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Berlin] 여전히 봉준호적인 '미키 17'

"친숙한 봉준호와 낯선 봉준호 사이의 길"

2025-02-16     이상용
봉준호 <미키 17> 특집
여전히 봉준호적인 '미키 17'
봉준호 영화의 '계급성'에 관하여

 

이 글에는 스포일러라고 불릴만한 것이 많다. 이 지면을 통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단 한번도 스포일러를 의식한 적은 없다. 그리 할 때 더 이상 비평이 아니라 단순한 정보의 나열에 그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존 버거의 『랑데뷰』에 등장하듯 줄거리 운운하는 것은 영화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영화의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매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항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것은 한국 시점으로 이 영화가 미개봉작이기 때문이다. 행여 글을 접하는 이들 중에 내용을 알고 싶지 않으시다면 돌아가는 것을 정중히 권유한다.

 

먼저, 한국인의 관점에서 <미키 17>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은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외국영화라는 점이다. <설국열차>(2013)나 <옥자>(2017)에서도 틸타 스윈턴을 비롯한 배우들이 등장했지만 이 영화들은 여전히 한국영화 혹은 한국의 봉준호 영화 같았다. 한국어 때문만은 아니다(동시에 한국어 때문이기도 하다). <옥자>의 유명한 지하철 상가의 난장판처럼 한국적 풍경들이 눈을 뚫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키 17>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미키 18이 러팔로가 연기하는 자본가 '마샬'을 암살하려고 할 때 실질적인 행성의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벌레의 형상을 복잡하게 띤 작은 크리퍼(creepers) 두 마리가 내부로 들어오고,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난장판이 벌어진다. 이 난장판은 <옥자>의 지하철 상가, <마더>의 장례식장, <괴물>의 실내체육관과 유사한 봉준호의 트레이드마크다. 이야기를 중첩시키고 비틀어 버리는 전개는 여전하지만, 종종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의 거리가 멀고, 자꾸만 환기시키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여준다. 최대한의 몰입을 끌어당기는 것과 다소 이완된 장면들의 전환은 느슨해진 봉준호처럼 생각할 수도 있고, 달라진 봉준호를 돌아보게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확연히 영어 기반의 영어인 탓도 있다. 일정한 선입견이 작동할 수 있다. 한국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수많은 미키들을 지나 미키 17과 미키 18을 동시에 연기하는 로버트 패터슨의 목소리의 이중적 연출은 묘한 이질감을 자아낸다. 더불어 종종 쉽지 않은 영어가 흘러 다닌 탓에 베를린에서 한글 자막도 없이 보는 관객에게는 어려움이 있었다. 행성의 생명체이자 지능을 가진 'creepers'를 어떻게 번역할지도 고민을 안겨주었고, 등장하는 자막은 독일어이다보니 습관적으로 자막 읽기에 길들여진 관객에게는 언어가 무겁게 다가왔다(개인차이겠지만 해외 영화제에서 영화를 볼 때 영문 자막과 영어를 듣는 영화의 이해도는 현격히 달라진다)두 명의 미키(17과 18)를 두고 "multiple"이라고 지칭할 때도 실제 한국에서는 어떻게 번역될지가 궁금했다. 아래 내용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임시적인 개인의 번역으로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미키 17>은 완전히 다른 봉준호의 외국영화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전작들과 달라진 막대한 대사량 때문이다. 해외에서 촬영된 전작들이 언어 사용을 줄임으로써 한국어와 영어의 간극을 좁히는 방식에 놓였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미친 듯이 대사를 읊어댄다. 여기에는 "죽는 기분이 어때?"와 같은 반복되는 유머의 대사가 있고(미키 17에 이르기까지 계속 폐기처분되는 미키를 향해 죽는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 기괴한 유머는 확실히 봉준호 특유의 고약한 마력을 뿜는다), 자본가 혹은 정치가를 풍자하거나 과장된 언어들의 전달도 일상적이기보다는 비일상성에 가깝게 느껴진다. 시각적 화려함도 크지만 언어적 과함이 넘쳐나는 이래저래 봉준호 영화의 또 다른 경계를 향해 가는, 더 이상 한국적 환경이 아니라 우주와 낯선 행성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새로운 봉준호가 되어 버리는 질주가 영화 전반을 가로지른다.

