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나스 트루에바'의 영화가 잔잔한 일상처럼 보인다면, 인물이 떠안은 근원적인 문제가 모호한 상태거나 문제를 배치할 장면이 미처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불확실하고 비결정적인' 일상의 연속 자체로 흐르며 거의 극 끝 무렵까지 인물의 문제를 제대로 터놓지 않는다. <와서 직접 봐봐>(2022)의 엘레나(잇사소 아라니)는 저녁 약속 후 귀가해 때늦은 허기를 채우는 다니엘(비토 산즈)을 의중을 살피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괜찮다는 거짓말뿐이다. 그들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이행하면서 본격적인 대화로 유입되지 '않'으려 애를 쓴다. 하지만 대화 도중 무언의 순간이 발생할 때면 인물도 관객도 본능적으로 무언가 위태롭다는 신호를 감지한다. 물론 직감에 불과한 신호를 대신하는 단서는, 끝맺어지지 않은 대화 끝 카메라가 엘레나의 시선을 따라 조용히 가리킨 다니엘의 조그마한 낙서("와서 직접 봐봐(TENEIS QUE VENIR A VERLA)")에 그치긴 하지만 말이다.
그 때문에 기복 없이 진행될 것 같던 호나스 트루에바의 영화 앞에서 우리는 표현하기 어려운 막막함과 어색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또는 지나간 시간 속에 자리한 씁쓸함과 공허를 읽어내게도 된다. 트루에바는 책과 음악 같은 예술품에 묵묵히 몰두한 인물을 배경 일부로 섞어내려 하고, 허공을 응시하는 얼굴을 뒤잇는 리버스 숏을 자주 생략하면서 기저에 깔린 기류를 좀처럼 직접 나타내지 않는다. 장면은 어떠한 열의로 고양되었다가도 인물을 에워싸는 이질적 감각 앞에 운동을 멈추고 감정적 흔적은 잔상처럼 남곤 한다. 우리는 시간의 지속으로 매개되는 극의 진행과 함께 이끌려 다닌다. 이로써 우리는 적당한 관심/무관심 사이의 불안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렇다고 해서 작중 인물들이 요동치는 내면을 무작정 억누르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보단 문제의 원인을 탐험 '중'이기에 잠잠한 쪽이다. 인물들은 공간을 이동하며 하염없이 걷고, 남들과 동떨어진 듯 굴고, 스스로를 적막 속에 가두면서 끊임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 사색적이고 모호하며, 한편으론 단속적인 영화의 겉모습이 자기 내면의 성찰 또는 투영에 몰두한 형태라는 점은, 인물이 무의식중에 새긴 낙서처럼 여러 장면을 거쳐 느슨히 되돌아온다.
인물이 처한 사건과 문제의 쟁점을 감추거나, 혹은 미루어 제시하는 트루에바의 특징은 단연 의문을 고조시키기 위해서도, 대미를 장식하기 위한 장치도 아니다. 그는 '확신'을 경계하며 단번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문제를 탐구하는 자(moralist)이다. 하루 단위를 낭비 없이 감각하고, 주어진 공간을 신중하게 관찰하던 끝에 지각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펼쳐낸다.
이를테면 <어거스트 버진>(2019)은 15일간의 일상을 큰 굴곡 없이 담아낸 영화다. 주인공 에바(잇사소 아라니)는 느긋한 여행객의 행색으로 등장해 낯선 이들과 만나고 해본 적 없던 것들을 시도하며 그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따금 물 위로 내던져지고 상대와 뺨 한 대씩을 나누는 육신의 통각 따위로 정신이 확 깨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도통 그녀가 깨어나야 하는 그것은 알 수 없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에바는 중얼거린다. "내 생각에 내 문제는... 내 생각에 내 문제는... 생각해 봤는데... 봤는데... 임신했다는 거예요. 근데... 난 안 돼요. 깨어있어요?" 에바의 말이 뜬금없는 폭로처럼 들린다면, 반복하건대 그것은 장면의 표면적 힘과는 상관없다(그녀는 일순간의 융합이 지나가고 심연으로 서서히 가라앉으며 말한다). 극 어디에서도 내비치지 않고 자기 안에 품고 있던 생각을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더 정확히는 비로소 깨우치며 외부로 표출했다는 사실이 관건이다.
