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사랑, 관념의 감옥을 넘어서는 성장의 기록
[Interview] 사랑, 관념의 감옥을 넘어서는 성장의 기록
  • 홍상현
  • 승인 2023.03.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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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국제영화제 초청작 <인 허 룸> 이토 치히로 감독 인터뷰
「인 허 룸」은 장르를 가로지르는 명장 유키사다 이사오와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그 남자가 아내에게」, 「원탁의 가족」 등의 작품에서 함께했던 시나리오 작가, 이토 치히로의 감독 데뷔작이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인 허 룸」은 장르를 가로지르는 명장 유키사다 이사오와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그 남자가 아내에게」, 「원탁의 가족」 등의 작품에서 함께했던 시나리오 작가, 이토 치히로의 감독 데뷔작이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도서관.

낡은 백자의 청화를 더듬듯 아카이브의 신문 인터뷰를 읽는다. 인터뷰이는 T. S. 엘리엇의 시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에 열광하는 문학자였다. 하지만 제리 샤츠버그의 <허수아비>(1973)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석사논문을 쓰지 않고 UCLA로 향했다. 영화이론을 전공할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MFA 과정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 사이 아버지를 기리며 쓴 시나리오로 RKO 픽처스가 주최하는 하틀리-메릴 국제 시나리오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거머쥔다. 기사 게재일은 1998년 11월 5일로 돼 있지만, 작품은 이미 도쿄국제영화제에서의 상영을 마친 후였다.

은사인 영화감독 이광모의 얘기다. UCLA에서 쓴 시나리오는 도쿄국제영화제(TIFF) 초청작 <아름다운 시절>(1998)로 애초의 타이틀은 <고향의 봄>이었다. 본인의 술회를 통해서도 들었거니와,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문학과 영화의 관계성에 주목했다. 문학이 지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영화는 전체적인 느낌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인 까닭에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면 문학이 빠를지 몰라도 영화는 전체를 건드릴 수 있다. 이를 시각화하는 작법은 견고했다. 아버지 세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짓이라는 판단 하에 아버지의 일기장으로 보는 과거를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롱테이크로 찍었다. 안쓰러움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마당에 끼어 있는 세월의 이끼 빛과 사진이 바랜 것 같은 노란색을 배합, 화면의 주조색으로 입혔다. 이 '심리적 색체'를 위해 열여덟 차례나 색보정을 했다.

 

시나리오 작가였지만 정작 영화계 생활은 미술 스태프로 시작했기 때문일까. 이토 치히로 감독의 실력은 시각적인 면에서 도드라진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시나리오 작가였지만 정작 영화계 생활은 미술 스태프로 시작했기 때문일까. 이토 치히로 감독의 실력은 시각적인 면에서 도드라진다. (C) 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시계를 24년 후로 되돌려보자. 제35회 도쿄국제영화제 초청작인 이토 치히로 감독의 <인 허 룸>은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 같지만 도쿄국제영화제 금상 말고도 하와이국제영화제와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에서 각각 대상과 최우수 예술공헌상을 차지한 은사의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2003년 <7번째 생일>로 시나리오 작가에 데뷔한 그는 장르를 가로지르는 명장 유키사다 이사오와 여러 작품을 함께하며 입지를 구축했고 마침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그 남자가 아내에게>(2009)를 거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원탁의 가족>(2014)에 이르러 시나리오만으로도 개성이 드러나는 냉온양면의 작풍을 확립했다.

