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th BIFF] '극장에 두고 온 것들' 극장과 영화를 만드는 것들
제31회 BIFF 비전 특집 ③ | 박근영 <극장에 두고 온 것들>
영화비평가 도경(기도영)은 우연히 오랜 친구 민우(강길우)를 만난다. 일이 끝난 뒤에 연락할 테니 만나자는 당장의 약속은 파기된다. 이후 함께 만난 자리에서 민우는 친구 현진(송지현)이 죽은 사실을 이야기한다. 도경은 극장을 오가며 일하면서, 대학 영화동아리 친구였던 민우와 현진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리고 과거 현진이 만들었던 단편 영화를 찾기 위해 곳곳을 수소문한다.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은 도경을 중심으로 비평가로서의 현재와 대학 시절의 과거를 오간다. 그 사이를 잇는 것은 현진의 죽음이다. 이 구조는 어쩔 수 없이 박근영 감독의 전작 <한강에게>(2019)를 떠올리게 한다. <한강에게>는 길우(강길우)의 사고를 기점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고, 박근영은 그 개인의 사건에 세월호라는 사회적 맥락을 겹쳐놓는다.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의 도경은 현진의 죽음과 사라지는 극장을 겹쳐본다. 개인적 상실이 공동체의 기억이 되고, 사라진 영화의 행방을 찾는 일은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는 극장의 기억들을 아카이브 하는 일이 된다. 다만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이 기억하려 하는 것이 과연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와 극장을 둘러싼 몸짓들
영화라는 매체에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어떻게 묘사되어 왔는가? 어두운 곳에서 객석에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 그는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화면 바깥에는 어떤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그 사운드는 그가 보고 있는 영화 안의 것이다. 한 사람이 영화를 본다는 상황은 이렇게 하나의 숏 안에서 매우 적은 요소만으로 구성될 수 있다. 여기서 영화의 스크린이 꼭 등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꽤 매력적이다. 어두운 공간, 객석, 인물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빛, 그리고 외화면의 영화 사운드가 있으면 된다.
종종 옛 극장의 풍경을 보여주는 영화는 담배를 태우거나 연인과 애정 행각을 벌이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동시대 극장의 풍경은 다르다. 관객은 또 다른 몸짓의 가능성을 잃고 그저 스크린을 바라볼 뿐이다.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의 극장 장면들도 분명 그렇다. 근데 영화는 때로 그 통상적인 이미지에서 이탈한 몸짓을 보여준다. 가령, 도경은 어느 한 장면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객석의 풍경을 본다. 또는 스크린에 시선을 두면서도 펜으로 노트에 무언갈 끄적인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도경이 영화비평가이기 때문이다. 비평가는 관객에게 작품을 소개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영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통상적인 관람에 덧붙여진 또 다른 극장의 몸짓을 스크린에 수놓는다. 이렇게 비평가라는 캐릭터는 극장이 잃어버린 몸짓을 되살리고 한 편의 영화가 통과하는 이후의 시간을 수행한다.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은 극장 바깥에서 영화의 제작과 상영 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을 호출한다. 학생들은 영화 장비 워크숍에서 카메라와 녹음 기기의 작동법을 배운다. 도경은 현진의 영화 시나리오를 뒤적이고, 현진의 영화를 상영했던 극장과 영화제를 찾고, 관계자들과 만난다. 때로 캠코더를 직접 손에 들고 무언가를 촬영하거나 노트북으로 영상을 편집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도경이 찾고 있는 현진의 영화는 쉽게 볼 수 없다.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은 한 편의 영화를 가능하게 했던 주변부를 계속해서 추적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들이 찾는 영화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영화라는 찰나는 과연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영화’라는 것은 어떤 요소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영화의 존재론적 특성’을 떠올린다. 이 영화는 극장에 대한 영화인 동시에 영화의 물성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 관객과 영화 사이의 만남은 그저 스크린을 응시하는 행위만을 요구한다. 반면 영화를 만들고 비평적으로 기록하는 영화를 둘러싼 행위는 모두 양손으로 무언가를 잡는 몸짓을 낳는다. 시나리오를 양손에 들고 넘기는 몸짓. 캠코더를 양손에 잡고 있는 몸짓. 카메라와 마이크를 양손으로 잡고 조작하는 몸짓. 노트북을 만지며 영상을 편집하는 몸짓. 비평을 위해 펜으로 노트에 무언갈 끄적이는 몸짓. 영화를 만들고 사후에 기록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붙들고, 넘기고, 조작하고, 재배열하는 행위다. 영화는 비물질적으로 경험되지만 영화를 둘러싼 노동은 물질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쯤에서 돌아볼 수 있는 것은 민우의 딸 아린(윤세아)이 종이접기를 하는 장면이다. 민우의 식당에서 아린이 종이를 접고 도경은 그 모습을 캠코더로 촬영한다. 종이접기는 존재하는 무언가를 재조직하여 새로운 걸 만든다는 점에서 필름 메이킹과 닮았다. 나아가 종이접기의 몸짓은 영화를 만드는 몸짓이 지닌 또 다른 특성을 일깨운다. 아린은 식탁에 고개를 박을 듯이 색종이를 내려다보며 종이접기에 몰두한다. 그리고 도경은 캠코더를 들고 아린을 촬영하며 그 안에 있는 모니터를 내려다본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양손으로 잡고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정확히는 그것을 통해 보이는 세상에 집중해야 한다.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은 그 양손의 몸짓이 지닌 매혹과 의미를 알고 있다.
