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질베르토 페레스 '영화, 물질적 유령': 현전성과 환영 사이의 비평
[Critique] 질베르토 페레스 '영화, 물질적 유령': 현전성과 환영 사이의 비평
  • 이현동
  • 승인 2024.06.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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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보기에 시발점, '물리적'인 영화로 보기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이어져 온 주류적 시각에 따르면 모든 예술은 그런 점에서 별 세계적인 것으로, 자신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표시하고, 자신이 다루는 모방 매체를 현실과 평행하는 관념적 영토로 설정해, 해당 예술 작품이 자족적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게 해 준다.(p.159)

이론이 견인하는 체계와 구조, 영화가 가정하고 있는 주체, 그리고 파생되는 구체적 현실과 더불어 일관된 이론을 구현하는 질베르토 페레스의 『영화, 물질적 유령』은 영화에 대한 회의주의를 지독하게 끌어온다. 또한 날렵하고 정밀한 비평이란 무엇을 규정하는 행위가 아닌 신화처럼 경직된 이론을 해독하고 개방하는 행위임을 드러낸다. 비평은 이론의 토양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비평가는 다양한 이론을 넘나들며 사유의 실천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한 교리와 방법론으로 점철된 비평 이론은 정치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지니지만, 질베르토 페레스의 『영화, 물질적 유령』은 영화에서 부유하고 있는 다채로운 사유와 이론을 총합하여 독자에게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페레스는 서론에서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덧붙여 설명하는데, 이 지점은 이 책의 출발점을 상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는데, 1) 작가 이론에 대한 변질과 오해, 2) 그리고 라캉주의,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 예다. 먼저 작가 이론의 의의는 그 시대를 내포하는 집단의 시스템이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개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예술 감각을 수긍하고 그들의 천재성을 인정하는 데 있다. 

여기서 논쟁의 주제는 페레스도 언급한 바 왕성하게 할리우드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했던 1960년대에 "영화가 감독의 예술인가라는 것보다 어떤 감독들이 작가로 간주될 만한가라는 것"(p.26)이었다. 에이젠시테인과 르느와르는 개인적 예술성에 대해 이견이 없었지만, 논란의 대상은 할리우드 감독들이었다는 대목은 상업적 오락 산업이라 분류되면서 작가 주의는 비평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하워드 혹스 같은 인물이 프랑스 비평가들에 재발견되고 나서 할리우드에도 작가 주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페레스는 히치콕을 작가주의의 대표적인 예로 들며, 그가 개인적 예술성과 상업적 영화 제작을 성공적으로 통합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라캉이 말하는 스크린, 일종의 불완전한 상상계가 그 세계를 오인하는 장소라 말하는데, 페레스는 관객이 착각할 리 없는 허구로서의 평행 세계라고 말한다. 재현된 구축물로 스크린은 현실의 재현이자 완전한 현실의 복제도 아니고(크라카우어), 환영도 아닌 셈이다.

그러므로 페레스는 "개별적인 것들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라캉-알튀세르주의자는 현실의 환영이란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을 품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도 현실의 지각이라는 오인을 초래하는 재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50)에 반대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강조하는가?

 

ⓒ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

영화이론가 '프란체스코 카세티'와 '조너선 크레리'는 영화를 구성하는 외부의 조건인 환상, 스크린, 극장, 지각, 집중, 인식, 느낌 등의 변화를 계보학적으로 구성한다. 가령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그의 저서 『Eye of the Century: Film, Experience, Modernity』(2008)에서 영화가 20세기 초반의 기술적, 사회적 변화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분석하며, 영화 경험이 현대성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는 특히 영화가 관객의 지각과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주목한다. 조너선 크레리의 경우, 『Suspensions of Perception: Attention, Spectacle, and Modern Culture』(2001)에서 근대 사회에서 지각과 주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탐구하며, 영화와 같은 시각적 매체가 현대인의 주의 집중과 인식 방식에 미친 영향을 논의한다. 그는 특히 시각적 경험이 사회적 통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페레스는 이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다르게 보기 위한 방식으로 현전성의 의미에 대해 주목한다. 여기서 현전성이란 단순히 바쟁의 '사진적 이미지'와 같이 사진이 시간의 우연성에서 해방된 사물이라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페레스에게 현전성은 리얼리티 자체가 아니라 리얼리티 '같은 것'이며 이를 어떤 형식으로 다루는가의 문제이다. 또한 페레스는 바쟁이 스크린 위에서 나무와 의자 같은 이 세계의 사물이 본연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 '영화적 리얼리즘'을 비판하며, 영화적 이미지를 '물질적 유령'(74)이라고 부른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과 삶의 질서를 구성하려는 노력을 반영하는 물질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페레스의 견해는 영화적 리얼리즘의 한계를 지적하며, 영화가 단순히 현실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형식을 통해 현실과 유사한 경험을 창조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는 영화가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여 관객에게 다양한 지각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에 집중하게 한다. 즉, 그는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다르게' 보여주는 방식을 탐구하며, 이를 통해 관객이 새로운 방식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영화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을 넘어서, 관객의 인식과 경험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매체임을 시사한다. 페레스는 이러한 영화적 이미지가 관객의 인식을 어떻게 형성하고, 현실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의하는지 주목한다.