이번 <인 허 룸>에서 이토 감독은 자작 소설을 앞서 언급한 "전체적인 느낌으로써의 커뮤니케이션"을 실현, 또 다른 차원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등장인물인 미야코(바바 후미카 분)의 아파트는 아름답지만, 일상의 공간이라기보다 부조리극의 무대 같다. 여기에 종종 정물(still life)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반복되는 일상의 무의미함을 그린다. 미야코를 사랑하는 스스메(이구치 사토루 분)는 삶의 본래성(Eigentlichkeit)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는 가운데 자신을 책망하며 상처받는다. 여기에 무위에 굴복해 버린 존재의 무력함, 사랑과 집착을 구분하지 못하고 주체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퇴행은 그와 세상을 잇는 모든 공간을 위험하게 만들어버린다. 다만,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토 감독은 스스메가 이 '아름답고 처절한 관념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사랑의 경험을 통해 성숙하는 성장서사를 구축함으로써 관객을 만족시킨다. 데뷔한 지 5년 만에 단연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아트디렉터 후쿠시마 나오카의 독보적인 프로덕션디자인도 작품의 백미.

내용은 이렇다. 늘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힘겨운 치과의사 스스메는 아로마 전문점을 운영하는 미야코와 사랑에 빠져있다. 항상 방문을 열어두고 느닷없이 연락이 두절되는 일도 비일비재하지만 같이 있으면 스스로를 속박하는 자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이 드는 미야코가 고마웠다. 그러나 미야코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 늘어가던 가운데 갑작스레 등장한 요코(미야코의 친구, 카와이 유미 분)가 미야코의 몸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알려주면서 시련이 시작된다.

 

데뷔한 지 5년 만에 단연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아트디렉터 후쿠시마 나오카의 독보적인 프로덕션디자인도 「인 허 룸」의 백미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데뷔한 지 5년 만에 단연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아트디렉터 후쿠시마 나오카의 독보적인 프로덕션디자인도 「인 허 룸」의 백미다. (C) 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홍상현

TIFF 초청작 <인 허 룸>은 한국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 프로듀싱의 작품 데다, 무엇보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한국의 국제영화제에서 사랑받아 온 이토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일단 '홍상현의 인터뷰'에서 항상 드리는 질문으로 시작해 보고 싶은데요.

한국영화를 즐겨 보시나요? 좋아하시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가 있으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토 치히로

당연히 즐겨보죠!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웃음)

순번을 매기는 건 아니지만 특히 좋아하는 작품으로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2020),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 등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 작품은 딱히 하나를 고르기 힘들 만큼 좋아하고요.

연기자와 관련해서는 설경구 배우, 조인성 배우, 공유 배우 등 주로 남성 연기자들이 주연한 영화들을 좋아하는데요. 다들 눈빛연기가 인상적이에요.

 

홍상현

시나리오를 쓰신 <봄의 눈>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게 2005년이죠. 올해가 2023년이니까 어느새 20년 가까이 한국영화와 인연을 맺어 오신 셈인데요.

이토 치히로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하지만 한국영화의 발전상을 지켜보노라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걸 실감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에너지가 넘치고, 흡인력이 강한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어서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어요.

 

치과의사인 스스메는 늘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힘겨워한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치과의사인 스스메는 늘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힘겨워한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홍상현

소설가를 지망하시다 미술 스태프로 영화계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번 <인 허 룸>을 포함해 그간 시나리오를 써온 작품들을 보면 모두 시각적인 면에서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스토리 자체의 구현뿐만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를 상정하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계신 거 아닌가 싶습니다만.

이토 치히로

저 자신, 구도나 색조에 대한 취향이 분명하다는 걸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또, 영화에서는 말로 하지 않거나 말로 할 수 없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잖아요. 이 점을 무척 중요하게 의식하고 있어요.

 

홍상현

<인 허 룸>은 얼핏 로맨스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현대인의 내면에 대한 통찰과 성장을 그리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독특한 작품을 구상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요.

