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나스 트루에바'의 영화에서 일상성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어쩌면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절'된 삶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단절은 요일과 날짜라는 구분 안에서 일기 에피소드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거나, 긴 시차의 공백을 거쳐, 혹은 픽션과 논픽션이라는 경계 사이의 침투로 인해 가능해진다. 물론, 그는 이를 통해 시공간에 대한 메타적 실험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는 일단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을 수집하고 그것에서 단절의 감각이 느껴지게 몽타주 한다. 가령 <어거스트 버진>(2019)은 에바의 일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려낸다. 요일과 날짜를 알리는 자막이 지나가고 다음 날의 평범한 일상이 펼쳐질 때, 우리는 그사이의 생략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와서 직접 봐봐>(2022)는 첫 시퀀스에서 다음 시퀀스로 넘어갈 때 6개월의 시간을 과감히 뛰어넘는다. 그리고 인물들은 기차를 타고 친구의 집으로 떠난다. 이 단절된 시간은 관조적인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하는 외화면 영역, 즉 인물의 행동을 추동하는 정서와 심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와서 직접 봐봐>에서 엘레나가 풀숲에서 볼일을 보다가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에 갑작스레 영화를 끝마쳤던 것처럼, 트루에바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2024)에서 행동과 이를 추동한 심리를 가늠할 수 없는 난데없는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두 남녀인 알레와 알렉스가 어두운 방 침대 위에 함께 누워있고, 이별을 이야기한다. 알렉스는 알레의 아버지가 말했던 '이별 파티'를 제안하고 알레는 이를 수락한다. <어거스트 버진>의 에바가 왜 피서를 떠나지 않고 마드리드에 남았는지, 그가 누구의 아이를 임신했는지 끝내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알레와 알렉스의 이별과 관련된 전사(前事)를 차단하고 과거와 단절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이별 이전으로의 플래시백도 이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현재를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시간을 뛰어넘어 플래시 포워드(flash-foward) 한다.
트루에바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구조에 대해 "교환하고 뒤바꿀 수 있는 조각(pieces that you can almost exchange and move around)"이라 설명한다. 극 중에서 영화감독인 알레는 트루에바의 이 문장을 실천하듯, 자신의 일상을 담은 영화를 이것저것 뒤섞고 재조합하며 편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에바의 영화는 서로 구분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트루에바는 이런 몽타주를 통해 실험적 소격효과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의 영화적 목표는 영화라는 허구에서 벗어나 실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삶, 허구와 실재를 거의 동일해질 때까지 밀어붙이고 그 경계를 혼동시키는 것이다. 현실과 극중극이라는 이중의 레이어 속에서 삶의 조각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이 '단절된 조각들의 반복성'은 영화가 일상을 묘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단절된 조각들의 반복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몇몇 숏은 이상한 방식으로 시간을 뒤섞는다. 이를테면 알렉스와 친구 둘이 함께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우선, 카메라는 대화를 나누는 알렉스와 친구들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는다(c1, three shot).
그리고 어느 순간 카메라는 180도 가상선을 넘어 정반대 편으로 가는 식으로 컷을 전환한다(cut to).
이제 프레임 안에 놓인 사람은 셋이 아니라 둘이다(c2, two shot).
친구 중 한 명이 자리를 떠난 것일까. 의문이 드는 순간 사라졌던 친구가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는다(c2, three shot).
하지만 그 친구는 실제로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시간 순서대로 따지면 c2-c1 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편집이 거꾸로 맞붙은 것이다. 즉, c1은 c2에 시간상으로 선행하는 플래시 포워드다.
알렉스가 친구 한 명을 데리고 바에 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씬이 시작되면 카메라는 바텐더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알렉스와 친구를 프레이밍 한다(c1, three shot).
그리고 어느 순간 카메라는 어김없이 180도 가상선을 넘는다. 이제 프레임 안에 놓인 사람은 바텐더뿐이다(c2, single shot).
알렉스와 친구는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일까. 다시 한번 의문이 드는 순간 사라졌던 알렉스와 친구가 바 문을 열고 돌아와 바텐더와 인사한다(c2, three shot).
하지만 알렉스와 친구는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이 또한 c2-c1의 시간 순서가 반대로 편집된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는 이 두 장면을 트루에바는 플래시 포워드의 방법으로 비선형적으로 편집했다. 그는 왜 아무런 극적 서사가 벌어지지 않는 일상적인 두 장면의 시간을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해야만 했을까.