 

이쯤에서 최대한 차분하게 영화의 줄거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미키 반슨(로버트 패터슨)은 대출업자들에게 돈을 빚져 궁지에 몰린다. 그는 돈을 갚기 위해 동업자인 티모(스티븐 연)와 함께 마샬(마크 러팔로)과 그의 아내(토니 콜렛)가 운영하는 행성 탐험에 참여한다. 우주에서부터 행성 탐험에 이르기까지 미키가 해야 하는 일은 끊임없이 위험한 일의 일선에 서는 것이다. 우주에서 손이 잘려나가도, 업무 도중 사망을 하여도 그는 새롭게 형성된 몸에 기억과 성격을 다시 설치하여 살아간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숫자가 붙는 것이다. 영화 초반 바디 스캔 후 고통스러워하는 미키의 모습과 함께 미키1 부터 반복적으로 용광로와 같은 구덩이에 던져지는 모습이 반복된다. 그때마다 미키의 숫자는 증가한다.

이 과정이 제시되기까지 기존의 봉준호 영화와는 좀 다른 구성을 보여주는데 영화의 시작은 2054년이다. 니플하임 행성의 좁은 협곡 아래에 떨어져 있는 미키가 보이고 잠시 후 티모가 나타난다. 하지만 티모는 미키를 구하지 않은 채 돌아선다. 미키는 자신이 미키 16인지, 17인지를 자문한다. 그리고 잠시 후 벌레처럼 생긴 크리퍼들이 등장한다. 급기야 우두머리로 보이는 크리퍼가 촉수를 들이밀며 미키를 덮친다. 이때부터 플래쉬 백을 통해 미키가 여기에 있게 된 상황과 미키 1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가 간략히 요약된다. 이 흐름은 결국 티모가 떨어져 있는 영화의 첫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도망치는 미키를 덮치는 괴물의 촉수 클로즈업이 동일하게 등장하고 화면에는 '미키 18'을 보여주었다가 19로 넘어가는 듯하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은 놀랍게도 이 괴물들이 미키 17를 순순히 돌려보내주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미키(어차피 16번의 죽음을 맞이하였기에)는 그럼에도 "그들이 최소한 나를 통째로 삼켜줄 수 있을까? 안 그러면 한 입 한 입 씹어먹지는 말아줘!" 라고 외친다. 하지만 크리퍼들은 아무런 반응없이 순한 양들처럼 보낼 뿐이다. 그러자 미키 17은 봉준호식 농담을 던진다. "난 여전히 좋은 고기야!" 문제는 다음 상황에서 이어진다. 탐사 기지로 돌아온 미키 17은 죽은 줄 알고 마련된 자신과 동일한 미키 18과 마주한다. 이것은 도플갱어의 대립인 동시에 현실에서는 법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동일한 복제체의 두 버전이 존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다중체를 숨기기 위해 미키 18은 17을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서로 반목하던 두 사람은 함께 모험에 나선다.

동일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미키 18은 폭력적이고 행동이 앞서는데 반해 미키 17은 폭력을 만류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언어의 캐릭터다. 미키 18은 자신보다 나약한 17의 존재감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자신에 대한 혐오라고도 할 수 있는 18의 공격적 태도에 반해 미키 17은 다름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죽음은 존재의 독특함을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매번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처럼 논쟁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이제 미키는, 아니 최소한 미키 17은 매번 죽는 존재가 아니라 다시는 죽지 못할 것이라는, 존재의 고유성에 사로잡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이 영화의 결말과도 깊숙히 연결되어 있다. 둘 중에 누가 살아남을지는 바로 존재의 고유성을 향한 주장과 결단 속에서 이뤄진다(이미 스포일러가 다수 내포되어 있지만 이 결말까지는 확정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미키 17과 미키 18의 동시 등장 속에 흥미로운 상황은 미키 17의 연인이자 리더가 되는 승무원 나샤(나오미 아키)와 또 다른 여성 캐릭터이자 동정심 많은 동료인 카이(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의 반응과 태도 속에서도 아이러니를 전개한다. 미키 18을 17로 오인했던 나샤는 두 남자를 보고 현실을 파악한 후 한 침대 위로 끌어들인다. 이 상황을 미키 17은 견디지 못할 뿐만 아니라 봉준호 특유의 코믹한 성적 표현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한편, 카이는 식사 자리에 있던 미키 17에게 매력을 느끼면서 따라오기 시작한다. 나샤가 두 미키와 같이 있는 것을 본 후 자리를 뜨자 나샤가 카이를 찾아와 현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나 카이는 미키 17을 자신이 맡을 테니 18을 가지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나샤는 두 미키 모두를 자신의 소유라고 말한다. 

