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진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 뒤에 있는 카메라의 존재와 이를 들고 있는 자의 기척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카메라라는 기술적 장치는 인간의 개입 없이 객관적인 현실을 재현할 수 있다고 믿어지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사진은 그 자체로 카메라를 든 자의 육체적 기척을 내포한다.
빌렘 플루서는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에서 카메라를 든 자를 구석기시대 툰드라 지역 사냥꾼에게 비교하며, 문화 대상의 덤불 속을 거니는 사진사의 존재는 사진이미지로부터 판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기술적 장치인 카메라와 그로부터 생산된 이미지 안에서도 카메라를 지탱하는 몸의 자세와 떨림, 불예측성은 여전히 감지된다. 이 사실은 카메라가 인간과 분리된 객관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인간의 신체에서 떨어질 수 없는 기계이며 그것이 스스로 이미지상에서도 스스로 드러남을 상기시킨다.
영화를 촬영할 때, 카메라는 종종 인간의 손에 들린다(Hand held). 또는 기계에 실려 있지만 인간에 의해 움직이고 조종된다(Dolly, Steady cam). 그렇다면 픽스 숏에서는 어떠한가(Fix)? 그저 삼각대에 고정되어있는 카메라에서 우리는 여전히 카메라를 든 자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가? 혹은 인간이 그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다면, 카메라는 누구의 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카메라를 든 자의 기척이 주는 물리적 감각은 이미지 안의 대상이 지닌 시각적 우선권으로 인해 감춰지거나 충분히 말해지지 못하는 바가 있지만, 샤론 록하르트의 <더블 타이드>(2009)와 루시안 카스탱-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의 <리바이어던>(하버드 감각민속지연구소 제작, 2012)은 앞선 질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카메라와 몸, 자연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확장시킨다.
세계의 리듬을 체화한 탈중심의 시선
샤론 록하르트의 <더블 타이드>는 두 개의 픽스 숏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다. 고정된 카메라는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여성의 모습을 1시간 40분의 시간에 걸쳐 보여주는데, 하루 두 차례의 만조 시간에 따라 첫 번째 숏은 새벽녘, 두 번째 숏은 황혼의 시간을 담는다. 우선 이미지의 내부, 카메라 앞에 놓인 대상을 들여다보았을 때, 이 두 숏의 이미지는 회화적 혹은 사진적으로 다가온다. 회화/사진이 움직임의 순간을 하나의 프레임에 고정시킨다면, <더블 타이드>는 이와 유사하게 고정된 하나의 프레임으로 이미지를 우리의 눈에 각인시킨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시간을 지속시킨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다시금 영화를 떠올릴 때면 각각 새벽녘과 황혼을 담은 두 개의 프레임이 회화적/사진적 인상으로 남아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그 이미지가 담고 있는 대상은 한 명의 인간과 그를 둘러싼 자연이다. 그리고 인간은 조개를 캐는 행위를 통해, 갯벌에 손과 발을 넣고 흔적을 남기는 식으로 자연과 관계 맺는다. 갯벌에 손을 넣고 허리를 숙이며 식량을 채집하는 여성의 노동 이미지. 마치 수렵채집 시대의 인간, 혹은 사족보행에 가까운 유인원 같은 몸짓. 또는 「이삭 줍는 여인들」의 반복. 그 밖의 동물의 울음소리와 곤충의 소리가 틈입하지만, 결코 이들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없다. (화면 먼 뒤편에 새가 두어 마리 등장하긴 한다) 그렇기에 이 프레임을 회화를 보듯이 하염없이 응시하다 경이로워지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으면서 생기는 지표들, 즉 여성이 갯벌에 남긴 흔적들 이외에는 그 어떠한 변화도 숏에서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변형은 곧 노동이기 때문에, <더블 타이드>의 이미지는 다른 가능성을 차단한 미니멀의 형식으로서 오롯이 노동의 이미지가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의 뒤에는 누가 있는가? 아마 감독과 촬영기사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더블 타이드>는 두 개의 픽스 숏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다. 하지만 어디에 카메라가 고정되었는가? 갯벌 위. 노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갯벌이 흔들릴 때, 고정된 카메라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그 주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날벌레들이 흩날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카메라를 지탱하고 있는 갯벌의 물성과 그 움직임과 연관된 육체의 리듬, 그리고 그 앞을 어른거리는 우연적인 생동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통해 카메라는 고정되었음에도 자연과 인간 사이에 작동하는 노동의 리듬을 체화한 도구가 된다. 다시 말해, <더블 타이드>에서 픽스 숏은 단순히 객관적인 관찰자의 위치가 아니라, 갯벌이라는 자연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의 상태, 혹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카메라 자체의 운동성을 드러낸다. 이는 곧 자연이 프레임의 대상이자 촬영의 주체가 되는 낯선 감각의 결과물이다.
