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이 보여준 기세의 형태
'기생충'이 보여준 기세의 형태
  • 오세준
  • 승인 2020.03.2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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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기우'를 중심으로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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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기세는 분명했다.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시작으로 올해 초 오스카 4관왕까지. 감히 누가 예견이나 했을까. 심지어 전세계 글로벌 흥행 수익이 대략 3,000억 원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지금까지도(20.03.20 기준) '역대 최고', '최초' 등의 수식어들이 <기생충> 앞에 줄을 선 상태다. 사실 필자의 경우 봉준호 감독을 생각할 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작가이면서 동시에 대중영화 감독'이라 불리는 경우다. 또 천만 관객이 본 작품을 만든 감독까지. 그의 존재는 전세계를 둘러봐도 유일무이하다.

알다시피 봉준호 감독의 모든 작품은 '추격'하는 세계로 구성된다. 개를 죽인 '윤주'를 잡기 위한 '현남'(플랜다스의 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쫓는 '두만'과 '태윤'(살인의 추억), 한강에 출몰한 괴물로부터 딸 '현서'를 구하기 위한 '강두의 가족'(괴물), 아들 '도준'의 혐의 벗기 위해 진범을 찾아 나서는 그의 엄마(마더), 꼬리칸에서 앞쪽칸으로-기차의 주인 윌포드를 쫓는 커티스(설국열차), 친구이자 가족인 슈퍼돼지 '옥자'를 구출하기 위해 미국 미란도회사로 떠난 '미자'(옥자)까지. 하지만 그러한 추격의 형식보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을 볼 때 새삼 놀라는 것은 '그의 디테일'에 있다. 이것이 가장 잘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작품에는 <살인의 추억>(2003)을 예로 들 수 있는데, 민방위훈련, 시위 진압작전, 대통령의 지방 순시에 동원되는 소녀들 등, 범인을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삽입되는 이러한 이미지는 급변하는 시대 속 당대 현실을 계속해서 환기한다. 물론 그의 작품들에는 '살인과 폭력의 순환' 역시 지속해서 맴돈다. 그리고 <기생충> 역시 추격과 폭력이 감도는 세계 안에 버젓이 존재한다.

 

기우의 기세(氣勢)와 기세(欺世)

 

나쁜 일이라는 것은 흔히 겹치는 법이다.

이것은 물론 일반론이다. 그러나 만일 실제로 나쁜 일이 몇 가지 겹쳐버리면, 이것은 이미 일반론 같은 것이 아닌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4월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中 택시를 탄 흡혈귀, p43

 

