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오사>(2024)를 보고 당황스러웠다. 이 작품은 걸작이라기보다 괴작에 더 가깝다. 처음부터 조지 밀러가 전작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처럼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나이도 고려해야 할 문제이고, 설령 제작한다 해도, 전작의 문법을 반복해 감흥이 반감될 것 같았다. 사실 이보다 더 큰 걱정은 이 영화가 속편이 아니라 프리퀄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이다. 보통 프리퀄은 본편의 설정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마련. 이 영화가 본편으로 이어진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서사가 정당해진다. 프리퀄 자체가 미완성에 가까운 이유이다. 결국, 이 영화는 처음부터 미완성과 실패를 감수한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만큼 <퓨리오사>는 감독의 야심이 분명히 드러나는 영화로,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퓨리오사>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문법은 대척점에 서 있다. 오프닝만 보아도 확연히 그 차이가 드러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오프닝을 살펴보자. 황무지의 풍경이 드러나고 정중앙에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도마뱀을 씹어먹는 맥스(톰 하디)가 있다. 이윽고 워보이가 몰고 다니는 차량의 엔진 소리가 들려오고, 맥스는 서둘러 자동차에 타서 도망치려고 한다. 워보이의 일격에 뒤집힌 자동차 안에서 맥스는 급작스레 어떤 소녀의 형상을 기억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이 소녀에 대한 단서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관객은 맥스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의 전사를 파편적인 기억을 통해 지레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맥스와 퓨리오사의 과거는 이야기로 설명된다기보다, 트라우마와 추억 등 감정에 의해서만 설명되며 아드레날린이 작동하는 연료로 작동한다. 세계관마저 이미지나 고유명사가 설명에 선행하는 방식으로 설명되며 대사마저도 최소한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퓨리오사>에서는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부제에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영웅 퓨리오사의 삶을 이야기로 그려내는 사가(Saga) 장르다. 인간의 일생을 담는 만큼 전작보다 다루는 시간이 광범위하다. 이 영화는 영웅 탄생 설화처럼 (역사가로 추정되는) 나레이터가 황무지로 변한 매드맥스 세계관의 전사를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퓨리오사>는 기후위기와 그로 인한 전력망 붕괴 화폐 가치 하락, 팬데믹 등 지금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다루며 매드맥스 세계관에 중력을 부여한다. 즉, 픽션 속 세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접점을 마련해 매드 맥스의 세계관을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미래 중 하나로 설정한다는 말이다. 감독은 영화의 첫 번째 파트로 도달불능점으로 이같은 설정을 뒷받침한다. 파트의 제목 도달불능점은 대륙 한가운데 등등 인간이 지리적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운 곳을 뜻한다. <퓨리오사>는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세계관을 드러내기 전에 급작스레 전작에서는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은 남극의 지도 한 장을 스크린에 삽입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러한 설정이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달리 <퓨리오사>가 우화로 다가오는 이유다.
<퓨리오사>의 서사는 전작보다 촘촘하다. 도달불능점에 있는 녹색 대지에서 성장한 어린 퓨리오사가 그곳을 탐사하러 온 디멘투스(크리스 햄스워스) 일당에게 납치당한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어머니가 홀로 그녀를 구출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도망치는 길목에서 포위당하고 만다. 어머니는 퓨리오사를 숨기는 데에 성공하고 디멘투스에 혈혈단신으로 맞선다. 퓨리오사는 숨어서 그녀가 디멘투스 일당으로부터 성적 고문을 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마주한다. 퓨리오사는 그때 디멘투스 일당에게 발각된다. 디멘투스는 막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으로 가득하다. 그 와중 물이 흘러나오는 땅에 살아가는 임모탄 조의 영토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황제로 군림하는 임모탄 조의 물과 자원을 빼앗고자 디멘투스는 석유가 있는 땅을 점령한 다음에 임모탄 조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임모탄 조는 퓨리오사를 데려가 신부로 삼는 조건으로 디멘투스와의 거래를 승낙한다. 퓨리오사는 자신을 겁탈하려는 임모탄 조에게서 도망쳐 삭발한 다음에 화물꾼으로 분장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퓨리오사는 지휘관 잭(톰 버크)의 작전을 도와 그와 콤비를 이루게 된다. 그녀는 임모탄 조에게서 벗어나 디멘투스에게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렇다면 <퓨리오사>는 왜 우화인가. <매드 맥스2>를 기점으로 이 시리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제작되었다. 할란 엘리슨의 단편 소설 『소년과 개』(1969)를 모티프로 한 매드맥스 세계관에서는 생존이 도덕과 윤리를 대신한다. 여기에는 법과 영토 등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국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임모탄 조에게서 탈주하는 맥스와 퓨리오사의 여정을 그리는 데에 집중할 뿐이다. 세상이 오직 임모탄 조의 손아귀에 있다는 듯한 설정이 그 뒤편에 깔려 있다. 중간에 자동차 연료가 생산되는 가스타운과 무기가 생산되는 무기농장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기는 해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진 않는다. 『소년과 개』는 생존이 우선시된 빅과 개, 백인 혈통주의와 기독교적 윤리에 매몰되어 있는 퀼라 준 등 여러 패거리의 존재를 통해 미국의 분열된 담론 상황을 그려낸다. <퓨리오사>도 앞서 말했듯 우리 세계와 느슨한 접점으로 설계된 세계다. <퓨리오사>에서 가스타운과 무기농장을 지배하는 패거리를 드러내고, 저들만의 윤리를 드러내는 과정을 담은 것은 조지 밀러가 제 나름의 시선으로 우리가 마주하는 야만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시도로 보인다.