이 여성 캐릭터들의 주목할 점은 소모품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미키를 향해 동등하게 대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카이의 경우는 동점심이 앞서 있기는 하다. 미키의 나쁜 동료이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티모처럼 "죽을 때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 무례함도 있지만 카이는 미키 17의 순진한 모습에 호감을 느낀다. 미키 17의 연인이었고, 18도 보게된 나샤는 두 미키를 동일하게 여길 정도로 이상화된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클론이나 소모품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동일한 개체로서 그들의 다른 모습을 사랑하는 이상화된 여인으로 보인다. 전작들과의 연결 속에서 보자면 그녀는 성숙해진 <설국열차>의 요나이며, 슈퍼 돼지들의 도살장을 보고 각성하게 된 미자처럼 보인다.

 

<옥자> 혹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멀티플, 그러니까 미키 17과 18의 동시적 등장은 캐릭터 각각에게 있어서, 그리고 최하위 노동자 계급의 분화라는 점에서 혼란을 야기하지만 이 등장은 엉뚱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행동하는 미키 18은 도취한 채 마이크를 잡고 흔드는 마샬을 암살하려고 하고, 미키 17은 이를 만류하기 위해 따라나선다. 그런데 이 과정에 등장한 크리퍼 새끼 두 마리(각각 루코와 조코다. 이 이름은 나중에 크리퍼의 우두머리를 통해 발설된다)로 인해 행성 크리퍼들의 전면적 공격이 시작된다. 울음을 들은 크리퍼들은 기지를 향해 달려온다. 그 모습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새끼 오무의 울음소리를 이용해 오무를 이동시키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마샬은 크리퍼 한 마리를 죽인 후 남은 한 마리도 살해하려 하지만 기지를 발휘한 나샤의 행동으로 죽음을 면한다. 두 명의 미키가 크리퍼의 우두머리와 만나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분명하다. 미키 17은 크리퍼들로부터 살아남은 자이기 때문이다.

마샬과 그의 아내가 보여주는 광기는 정치인들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이미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특정 정치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기획과 캐스팅 단계에서 지금의 현실은 예상할 수가 없었다. 다만, 만화와 같은 과장법들이 인류가 반복해 온 정치적 캐릭터들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을 따름이다. 마샬이 새끼 크리퍼를 죽이려고 할 때 이를 만류하던 아내가 자신이 아끼는 카펫을 들어올리는 장면은 지배계급의 위선을 향한 전형적인 풍자의 묘사다.

아무려나 마샬은 두 명의 미키에게 기폭장치를 달고 크리퍼들과의 협상 테이블로 내보낸다. 그곳에서 미키 17은 번역기를 활용해 아기 크리퍼를 돌려주는 것이 실마리임을 알아채고, 나샤에게 신호를 보낸다. 다소 극적인 상황이고, 연결이 아주 매끄럽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옥자>의 주인공 미자가 마란다에게 금송아지를 내던지며 협상하는 것처럼(언제부터 미자는 그렇게 영어를 잘 하게 되었을까) 일정한 해피엔딩을 향해 치닫는 방향성 속에 마샬의 광기와 부딪히는 긴장감이 구현되어 있다. 무엇보다 폭력과 극단적 대립 속에서 행동하는 미키 18은 자신을 희생한다. 그것은 <설국열차>의 클라이맥스처럼 달리는 기관차를 폭파하기로 결심하는 꼬리 칸의 남자 커티스를 미키 18이 반복하는 셈이다. 평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미키 17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인공 나우시카 공주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봉준호의 히어로는 귀족적 메시아가 아니라 두 명으로 양분된 멀티플이자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는 노동자다. SF의 고전인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세계를 구하는 메시아가 결국 시장의 아들이었던 한계와 달리 이후 수많은 묵시록적 주인공들이 귀족 계급에 속했던 인물이었던 것 달리 봉준호 감독은 죽음조차 소비되는 계급 낮은 클론이 낯선 행성에서 새로운 생명체들과 공존의 방식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난 봉준호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마더>의 경우 계급적 연쇄과정 속에 아들의 살인을 결국 더 비루한, 엄마가 없는 종팔이에게 덧입혔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할리우드적 낙관주의를 통해 가장 비루한 계급이 광기 어린 지배자 계급을 폭팔시키고, 동시에 크리퍼들과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출발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는 신화의 탄생을 그려내고 있다. 가장 할리우드적 엔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이 영화의 이질감이 있다. 이곳은 <괴물>의 한강 매점의 구석방도, <옥자>의 산골도 아니다. 개척지로서 새로운 행성의 거주민이 되기를 자청하면서, 이곳에 온 승무원들과 함께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봉준호의 가장 밝은 영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메시아주의적 성과를 기괴한 세계의 풍경을 헤집음으로써 기어코 완성해 낸다. 중간에 늘어지는 부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뒷심은 좋은 또 한 편의 봉준호 영화다.