오로지 그 생각 하나를 말해내기까지 걸린 긴 시간(러닝타임), 과도한 반복 그리고 머뭇거림('...')은 트루에바 영화의 본질을 설명해 내고 있다. 특정하게 정해진 하나의 문제,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에 관여한 문제를 긴 시간, 일평생 고심하는 인간의 사유 능력, 그리고 이를 통한 영화적 사유의 형식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에 대해서/관해서' 직접 알고 싶어하는 인물들의 양상은 감독 스스로가 전통적 영화 형식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몸소 실천해 알고자 한 결과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구분을 해체한 <누가 우릴 막으리>(2021)에는 '영화'의 실체를 묻는 트루에바식 사유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며 그것에 참여하는 대상으로 선택한 이들이 격동적 변화 시기의 청소년들임은 더없이 적합하다. 그들은 끝없는 질문과 회의감으로 휩싸이는, 스스로 어떻게 표현되려는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각하는' 존재다. 예컨대 아이들이 길거리에 어정쩡하게 멈춰서서 열띤 토론을 펼치던 장면을 상기해 보자. 아이들은 영화란 극적인 사건을 덜어내고 '그냥' 있는 그대로인 '자신'의 문제에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사유의 놀라움은 그것이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과정과 지식체계를 습득한 것이 아닌) 오직 인물들 자신이 살아온 경험의 파편들을 토대로 발설되었다는 점에 있다.
<와서 직접 봐봐>에서 엘레나가 저명한 사상가의 조예(페더 슬로터다이크의 저서『당신의 삶을 바꿔라』)에 심취해 여러 번 언급하고 급기야 그의 저서 속 구절을 직접 소리 내 읽기까지 할 때, 그녀가 표하는 여운이 어딘지 지나치게 느껴진 이유를 알 것 같다. 다른 이들이 저마다 이해한 내용을 덧붙이며 호응하지만 그것이 마치 애쓰는 것처럼 다가온 이유도 알 수 있다. 인물이 문장의 의미를 깨닫고 감탄하는 데 이른 시간은 우리와 같을 수 있을까. 이 영화엔 수많은 진리와 그에 대한 감탄, 깨달음이 있지만 재빠르게 지나가는 장면을 통해 관객은 작품이 '자기를 보며 말을 건 것 같았다'는 인물의 경험을 동등하게 얻을 수 있는가, 트루에바는 묻고 있다. 그는 우리가 같은 종류와 강도의 감상에 빠지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절대적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영화적 작업을 통해 그 진리를 몸소 경험하고, 해체하여 실천하며 이를 관객에게도 권유한다. 기예모르(프란체스코 카릴), 수사나(아이린 에스콜라)가 그들의 시골집을 방문한 엘레나와 다니엘에게 공간 구석구석을 설명할 때의 패닝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인물의 설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돌연 화면을 벗어나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려는 인물들의 무의식을 따르는 쪽이다. 분산되고 유동적인 동선은 이따금 큰 이유 없이 멈춰서는 인물들의 몸짓(가령 사진을 찍거나, 신발을 고쳐 신거나, 가시에 찔린 발을 살피는 등)을 수용하며 '와서 직접 봐봐'하는 대사를 극 바깥(관객)으로까지 흘려보낸다. 간과하기 쉬운 이 가벼운 인사치레는 초점화를 방해하여 '직접 보기'를 극 안팎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감독의 야심이자, 동시에 영화예술 속 '와서 직접 보기'의 가능성과 부진함을 진단하려 한다.
이러한 점은 단연 트루에바의 영화 속 고독의 정서와도 연관된다. 자신의 괴로운 일을 털어놓으려는 이 앞에서 무신경한 태도로 일관하는 인물들의 양태는 일시적인 소통의 오류라고 볼 수 없는 삶의 근원적인 상념과 맞닿아 있다. 가령, 유산 경험을 이야기하려는 수사나의 말을 들은 엘레나는 상대의 문제를 일일이 인류 보편의 문제로 치환해 반응한다. 대화에 깊이 유입되지 않으려는 그 무의식 이면에는 아이가 있는 가족의 풍경을 상상하기 어려운 엘레나, 다니엘의 삶이 있다. 물론 감독은 이 역시 명료하게 알리지 않는다. 대신 대화 도중 인물들이 상대 눈에 띄지 않게 살짝 고개를 틀어 지어 보이는 무표정을 장면 곳곳에 심어둔다. <누가 우릴 막으리>가 '혼자 남겨질 때면 생각을 멈출 수 없다'고 전할 때, 그것이 적어도 물리적인 고립을 가리킨다면 <와서 직접 봐봐>에서는 그 물리적 경계를 깨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표정을 관리하는 일처럼 그의 인물들은 나란히 앉아 틈틈이 자기 고독과 마주하곤 한다.
엘레나가 무언가에 홀린 듯 때에 맞지 않게 "가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하고 자신의 진짜 문제를 털어놓는 시기는 거기 담긴 방황의 요체를 신중히 살피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는 영화의 엔딩이다. 앞의 대사는 인물이 관념체계에 그토록 몰두해 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변을 보기 위해 수풀을 헤집는, 다소 뜬금없는 인물의 몸짓과 함께 산만하게 흩어진다. 이는 <어거스트 버진>의 에바가 자기가 내뱉은 말을 누군가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거의 도망치다시피 사라졌던 엔딩을 상기시킨다. 이쪽저쪽으로 우왕좌왕하며 스크린 속에서 퇴장했던 배우 잇사소 아리니는 엘레나의 모습으로, 또다시, 발설된 자기 내면을 혼자서 거둬들이는 방식으로 독백을 해낼 뿐이다.
