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th BIFF] '모종의 탐정' 소설가가 탐정이 되기까지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한국 부문 특집 ② | 김미영 <모종의 탐정>
<모종의 탐정>의 서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소설가 해주(이유하)가 겪는 방문과 만남이다. 5년간 신작을 내지 못한 해주는 새로운 집필에 들어가며 가족과 전남편, 연인의 동생, 오랜 친구 등을 만난다. 이러한 연쇄적인 만남의 단초가 되는 것은 전남편 태재(박종환)가 수령한 사망 보험금의 행방이다. 다만 영화는 제목이 주는 예상과 달리 그 사건이 지닌 미스터리를 일반적인 탐정의 감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미스터리가 일찍이 해소된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태재가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을 사정이 어려운 친구에게 빌려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해주는 태재와 마주한다. 태재는 해주와 함께 연극을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들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절친한 친구로 남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사망 보험금과 관련한 오해로 시작한 영화는 이를 기점으로 연극 생활을 했던 해주의 과거를 들추기 시작한다.
<모종의 탐정>의 캐릭터와 특유의 리듬은 김미영 감독의 전작 <절해고도>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절해고도>에서 딸을 절에 보낸 아버지를 연기한 박종환 배우의 등장도 그렇거니와, 도시와 산골을 유유자적하게 오가는 영화의 흐름이 그러하다. 유독 돋보이는 것은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기이한 시간 감각이다. <절해고도>가 씬의 생략과 배치를 통해 속세와 절, 현생과 전생을 오가는 행자의 감각을 체화한 영화라면(「[한국독립영화 편지 김미영] ‘절해고도’ 산은 어떤 꿈을 꾸는가」, 코아르, 2024.09.03), <모종의 탐정>은 소설 집필이라는 서사적 설정을 기반으로 픽션과 논픽션,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한국 현대사의 구체적인 순간을 되새긴다.
소설을 쓰는 사람
해주는 오랜 후배의 닦달에 못 이겨 펜을 꺼내 들고 공책 앞에서 고민한다. 뭔가를 구체적으로 써내려 가지는 못한다. 혹은 그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챌 수 없다. 다만 분명 그는 소설을 구상 중이다. 소설을 쓰는 해주의 이미지는 방문과 만남의 연속인 영화의 주된 흐름에 종종 틈입한다. 그 숏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멈춰 세운다. 소설을 쓰는 숏(정확히는 소설을 쓰기 위해 책상 위에 앉은 숏)이 등장하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소설가의 머릿속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봐왔던 장면은 그의 머릿속에서 펼쳐진 허구인가? 선행하는 숏들은 소설을 쓰는 숏 아래에 종속되어 있는 것인가? 만약 그것이 부분적으로 사실이라면 앞선 장면들을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소설가의 픽션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그럴듯 한가? 이런 질문이 어렴풋이 들 때마다 해주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을 인과적으로 짜맞추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있진 않을테다. 꿈과 상상을 모호하게 오가는 편집이 그 자체만으로는 더 이상 흥미롭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여러 층위를 떠올리게 하는 서사적 리듬이 한 영화의 개념을 구성하는 데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모종의 탐정>의 소설을 쓰는 몸은 그 성찰을 요청한다.
영화는 시공간을 다루는 매체인 동시에 그것이 자연스레 지각될 수 있는 효과적 방법론을 축적해온 매체다. 김병규 평론가가 손구용의 <공원에서>를 두고 지적했듯이, 영화에서 직선적이고 인과적인 시간은 매체 고유의 특질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자리했으며, 사실 그것은 모종의 영화적 장치를 통해 뒤틀릴 수 있을 만큼 취약한 것이다. (「[사사로운리스트] 공원에서」, KMDb, 2025.02.03) 김미영의 <절해고도>가 전통적인 서사 중심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지닌 시공간 감각은 그런 것이었다. 벤치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공원에서>의 몸짓이 관습적 시간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면, 잠에 들거나 산길을 오르내리는 <절해고도>의 몸짓은 누군가의 꿈과 상상, 미리 들추어 본 미래를 떠올리게 만든다. <모종의 탐정>의 소설을 쓰는 몸은 선형성과 인과성의 관습을 벗어나 삐걱거리는 시공간 감각을 다시 불러온다. 여전히 떨쳐낼 수 없는 사실. 영화는 소설과 닮았다. 그래서 영화 안에 등장한 소설은 영화 자체가 지닌 주된 서사의 흐름과 비교하고 겹쳐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소설을 쓰는 몸, 혹은 소설을 읽는 몸은 과연 그간 우리가 봐왔던 장면들이 어떤 이야기의 층위에 있는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물론 많은 영화들을 인과적인 시퀀스 안에서 그 취약성을 봉합하거나 매끄럽게 이어 나간다. 다른 한편, 어떤 영화들은 그것이 영화 전체 구조를 위태롭게 만들도록 던져놓는다.