이토 치히로

원작을 쓰면서 일단 한 인간의 자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정해두었습니다. 소설이 일기 형식으로 쓰여 있는 것도 그래서이지요. 이걸 영화로 만들게 되면서 다시 한번 어떤 관점에서 그려야 할지 생각해봤는데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 그대로를 볼 수 없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잖아요.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홍상현

이를테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이토 치히로

주인공인 스스메는 강한 자의식으로 인해서 자기 내면에 대해서서도, 주변 사람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과도하게 통찰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해소하려 하지 않죠. 따라서 누군가를 강하게 원할 때도 내내 흔들리며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고요. 이 모습이 연애라는 경험을 통해 나타나는 걸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또한 '이해'라는 것이 근저에 있는 까닭에 역설적으로 이해하려는 의식, 완전한 이해가 존재할 수 없으며, 그저 상상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답을 찾지 못하는 답답함의 느낌을 영화를 보시는 분들에게 전해드리고도 싶었고요. 최대한 대사의 사용을 자제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인 허 룸」은 주요 등장인물 세 사람의 캐릭터를 방으로 표현한다. 각자의 내면을 공간의 이미지를 통해 표출하는 것이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인 허 룸」은 주요 등장인물 세 사람의 캐릭터를 방으로 표현한다. 각자의 내면을 공간의 이미지를 통해 표출하는 것이다. (C) 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홍상현

스스메의 직업을 치과의사로 설정하신 것도 연장선상에 있나요?

이토 치히로

그렇죠. 어느 정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입 안을 보이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스스메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작 그런 스스메가 마스크로 자신의 입을 가리면서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입 안을 들여다보는 거죠.

 

홍상현

작품 이야기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In Her Room"이라는 (영어)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이 영화에서는 미야코의 방이 주제와 직결되는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이토 치히로

프로덕션디자인을 맡은 후쿠시마 씨와 처음 이야기했던 것은,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세 사람의 캐릭터를 방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각자의 내면을 공간의 이미지를 통해서 표출하는 거죠. 그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게 미야코의 방인데요. 이름의 한자를 뒤집은 단어이기도 한 '자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상현

스스메의 퇴행적인 캐릭터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대목인데요. 요코의 등장으로 또 다른 긴장감이 조성되면서 드라마에 역동성이 더해집니다. 극적인 재미를 위한 장치라는 것 말고도 요코라는 캐릭터가 갖는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토 치히로

신뢰라는 것은 감정의 기점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데 스스메는 미야코를 사랑한다고 느끼면서도 그녀를 미덥지 않아 하죠. 사랑보다 의심하는 마음이 더 강해져 버린 겁니다. 해서, 늘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망상에 빠져있고, 이를 통해 주어지는 괴로움을 사랑의 힘이라고 착각하죠. 생생한 상대와의 대화보다 혼잣말을 되풀이하듯이.

요코는 이런 갈등 속에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컨대 스스메가 진정 미야코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요코의 언동에 농락당하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니 역설적이지만 요코의 존재는 미야코에 대한 스스메의 사랑이 설령 속아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강하지 않다는 걸 드러내 줍니다.

아울러 저는 비단 연인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주위에서 들은 정보 가운데서 내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 숙고한 후에 사물을 바라보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스스메는 이런 제 주관이 반영된 캐릭터이기도 하답니다.

 

미야코를 연기한 바바 후미코 배우는 촉감이 좋고 높은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감독의 세세한 조정요구를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미야코를 연기한 바바 후미코 배우는 촉감이 좋고 높은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감독의 세세한 조정요구를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홍상현

배우들의 연기 외에도 물의 이미지나 독특한 사운드 디자인을 통한 정서적 연출을 통해 서사를 이끌어가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토 치히로

이미지나 사운드는 언어정보로 가득 차 있는 소설에서 대사가 적은 영화로 작품을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제가 특히 주목한 요소들입니다. <인 허 룸>은 설명이 최대한 배제되어있다는 인상을 받기 쉬운 작품이지만 인터뷰이께서 지적하시는 부분에 저는 무척 많은 정보를 담았어요. 그러한 연후에 서사를 부감으로 바라봤을 때, 일상에서처럼 무의식적으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가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상현

지금의 일본 영화계 상황을 생각할 때 실로 '희유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아트디렉터 후쿠시마 나오카 씨의 프로덕션디자인이야말로 <인 허 룸>의 큰 볼거리 중 하나 아닐까 합니다. 후쿠시마 씨와 어떤 비주얼 플랜을 세워 실천하셨나요.