이를테면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뉴스릴 같은 영화의 직접성, 일상의 투명하고 평범한 일을 조명한 '비토리오 데 시카'와 '체사레 자바티니'의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같은 현전성을 발휘하지만, 그럼에도 페레스는 단호하게 영화가 생산하는 것은 '재현'이 아니라 '모방'이라 주장한다. 이 말은 다큐멘터리는 '영화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장르로서의 픽션, 다큐멘터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픽션의 문제를 거듭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페레스는 존재했던 것은 다큐멘터리지만 생성되는 것은 허구라 말하며 베르토프의 아방가르드로 추앙받는 작품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도 실제 삶으로부터 직접 소재를 찾는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라 말했다.

덧붙여서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란 형식의 분류, 즉 스트로브와 위예의 영화가 시각적 감각을 스크린에 밀착된 형태로 표출할 때 그들이 고수하는 형식이란 '사진적 영화'에 대한 주석일 뿐, 카메라라는 물질적 세계 밖으로 나아갈 수 없는 수단으로 편성된다고 밝힌다. 미루어 보아 페레스는 기계 장치가 연계된 카메라와 영화의 관계가 물리적(지각을 재현하며 이동성을 지닌)이라는 점을 인식하며 특정하게 규정되는 관습을 계속해서 심문한다. 이처럼 페레스의 비평은 관습을 비관습화하고, 영화를 새롭게 보기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제공한다.

 

ⓒ <붉은 사막>(1964)

픽션과 논픽션의 관계를 논의하며 페레스는 브레히트를 언급하면서 이러한 문제 제기를 동일하게 수행한다.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는 관객이 친숙한 공간과 무대를 실제 세계라고 여기는, 즉 관행적인 컨벤션을 폐기하는 효과를 지닌다. 페레스는 영화와 무대라는 재현의 매체가 자족성을 갖는다는 이론을 단순히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을 통해 매체가 굴절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데 의의를 둔다.

예를 들어, 독일 표현주의 감독인 F.W. 무르나우의 영화 <노스페라투>에서 유령의 이미지를 해체하는 수단으로 '빛'에 대한 감각을 상기시키는 장면이나, 진실의 능력을 다루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분석하며 "우리는 거짓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440)라는 말을 인용한다. 이는 예술의 인위적인 속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카메라의 물리적 성질에 대해 합리적이고 유효한 논의를 거듭하게 만든다.

페레스는 이러한 접근 방식을 통해 재현 매체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예술과 현실의 경계는 종종 불명확해지며, 매체 자체가 현실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페레스는 이 과정에서 매체의 한계를 드러내고, 관객에게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는 데 주목한다. 이는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거짓을 통해 진실에 접근한다는 개념은 진실이 항상 명백하지 않으며, 복잡하고 다층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마지막 챕터인 '이방인의 시점'에서 페레스는 모더니즘을 통해 장착된 소외된 의식, 즉 의문을 관통해야 하는 이미지를 통해 카메라와 우리의 시선을 동화시킨다.

"카메라가 대상의 외양을 직접 포착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주관적이기도 하다. 대상이 개별적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이는 대로 묘사하기 때문이다."(602)

시선의 문제는 곧 외부적 조건들에 의해 소급될 수밖에 없다. 페레스는 이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안토니오니 작품을 예시로 든다. 캐릭터, 정서, 주제와 같은 고전적 요소를 즉시 제거하지 않고 도리어 모더니즘 영화가 일으키는 충격인 충만과 공허 사이의 긴장감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주체와 객체가 함께 공전함을 역설한다. "안토니오니의 영화 언어는 한 인물이 보는 것을 직접 재현하는 한정된 시선이라는 컨벤션으로부터 자유로운 주관성을 정교하게 탐색한다."(604)라는 문장은 안토니오니가 영화를 외화면 밖으로 구원하기 위한 선지자로 등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조지프 베넷의 <정사>(1960)에 관한 글에서 "매번의 운동은 탈선의 연쇄"라고 쓴 것과 같이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영화가 가진 가시적인 위력을 숙고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장면의 연출자가 아닌 "의식의 연출자"(638)다. 짐작하건대 마지막 챕터에 안토니오니가 배열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모더니스트로서 그 비평의 임무를 관객에게 하달하는 페레스는 영화를 정확한 대상이 아니라 불확실한 대상, 즉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유령으로 보고 있다.

페레스는 안토니오니의 영화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시각적 경험과 인식의 경계를 탐구하는 데 집중한다고 말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캐릭터의 시선을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소외와 충만, 그리고 공허함을 함께 경험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은 관객에게 영화적 경험을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반응하게 한다. 

 

결국, 영화 비평은 단순한 분석을 넘어, 영화가 지닌 철학적,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페레스는 영화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반영하고 비판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 비평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며, 영화의 잠재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또한 영화 제작자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는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 이면에 담긴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영화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고 모방하는 매체임을 강조한다.

질베르토 페레스의 『영화, 물질적 유령』은 현대의 리뷰어 중심 시대를 회고하는 데 적절한 비평서이다. 그는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 들뢰즈, 더들리 앤드류, 토마스 앨세서와 같은 이론 비평가의 논의를 따르지 않는다. 도리어 그가 서론에서 비평하듯이 축적된 합의들, 원근법, 이념, 촬영 기법에서 발화되는 컨벤션에 대한 불만을 비평가들에게 동시에 가한다. 페레스는 그 전의 영화이론을 회의하고 다시 보기 위해 21세기가 진입하기 이전인 1999년에 이 예언서를 내놓았다. 오히려 영화를 다르게 보기 위해 필연적인 불화를 요청하면서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진 '본질주의'에서 크게 벗어나 물질의 변환성을 영화에 투사하고 있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영화, 물질적 유령
저자 질베르토 페레스
번역 이후경, 박지수

 

출판사 컬처룩
쪽수 700쪽
발행일 2024년 03월 20일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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