<모종의 탐정>의 시퀀스들은 그런 인과적 층위와 불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해주는 사망 보험금에 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전 시어머니를 만난다. 그는 시어머니에게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를 듣고 친구를 만나러 당구장으로 간다. 친구를 만나러 간 자리에 어느새 태재가 오고 둘은 오랜만에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와 소설을 쓴다. 다만 김미영은 여기서 해주가 친구를 만나러 당구장에 ‘방문하는’ 장면과 작업실로 ‘돌아오는’ 장면을 넣지 않는다. 어느새 당구장에 누워 잠들어있다가 눈을 뜨고, 태재와의 대화 이후에 갑자기 작업실에 놓여있는 식이다. 수많은 방문과 만남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경로는 어딘가 생략되어 있다. 해주가 떠도는 도시와 산골이 어떤 지도를 그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시간대에 일어난 것인지 쉬이 파악되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을 쓰고 있는 작업실의 시공간으로 돌아올 때면, 지금까지의 숏들을 다시 한번 복기하게 된다.
이런 비선형적 서사 감각은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보기와 읽기를 요청한다. 2010년대 이후의 한국 독립영화 사이에서 이러한 구조적 감각이 두드러졌다는 것을 돌이켜 보았을 때, 김미영의 영화는 그런 흐름의 일부로서 구조적 독해의 욕망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다만 김미영의 영화는 그 실험적 구조 자체가 이야기를 생성하는 뼈대가 되기보다는, ‘행자’ 같은 인물이 지닌 일탈적 감각을 오롯이 체화하고 그 안에서 전통적 스토리텔링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모종의 탐정> 역시 일련의 서사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소설가’의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이동의 과정을 뛰어넘는 장면 연결과 반복해서 돌아오고야 마는 소설을 쓰는 몸의 이미지. 어쩌면 누군가와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등의 행위는 소설가의 머릿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구성될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에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일상에서 이야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영화를 통해 이렇게 지각된다.
다만 <모종의 탐정>의 이야기를 그저 ‘소설가’의 감각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소설가로서의 현재로 시작하지만 결국 연극과 관련한 과거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해주가 일행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 때,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은 택시 기사가 과거의 연극 동료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택시 탑승객 각자가 연극에 대한 기억을 꺼내고 그 연극은 실제 연극 실황을 담은 영상 아카이브로 재생된다. 각자가 이야기하는 연극이 택시 기사의 연극 생활과 연관되어 있다는 이 거짓말 같은 장면은 영화상에서 가장 픽션성으로 가득한 순간이다. 이 과장된 우연은 영화의 적지 않은 장면들이 소설가의 머릿 속에서 구상되고 있는 것 같다는 의식을 이어받는다. 그 순간 연극 실황을 담은 논픽션의 컬러 이미지가 픽션의 흑백 이미지 사이를 뚫고 들어온다. 픽션은 이렇게 현실을 아카이브 한다. 쓰기를 망설이고 있는 해주의 소설(픽션)은 이런 식으로 현실과 더 가까워진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이완민 감독의 <누에치던 방>(2018)과 닮았다. 현실의 무게를 눌러 담은 채도 낮은 이미지, 그리고 아득한 노스탤지어로 다가오는 과거의 이미지. 그리고 두 영화는 모두 정치적 연극 혹은 연극의 정치성을 다루고 있다. 화법은 다르지만, 김미영과 이완민은 모두 그만의 작가적인 시간 감각을 영화 안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이완민 감독은 <모종의 탐정>에서 술집 ‘달별바’ 사장의 친구로 출연한다. 해주가 오랜 공백 끝에 다시 찾은 달별바는 그가 지난 연극 생활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장소다. 달별바의 사장은 해주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진 못하지만, 그 장소를 찾았던 연극인들과 그들이 겪었던 비극을 뒤늦게 상기한다.
두 영화가 공유하는 것은 재난 이후, 보다 구체적으로는 촛불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예술인들이 추억하고 회고하는 기억의 풍경이다. 이 과거를 지나온 소설가는 ‘탐정’이 되어야 한다. <절해고도>의 아버지가 행자의 감각을 지녀야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듯, <모종의 탐정>의 소설가는 탐정의 감각을 지녀야만 한국의 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다. 그가 탐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비극을 기억하고 있는 달별바가 ‘와이파이도 통하지 않는 지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상실은 감춰지고 잊힌다. 그리고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다. 건물 벽을 두드리고 감춰진 지하 통로를 발견하는 ‘셜록 홈즈’처럼(아서 코난 도일, 『붉은 머리 연맹』), 소설가는 탐정이 되어야만 그 기억이 깃든 지하로 돌아갈 수 있다.
김미영은 탐정이 될 수밖에 없는 소설가를 통해 그 비극의 과거를 세계와 연결한다. 과거의 아카이브 이미지는 해주의 트라우마를 함축한 듯한 흑백 이미지를 뚫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이것이 <모종의 탐정>이 소설을 다루면서도 소설 너머의 가능성을 꿈꾸는 방식이다. 그 이미지는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누군가에겐 새로운 사실이 될 것이다. 어쩌면 아카이브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