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글레이저] 보이는 것 너머, '은밀함'에 대하여
[조나단 글레이저] 보이는 것 너머, '은밀함'에 대하여
  • 변해빈
  • 승인 2023.05.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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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세계에서 불발되어가는 욕망의 위태로움"
ⓒ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2023)

'조나단 글레이저'(Jonathan Glazer)의 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2023)가 제76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후보로 공개됐다. 그의 10년 만의 신작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둘러싼 외곽 지역에서의 삶을 그린 이 영화는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전작 <언더 더 스킨>(2013)에서 예견되었듯 '그가 원작을 얼마나 담아냈는지'는 미지수다. 공개된 신작의 스틸 역시 학살과 테러의 역사를 담은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 좀 다른 인상을 준다. 호수와 구름과 들판, 인물들의 자유로운 몸짓,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한적함.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영화에 관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써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는 보이는 것 너머 '은밀한 영역'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로라(스칼렛 요한슨) ⓒ 영화 <언더 더 스킨>(2013)

1.

조나단 글레이저의 영화는 '겉'과 '속'이 다르다. '외피'가 주는 인상은 '내막'의 무언가와의 관계성을 거치지 않고선 말해질 수 없다. 그의 세계는 사후 개념과 우주와의 접목으로 그 외연이 확장되는 듯하지만,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서사적인 줄기는 한 줄로 요약될 정도로 간결하다. 거친데 유약함이 동시에 나타나고, 건조한 풍경이 위태로운 정조를 에워싸는 데서 오는 일련의 긴장에 관해서도 그렇다.

이를테면, 갱스터 일당의 대립을 그린 <섹시 비스트>(2000) 속 인물들의 과격하고 매몰찬 언행은 내면에서 치솟는 나약함을 감추려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덩치를 부풀린 육체나 신체 훼손을 묘사하는 각종 욕설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상대에게 애원하는 안쓰러운 형국으로 전락한다. <탄생>(2004)의 '안나'(니콜 키드먼)는 어느 날 죽은 남편 숀의 환생체라고 주장하는 열 살짜리 아이 숀과 만난다. 아이는 생김새가 닮지도 않았고 안나와 그녀의 약혼자, 주변인들은 아이의 말을 터무니없이 여기면서도 관계가 비틀리고 만다. 안나는 불가능한 그것을 내심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겹겹이 외피를 쌓았다가 또 겹겹이 내막을 찢어발기는 형태는 <언더 더 스킨>에서 강화된다. 인간의 피부를 인형 탈처럼 입고, 인간을 사냥해 식량으로 삼던 에일리언 '로라'(스칼렛 요한슨)는 신체에 가해질 수 있는 가능한 여러 폭력의 종류에 시달린 뒤 죽음을 맞는다. 그 죽음에는 인간의 껍데기와 속의 본체가 적나라하게 분리되는 사건이 개입되어 있으며, 전폭적으로 잔인한 이 풍경은 분리에 의한 비대한 고립감 안에서 성립된다. 시야는 더없이 황량한데 내면은 폐쇄적으로 닫힌 상태에서 감지되는 은밀한 욕망이, 글레이저 영화에서 사실상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테두리에 가두어진 욕망은 겉으로는 격정적으로 요동칠 것 같지만, 그 출처를 하나씩 파고들어 가면 심오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안기고야 만다.

글레이저의 영화에서 겉과 속의 극명한 차이가 혼용된 이미지는 단연 영화 속 인물들의 육체성을 통해 강조된다. 가령 유연하고 관능적인 근육의 움직임이 뻣뻣하게 경직된 몸과 연이어 배치되며 변주를 일으키는 형상 따위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는 단지 표면에서 느껴지는 인상에만 그치지 않는다. 글레이저는 아이와 성인, 인간과 괴물적인 것, 남성성과 여성성, 현세와 내세 등의 서로 다른 리듬이 혼용된 피조물을 통해 외피에서 상상되는 질서를 무너트린다. 그것은 육안상의 그로테스크함과는 전혀 다르다. <탄생>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온 인물의 형상 중 하나는 '아이가 그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미동 없이 앉은 모습'이었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아이 숀을 둘러싼 아우라는 너무 무겁고 음울한 나머지 흡사 어떤 죽음 앞에서 절로 묵언하게 될 때의 위력이 느껴지는 정도다. 그건 아이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무언가, 다시 말하면 순수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슬픔이 아니라 슬퍼할 기력조차 잃어버린 쇠약하고 때묻은 세월의 흔적에서 비롯된다.