이토 치히로

세세한 플랜을 세우기보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고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그리고 후쿠시마 씨의 센스를 믿었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방에 대한 내용 이외의 추가적인 요청은 추상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녀가 상상하는 비주얼을 보고 싶었거든요.

소설을 쓸 때는 장르의 특성상 자유롭게 상상했던 것들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영화를 만들 때 제일 고생하셨던 게 미술 스태프분들이었어요. 제가 후쿠시마 씨를 특별히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 만들기를 마음속 깊이 즐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정된 예상과 시간 속에서 힘든 일만 있었을 텐데,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제게 여러 가지를 제안해 주시더라고요.

그런 맥락에서 요코의 방은 후쿠시마 씨의 센스가 가장 빛나는 부분 아니었나 싶어요. 영화의 첫머리에서 스스메와 미야코가 오감에 얽힌 기억을 이야기하는 게 나오는데요. 요코의 방에 생생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진 귀와 입 등의 오브제가 배치되죠. 의미심장하죠. 방의 커튼을 빨간색으로 한 것도 후쿠시마 씨의 아이디어였는데요. 스스메와 요시코가 성관계를 갖는 장면의 정처 없는 분노, 공허함, 눈앞의 대상과는 다른 곳에 있는 마음에서 비롯된 욕망 같은 복잡한 심정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뮤지션으로 유명한 이구치 마사루 배우는 이야기를 읽어내는 힘이나 캐릭터와 실제의 자신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 연결해나가는 감성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를 어떻게 표현해서 관객에게 전달할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뮤지션으로 유명한 이구치 마사루 배우는 이야기를 읽어내는 힘이나 캐릭터와 실제의 자신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 연결해나가는 감성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를 어떻게 표현해서 관객에게 전달할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홍상현

이번엔 미야코를 연기한 바바 후미코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죠. 촬영장에서 주로 어떤 주문을 하셨나요?

이토 치히로

제가 바바 배우의 연기에서 요구한 것은 '무'가 아닌 곳에 있지만 잡을 수 없는 목소리, 표정, 움직임, 또한 윤기와 육체적인 부드러움 등입니다. 그녀는 촉감이 좋고,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 감독의 세세한 조정요구를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예요. <인 허 룸>은 그런 그녀의 남다른 재능을 확인하는 기회였습니다.

 

홍상현

스스메 역의 이구치 마사루 배우는 <인 허 룸>에서 지금까지와 혁명적으로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 역할창조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 같던데요.

이토 치히로

스스메를 연기한다는 건 <인 허 룸>의 세계관을 짊어지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무척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서 섬세한 캐릭터를 형상화해 주셨어요.

이구치 배우는 이야기를 읽어내는 힘이나 캐릭터와 실제의 자신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 연결해나가는 감성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를 어떻게 표현해서 관객에게 전달할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한편으로 머리보다 마음으로 연기에 임한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작품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각오는 표현자라면 누구든 갖고 있을 테지만, 이구치 배우는 이런 면이 특히 강하지 않나 싶어요. 수치심조차 뛰어넘어 의도한 바를 표현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대단히 성실합니다. <인 허 룸>에서 함께하면서 그가 왜 그토록 강한 흡인력을 가진 특별한 소리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홍상현

<썸머 필름을 타고!>(2020)로 한국에도 팬이 많은 카와이 유미 배우의 연기도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애초에 가와이 배우의 캐스팅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건가요?

이토 치히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단히 즉흥적인 동기인데요.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서 요코 역에 어울리는 배우로 누가 있을까 생각하는데 가정 먼저 떠오른 게 가와이 배우였어요. (웃음)

 

「썸머 필름을 타고!」로 한국 관객들에게 사랑받은 카와이 유미 배우는 사랑보다 의심하는 마음이 더 강해져 버린 스스메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캐릭터인 요코 역을 맡아 열연했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썸머 필름을 타고!」로 한국 관객들에게 사랑받은 카와이 유미 배우는 사랑보다 의심하는 마음이 더 강해져 버린 스스메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캐릭터인 요코 역을 맡아 열연했다. (C)2023 In Her Room Film Partners

홍상현

카와이 배우에게는 어떤 디렉션을 하셨는지요.