<기생충>의 수많은 주인공들 사이에서 필자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인물은 '기우'(최우식)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말과 행동'으로, 극 안에서 이것들의 성질은 강력하지만, 상당히 가볍고 공허하다. 또 기우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끝까지(그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조차) 특정한 무언가를 따라가거나 따라 하는 모습으로, 마치 뇌는 지나지만 가슴은 지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가 위조한 대학 증명서를 두고 "아버지 저는 이것을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문제를 풀지 못하고 고민하는 다혜에게 "(...) 24번 정답? 관심없어. 난 오로지 다혜가 이 시험 전체를 어떻게 치고 나가는가, 장악하는가, 거기에만 관심있다. 실전은 기세야"라고 말하는 부분, 이때 아버지와 다혜를 바라보는 기우의 눈빛은 상당히 날카롭다.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확신'에 가득 찬, 또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가온다. 이러한 장면들은 단순히 극의 전개보다 '기우'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으로 더 크게 작용한다.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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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의문이 하나 있다면, 기우의 위에서의 상황은 노상방뇨를 하는 취객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민혁과의 만남 이후 기우에게는 '그때는 없고, 지금은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 무언가를 추측해 보자면 '산수경석'이 아닐까. 영화 초반 민혁이 산수경석이 든 상자를 열 때, 그것을 유심히 보는 '기우의 숏'(카메라는 아래서 위로 기우를 담는다)은 그 상황과는 무관하게 상당히 이질적이다. 골똘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돌에게 홀린 듯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기우의 대조적인 모습은 반드시 '산수경석' 때문이거나 '민혁의 부재'라고 단정 지어 설명하기 어렵다. 어쩌면 기우가 다혜의 과외 면접을 보러 간 날, 현관문에서 계단을 올라 강렬한 햇빛이 내리비치는 푸른 정원을 향하기까지 약 23초간 카메라가 기우의 주변을 감싸는 숏, 이 순간의 묘한 영화적 질감이 기우의 변화를 더 일으키는 것으로 다가온다. 분명한 건 기우에게 '변화'가 일어났다고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없지만,(그가 원래 이런 인물인지 아닌지) 영화를 이끄는 동력으로 가족 전원을 박사장의 집으로 취업시키는(침입에 가까운) '추돌적인 힘'이 발생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관객인 우리는 그러한 '기우의 태도'(여기서 '태도'는 그의 정체성 또는 성격과 같은 기질적인 특징을 함유한다)를 무엇이라 볼 수 있을까. 기우의 말을 빌리자면, 정확히는 감독의 대사로 비추어 볼 때, '기세'로의 <기생충>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다시, 필자는 이런 질문을 갖는다. "영화가 기우의 가족들에게 가능하도록 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영화 전체를 맵핑(mapping)할 때, 약 1시간가량의 영화 전반부 -기우의 가족 전원이 박사장의 집에 취업할 수 있었던 가능성- '벼락이 치는 순간까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로 바꿔 볼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영화적 우연성'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이는 극 밖에 위치한 관객의 관점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으로 포착된 기우의 가족이 벌인 모든 일들을 '우연'이라 불릴 '기세'로 정의해보면 어떨까. 이 기세의 취함은 반지하에서 고작 사람의 발 정도 볼 수 있었던 그들의 위치를 결정적으로 자신들의 위치와 같은 사람들을 아래로 보는(문광과 그녀의 남편) 위치로 끌어올린다. 전반부가 보여주는 형세는 자신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또 오직 그들의 생존이 우선시되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를 밀어내는 꼴이다. "우리는 우리가 제일 문제잖아. 우리 걱정만 하면 되잖아"라는 기정의 말처럼. 그러니 이들의 삶에서 '누군가와의 타협이나 이해'는 불가능하다.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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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기세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영화 중반을 지나 박사장 집에서 간신히 탈출한 기택과 기우, 기정.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잠심 다리 밑에서 숨을 돌린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계획이 뭐냐구!"라는 기정의 물음에 기우는 "아까부터 든 생각인데 민혁이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했을까"라고 답한다. 이 대사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반부를 통해서 '기세'라는 것은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어느 정도 숨 쉴 수 있는 나름의 해결책으로 작용하는 듯 보여지나, 정작 중요한 위기에서 그것이 발휘하지 못한다. 능력은 보통 위기에 발휘되는 법. 기우에게 내려진 '기세'는 '민혁과 똑같이'로 작용하는 기운, 어쩌면 '떠난 민혁의 자리를 자신이 채울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불과하다. 결국 이 기세의 작용은 허무한, 아니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자신만의 '자리싸움'인 것이다. 기세의 무력함은 집이 물로 가득 차는 순간에도 '산수경석'을 놓지 않는 집착과 영화의 끝에서 다송이의 깜짝 생일파티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혜야 나 잘 어울려?"라는 어떠한 의미도 답에 넣을 수 없는 질문을 내뱉는다. (한편, "민혁 오빠한테는 이런 일이 절대 안생기지"라는 기정의 말은, 적어도 그녀는 민혁과 자신 사이에 계층으로의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함을 인정한 말로 볼 수 있다)

이 답은 사실 이미 정해진 결심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해가 잘 드는 정원에서 존재하기 위함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문광부부를 제거해야 함을. 이때의 기세는 '세상을 속임'의 기세(欺世)다. 산수경석을 들고 밑으로 내려가려는 기우의 표정은 허탈함과 표독함이 섞인 묘한 감정을 가진다. 물론 결과는 필연적인 실패이다.

잠깐, 영화 중반 기우의 고백을 들어보자. "(다혜가) 대학교 들어가면 정식으로 사귀자고 하려고요. 진지하게." 옆에 있던 기택은 한술 더 떠 "그럼 이 집이 이게 우리 처갓집이 되는 거네?"라고 답한다. 그들이 지닌 기세의 맹목적인 확신은 자신들의 신분상승의 꿈을 당연히 이룰 수 있다는 듯 가능성이란 풍선을 마구 부풀린다. 이때의 가관은 그들이 벌써부터 '박사장 가족의 공간'(남궁현자라는 예술가의 혼이 담긴 집, 상류층)을 소유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연덕스럽게 술판을 벌인 그들의 모습은 마치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비리디아나>(1961) 속 거지들의 만찬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키며, 실제로 그들이 박사장의 집에서 누릴 수 있었던, 말 그대로 최후의 만찬이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예언했지만, 기우의 가족은 자신들의 최후를 결코 예측하지 못했다 점이랄까.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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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다혜를 향한 '기우의 고백'은 또 다른 성질을 가지는데, 그것은 '당사자의 부제에 따른 효력의 무효화'다. 이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서 종수가 혜미를 향한 고백과도 일맥상통한다. 두 고백은 타자의 부재, 술과 약의 힘을 빌린 취중진담으로,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무능력함'을 인정한 반사적인 행동인 동시에 그 말을 듣는 타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임을('기우의 가족'과 '벤'은, 공통적으로 그 상황을 웃어넘긴다) 보여준다. 이들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성> 속 주인공 'K'와 같다. 외지인이자 토지측량사인 K가 어떻게든 '성' 도달하기 위해 시도해 보지만, 그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 '닫힌 구조' 속에 모습. 한편으로, 같은 시기에 개봉한 <아워바디>(2019)나 <벌새>(2019) 역시 세계가 존재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 속의 주인공을 담는다. 정리하자면, 기우의 고백은 자신이 앞으로 그렇게 살 것이라는(다혜를 통한 신분상승) 기세로 보아도, 그것이 안타깝게도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울리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정작 기우는 문광과 근세를 제거하지 못한 채, 되려 기정을 잃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기택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기우에게 기세는 자신의 자리도 지키지 못하는 허울뿐인 기운과 같다. 그리고 그 효력의 끝은 '부치지 않은 편지'로 끝을 맺는다. 이상하다. 관객인 우린 더는 응시할 것이 없는 최악의 결말을 보았음에도, 더 응시할 것이 남아있다는 것을 '기우'를 통해 확인한다. 아빠인 기택의 생존을 확인한 기우는 다급하게 집으로 뛰어가 편지를 쓴다.