그런 이유에서 글레이저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직접 볼 수 없거나 현실성의 원리에 의해 숨겨지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호기심이다. 몸속, 물 밑, 바닥 아래의 가시적 공간을 경유해 나타나는 인물의 내적 욕망은 실체가 없는 대상을 마주하기 위한 감독의 욕망이다. 그의 영화는 인물의 저 밑바닥의 과거를 헤집는 소동으로 시작된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바위가 수영장 밑바닥을 부수는 <섹시 비스트>의 첫 시퀀스는 선언적이다. 파괴된 바닥은 현재의 호화스럽고 편안한 생활의 지반을 무너트릴 것을 암시한다. 갱스터로의 삶을 청산한 갤에게 작전에 복귀할 것을 종용하는 던은 그와 주변인들이 잊고 싶은 난잡한 과거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그를 자극한다. 여기엔 진실의 숭고함이라곤 없는데, 이미 갤과 주변인은 서로의 과거를 전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폭로에 의해 더 큰 고통을 받는 쪽은 폭로의 주체인 던이다. '회피'가 상대의 어두운 과거를 용인하는 '사랑의 몸짓'이라면, '폭로'는 사랑을 과거적인 것으로 부정당한 이의 '폭력의 언어'이다. 즉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청산할 수 없는 은밀한 과거를 가시화하고 그 뿌리에서 자라나는 또 다른 은밀함의 확장을 말한다. 끝내 갤은 무의식 속에 묻어둔 악의 본성과 대면하며 살인을 저지르고 이 과거를 지님으로 하여금 은밀함의 영역은 넓어진다.

 

안나(니콜 키드먼) ⓒ 영화 <탄생>(2004)

글레이저의 과거는 전생 개념으로까지 파고든다. 극의 시작과 끝에는 공통적으로 죽음과 태어남, '죽다 살아난 몸'이거나 재탄생하는 설정이 가미되어 있다. 전생이 탄생 이전의 과거에 해당되는 생애라고 할 때, 그의 영화는 전생의 기억을 품으며 열린다. 그런데 이를 가장 전면적으로 이야기한 <탄생>에서 아이의 환생은 기억력에 의한 일종의 해프닝으로 밝혀진다. 안나와 남편이 주고받은 편지 속 내용에 깊이 빠진 탓에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망상증을 앓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내막을 깨우치게 된 계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아이는 편지에서는 알 수 없는, 숀의 또 다른 숨겨진 비밀 곧 외도 상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아이는 이 사실을 안나에게 알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생긴 은밀한 비밀은 윤리성의 문제에서 아이를 통해 숭고한 사랑의 언어로 변모한다. 하나는 아이가 주체성을 탈환하고 삶을 복원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안나의 과거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환생체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글레이저의 영화에서 사랑의 실패는 삶의 실패이고 따라서 죽음의 신호가 된다. 아이가 지킨 비밀은 (환생체인) 자신을 죽이는 일이지만 다른 이의 삶은 지킨다. 일방적인 사랑의 감정을 넘어서 슬픔을 통한 타자와의 동일시가 이를 가능케 한다. 슬픔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성과 가까운 욕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글레이저는 초월성에 대한 접근을 통해 결국은 육체적 감각의 수용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위태로움을 말하려한다.