루시안 카스탱-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의 <리바이어던>의 카메라 또한 인간의 손에 들려있지 않다. 뉴 잉글랜드의 해안에서 벌어지는 어업의 현장을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이들은 자신의 몸과 어부들, 선박의 곳곳에 고프로 카메라를 부착하고 이렇게 채집한 푸티지를 고유한 리듬에 맞추어 나열한다. <더블 타이드>가 픽스 숏이 지닌 객관성과 관찰적 태도를 인간의 육체성과 자연의 물성으로 비틀었다면, <리바이어던>은 극단적으로 시점화된 숏을 통해 몸과 자연의 역동성을 총체적으로 더듬는다. 어부의 헬멧, 바닷속, 배의 구조물 등에 부착된 카메라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영화의 시선은 인간과 비인간, 자연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를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은 회화/사진적인 프레임이기보다는 몸과 기계, 자연이 만드는 변화무쌍한 날것의 인상이다.
이때 카메라를 든 자의 권위는 파괴된다. 인간이 고정한 카메라(Fix)는 바다의 운동성으로 인해 인간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역동하는 자연과 기계, 몸 자체와 동화된다. 가령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새 떼를 담고 있는 숏은 선박의 측면에 설치된 카메라로 촬영되었는데, 선박이 파도의 흐름에 따라 출렁이길 반복할 때마다 카메라는 물속과 물 밖을 오간다. 픽스된 하나의 숏 안에서 물속과 물 밖의 몽타주가 이루어지며 파도와 선박의 리듬이 드러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카메라는 <더블 타이드>와 유사한 방식으로 자연의 리듬을 체화한다. 그래서 이 이미지들을 보고 있다 보면 영화가 지칭하는 ‘리바이어던’은 인간중심의 시점을 과격하게 침식시키는 자연이라는 괴물의 의미로 다가온다.
결국 <리바이어던>에서 카메라는 인간의 눈을 대리하는 기계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작동한다. 또한 이따금 이런 파편적인 이미지와 사운드들은 추상과 기호로 나아가는 듯이 보이는데, 이것은 자연의 맥박과 카메라 기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밀한 긴장이다. 영화는 이렇게 인간의 눈이 볼 수 없는 또 다른 감각을 열어젖힌다. 그곳에 있는 것은 몸, 쇠, 물, 어둠, 빛, 날갯짓, 진동, 파동, 날뜀, 그리고 생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연의 신체이며, 카메라의 존재와 카메라가 보고 있는 대상은 이 신체를 통과해 ‘리바이어던’으로 변모한다. 즉, <리바이어던>이 수정적인 픽스 숏을 통해 대상을 보여주는 방식은 권위적인 응시가 아니라 대상과의 결합이며, 이는 곧 영화가 인간의 손에 들려있길 포기했을 때 어떠한 감각적 전환을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결과가 된다.
<더블 타이드>와 <리바이어던>은 상반된 형식과 미학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자연의 리듬을 체화한 탈인간과 탈중심으로서의 영화이다. 고정되었지만 끊임없이 흔들리고 움직이는 탈관습적인 숏들은 세계가 발산하는 존재의 기척이며, 세계를 감각하는 또 다른 행로처럼 제시된다. 이 기척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두 영화는 ‘카메라는 누구의 손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경유해 결국 누군가의 손에 들리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세계 그 자체를 감각하는 태도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플루서의 말을 다시 떠올리며 나아가보자면, 두 영화는 사진/영화 이미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카메라를 든 자’의 위치에 세계가 놓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셈이다. 결국 이 영화들은 카메라가 더 이상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이후, 2024 제5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