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프디 형제 #3] '굿타임' 자본주의의 기이한 변장술
[사프디 형제 #3] '굿타임' 자본주의의 기이한 변장술
  • 김민세
  • 승인 2022.11.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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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프디 형제의 유령들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는 '맥락 없이 갑작스럽게 얼굴을 들이미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단편 <검은 풍선>(2012)에서 풍선을 들고 가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따라가던 카메라는 뜬금없이 가판대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상인의 얼굴에게로 눈을 돌린다. 또 다른 단편 <외로운 존의 지인들>(2010)에서 주인공은 첫 장면에서 황당하게도 자신의 아파트 라디에이터에 숨어있는 올빼미를 발견한다.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2008)은 거리를 떠돌며 보는 사람마다 "안녕 멋쟁이, 안녕 예쁜이"라고 유쾌한 말을 건네는 낯선 사람에게 그가 주인공이 되는 하나의 씬을 부여한다. <헤븐 노우즈 왓>(2014)에서 갑자기 등장한 유대인은 길바닥에서 구걸하고 있는 홈리스 할리에게 가서 술을 마시고 더 취하라며 돈을 쥐어주고 떠난다.

이들은 서사와 주인공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으며 기능적으로는 영화에 전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 유령 같은 인물들은 사프디 형제가 수없이 거닐고 응시하는 뉴욕에 불쑥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 유령들은 <굿타임>(2017)에서 또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헤븐 노우즈 왓> 이후로 큰 변화를 겪어 극단적인 장르 영화로 우리에게 도착한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서는 그 갑작스러운 등장들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들은 범죄 또는 스릴러로 구분될 수 있는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방해한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그 유령들은 질주하는 '코니'(로버트 패틴슨)를 이상한 방식으로 멈춰 세운다. 엄마의 신용카드로 닉의 보석금을 대신 지불하려 하는 친구 '로렌', 병원 로비에서 닉이 있는 병실의 층수를 알려주는 '환자', 아무 말 없이 코니가 건네주는 주스를 겨우 마셔내는 병동 안의 '노파', 친절하게 원하는 목적지에 코니를 데려다주는 병원 셔틀 차량의 '운전기사',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게 호의를 베푸는 '한 여성', 그리고 의심 가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코니에게 차를 빌려주고 심부름을 대신하는 '크리스탈'(탈리아 웹스터)까지.

이들은 골칫거리 주인공인 코니를 서로 바통을 주고받듯이 거두고 보호하고 도와준다. 그래서 은행 강도 공범인 '닉'(베니 사프디)을 구출시키기 위해 더 큰 범죄를 모의하는 코니가 선하고 (거칠게 말해) 멍청한 사람들에게 행운과도 같은 도움을 받는 것은 추격 범죄 스릴러의 장르에 있어서도, 범죄자를 다루는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을 장르적·서사적 관점에서 비판한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잘못 본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서 그들은 <굿타임> 이전에도 존재해온 유령들이며 하나의 알레고리이자 맥거핀이기 때문이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사프디 형제의 유령들은 마치 영화의 주인공을 응시하는 자리를 넘겨받고 가로채듯이 움직인다. 때로는 그들이 또 다른 서사의 축에서 주인공을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뉴욕 거리 위를 떠다니는 검은색 헬륨 풍선의 이동을 따라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단편 <검은 풍선>은 이러한 사프디 형제의 영화의 특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영화이다. 그렇다면 사프디 형제의 '검은 풍선'이 <굿타임>의 코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새로운 질문을 해보고 싶다.

'검은 풍선'이 유령인가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이 유령인가. 다시 말해, 코니가 유령인가 그를 둘러싼 타자가 유령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이전에, 무엇이 코니인가. 또는 코니는 무엇인가.