글레이저의 영화에서 불멸성은 유한성을 깨우치게 하기 위한 화두로 쓰인다. 이를 통해 그는, 죽음의 위협을 받는 순간 바깥으로 뚫고 나오는 존재의 본성을 보려 한다. <언더 더 스킨> 속 로라의 죽음은 자기 전생을 망각한 것에 대한 대가다. 오프닝 시퀀스는 그녀가 인간의 언어와 체계를 습득하며 인간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때는 이미 그녀가 죽은 인간의 피부를 입은 이후다. 구름 사이로 불빛이 번쩍이며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컷은 있지만, 에일리언의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배제되어 있다. 또 <섹시 비스트>와 <탄생>에 비해 과거의 직간접적 출몰도 없다. 문제는 과거의 자리가 밀려나듯, 로라 또한 점차 자신의 본분과 정체성, 이를 아우르는 전생을 잊으면서부터 발생한다. 로라에게 전생은 에일리언으로서의 삶이며, 그녀는 인간의 외형으로 다시 태어난 유사 환생체다. 그리고 영화는 외피가 그녀의 전생을 덮쳐버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냥터(도심)에서 이탈해 산기슭의 작은 마을에서 펼쳐지는 후반부의 로라는 바람에 휘청이고 두려움에 떠는, 사랑을 요청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점점 인간성을 갖추고 인간으로 진화한다. 그런데 그녀가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만의 은밀한 영역이 있다. 그것은 피부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내막, 인간의 신체 내부이다. 그 안에는 에일리언인 본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라는 인간과의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고, 전술했듯 죽음이 기다린다. 인간을 죽이던 에일리언이 그를 겁탈하려는 인간의 폭력에 의해 죽는 결말은 관계의 역전에 대한 중요한 사유를 유도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보다 이 마지막 순간, 찢어진 외피에 의해 에일리언의 본체가 강제 이탈되고, 이로써 그가 '인간으로서' 죽지 못한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싶다. 그런데 이것은, 거듭 강조하건대 표면적인 상황에 의한 인상에 불과하다. 에일리언의 실질적인 죽음은 인간적인 성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에일리언은 찢어진 외피의 얼굴을 보느라고 방심하다 불태워져 죽는다. 두 얼굴의 대면은 죽은 인간의 얼굴과의 대면이 불발된 오프닝과 비교된다. 에일리언은 이제 죽음과 상실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레이저에게 인간성이 곧 초월성의 다른 이름이라면, 죽음이 다가오는 이 순간의 이탈은 좀 다른 층위에 있다. 다시 말하면 강제 탈피된 에일리언의 이 응시에는 몸의 겉과 속의 경계를 구분하는 거리감이 없다. 자기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스스로의 죽음을 자각할 때의 허망함이 짙다. 이것은 내가 죽었다는 허망함, 그것이 과하다면 내 삶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글레이저 세계의 겉과 속의 동일시에 대한 욕망은 유체 이탈, 즉 죽음이 불가항력적으로 따르는 일이다.

 

ⓒ 영화 <섹시 비스트>

2.

결국, '내막'에 대한 글레이저의 강박은 그것을 모두 '바깥'으로 드러내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죽음의 과정을 모조리 지켜보게 하기에 굉장히 적나라하고 난폭하다.

'갤'(레이 윈스턴)의 구타로 시작된 <섹시 비스트>의 죽음은 '던'(벤 킹슬리)을 향해 총을 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여러 장면을 우회한 뒤 다시 구타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심지어 던은 단번에 죽지 못하고 인물들에게 차례로 맞아서 죽는다. 죽음을 확정하기 전까지, 던이 죽는 장면은 잘게 분절한 형태로 갤과 갱스터들의 대화 사이에 마구잡이로 틉입한다. 의심하는 자의 상상처럼도 보였다가 실제 과거를 떠올리는 갤의 기억으로도 보인다. 죽어가는 던의 시점 쇼트와 그를 죽이는 이들의 시점 쇼트가 불규칙하게 뒤섞여있다. 이에 비해 <언더 더 스킨>의 죽음은 그것이 극도로 조용하고 말끔해서 섬뜩하다. 포획된 인간은 의문의 점액질 속에서 피부만 남긴 채 형체 없이 부패된다. 에일리언의 육신은 모조리 타들어 간 뒤 연기로 흩어진다. 게다가 그 죽음은 지켜보는 이마저 없다. 인공적인 기계의 결합을 연상케 하며 탄생한 피조물은 영화의 끝, 물리적인 육신이 소사되고 압도적으로 가벼운 자연물의 질량만을 남긴다. 이러한 형상은 <탄생>의 성인 숀의 죽음에도 있다. 카메라는 조깅하는 숀의 뒤에서 거리감을 벌인 상태로 그가 길 위로 푹 쓰러지기까지의 과정을 가만히 뒤따른다. 그 뒤로도 별다른 반응 없이 곧장 10년 후로 이동한다. 더없이 분명한데, 그러므로 탄식을 터트리게 하는 음울함이 짙다.

글레이저 세계에서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인상은, 화면 속의 인간이 만드는 반향이 과도하게 작거나 아예 제거된 대신 자연 풍경의 존재감이 비대한, 그 차이에서 온다. 에일리언과 숀의 죽음은 주변에서 흩날리는 눈송이나 불에 타들어 가는 나뭇가지의 마찰음에 묻혀버릴 정도로 존재감이 위태하다. 바다와 숲, 바람과 눈과 비와 운무를 담은 글레이저의 풍경은 빽빽하게 군집을 이루거나 뾰족하고 날카로운 절대적인 자연 그대로의 형상을 띠고 있어서 위협적이고 불쾌하다. 그 풍경 안의 인물들은 기구하고 초라하며, 극도로 고립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글레이저의 자연 풍경은 인물의 위태로운 감정을 대변하는 듯 보이지만, 조화롭기보다 오히려 화면에서 인물을 밀어내거나 삼켜 없애면서 통제한다. <언더 더 스킨>의 숲은 인간을 피해 도망친 에일리언을 은닉해주기보다 어떤 위험과 폭력을 묵인하는 음침한 장소다. 글레이저의 물은 혼탁하고 몸을 짓누르는 무게감이 있고(<섹시 비스트>, <언더 더 스킨>) 혹은 우는 인물을 수용하지 못하고 냉담하게 돌려보내거나 겉돌게 하는 바다가 된다(<탄생>, <언더 더 스킨>). 파도의 난폭한 성질은 인물의 소리와 모습을 순차적으로 덮어 없앤다. 고정된 한 화면 안에서 관객의 시선을 이동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인물이 존재감을 잃고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드넓게 펼쳐진 풍경을 향해 시선을 돌려버리게 된다.

