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가능한 사랑〉, '보다'의 계급론

"카메라를 쥔 자와 카메라 앞에 선 자"

2026-09-24     박정수

현재는 우리의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 선명함은 단지 물리적인 뚜렷함에 불과할 뿐, 의미와 인식의 차원에서는 불명료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현재는 구불구불 뒤엉킨 미궁을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결코 해명을 선사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그 명확성은 우리의 눈을 따갑게 만든다.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 언제나 고해상도의 심미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선명함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추한 진실까지도 낱낱이 드러낸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을 꾸기도 하고, 과거로 도피하기도 한다. 선명하지만 해명되지 않는 현재와, 흐릿하지만 오히려 의미를 붙잡을 수 있는 과거가 서로 포개지고 또 포개지면서 우리의 인식은 혼돈에 빠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선명함은 마땅히 선명해야 할 것을 또렷하게 밝혀야 한다. 아름답지 않더라도, 불편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이라면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늘 그래왔듯이.

이창동의 영화 속 개인들은 격동의 근현대사와 장애를 둘러싼 현실, 폐쇄적인 좁은 사회와 급변하는 사회 등 한 사람이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불가항력의 공포를 걸러지지 않은 채 마주한다. 누군가는 그로부터 도피하지만, 어떤 이는 긍지를 잃지 않은 채 그것과 맞서고, 끝내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끝끝내 이창동 감독의 카메라에 선명하게 남는 것은, 작고 연약한 인간의 거대한 긍지다. 이 긍지와 그것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긴장감은,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미 감지된다.

미옥(전도연)과 호석(설경구)이 장례식장에 방문하는 과정에서 상복을 입은 부부 곁을 눈치 없이 명랑하게 지나가는 노부부, 빈소 앞에서 변덕을 부리며 들어가지 않겠다는 호석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 그저 물리적으로만 놓여 있을 뿐, 감정과 생각까지 공유하지는 못한다. 훗날 예지(조여정)의 상상 속에서 이들의 사랑은 낭만적으로 재구성되어 플래시백되지만, 실상 이들은 그저 같은 동네에 살았고 같은 계급에 속했으며, 학업에 전념할 여유 없이 성인이 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의 프레임에 강제로 묶였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그렇게 노동자들만의 프레임에 예지와 상우(조인성)가 점차 틈입하면서, 그 내부의 균열과 긴장은 더욱 증폭된다. 이때 투쟁이란, 하나의 프레임에서 저마다의 숏과 리버스 숏으로 독립하려는 움직임인 동시에, 그 공동의 프레임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하려는 욕구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인물이 프레임으로부터의 독립만을 욕망하지는 않는다. 예지가 구성하는 프레임에서 치열하게 벗어나려는 호석이 있는가 하면, 그 프레임을 도리어 동경하는 미옥도 있다. 영화 전체를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명제가 지배하듯, 남의 떡은 커 보이지만 정작 자신이 쥔 것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미옥은 프롤레타리아이고 예지는 부르주아이니, 그 동경은 얼핏 자본과 계급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창동의 진단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미옥이 부러워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생활의 풍요라기보다, 예지와 상우가 맺고 있는 부부 관계와 거기서 비롯되는 여성의 지위에 가까워 보인다.

호석은 전형적인 '옛날 남자'다. 예지는 미옥과 호석의 관계를 낭만화했지만, 미옥의 시선으로 그 관계를 들여다본다면 그 안엔 분명 폭력적인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호석은 미옥의 말을 좀처럼 들어주지 않고, 술을 마시면 사고를 치기 일쑤다. 반면 미옥의 눈에 비친 상우와 예지는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옥의 시선에서 바라본 프레임일 뿐이다. 그보다 깊고 넓게 인물들을 포착하는 이창동의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오히려 더 능동적인 쪽은 미옥에 가깝다. 파업에 함께 참여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울 남편 짱' 같은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남성들보다 수동적인 태도를 보일지라도, 정작 호석은 미옥의 말 한마디에 제지된다. 호석이 정말로 미옥을 일방적으로 휘두르며 살았다면, 미옥 역시 그토록 사사건건 따지고 맞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반대로 미옥의 시선에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예지와 상우의 관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예지야말로 상우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조정해 온 쪽임이 드러난다. "사장님, 저 착취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싫은 일도 해내야 하는 미옥은 예지의 삶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싫다고 말하거나 반항할 수 있는 관계조차 갖지 못한 쪽은 예지에 가깝다. 예지는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채로, 남편이 생산하는 지적 자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조율한다. 결국 미옥이 부러워한 것은 그녀가 바라본 예지의 삶이었을 뿐, 카메라가 포착하는 예지의 삶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라보는 권력