<퓨리오사>의 패거리는 각자 시대의 문제적 개인을 그려낸다. 디멘투스는 감정을 응축해 표정으로 드러내는 퓨리오사와 다르게 디멘투스는 모든 것이 과장되어 있다. 세 개의 바이크에 연결된 줄을 손에 쥐고 다니는 그의 꼴은 정확히 전차를 몰고 다니는 로마 시대 황제와도 비슷하다. 인간을 바이크로 능치처참을 한다든지, 여성을 강간한 다음에 처벌하는 등 죽음을 일종의 쇼로 소비한다. 쇼의 규모로 본인의 남성성을 드러내는 식이다. 후반부에야 그가 딸을 상실한 그 트라우마로 딸이 애착하는 인형을 정확히 허리춤에다가 차고 다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 인형에 투사된 딸의 존재감은 디멘투스의 남근을 가리고 있다. 그는 야만적 시대의 희생양이 된 가족을 제대로 애도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는 가족의 죽음을 부정하고 딸의 인형에 자신의 죄책감을 투사한다. 그 죄책감은 이윽고 극한의 남성성으로 왜곡된다. 이때 디멘투스가 야만적인 시대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냉소한다는 사실이 눈여겨볼 만하다. (주로 이성적인 시선에 자신을 투영해) 세계와 인간이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는 냉소를 일삼으며 본인이 마주해야 할 진심과 책임을 외면한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그것을 행한다. 디멘투스는 결국 살인에 중독되어서 수치심을 비롯한 여러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끝이 없는 권태에 빠진다. 즉, 도파민에 과잉노출된 상태에 처한 것이다. 디멘투스는 무언가를 파괴하고 빠르게 하지 않는 이상 쾌감을 느낄 수 없다.
<퓨리오사>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정반대의 문법을 택한 것은 디멘투스의 가르침에 영화가 배반하기 위해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인물의 트라우마마저 서사의 추진력을 더하는 연료로 소비되며, 인간을 액션의 한가운데에 두지 않는다. 퓨리오사와 맥스가 제아무리 처절한 액션을 펼친들 더 두드러지는 것은 온갖 자동차 등 기계의 움직임과 빨간 내복의 기타 연주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액션은 기계의 속도감에 인간 신체의 리듬이 맞물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때 인간에게는 잠깐의 휴식도 주어지지 않는다. 자동차의 속력을 따라가지 못한 이는 죽을 뿐이다. 모래폭풍부터 시작해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는 인간의 육체를 초과하는 것이 한가득하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드러나는 광기는 인간의 신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신체를 극한으로 몰아세운 상황에서 생긴다.