앞서 살핀 영화를 둘러싼 행위는 모두 고개를 숙이는 몸짓을 동반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고개를 숙여 쓰고, 읽고, 장비를 조작하고, 카메라와 캠코더를 들여다본다. 근데 어느 순간 이들은 고개를 들어 무언가를 그저 바라본다. 가령, 도경은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문화 공간 ‘아친마당’에 방문해 원주 아카데미 극장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다. 여기서 도경은 무언가에 몰두하기보다 그저 한 편의 영화와 대면한다. 누군가의 손 위에 있던 것들이 스크린에 확대된 상을 통해 확장될 때. 그 앞에 놓인 도경은 고개를 들고 온몸으로 무언가를 감각하는 듯한 숭고의 순간을 경험한다.
비평가 도경이 현진의 영화를 찾다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결국 이런 순간이다. 비평가로서 들고 있는 노트를 힐끔거리고, 촬영자로서 캠코더 안을 들여보던 그는 기록의 행위보다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중요해지는 순간으로 나아간다. 그것을 어떤 변화와 성장만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석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고개를 들어 스크린과 직접 대면하는 경험. 손에 쥔 것을 바라보던 사람이 손에서 시선을 떼고 더 큰 상(像)을 바라보는 시선의 이동. 그것은 한 편의 영화, 하나의 극장이 한 사람의 삶에 지극히 사적인 방식으로 스며드는 과정이다.
영화가 있는 곳
<극장에 두고 온 것들>에서 두드러진 시각적 스타일 중 하나는 ‘필름 룩’과 ‘빈티지 캠코더 룩’이다. 박근영 감독은 아마도 디지털로 촬영되었을 영상에 푸른빛과 초록빛이 감도는 후지 필름 특유의 필름 룩을 덧씌웠을 것이다. 거기에 극장이라는 장소성, 크게 패닝 하여 담는 거리 등은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감성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하다. 한편, 캠코더 영상이 지닌 감성은 아마도 이와이 슌지의 것일 테다. 그 따뜻한 색감은 박근영 감독이 종종 애정을 표했던 <러브 레터>(1995)와 결을 같이 한다. 박근영은 이런 노스탤직한 이미지를 통해 필름 룩의 현재와 빈티지 캠코더 룩의 과거를 유물화 한다. 이를 통해 언젠가 과거가 될 현재는 한 편의 영화로 아카이브 되고, 매우 사적인 과거의 아카이브는 시네마틱의 권리를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은 박근영의 사적 취향에서 비롯한다.
이 과거를 돌아보는 시선에서 노스탤지어의 낭만 그 너머의 것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의 지금을 언젠가 잊히고 사라질 과거처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 장비 워크숍에 참여한 아이들은 카메라 이곳저곳을 만지며 무언가를 촬영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도경이 캠코더로 촬영한다. 영화는 어느새 도경의 캠코더 시점으로 넘어간다. 현진의 과거를 돌아볼 때 등장했던 캠코더 룩의 이미지는 이렇게 오늘날의 아이들을 뒤덮는다. 언젠가 영화를 만들게 될 아이들을 담고 있는 이미지는 다가올 미래를 떠올리게 만들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노스탤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미래를 과거로 만들어버리는 카메라. 돌이켜보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가장 현재화된 이미지의 시간을 부단히 따라가면서도 그것이 이미 지나간 시간 선에 놓여있음을 불현듯 깨닫는 일이다.
영화는 공적인 장소에서 상영되고 공동의 기억으로 남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은 사적인 시간과 접속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언제나 공적인 이미지가 될 수 없으며, 객관적인 시간 선 위에 놓일 수 없다. 그것에서 나의 취향을 떠올리든, 사적인 기억을 떠올리든, 동시대의 풍경을 인식하든, 그저 영화는 그곳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의 엔딩 직전 장면이 담고 있는 것은 그러한 영화가 땅에 내리 앉은 순간이다. 도경이 극장에서 현진의 영화를 마주하였을 때.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을 향하는 카메라가 180도 돌면 영화는 대학 시절의 과거로 이행한다. 그곳은 정식 극장이 아니다. 도경, 민우, 현진을 비롯한 친구들은 작은 동아리방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 앞에는 프로젝터가 있고, 이들은 그 프로젝터의 빛이 향하는 곳을 올려다본다.
극장에서 스크린이 아니라 관객석을 보던 도경의 시선처럼, 카메라는 스크린에서 눈을 돌려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는 이들에게 가닿는다. 영화는 내내 도경의 시점을 따라 영화의 상(像)을 찾아 헤맸지만, 끝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의 시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능해지고, 박근영은 그 각자의 독대를 마법처럼 담아낸다. 다소 유치한 말일지는 몰라도, 영화가 있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 극장이라는 종교적 명제. 그렇게 생각하면 극장은 반드시 특정한 공간이나 제도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조건들이다. 어두운 공간, 객석, 빛, 그리고 사운드. 덧붙여 그 옆에 함께 놓인 우정의 사람들.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은 그 작고 사소한 것들을 통해 극장이라는 장소와 영화라는 시간을 다시 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