중요한 것은, 미옥과 예지의 차이가 이창동 감독의 카메라가 아니었다면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부터 이창동은 '보다'의 권력관계를 조명한다. 본다는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선은 대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다. 권력을 가진 타인이 나를 감시하거나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면, 우리는 금세 자신의 행동을 교정한다. 일하는 미옥의 곁에 카메라를 쥔 채 비싼 옷을 입고 여러 스태프를 대동한 권력자 예지가 동행하자, 악덕 사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노조 결성을 허용하는 장면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지는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만, 그녀의 시선은 상대의 행동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역시 무언가를 바라볼 수는 있어도, 자신이 본 것을 사회적으로 송출해 여론을 움직이는 힘까지 갖지는 못한다. 미옥 역시 사진을 찍는다. 예지가 들고 다니는 가방을 찍어보고, 상우의 별장에서 먹었던 음식을 촬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진은 예지의 촬영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미옥의 사진은 평생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를 가방과 다시는 먹지 못할 음식을 추억으로 남겨두는 데 머문다.

반면 거대 자본과 제작 인력을 동원하며 부르주아적 지위를 획득한 영화감독의 바라봄은, 자신이 본 것을 다시 현실에 개입시키는 힘을 갖는다. 프롤레타리아의 사진이 추억으로 남는다면, 부르주아의 촬영본은 지원사업에 제출할 수 있는 자본이 된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이미지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라면 파고들기 어려운 이미지를 찾아내거나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 상우의 '호루라기'가 이를 상징적으로보여준다. 호루라기는 원하는 순간 원하는 대상을 눈앞으로 불러내고, 그렇게 호출한 대상에게 원하는 행동까지 요구할 수 있는 도구다. 바로 그 힘까지도 부르주아의 '바라봄'에는 포함되어 있다. 결국 예지가 가진 것은 카메라 자체가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권력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이창동 영화의 모호함은, 바라보는 것과 바라봐지는 것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프레임들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노동자가 '보다'의 권력을 충분히 갖지 못한다 해도, 영화는 내내 호석과 철이를 통해 시선에 노출되기를 거부하는 명백한 의지를 드러낸다. 또 부르주아가 노동자를 촬영하는 장면은 세상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지만, 정작 그 노동자를 촬영하는 부르주아를 촬영한 이미지는 공백으로 남는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권력자의 시선에 의해 왜곡된 이미지이거나, 권력자가 보지 못한 부분을 자신의 의도대로 임의로 채워 넣은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이때 인식은 다시 혼돈에 빠진다.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구성된 이미지인지, 좀처럼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창동 감독의 이번 작업은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영화라기보다, 그 이미지가 어떤 시선과 권력의 층위를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해부하는 과정에 가깝다.

영화의 층위는 크게 네 겹으로 나뉜다. 예지의 카메라에 의해 구성되는 현실, 그 현실 가운데 예지가 자신의 기억과 욕망에 따라 픽션화한 플래시백, 예지가 촬영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이창동의 카메라가 포착한 현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더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CCTV의 시선이 그것이다. 각각의 프레임은 동일한 대상을 봐도 결코 동일한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다. 특히 플래시백은 처음엔 그것이 예지가 엮어낸 것인지 이창동 감독이 구성한 것인지 모호하다. 그래서 관람객에게 마치 현실인 양 혼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미옥이 낭만적으로 여긴 예지의 과거는 플래시백되지 못하고, 오직 예지가 낭만적으로 여기는 미옥의 과거만 플래시백된다는 점에서, 플래시백은 실제 기억의 재현이 아닌 예지의 시선으로 픽션화된 과거임이 확실해진다. 이는 당시 '공순이'가 되어야만 했던 여성 노동자의 삶과 폭력적인 남성성을, 압구정 출신 부잣집 딸의 동경과 낭만 속에서 미화했을 가능을 떠올리게 한다.