기우의 편지를 읽은 지젝은 이렇게 설명한다. "부치지 않은 편지를 보관하는 것은 그것이 미래를 붙잡아 두는 것이다. 쓰지도 않고 보내지도 않은 편지도 특이하지만, 부칠 생각 없이 편지를 간직하는 것은 정말 특이하다. 편지를 간직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 편지를 결국 '부쳤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편지에 담긴 생각을 포기하거나 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그것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현실 속 수신자의 응시에 내맡겨지기에는 너무나 소중하다고 말한다. 현실의 수신자는 편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편지의 가치에 걸맞은 환상 속의 상대자,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제대로 가치 평가를 해주리라 간주하는 사람에게 '보낸'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22p)

이 편지는 누구를 위한 편지일까. 봉준호 감독은 어떤 생각으로 영화의 말미를 '기우의 부치지 않은 편지'로 채워 넣었을까. 관객인 우리가 그 편지의 수신자로 극장 안에 남아있기를 바랬던 것일까. 기우의 편지가 그의 목소리로(보이스오버) 흘러나오는 끝에 기우는 아버지와 포옹을 한다. 편지가 보여준 환상, 그리고 다시 반지하의 장면이 등장한다. 그 순간 영화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슬프다. 이에 대해 봉 감독은 "솔직히 그 장면은 최대한 아름답게 찍고 싶었지만 가장 잔인한 장면이라고 봤어요. 그런 이중적 감정으로 찍은 장면이에요. (...) 이 장면으로 위안을 받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잔인한 장면이죠"라고.(필로 NO.10, 인터뷰 <기생충> 봉준호 - 어둠과 심연 사이, p152)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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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형세

'기우의 기세'로 가족은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그들은 박사장의 부를 쫓기 위한 욕망의 움직임, 그 자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박사장의 가족이 아닌 자신들과 똑같은 문광의 가족을 만난다. 서로가 타협하지 않은 그들의 끝에는 처참하게도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이 죽음은 서로의 처지를 무시하고 깔보는 부도덕함에 비롯된 걸까. 어쩌면 박사장의 지하실 근세를 대신해 기택이 자리하기 위한 필연적인 죽음, 이미 누군가로부터 정해진 제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창문 넘어 정원에서 햇볕을 쬐며 누워있는 기우를 바라보는 기택과 충숙의 모습은, 비가 오는 와중에도 인디언 텐트에서 놀고 있는 다송이를 노심초사 바라보는 박사장과 연교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기택 부부의 무능력함, 누구에게나 공평한 햇빛을 잠시나마 아들이 맘껏 쬘 수 있는 안도감 같은 것이다.

아니면 기정이 근세로부터 칼에 찔려 죽는 순간, 기택 자신이 박사장의 운전기사인지, 기정의 아빠인지 고민하는 찰나의 감정은 어떨까. 관객으로는 감히 상상조차 못 할 치솟는 감정의 유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세에게 풍기는 악취에 불쾌한 표정으로 얼굴을 돌리는 박사장을 향한 기택의 분노. 이것을 <버닝>에서 벤을 향해 깊게 칼을 찔러버리는 종수의 분노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왜 기택과 종수는 끝내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을까. 무엇을 위한 죽음일까. 신자유주의에 대한 산물의 제거함일까. 그들이 현재를 살고있는 세상의 상징이기 때문에? 글쎄. 종수가 벤이 혜미를 죽였다는 의심을 넘어 확신에 선을 넘었건, 기택이 박사장이 넘지 말라던 선을 넘었건, 관객인 우리는 두 죽음이 영화의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현실이 지닌 한계'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삶은 계속돼야 하기에. <기생충>의 형세란 박사장 집의 지하실과 같은 어둡고 폐쇠된 공간을 햇빛이 내리비치는 정원 위로 끌어 올리는 꼴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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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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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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