그런데 <와서 직접 봐봐>는 인물이 자리를 피하는 모습 뒤에, 인물 내면의 생각이 인물의 현재 상황을 지시해 주는 묘한 광경을 덧붙여 보여준다. 그러니까 표현 그대로 '난데없이' 수풀에 웅크리고 앉아 소변을 보는 이 상황. "가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하는 대사는 정말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하는 어처구니없음의 표현으로 변모해 들리기도 한다. 물론 앞의 대사가 소변을 보는 상황에 적용되는 건 일시적인 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녀의 실존적인 문제가 내포된 대사의 실질적 무게와도 너무나 다른 상황인 것도 맞다. 다만, 어쩌면 엘레나가 소변을 누던 도중 터트린 웃음은 너무도 일상적인 생리적 행위 앞에 놓인 자기 모습을 인식하자 찾아온 어떤 깨달음의 표식일지 모른다. 논리정연한 일반화된 명제로는 다 알 수 없는, 혹은 그 명제의 세부에는 우발적 일상의 리듬, 인간의 지극히 사소하고도 생물적인 욕구 해소의 순간들, 그리고 언어가 삶을 앞서서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가 하면 엘레나의 실존적 두리뭉실함, 자기 무위에 대한 사유는 <와서 직접 봐봐>의 오프닝 장면의 이해로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오프닝에는 네 인물을 각각 담은 네 개의 원 쇼트가 차례로 나열된다. 엘레나, 다니엘, 수사나, 기예모르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화면을 차지하면, 관객이 몇 분 동안 한 사람을 바라보게 만드는 구성이다. 그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원 쇼트 안에서 마치 혼자 있는 듯이 행동한다. 저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거나 감정을 자유로이 얼굴에 드러내는 모습은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을 때 가능한 종류에 가깝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는 허구적 구분선(영화의 프레임) 속에 놓여진 인물들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분리되었다고 착각하게 되지만, 실제 인물들은 하나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상태이므로 분리된 것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들이 마치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이유, 또는 그런 효과를 만들어 내는 건 그들이 관람 중인 공연의 피아노 연주곡이다. 이따금 우리는 훌륭한 예술(품) 앞에 섰을 때, 주변을 의식하지 않게 되고 자기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어디에 위치하는지 따위를 가뿐히 망각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저 먼 곳의 기억을 불현듯 떠올리거나 지금의 '내'가 처한 현실 속 무언가가 달라져야만 한다는 강렬한 직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엘레나는 언젠가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더 이상 허구적 예술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오프닝을 보며 관객 또한 모종의 감흥을 느낄 수 있다면, '영화'를 통해 그런 순간을 경험해본 이라면 (수사나가 반박했듯) 여전히 예술에 힘이 있다고 반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트루에바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뒤섞는 식이지, 허구적 요소를 제거하거나 불신하는 이는 아니다. 오히려 허구 속에서만 표상가능한 인간의 정신, 감정, 의식, 존재 행위 등이 중요한 트루에바에게 있어 '영화'는 그렇게 실체가 모호한 것들을 시청각적 형태로 볼 수 있고 바깥으로 드러내 주는 물질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트루에바는 극의 마지막 순간을 말끔히 봉합하는 법이 없고 갑자기 막을 내린다. <와서 직접 봐봐>의 마지막은 어떠한 전조적 낌새 없이 촬영 현장을 녹화 중인 메이킹필름 영상의 실재적 질감으로 전위되며 이쪽(극영화, 허구)에서 저쪽(다큐멘터리, 실재)으로 옮겨가는 영화적 운동이 발현된다. 그리고 이는 거기서 더 나아가 관객의 현실이라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접속하는데 그럼으로써 영화가 끝이 난다기보단 멈춤, 일시 정지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쪽 같다. 즉 그에게 크레딧은 영화라는 거대한 물질의 뒤에 마침표가 아닌 줄임표를 붙이는 것과 같다. 영화예술을 통해 전하고자 한 함의 다음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질 또 다른 사유의 영역을 남겨 두는 것. 인물이 품고 있던 생각이 외부로 뚫고 나오고 공유되려는 찰나 급격히 모든 영화적 활동을 머뭇거리게 만들 때, 바로 그 찰나에 우리의 사유 체계 역시 일시 정지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그렇게 꺼졌던 인식이 다시 켜지는 것을 조금씩 느끼며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던가. 이는 트루에바의 영화가 막을 내린 이후, 무언가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며, 미처 다 알아내지 못했을 때의 미심쩍음을 안기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 존재는 생각을 멈출 수 없을 때만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갈피를 잃을 때, 더 이상 알고 싶은 것이 없고 알아내야 하는 것이 없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무와 공허함에 휩싸이기도 한다. 트루에바는 그 지점을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듭 말하건대, 그의 영화 세계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문을 끝없이 거머쥐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유 능력의 무능력과 불필요함을 더욱이 염려하는 것, 트루에바의 영화적 사유 형식은 이것에 관한 실천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