이토 치히로

카와이 배우는 제가 쓴 시나리오를 아주 재미있게 읽어주었고 애초부터 완벽하게 주어진 배역을 이해해 주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요코 역을 맡길 수 있었어요. 제작 준비 과정에서 질문들을 노트에 따로 적어오기도 했죠.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현장에서의 제 디렉션은 그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요코는 어떤 심정인지를 서로 확인하는 정도였어요. 감각적으로 제가 뭔가를 전하려 할 때, 그녀는 이미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카와이 씨의 가장 큰 매력은 의식적으로 우러나오는 독기와 무의식적으로 우러나오는 온기에 있고, 그런 그녀이기 때문에 제가 생각했던 것을 넘어 '최고의 요코'를 연기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카와이 배우가 함께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인 허 룸>은 정말 축복받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홍상현

세 배우의 케미스트리가 마치 오랫동안 함께해온 동료들처럼 훌륭합니다. 연출 면에서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노하우를 듣고 싶은데요.

이토 치히로

제 '실력'이 아니라 그들의 '사람됨'이 성공 요인이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정말 타인을 세심히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거든요. 적절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진실하게 상대방을 생각해줄 줄 아는. 그런 면에서 제가 무척 서투른 사람이었던 까닭에 감독 데뷔작에서, 그것도 이 어려운 배역들을 세 사람에게 맡기고, 함께할 수 있었던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TIFF 레드카펫 행사에서 세 배우와 함께한 이토 치히로 감독. 조만간 문자 그대로 ‘청출어람’하며 기세를 떨치는 여성감독을 보게 될 것 같다. (C)TIFF
TIFF 레드카펫 행사에서 세 배우와 함께한 이토 치히로 감독. 조만간 문자 그대로 '청출어람'하며 기세를 떨치는 여성감독을 보게 될 것 같다. (C) TIFF

"<인 허 룸>을 흥미롭다고 느끼실지, 혹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큰 감흥 없이 흘려보내실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각자 보고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을 테지만, 저로서는 새로운 각도에서 스스로를 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이질감을 관객 여러분께 전해드리는 작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제가 유키사다 감독의 작품에서 써왔던 시나리오들과는 조금 다른 인상을 받으실 수도 있겠지만, 그간 로맨스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며 진정 그리고 싶었던 것을 담아낸 작품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한국 관객 여러분들의 소감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홍보용 트위터 계정을 오픈하자마자 순식간에 1만 명의 팔로워가 따라붙고, 인스타그램에서는 사진일기 형식의 포스팅이 지속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얻는 등 관객들의 기대를 모으며 3월 10일 개봉한 <인 허 룸>은 현지에서 그 독특한 매력만큼이나 색다른 화제를 뿌리고 있다. 바로 대략 한 달 뒤에 차기작 <사이드 바이 사이드>가 공개될 예정이기 때문. <인 허 룸>과 마찬가지로 유키사다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은 다음 작품을 이처럼 인터뷰의 에필로그에서 언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그리고, 살아간다>(2019),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2018) 등으로 알려진 사카구치 켄타로 주연의 이 영화에 <인 허 룸>의 스스메가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인 허 룸>과는 세계관이 전혀 다른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지만 주제에 있어 공통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토 감독의 귀띔. 게다가 이 두 작품과는 또 다른 템포의, 엔터테인먼트성이 높은 세 번째 작품도 준비 중이니 기대해달란다.

이 감독. 지금껏 얼마나 큰 인내심으로 데뷔를 참아온 것일까. 조만간 문자 그대로 '청출어람'하며 기세를 떨치는 여성감독을 보게 될 것 같다.

[인터뷰 홍상현,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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