예지의 카메라가 구성하는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예지가 카메라에 담길 것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미옥 역시 그녀가 만드는 프레임에 어느 정도 공조한다. 호석과 달리 촬영 자체를 즐기며 자신의 이야기도 적극적으로 들려준다. 그러나 어설프게 행동하는 철이를 촬영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장면에서, 미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드러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잘 가꾸어진 자신, 그리고 그 이미지가 만들어낼 일종의 유명세다. 예지 앞에서 미옥이 숨기고 있는 욕망은 그녀의 카메라에 결코 담기지 않는다. 예지는 노동과 노조를 실제로 알지 못한다. 그녀는 노조를 책과 상우의 입을 통해서만 배웠고, 예지가 강남좌파라는 점에서 노조는 어떤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이자 이상에 가깝다. 그래서 미옥이 실제로 노조를 구성하려 할 때엔 어딘가 어설픈 모습을 보이고, 호석이 노조를 비토하는 순간에는 그것을 촬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하는 기색이다. 그녀가 노동자를 촬영하고 있음에도 노동자의 현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이유다.

 

바라보지 않는 윤리

이창동 감독의 카메라는 다큐멘터리 역시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는, 부르주아적 '보기'에 대한 안티테제인 동시에 카메라를 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보인다. 이창동의 카메라에 담긴 것들은 예지의 프레임을 뛰어넘고서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으로 환원되길 거부한다. 노조가 언제나 정의롭거나 웅대한 이상을 위해 조직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비정규직과 외국인 노동자는 들어올 수 없는 노조에 속해 있다는 우월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며, 노조 내부에서도 조합장과 조합원의 위계는 농담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분명하게 구분된다. 또 정의냐 생존이냐 물었을 때 생존이 우선인 구성원들은 호석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구조조정 역시 마찬가지로, 화장실을 멋대로 사용하고 규칙을 어기며 반항심을 드러내는 호석의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해고될 만한 명분을 스스로 제공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미옥이 별장을 떠나겠다고 한 이유 역시 단순하지 않다. 상우와의 외도와 호석의 자기 고백이 결합되면서 발생한 죄책감이 여러 이유 중 하나였지만, 정작 예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예지는 자신이 부르주아이자 영화감독이라는 이유로 프롤레타리아인 미옥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예지의 카메라는 질문하고, 때로 그 질문은 강압적이고 유도하지만, 이창동의 카메라는 질문하지도 들이밀지도 않는다. 이렇게 이창동의 카메라는 결과를 미리 상정하거나,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결론에 장면을 끼워 맞추지 않는 것이다.

이때, 이창동의 카메라는 또 하나의 카메라인 CCTV를 닮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눈치를 본다"거나 "보여주기 싫다"는 말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은 동의 없이 쏟아지는 시선 자체에 저항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줄 알았던 해변에서조차 CCTV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사적인 순간마저 완전히 소멸한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창동 감독의 카메라와 CCTV가 결국 같은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픽션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큐멘터리로서 예지의 카메라와 CCTV는 이미 있는 현실을 가리지 않고 기록해, 누군가 감추고 싶어 한 것까지 드러낸다. 반면 이창동의 카메라는 픽션의 형식으로 흩어진 현실의 조각을 모아 새로운 관계 속에 놓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은 호루라기를 회수한다. 앞서 호루라기가 부르주아의 '봄'이 가진 권력, 즉 자신이 원할 때 대상을 호출하고 자신의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상징했다면, 그것을 회수하는 행위는 그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순수하게 바라보기만 하고 바라봐지길 원치 않는 철이의 손으로 호루라기를 회수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미옥과 호석은 CCTV가 없는 집으로 돌아와 비로소 ‘달’을 바라본다. 달은 미옥과 호석, 그리고 예지가 각자의 난관에 부딪혔을 때에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았던 꿈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상우의 별장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달이, 미옥과 호석이 돌아온 집에서는 다시 떠오른다. 모든 사적 순간이 부르주아의 카메라에 포섭되고, CCTV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세계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다시 희망이 떠오르는 것 아닐까…

 

계급을 입체적으로 탐구하는 만큼 소재와 갈등 구조는 끌로드 샤브롤의 <의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가 처한 구조적 조건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시기심, 그리고 부르주아의 악의 없는 행동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내는 피해는 두 작품을 연결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가능한 사랑>은 계급의 문제를 단순히 경제적 격차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다. 계급의 차이는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의 차이를 넘어서, 누가 무엇을 볼 수 있으며, 누구의 시선이 타인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누가 자신이 본 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가로 팽창하는 것이다. 결국 계급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보다'의 계급론을 배제할 수 없다. <가능한 사랑>에서 선명하게 도착하는 것은, 우리가 진실이라 부르는 것마저 결국 누군가의 시선과 선택을 거쳐 우리 앞에 도착한 이미지라는 사실이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