 

봉준호의 본격적인 외국영화라고 했지만 봉준호의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친숙한 설정이나 반복들을 지나치기는 어렵다. 일부에서는 미키 17과 나샤의 성적 표현이 기존의 봉준호 영화의 수위를 넘어서거나 본격화되었다고 말하지만 옴니버스 형식으로 된 <흔들리는 도쿄!>에서 보았듯이 성적인 메타포들은 이미 그의 영화에 존재했다. <마더>의 경우 근친상간뿐만 아니라 엄마가 아들 친구의 정사 장면을 훔쳐보는 장면이나 마을에 일어난 살인사건이 결국 동네 남성들의 성적 착취의 결과였다는 점에서(이 영화에서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성에 대한 묘사는 도처에 깔려 있었다. 

이번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성의 본격적인 묘사 차원이 아니라 성적 묘사와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키 17과 나샤가 사랑을 나눈 후 그렸던 성애적 캐리커쳐는 두 사람만의 신호로 작용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미키 17이 보내는 메시지의 중핵을 이룬다. 엄청 대단하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들만의 신호를 중시해 온 봉준호 영화들을 생각하면(<기생충>은 여러 인물들 각각의 그들만의 신호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의 기호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운 방식은 확연히 눈에 띈다. 

또한 난장판을 이루는 연쇄과정들 뿐만 이니라 <설국열차>에서 향락의 메타포이자 폭탄으로도 쓰였던 크로놀처럼, 이 영화에도 'OXYZOFUL'이 등장한다. 사실, 나샤가 두 미키를 한 침대에 끌어들인 것도 이것의 효과이기도 했다. 

미래의 어딘가에 계급적 분화가 심화되고, 전직 의원이었던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미키이지만 그의 반복적 죽음에는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소설가 까뮈가 묘사하는 '시시포스 신화'의 부조리(동시에 기괴한 유머)와 그 안에 너무나 인간적이며 동시에 백치적인 의지의 탄생이 있다. 까뮈가 묘사한 것처럼 신화 속 시시포스는 돌을 정상에 올려도 다시 굴러떨어질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숙명을 반복한다. 까뮈가 예찬하는 것은 부조리함만이 아니라 떨어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다시금 끌어올리는 시시포스의 단단한 근육과 힘줄이다.

<미키 17>을 가장 긍정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봉준호 특유의 고집스러운 탐구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끝내 미자는 옥자를 데려오고, 끝내 박강두는 현서를 괴물의 입에서 끄집어낸다. 물론, 현서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피할 수는 없지만 박두만 형사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화성의 논을 바라본다. 그것은 커티스의 고집스러움이다. 물론, 기우의 계획처럼 어처구니없고, 혜자의 믿음처럼 어처구니없는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열정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세계는 봉준호 영화를 움직여 왔다. 미키 혹은 미키 17의 의지는 무엇인가? 돈을 갚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인가? 이 과정 속에 계급이 있고, 광기가 있으며, 우발적인 충돌이 있고, 사랑이 있다.

<미키 17>은 SF이기보다는 고어, 슬래셔 등이 뒤엉킨 영화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소리'다. <옥자>에서 옥자의 소리를 이정은 배우에게 부탁했던 것처럼, 크리퍼의 소리를 내기 위해 여러 캐릭터들이 목소리를 내는 장면은 봉준호 영화의 또 다른 관심사를 드러낸다.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이 세계의 폭력과 미키의 반복적인 죽음은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