우리는 동생 닉에 대한 코니의 이상한 집착으로부터 알 수 있다. 거기엔 단순히 코니 스스로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닉을 향한 무조건적인 우애라고도 할 수 없는 '기이한 태도'가 있다. 그러므로 코니와 닉은 각자의 개별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환유로 존재한다. 닉은 코니가 뉴욕에 두고 온 무언가이고, 뉴욕을 떠날 수 없게 하는 무언가이며, 코니 그 자체이다. 즉 코니와 닉은 각자가 서로를 보충하는 환유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굿타임>에서 코니는 닉이고 닉은 코니이며 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타자가 된다.

앞서 열거한 유령들이 코니의 서사의 축 위에 있는 코니의 타자라면, 닉의 타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영화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장애인들이다. 영화의 시작 지점, 지적 장애를 갖고 있는 닉이 장애인 보호 시설의 상담사와 대화하고 있을 때 코니가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와 닉을 데려간다. 그들이 함께 지나가는 복도에는 닉과 같은 상태의 장애인들이 있고 코니는 그들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닉에게 말한다. "네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 같아?" 이것은 닉에게 하는 질문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다.

코니는 닉이 특별한 존재임을 믿게 한다. 또는 자신이 뉴욕 땅을 배회하는 유령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래서 코니-닉은 스스로의 얼굴을 변장하고 서로의 존재를 뒤바꾸며 뉴욕을 미끄럽게 빠져나가려 한다. 백인의 얼굴에서 흑인 얼굴을 한 가면으로, 검은색의 머리카락에서 탈색한 노란색의 머리카락으로, 놀이공원의 침입자에서 놀이공원의 경비직원으로.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이 기이한 변장술의 전략은 실패한다. 병원에서 구출해낸 닉은 마약중독자 래리가 되고, 얻어내려 했던 거금의 돈은 스프라이트 페트 안에 들어 있는 LSD가 된다. 이 오작동은 뉴욕이라는 장소,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코니는 뉴욕을 떠나지 못한다. 닉을 구출하겠다는 목표에 한 발 치도 가지 못한 채로 경찰에 붙잡힌다. 이때 코니는 자신이 닉의 장애인 보호소에 있던 장애인들과 그를 도왔던 이상하리만큼 멍청한 흑인들이 타자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코니는 자신이 유령이었음을, 뉴욕과 미국이라는 자유의 땅이자 자본주의의 땅이 꾸는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철창 안에 갇혀 그 너머를 응시한다. 코니가 카메라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유는 그 너머에 자신의 모습, 유령의 얼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코니는 닉이 된다. 그리고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진 않아"라고 생각했던 장애인들과 함께 방 안에서 벽의 끝과 끝을 왕복하며 거닌다. 카메라는 어쩔 줄 몰라하는 닉의 얼굴을 사선으로 잡아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면 얼굴을 담아낸다. 그 닉의 얼굴은 코니가 뚫어져라 응시했던 유령의 얼굴, 꿈에서 깨고 난 뒤의 자본주의 아래에 놓인 비참한 현실이다.

<굿타임>은 뉴욕과 미국이라는 부조리의 장소와 자본주의라는 맥락을 때로는 처참하리만큼 현실적으로, 때로는 기진맥진할 만큼 초현실적으로 재현해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농담이었으며 하룻밤의 꿈이었음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굿타임>에서도 어김없이 얼굴을 들이민 사프디 형제의 유령들은 자본주의가 꾸는 악몽의 얼굴이다. 코니 역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과 닉 역을 맡은 베니 사프디의 얼굴은 이를 소름 끼치리만큼 정확하게 표상한다.

<굿타임>은 사프디 형제와 로버트 패틴슨의 최고작임과 동시에 21세기의 시네마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환상적이고도 기이한 영화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굿타임
Good Time
감독
조슈아 사프디
Josh Safdie
베니 사프디Benny Safdie

 

출연
로버트 패틴슨
Robert Pattinson
베니 사프디Benny Safdie
제니퍼 제이슨 리Jennifer Jason Leigh
탈리아 웹스터Taliah Webster
바크하드 압디Barkhad Abdi
피터 버비Peter Verby
버디 듀레스Buddy Duress
술레이만 시 사바나Souleymane Sy Savane

 

수입 더쿱
배급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17
상영시간 10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8.01.04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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