이 플래시 포워드가 우리에게 주는 감각은 '단절과 반복'이다. 먼저 카메라가 180도 가상선을 뛰어넘었을 때. (cut to) 180도 규칙을 무시하는 불연속적 편집 또한 그렇거니와, 프레임 안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가 이전의 숏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 전환은 단절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후의 숏 안에 사라졌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왔을 때. 그것은 실질적으로 '다시 들어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면이 '반복되는 것만 같은 인상'을 만든다. 이 단절과 반복의 감각은 다분히 고다르적이다. 하지만 역시나 영화 속 영화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창조적 영화 언어를 내세우는 메타 영화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고다르가 점프컷과 180도 규칙의 파괴, 플래시 포워드 등의 단절과 반복을 통해 영화의 '영화됨'의 과정을 메타적으로 드러내고 소격효과를 일으켰다면, 트루에바는 일상을 소묘하는 사실주의적 방법으로서 '단절된 조각들을 반복'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다면 반복은 어떻게 일상이 되는가. 알레의 아버지가 알레에게 준 키에르케고르의 『반복』과 니체의 영원 회귀에 대한 언급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미국의 철학자 스탠리 카벨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 "결혼이 타자의 인정이라는 형이상학적 과제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일상의 수락, 즉 영원한 반복의 수락이라는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의 과제가 동시에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일상'이란 "근대 이후의 회의적 인간이 부딪히는 반복의 현실"이다. 근대인에게 일상은 곧 반복되는 사이클이며, 결혼이라는 제도는 그 반복되는 일상의 영원한 수용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명제 안에서 '반복-일상-결혼'이라는 도식을 도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도식은 트루에바가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위해 참고한 고전 할리우드의 재혼 코미디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트루에바는 영원회귀적인 반복이야말로 일상을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믿고 있고, 이는 그가 예측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중요한 지침이 된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에서 눈에 띄게 볼 수 있는 또 다른 반복은 유사한 상황의 반복이다. 가령 알레와 알렉스는 자신의 부모와 친구, 지인, 이웃들에게 자신의 이별 소식을 알리고 그들을 이별 파티에 초대하는 행위를 영화 내내 반복한다. 이 행위는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이별을 앞에 둔 이들이 끝내 재결합하는 유사-재혼 코미디이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보게 되는 것은 이별 파티의 정당성을 어떻게라도 남들에게 설득하려는 알레와 알렉스의 모습이다. 이들은 단순히 이별을 앞두고 고민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이별 파티라는 행위를 타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영화 내내 노력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들의 목적은 이별이 아니라 그 반통념적인 선택의 사회적 인정 자체로 느껴진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에 의심하고 사회적으로 수용되길 노력해야 하는 근대인의 초상이다.
이때 알레와 알렉스의 행위를 영화가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되짚어야 한다. 이 사실은 등장인물의 발화를 통해 영화 안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알레가 자신이 찍은 영화의 가편집본을 상영하고 지인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장면에서 한 지인은 영화가 너무 길고 반복적이라는 피드백을 건넨다. 극중극인 알레의 영화가 영화 본편과 구분할 수 없게 얽히는 부분을 떠올렸을 때, 이 피드백은 곧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라는 영화에 대한 메타적인 재인식이다. 트루에바는 이 자의식적인 비평을 통해 이 영화가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려 한다. 즉, 트루에바는 고다르를 상기시키는 단절과 반복의 몽타주를 통해, 그리고 유사한 행위와 상황이라는 시퀀스 단위의 반복을 통해 이중의 반복성을 영화 안에서 보여주고 있다.
