재하는가. 충분히 말해지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는 이런 너절한 물음으로 비평의 존재 목적이라는 성대한 주제를 건들 체력은 없다만, 적어도 한 명의 비평가의 존재 목적을 물을 때, 사소하고 하찮으며 미묘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영화의 세세한 파편들을 목격하는 눈이 무력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 연재에서는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애매한 시기에 위치한 영화를 꺼내놓을 예정이다. 한 작품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해지는 함의를 동어 반복하지 않기 위해, 차라리 지배적인 맥락을 해체하고 비약을 감행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학문적으로 갈고 닦아야 할, 그렇게 되어 온 훌륭한 고전을 학습하기 위한 창구로써 시도되는 비평과 다르길 바란다. 내러티브 요소로서의 영화의 사건과 다소간 거리가 먼 기호와 도상, 미학적인 요소에 의한 파편적 사건을 무시하지 않고 싶다.
다시 말하자면, 그 작은 파편에 집착해서, 관객과 작품 사이 발생하는 '지금 일어남(리오타르)'과 같은 의미에서의 사건을 경험하는 데 나에게도 하나의 좌석이 확보되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파편으로부터 영화에 대해 얼마만큼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나도 알지 못한다. 지금으로서는 영화를 읽는 하나의 경로를 살피는 것, 이것을 바랄 따름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