   

고요하고 평온하게 감지되는 자연의 풍경은 자연스럽고 비정하고, 무엇보다 은밀하게 인물을 소멸시킨 뒤의 흔적이다. 그런데 자연의 시간관과 규정성을 깨며 시작한 그는 어째서 그 자연스러움에 굴복하고 무너지는 형상을 보고야 마는 것일까. 이것이 영화의 욕망이라면 우리는 어떤 속내를 보게 될 것일까.

 

 

우리의 시선 이전에, 인물들의 반응이 있다. 인물들은 우발적으로 벌어지거나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기이한 포용성을 보인다. 다른 국면으로 치닫는 경계의 타격감에 비해서 마치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다. 가장 거칠게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섹시 비스트> 역시 전반부는 '갤이 던의 종용을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물음을 축으로 진행되지만, 후반부에서 갤은 작전에 당연하다는 듯 합류해 있다. 무엇보다 이 전환점에는 갤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던의 죽음을 조직에 감추기 위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글레이저는 전반부의 쓸모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정도로 자연스럽게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그 경계에서 글레이저의 인물들은 그들이 처한 특정 상황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인다. 뜻밖의 사실을 압도적으로 믿어버리고 허망하게 존재를 상실한다. "그것은 달리 어쩔 수 없고,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나가 거듭 강조한 이 말은 글레이저의 세계를 관통한다.

이러한 인물들의 무방비함은 이야기 구조의 허술함과는 다른데, 아마 보이지 않는 시간의 경과 때문인 것 같다. 허황된 무언가로 상대를 설득해야 하고 또 믿어버리는 인물들에게 시간의 경과는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글레이저의 영화는 서사적인 골격을 설명하기 위해 인물들의 관계성을 단계적으로 증축해가는 과정에 비해 구체적인 시간의 경과가 모호하다. 낮과 밤의 구분은 있지만 하루가 흘렀는지 한 달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는 <탄생>에서 숀의 죽음 다음, '10년 후'라는 자막 하나로 시간의 폭이 거대하게 접혀버린 탓에 안나의 지난 과거를 우리'만' 알지 못하는 문제와 같다. 다시 말해 감독은 인물들이 고립되고 폐쇄된 시공 속에서 혼자 버틴 외로운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 해묵은 외로움이 무방비함의 기제로 작동한다. 안나가 예정된 결혼식을 마친 뒤 울면서 바다로 향하는 <탄생>의 마지막 장면은 '느닷없다'라는 말과 어울린다. 모두가 아무 일 없이 끝이 났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엔딩은 '당연한' 것이다. 안나에게 그것은 없던 것처럼 여겨질 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통을 나만 알고 느낀다는 것, 고립되고 폐쇄된 글레이저의 세계에서 죽음과 상실은 존재의 절대적인 외로움의 표상이다. 죽음은 홀로서기이고 끝내는 주체가 주체성의 지배를 벗어나 스스로를 상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결되어 있던 스스로와 분리된 절대적 소외자의 맨얼굴로까지 글레이저의 은밀성에 대한 사유는 심화된다.

그러므로 외딴 시간 안에서 인물들이 엉뚱한 안도감을 느끼거나 헛된 욕망을 품어버리는 건 불가피해 보인다. 공상적이고 허구적인 관념으로부터 구축한 세계의 테두리 안에서 글레이저는 욕망이 불발된 존재의 은닉할 수 없는 내면의 초라함을 응시하게 만든다. 시간감 대신 추위와 더위의 계절감이 짙고, 그 안에서 인물들은 열병을 앓거나 누군가의 체온을 갈구하는 빈곤한 이미지다. 영화는 욕망의 대상의 소유와 동일시가 애초에 불가능함을 지시하며 시작한 바 있다. 갤에 따르면 '사랑스러운 곳은 죽여주는 곳'이며 '환생 같은 건 안 믿는다'는 숀의 목소리로 영화는 열린다. 실패와 위험 요소에 대한 인식 체계를 갖추며 (재)탄생한 에일리언은 죽음을 무정하게 대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직면하는 마지막은 복선이자 암시이고, 역설적인 욕망의 대가다.