삶이라는 반복 속에서
스탠리 카벨의 말을 다시 떠올려 봤을 때,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가 보여주는 이중의 반복성은 반복되는 일상을 소묘하는 트루에바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정은 아이러니하다. '반복-일상-결혼'이라는 도식이 보여주듯, 결혼/연애는 '반복되는 일상의 수용'이라 설명한 바 있다. 이와 반대로 이혼/이별은 그것으로부터의 단절이자 거부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알레와 알렉스의 결혼/연애 생활이 아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15년 동안 지속되었던 그 반복의 일상과 단절한 채 시작했다. 그렇다면 선언적인 첫 장면을 통해 반복의 일상을 벗어던짐에도 불구하고, 왜 영화의 형식 자체는 반복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반복에서의 이탈이 곧 또 다른 반복을 낳는다면, 이 반복의 반복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트루에바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반복되는 삶에서 일탈을 꿈꾼다. <어거스트 버진>의 에바는 피서 기간에 자신의 마을 마드리드에 남아 관광객의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일상을 겪는다. <와서 직접 봐봐>에서 도시에서 살고 있는 엘레나와 다니엘은 코로나 팬데믹 동안 교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긴 친구 부부의 집에 방문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이들이 명확한 욕망을 지니고 반복의 삶에서 일탈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삶'과 '일탈이라는 욕망' 양쪽에 발을 동시에 담그고 있다는 점이다. 에바의 몸은 마드리드라는 그의 일상적 장소와 연속되지만, 그곳에서 펼쳐지는 사건은 일상에서 탈출한 휴가의 성격을 지닌다. 또한 엘레나와 다니엘은 반복되는 근대 이후 도시의 삶에 만족하고 교외의 생활을 찬미하는 부부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6개월 뒤 어떠한 이유로 인해 교외로 떠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일탈을 꿈꾸기보다는 일상에 남아있는 와중에 일탈을 겪거나, 일상을 원하면서도 일탈한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알레와 알렉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이별한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트루에바가 할리우드 재혼 코미디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재혼 코미디에서 재결합은 반복되는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스탠리 카벨의 분석을 따져봤을 때, 이들의 이별은 따분하게 반복되는 긴 연애 생활 때문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별 선언을 통해15년의 반복된 일상에서 일탈하고, 이별 파티 계획을 통해 사회 통념을 탈피하길 시도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삶이라는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인생은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벗어날 수 없다. 알레는 그 사실을 '영화가 너무 길고 반복적이라는' 지인의 피드백을 통해 깨닫는다. 사실을 그대로 담아내려 할수록, 영화는 어떻게든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알레와 알렉스의 갑작스런 재결합 끝에 알렉스가 키에르케고르의 『반복』의 한 구절을 반복하여 소리 내 읽는 것은 끝내 반복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트루에바는 철학의 인용을 통해 영화를 지적으로 이끌어가는 작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렉스가 소리 내 읽은 키에르케고르를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 영화 내에서 등장하진 않지만 키에르케고르는 『반복』에서 이렇게 말한다.
반복은 근대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소임을 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반복은, 그리스 사람들이 상기라고 한 결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모든 인식은 상기라고 가르쳤지만, 새로운 철학은 인생 전체는 반복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근대철학자 중에서 이 점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사람은 라이프니츠 한 사람 뿐이다.
반복과 상기는 동일한 운동이다. 단지 방향이 반대라고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즉, 상기되는 것은 이미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뒤를 향하여 반복되지만, 진정한 반복은 앞을 향하여 반복된다. 그러므로 반복은, 만일에 그것이 가능한 경우라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만 상기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상기'의 개념을 '반복'의 개념을 대비시키고 있다. "상기는 뒤를 향하여 반복되지만, 진정한 반복은 앞을 향하여 반복된다." 이 말은 곧 트루에바가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편집한 방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플래시 포워드와 반복되는 시퀀스를 통해 미래를 향해 반복한다. 반복은 지나온 것을 돌아볼 때는 따분한 것이고, 앞으로 펼쳐질 것을 볼 때는 허무한 것이지만 그 사실을 긍정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반복을 충실히 살아 나가는 것뿐이다. 결혼은 그 끝없는 일상의 수용이다. 트루에바는 이 반복의 태도를 긍정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알레와 알렉스의 이별 파티가 한창인 현장이다. 사람들은 알레의 아버지의 집 마당에 모여 밴드의 공연을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리고 그 위로 크레딧이 올라간다. 하지만 의심을 놓칠 수 없다. 사실 이별 파티의 장면은 이전에 알레의 영화 촬영 현장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이별 파티 장면이 실제 이별 파티의 현장인지, 이전에 촬영한 알레의 영화라는 극중극인지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전자라면 우리가 보게 되는 엔딩은 영화의 시간상 가장 마지막 순간일 것이며, 후자라면 이야기의 한 가운데서 영화가 갑자기 멈춘 것이 되어버린다. 트루에바는 엔딩에서조차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선택을 통해 반복과 비선형적 플롯 속에 우리를 가두려 한다. 이 반복되는 영화라는 시간이자 삶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몇 번째 테이크를, 그들의 몇 번째 인생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 모호한 엔딩을 통해 트루에바는 영화와 삶, 허구와 실재를 거의 동일해질 때까지 밀어붙이길 시도한다. 이들이 파티 후에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레이디 이브>(1941)의 커플처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삶의 조각들은 어느 방식으로든 '다시 반복되리라'는 사실이다. 트루에바는 할리우드 재혼 코미디의 플롯을 빌려 근대의 회의적 인간이 마주하는 일상의 반복, 즉 결혼이라는 주제를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흥미롭게 구조화한다. 길고 반복적인 영화. 또는 그런 따분하고 허무한 일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으로서의 삶을 긍정하고 싶어지는 것은 이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엔딩이 주는 충만함 때문이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The Other Way Around
감독
호나스 트루에바
Jonás TRUEBA
출연
잇사소 아라나Itsaso ARANA
비토 산즈Vito SANZ
제작 Los Ilusos Films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 115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