반면 <퓨리오사>는 이야기와 액션을 나누듯이 연출한다. 이야기가 전개된 다음에 액션이 펼쳐지며, 액션은 서사의 일부로 작동하지 않는다. <퓨리오사>의 액션은 미니멀하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보다 버스터 키튼의 <제너럴>(1924) 속 액션에 가깝다. <제너럴>에서 그려지는 버스터 키튼의 액션은 한 열차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육체적 운동을 담는다. 버스터 키튼의 액션은 기계적 리듬에 동화되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인간의 몸짓과 거기서 생기는 서스펜스를 그려낸다. 안야 테일러 조이가 트럭에 매달려서 온 힘으로 견디는 느린 액션을 길게 포착하는 것도 이 몸짓을 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기계적 리듬에 투신하는 빠른 템포의 디멘투스의 액션과 반대다. 조지 밀러의 액션 연출은 최근 <탑건:매버릭>(2022) 등에서 그려진 아날로그 액션의 연장선에 있다. 육체를 CG가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서커스라면 <퓨리오사>는 차력쇼에 가까운 느낌이다.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캐릭터는 디멘투스를 따라다니되 침묵하는 역사가다. 그는 온몸에다 문신으로 인류 문명의 흔적을 새기고 전달하며 어디서든 관찰자의 입장으로 있다. 그가 퓨리오사에게 역사가를 제안한 것도 그저 살아남을 수 있어서다. 역사가가 불리는 순간은 우스꽝스럽게도 눈물의 의미를 설명할 때다. 과거의 전통과 가르침, 인간다움은 그저 텍스트에 불과해졌다는 것을 이보다 잘 드러낸 순간이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조지 밀러가 진짜로 남기고 싶은 것이 이야기라는 점을 짚을 수 있다. 그가 <매드 맥스>와 <퓨리오사> 사이에 찍은 <3천 년의 기다림>이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천일야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알라딘 설화를 뒤튼다. 3천 년 가까이 정령 진(이드리스 엘바) 인간의 욕망이 자아내는 파국을 지켜보는 관찰자로, 3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야기를 고백한다. 조지 밀러는 이 영화를 매드 맥스와 정반대의 영화로 불렀다. 이는 긴 시간을 그려낸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이 영화가 어떠한 이야기와 대화가 중심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조지 밀러는 이 영화를 통해서 매드 맥스를 거부하기 시작한 듯하다.
<퓨리오사>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처럼 퓨리오사를 침묵하게 하지만 사실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가라는 장르에서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나레이터의 사후 회고담이다. 한병철은 서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야기를 멀리서부터 오는 것이라 이야기했다. 서사가 단절할 수 있고, 순간적인 정보에 가까운 것이라면 이야기는 텍스트를 천천히 본 다음에야 다가오는 것이다. <퓨리오사>는 지독하리만치 서사로 가득 차 있다. 또 그 서사 하나하나가 무겁게 현실에 빗대어지는 우화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마지막에 감독은 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인류사를 나레이션으로 말하며 <퓨리오사>에서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인류사의 한 부분을 잘라내 빗댄 알레고리로 보이게 한다. 임모탄 조가 초반에 디멘투스를 공격할 때 워보이가 가미카제 부대처럼 보이는 것도 감독이 인류사가 반복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퓨리오사가 디멘투스를 벌하는 방식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퓨리오사는 기계의 리듬에 익숙한 디멘투스의 성기에 나무 씨앗을 심고 임모탄 조의 정원에 결박한다. 나무 씨앗은 디멘투스의 피를 먹고 자라며, 나무는 정반대로 디멘투스에게 양분을 공급하며 순환을 이룬다. 기계적 리듬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 안에 인간을 가두는 방식이다. 디멘투스와 같은 현대적 인간이 본성을 되찾으려면 이러한 과격한 방법밖에 없다는 듯이. 디멘투스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포착한다. 디멘투스는 동시에 해방감을 느끼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조지 밀러의 과격한 설정이 자칫 거부감을 불러올 수 있다. 이를 단순하게 자연과 여성성을 연결하며 기계 문명과 이어진 남성성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에코페미니즘의 도식에 부합하는 결말이라 비판할 수 있다. 퓨리오사가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감정을 설명하기 힘들기에 결말을 위해모든 것이 설계되었다는 인상 또한 지우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이러한 설정이 개인적으로 납득되는 이유는 조지 밀러의 염세적인 회한이 드러나서다. 조지 밀러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도파민과 아드레날린만 존재하는 세상으로 그려낸다. 디멘투스에게 가해진 처벌은 결코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뿐이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Furiosa: A Mad Max Saga
감독
조지 밀러George Miller
출연
안야 테일러 조이Anya Josephine Marie Taylor-Joy
크리스 헴스워스Chris Hemsworth
톰 버크Tom Burke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 148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4.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