그리고 이것으로 글레이저가 자극하는 건 연민의 정서다. 평온한 삶을 되찾아 귀가하는 갤의 모습은 이상한 위화감을 준다. 조직의 보스에게 고작 20파운드를 받은 그는 밤거리에 쫓겨나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돈보다 그를 한없이 작게 만드는 건 살인을 숨기려던 마음, 치부를 들켜서다. 그의 부끄러움은 아내를 생각하며 훔친 귀걸이 두 짝을 만지작거리는 작은 손짓 하나로 애잔한 풍경이 된다. 매정하게 돌아선 약혼자 앞에서 안나가 애원하는 건 고작 과거와 달라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가 끝내 우는 안나를 끌어안은 건 불가능한 삶을 욕망하는 이를 안쓰럽게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다. 사랑의 이미지는 <언더 더 스킨>에서도 겁먹은 상대를 걱정하고 안심시키는 보살핌의 차원으로 그려진다. 우리가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면,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상대 앞에서 무방비가 되어 무너져버리는 형상 때문이다. 다른 이의 고통을 인식하는 원초적인 연민의 시선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의 나약함과 무너짐을 감싸려는 영화의 욕망이다.

 

ⓒ 영화 <탄생>(2004)
ⓒ 영화 <언더 더 스킨>(2013)

글레이저 세계의 모든 육신은 적나라한 이미지로 보는 이의 시점과의 동일시를 추구한다. 육신은 숨겨진 사실의 매개물이다. 그런데 얼굴은 은닉의 이미지이며 비가시성의 영역으로 기능한다. 그는 클로즈업한 얼굴을 화면 안에 가득 채워 넣고 그것을 가장 불투명한 막으로 만든다. <탄생>은 공연장의 군중 속에서 안나의 얼굴을 찾아 거대하게 확대하고선 단지 그녀의 정면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이 카메라의 작동은 숀을 생김새로 구분할 수 없는 상황과 대치되며, 타인을 향한 시선의 권력이 작동할 수 없음을 말한다. 말없이 얼굴의 마주봄만으로 일련의 대화를 나누거나 스크린을 외려 비워내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얼굴들은 스크린 바깥, 관객의 시선에 의한 권력을 무능하게 전락시킨다. 무언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볼 수 없을 때의 감흥이 중요하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무언가를 확실히 해두고 싶어 하는 인물들의 욕망, 그 욕망의 불발이 관객이 동일시를 느껴야 하는 지점이다.

대신 얼굴들은 어떤 과거를 맴돌고 있다. 바로 직전, 아이가 낙담하고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안나의 의식은 10년 전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는 눈짓의 머무름은 <언더 더 스킨>의 기록매체로서의 눈의 기능으로 이어진다. 에일리언이 도심과 거리에서 바라본 인물들은 필름에 맺힌 상처럼 기록된다. 그런데 글레이저의 영화에는 지나간 장면을 번복해 회상하는 구조가 없다. 오직 그것을 기억하는 인물의 얼굴만 덩그러니 등장할 따름이다. 문제는 표정이 제거된 에일리언의 얼굴을 통해서는 영화 속 어느 지점의 과거를 떠올려야 하는지 더욱 난감해진다. 여기서 글레이저는 영화의 (시간적 흐름에 따른) 운동성 위에서 모종의 푼크툼적인 실험을 자행한다. 시점의 무규정성은 영화적 공간에 대한 모색과도 연결된다. 영화의 마지막, 연기를 따라 하늘로 이동하던 카메라는 수직으로 하강하는 눈송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눈송이는 렌즈이자 스크린 표면에 부딪히며 이 시선을 우리가 가질 수 없음을, 영화와 현실이 분리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시점은 누구의 소유일까. 또한 눈송이의 움직임은 수직적인가, 직선적인가. 이 역시 확신하긴 어렵지만, 오프닝에서 에일리언의 거대한 눈동자가 우리를 향해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보이는 것 '너머'의 방향이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시각의 부정성으로서 깊이의 영역에 대한 사유가 남는다.

이제 글레이저의 영화에서 앞과 뒤, 이면과 밑의 구분은 어디에도 규정되지 않는다. 이는 앞으로 은밀함의 영역을 모색해온 글레이저의 영화를 탐색하는 중요한 화두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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